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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딤전3:15)

1. 성경 (딤전 3:14 ~ 16)

내가 속히 네게 가기를 바라나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14)만일 내가 지체하면 너로 하여금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지를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니라 (15)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그렇지 않다 하는 이 없도다 ○그는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 영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영광 가운데서 올려지셨느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4 내가 ~~~~이것을 네게 쓰는 것은" ;. 바울이- 디모데에게 가는 문제에 대해서 소망을갖게 하는 것은 그를 격려하려는 뜻에서요, 다른 한편으로 는 자기가 없는 동안에 너무 오만불손하게 된 자들의 [고집을 억제하려는 뜻 에서이다. 그러나 이것은 허구적인 약속도 아니요, 거짓 구실로 그들을 겁 주는 것도 아니니, 까닭은 그가 거기에 갈 그것을 전적으로 예상하고 있 었으며, 누가가 사도행전 18장 23절에서 말하듯이 그가 브루기아 땅을 여 행하고, 있는 동안에 이 서신을 썼다면 그가 실제로 거기에 갔다는 추측도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가 얼마나 간절한 마음으로 교회를 보 살피고 있었는가를 우리에게 입증해 주고 있으니, 다시 말해서 -그는 현재 당면한 .악을 제거하는 데 잠시라도 지체되는 것을 견딜 수 없었다는 이야기 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만약 자신이 생각 밖으로 지체되는 경우를 대비하 여 디모데에게 교훈을 주기 위해서 이 서신이 쓰여지고 있다는 점을 곧 덧 붙이고 있다.

 

"15.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 이 말로써 그는 목회직의 의의와 가치를 추천하고 있는데, 이 까닭은 목사들이란 하나님께서 그의 집을 다스리는 임무를 맡겨주신 청지기들과 같기 때문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큰 권속에 대한 책임을 맡고 있다면 그는 자신의 부주의, 미숙함, 또 는 게으름으로 일이 잘못되는 일이 없도록 밤낮을 가리지 않고 보살피느라 초조하고 분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사람들에게도 그 정도의 관심을 가져 야 한다면 하물며 하나님께 대해서는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교회를 가리켜 그의 집으로 부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으니, 곧 그는 입 양의 은혜로 우리를 그의 아들로 받아들이셨을 뿐 아니라 그분께서 손수 우 리 가운데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교회를 가리켜 진리의 기둥과 터'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교회에 대한 결코 평범한 (한사가 아니다. 그것을 묘사함에 있어서 이보다 더 뛰어난 단어가 또 어디 있겠는가? :하나님의 영광과 인간의 구원을 [모두 포함하는 진리보다 더 거룩하고 경외의 '대상이[도되는 것은 없다. 세속. 철학의 경탄자 들의 그것에 대한 모든 칭송을 하나로 묶는다. '해도그것은 하늘의 지혜의 가치와 비교할 수 없으며, 오직 이 하늘의 지혜는 (살아 있는 자들을 위한 빛, 진리, 교훈, 그리고 하나님의 길과 나라로 불리고 있는 것이다.[그러나 이 진리는 오늘날 교회의 사역을 통해서만 보존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그처럼 측량할 수 없는 보물을 소유하고 있는 목사의 책임은 얼마나 무거운 지 모른다. 바울의 이 말에서 몰염치하게도 교황주의자들은 그들의 모든 부 조리가 이 진리의 기둥이요, 따라서 오류가 없으므로[그것을 하나님의 말씀 으로 여겨야 한다는 추론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왜 바울이 교회에 그처럼 귀한 명칭을 주고 있는가를 파악 하지 않으면 안된다. 분명히 그는 목사들에게 그들의 직분의 위대성을 설명 함으로써 얼마만한 신실성과 근면성,얼마만한: 존경심으로[ 그들이 그것을 수행해야 하며, 동시에 그들의 실수로 만약,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모습이 요, 세상의 빛이며 인간의 구원인 :진리가 해를 받을 경우에는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재앙이 얼마나 무시무시한 그것인가를 지적해 주고자 하고 있 다. 이 점은 목사에게 사명의 중대성을 자각시켜 주어야 있었다. '곧 그들을 낙담시키기보다는 더욱더 경성하도록 격려해야 옳다는 이야기이다. 이렇게 볼 때 바울이 어떤 의미로 이 말을 사용하고 있는가를 파악하기란 쉬운 것 이다. 교회가 진리의 기둥인 것은 그것의 (사역을 통해서 진리가 보존되고 전파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하늘에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지 않은 며, 또한 그의 진리를 공포할 천사들을 사신으로 날마다 보내시지도, 않고, 오직 그분께서 이 목적을 위해[임명하고 계시는 목사들의 수고를 사용하시 는 것이다. 보아니, 이것을 좀더 소박하게 이야기하자면, 교회가 모든 신자들 의 어머니인 까닭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그들에게 새로운 탄생을》가져 오며, 그들의 모든 생활을 교육하고 북돋아주며, 그들에게 힘을 주어 마침 내 그들을 철저한 일반전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제또한 교회가 진리의 기둥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것은 그것이 인간의 기억에서 사라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 하나님께서 그 손에 맡겨두신 가르침을 시행하는 직무가 이 진리를 보존하는 유일한 수단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이 칭송이 말씀의 사역에 적용되는 것은 교회가 제거될 경우, 하나님의 진리가 무너지기 때문 이다. 물론 이것은 교황주의자들이 건성으로 주장하는 대로 인간이 '교회에 그들의 도움을 더하지 않을 경우, 그 자체가 조금이라도 덜 확실하게 되기 때문은 아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들로부터 확실성을 빌어오기 전에 는 그것이 불확실하다는 말은 충격적인 모독이다. 바울의 뜻은 로마서 10 장 17절의 것과 동일하니, 믿음이란 들음에서 오는 것이므로 전파함이 없이 는 신앙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인간을 상대로 하는 한 교 회가 진리를 유지하는 것은 그 전파를 통해서 교회가 그것을 공포하고, 순 수하고 철저하게 보존하여 후대에 물려주기 때문이다. 복음에 대한 공적 가 르침이 없고, 자신들의 전파를 통해서 진리를 흑암과 망각으로부터 구출하 는 경건한 사역자들이 없다면 거짓, 오류, 협잡, 미신, 그리고 온갖 종류의 곡해가 당장 일어날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교회 안에서의 침묵은 진리의 출발과 억제를 뜻한다. 이 귀절에 대한 해석에는 조금도 억지가 없다.

 

이제 우리는 바울의 의도를 파악했으나 교황주의자들에게로 돌아가 보 자. 그들의 첫째 잘못은 교회의 이 칭송을 그들 스스로에게 돌리는 데 있 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그들이 빌어온 옷으로 맵시를 내는 자들이다. 설령 교회가 삼충천 위로 올려진다 하더라도 이것은 그들과 아무런 관계가 없을 것이다. 사실 나는 이 전체 귀절을 그들에게 불리하게 돌려 놓는다. 왜냐하 면 교회가 진리의 기둥이라면, 진리가 매장되어 있을 뿐 아니라 무참하게 파 괴되고 짓밟히는 그들 사회에는 교회가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이 다.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가 높여지고 명백하게 드러나는 곳이 아니고서는 교회로 인정하지 않으려 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 세계에는 그와 같은 증거가 전혀 없고, 오직 황폐와 파멸이 있을 뿐이다. 그들 가운데서는 교회의 참된 목표가 발견되지 않는다. 그들이 이런 환상을 가지게 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 님의 진리가 순수한 복음 전파에 의해서 유지되어야 하고, 그것의 지지가 인 간의 기능이나 감정이 아니라 훨씬 더 고귀한 것에 의존하므로 그것은 하나 님의 소박한 말씀에서 이탈하는 일이 없어야 한다는 점이 무엇보다 중요한 것임을 생각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6 크도다 경건의 비밀이여" ;  여기에 그의 찬양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 이 따르고 있다. 인간의 배은망덕으로 하나님의 진리가 그 진가를 인정받지 못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경건의 비밀이 위대하다는 말로써 그 것의 진가를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통상적인주제가 아니라 모 든 지혜의 보화가 숨겨 있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계시와 관련되기 때문이 다(골2 : 3).[9이 모든 것의 위대성을 통해서 목사들은 자신의 직분의 중요 성을 이해할 뿐 아니라 더욱더 적극적으로, 그리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거기에 몰두해야 옳을 것이다.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God manifested in the flesh" ;  육신으로나타 나신 하나님) 벌게이트 역은 하나님 이라는 '단어를 생략하고 그냥이 신비 의 내용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만, 이것은 첫눈에 알 수 있듯이`[미숙하고 부적합하다. 그리고 설령 그것이 에라스무스의 지지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 도 그는 자기 자신의 번역의 지권위를[파괴하고 :있으므로 여기에 대해서 따 로 반박이 필요없는 줄 안다. 모든 헬라어 사본은 의심할-여지 없이:신 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라는 독법에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설령 바울이 하나님의 명칭을 뚜렷이 사용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전체 문맥을 주의깊게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리스도의 명칭이∫보충되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것이다. 나로서는 용인되고 있는 헬라어 사본을 따르는 :데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 그가 이제부터 묘사하려는그리스도의 현시()를 하나의 위대한 신비로 부르는 이유는 간단한데, 크 .까닭은 그것이 그가 에 베소서 3장 18~19절에서 언급한 지혜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에 의 해서 우리의 기능이 압도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제 이 귀절의 소절들을 차례로 음미해 보도록 하자. 도의 위력에 대한 가장 적합한 묘사는 '육신으로 나타나신 하나님 이라는 말씀에 담겨 있 다. 첫째, 우리는 여기서 양성()에 대한 뚜렷한 확증을 볼 수 있다.2곧 그는 동시에 참 하나님과 .참 사람이심을 밝혀주고있다. :둘째, 그는!양성 에 대한 구별을 짓고 있으니, 그는 먼저 자신을 하나님으로 부르고 다 음에 육신으로 [나타나심을 [밝히고 있다.그리고 세째,[5]는' 그의[ 위격이 하나님이시며, 육신으로 나타난 동일한 위격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이위 격의 동일성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점은 아주 크지만 .도.그 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무한한 영광이 우리의 타락한 육신과 결합 되며, .그 결과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을 보고 있다(videmus in Christo coniunctam cum hac nostra carnis putredine, ut unum, .efficiant).

 

"영으로 의롭다 함을 입으시고" ;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의 육신을 취하여 자 신을 낮추심으로써 그의 안에서는 자신이 하나님이었음을 증거하는 영적 능 력이 나타났다. 이 귀절은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석되어 오고[있지만,는 내가 이해하는 사도의 의미로 만족하겠으며 더 ,이상의 것을 덧붙이지; 않겠 다. 먼저 여기서 말하는 의롭다고 인정받음|(justification) 신적인 '능력 에 대한 인정을 뜻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옳은 그것으로[ 여겨진다는, 곧 경이적이요 철저하게 완전하다는: [말이 나오는 시편_19편 9절에서 엿 볼 수 있는 그대로이다. 시편 51편 4절에도 보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 겨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그의 의에п대한 찬양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음을 본다. 그리고 마태복음 11 장 19절과 누가복음 7장 .35절에 보면 그리스도 께서 지혜가 그 자녀들에 의해서 옳은 것으로 여겨진다는 말씀을 하고 있는 데, 이것은 그들을 통해서 지혜의 가치가 뚜렷해진다는 뜻이다.

 

그리고 누 가복음 7장 29절에서는 세리들이 하나님을 의롭게 여기는 것으로 이야기 되는데, 이것은 그들이 마땅한 경외와 감사를 돌리면서 그리스도 안에서 찾 아낸 하나님의 은혜를 인정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여기에 나오는 단어도 동 일한 의미를 지닌다. 다시 말해서 비바울은 인간의 육신을 입고, 나타난 그분 은 동시에 하나님의 아들로 밝혀지고 있으며, 그 결과 육신의 연약성이 결 코 그의 영광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영이라는 단어 속에 그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령하고: 인간을 초월하 는 모든 내용을 포함시키고 있는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에서이다. 첫째, 그 리스도께서 육신으로 낮아지게 되셨던만큼 바울은 여기서 그의 영광을 명백 히 드러냄으로써 영광의 육신을 대조시키고 있다. 둘째,с요한이 :그리스도 안에서 보였던 것으로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는 하나님의 독생자에게 어울 리는 영광은 외적인 전시나 (지상적인 광채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거의 전 적으로 영적이었다. 동일한 표현이 로마서 1 장 3~4절에 나오는 이 아들 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 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 리스도시니라"는 구절에 사용되고 있으며, 다만 한 가지 차이점이라면 이 귀절에서는 그의 영광의 특별한 제시, 곧 부활을 언급하고 있다는 점이 다.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만국에서 전파되시고" ;  하나님께서 당시까지 눈먼 상 태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던 이방인들에게 하늘의 천사들에게도 숨겨져 있던 그의 아들에 대한 계시로 그들을 영예롭게 해주셨다는 발언은 참으로 경이 적이요, 감격스러운 것이다. 즉 그분께서 천사들에게 보여졌다는 것은 이 것이 신기하고 탁월한 일이라서 천사들의 관심을 살 정도의 우모습이었다는 뜻이다. 이방인들을 부르신 사건은 얼마나 새롭고 특이한 일이었는가에 대 해서는 에베소서 2장에서 이야기된 바 있다. 그것이 천사들에게마저 새로 운 광경이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는 것은 그들이 설령 인류의 구속에 대 해서 알고 있었다 조하더라도 그것이 어떻게 성취될 것인가 하는 점에 대해 서는 처음에 모르고 있었으며, 그것이 그들에게서 숨겨진 것은 하나님의 자비의 위대성이 그들로 하여금 더욱더 경탄을 금치 못하게 만들려는 뜻에 서였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상에서 믿은 바 되시고~~~~" ;  하나님께서 그의 계시에 대한 몫을 속된 이 방인들과 그의 나라의 영원한 기업이 되는 천사들에게 동일하게 나누어주 셨다는 것은 그 무엇에 비길 수 없을 정도로 경이적인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모든 장애물을 극복하고 도저히 정복될 가망이: 없어 보이던 자들을 믿음의 순종으로 이끄는 데 사용하신 (전파된 복음의 위대한 효용성도 결코 평범한 기적은 아니었다. 모든 접근의 길이 얼마나 완벽하게 봉쇄되고 잠겨 있었던지 세상에 그것처럼 `불가능한 것이 없어 보일 정도였 다. 그렇지만 거의 믿어지지 않을 정도의 승리를 통해서 믿음이 [정복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분께서 영광 속으로 받아들여지셨다 는 점을 덧붙이고 있는데, 물론 이것은 이 유한하고 비천한 생활 후에 있었던 일이다. 따라서 세상에서는 믿음의 순종을 통해, 그리고 아그리스도의 위격 안에서 경이로운 변화가 이루어짐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그에게 모든 무릎이 꿇도록 하시려고 미천한 종의 상태에서 아버지의 오른편으로 높여지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