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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딤전2:15)

1. 성경 (딤전2:8~15)
 그러므로 각처에서 남자들이 분노와 다툼이 없이 거룩한 손을 들어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8)또 이와 같이 여자들도 단정하게 옷을 입으며 소박함과 정절로써 자기를 단장하고 땋은 머리와 금이나 진주나 값진 옷으로 하지 말고 (9)오직 선행으로 하기를 원하노라 이것이 하나님을 경외한다 하는 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10)여자는 일체 순종함으로 조용히 배우라 (11)여자가 가르치는 것과 남자를 주관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조용할지니라 (12)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고 하와가 그 후며 (13)아담이 속은 것이 아니고 여자가 속아 죄에 빠졌음이라 (14)그러나 여자들이 만일 정숙함으로써 믿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그의 해산함으로 구원을 얻으리라 (1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8. 각처에서" ; 이것은 고린도 전서 1장 2절의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서, 곧 하나님께서는 이방인과 유대인, 헬라인과 야만인 모두의 공통된 아버지이시며, 깨끗한 제사가 유대뿐 아니라 온 땅에서 하나님께 바쳐질 것이라는 말라기의 예언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고 있으므로 그들 사이에 이제 아무 차별이 있을 수 없다는 뜻이다. 
 
"분노와 다름이 없이" ;  흑자는 이것을 양심이 스스로 다투면서, 말하자면 하나님께 불평을 제기할 때처럼 분노를 격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이것은 역경이 우리에게 밀어닥칠 때 흔히 일어나는 일이다. 이때 우리들은 하나님께서 당장 오셔서 우리를 돕지 않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초초해 하며 괴로와하기 마련이다. 신앙이 거기에 대한 여러가지 공격 때문에 동요되는 것은 하나님의 도우심이 명백하지 않으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관심을 가지고 계시는지, 우리가 구원받기를 원하고 계시는지 하는 등의 의심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이런 견해를 택하는 자들은 다툼을 의심하는 마음의 혼란의 뜻으로 본다. 따라서 그들의 견해에 따르면 그 의미는 우리들이 침착한 양심과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가지고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크리소스톰과 같은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서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있어야 하며, 따라서 당혹케 하는 온갖 영향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뜻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본다.
 
다툼과 분쟁보다 더 우리의 진지한 기도를 방해하는 것은 없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어떤 사람이 자기 형제와 다투는 일이 있을 경우에는 제단에 제물을 가져오기 전에 먼저 화해해야 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내가 보기에 이 두 견해는 다 사실이지만, 본 귀절의 문맥을 곰곰이 생각 해 볼 때 나는 틀림없이 유대인들이 이방인에 대해 그들과 동등하게 된 것을 불쾌하게 여기면서 그들의 부르심의 사실성 여부에 관해서 논란을 일으키고, 사실상 그들이 은혜에 동참하는 것을 배척하고 제외시키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났던 다툼을 바울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으로 본다. 따라서 바울은 이런 종류의 분쟁은 종식되어야 하며,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은 인종과 국경에 관계없이 한 마음으로 뭉쳐서 기도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특수한 상황에서 일반적인 교훈을 추론하지 말라는 이유도 없다. 
 
"거룩한 손을 들어" ;  이것은 그들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한 아무것도 온 사방의 모든 민족들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는 말과 다름없다. 그러나 그가 내적인 실체를 표현하는 데 외적인 상징을 사용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손이 청결한 마음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사야는 유대인들의 잔인성을 공격하면서 그들이 피로 얼룩진 손을 하나님께 들어올린다는 점을 들어오는 비난하고 있다(사1:15). 뿐만 아니라 이 습관은 모든 세기에 걸친 에배에 있어서 수행되어 오고 있으니,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을 찾을 때 위를 쳐다보기 마련이며, :아주 뿌리를 .박고 있어 우상숭배자들까지도 비록 신을 목석에 새겨놓았지만 이 습관에 따라서 손을 하늘로 들어올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습관에 그것이 대표하는 실체가 따르기만 한다면, 이 습관이 참된 경건과 일치한다는 점을 배울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서만 찾아야 한다는 점을 아는 우리로서는 그에 대해서 지상적이거나 육적인(carnal) 관념을 품어서는 안되며, 또한 육신적인(fleshly) 애정을 제쳐놓은 가운데 아무것도 우리의 마음이 이 세상에서 벗어나 올라가는 것을 막는 일이 없도록 해야겠다. 우상 숭배자들과 위선자들이 기도하면서 손을 들어올리는 모습은 마치 나귀와 같다: 다시 말해서 외적인 상징을 통해 자신들의 마음이 위로 올려진 것으로 고백하지만 우상숭배는 사실 마치 하나님께서 목석에 갇혀 있다는 듯이 거기에 고정되어 있으며, 위선자들은 그들의 여러가지 헛된 관심이나 악한 사상에 너무 얽매여 있어서, 땅으로 떨어지고 만다. 따라서 그들은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과 반대되는 것을 보임으로써 자신들에게 불리한 증거를 하고 있다.
 
"기도하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그가 지금까지 이야기한 내용에 따르는 결론이다. 갈라디아서 4장 5절에서 보았듯이 우리가 하나님을 바르게 부르기 위해서는 양자의 영을 부여받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만민을 위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대해서 설명하고, 이방인도 유대인과 동등하게 구속의 축복을 누리도록 하는 뜻에서 자신이 그들을 위한 사도로 임명된 점을 언급하며, 그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한 방식으로 기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따라서 믿음은 하나님을 부르는 데까지 발전하기 마련이다. 로마서 15장  9절에서도 그는 열방은 기쁘고 즐겁게 노래할지니(시67 4), 너희 모든 백성들아, 저를 :칭송할지어다"(시117; 1), "내가 열방 중에서 주의 이름을 찬송하 리이다"(시18 :49)라는 귀절로써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입증하고 있다. 믿음에서 기도로 나가든 기도에서 믿음으로 나가든, 원인에서 결과로 나가든 결과에서 원인으로 나가든 논리는 마찬가지이다. 이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의 말씀에 의해서 자신을 계시하시는 것은 우리가 그의 이름을 부르게 하려는 뜻에서라는 점을 지적해 주고 있으며, 이것이야말로 우리 믿음의 으뜸가는 단련이기 때문이다.
 
"9. 이와 같이 여자들도~~~~" ; 그는 남자에게 청결한 손을 들어올릴 것을 명하고, 여기서는 여자들이 올바르게 기도하는 데 갖춰야 할 문제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추천하고 있는 덕과 유대교의 외적인 성결의식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고 있는 것으로도 보인다. 왜냐하면 어떤 곳도 속되지 않으며, 남자나 여자들이 자신의 악 때문에 저지를 받지 않는 한, 어느 장소에서도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주장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말이 나온 김에, 여자들이 거의 언제나 저지르기 쉬운 잘못을 바로잡는 것이 그의 의도였다. 추측컨대 아주 부요할 뿐 아니라 유명한 시장을 가진 도시인 에베소에서 이 잘못이 특별히 만연했던 것 같다. 그 잘못이란 복장에 대한 과도한 관심과 열성이다. 그들이 정숙하고 단정한 복장을 하기를 바울이 바라는 것은 사치와 과용이란 허영이나 방종에서 나오는 과시욕에서 기인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장이란 다른 외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서 일정한 허용 한계를 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단정함을 원칙으로 삼을 수밖에 없다.
 
위정자들은 사실 과도한 욕망을 어느 정도 견제할 수 있는 법을 제정할 수도 있겠지만, 인간의 양심을 규제하는 임무를 띠고 있는 경건한 교사들은 그런 법적 제재의 의도를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한다. 최소한 이것만은, 곧 정숙과 단정함에 어긋나는 유행에 따른 의복은 어느 것이고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만은 이론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면적인 성향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되는데, 그 까닭은 속에서 방종이 지배할 경우 정숙이 있을 수 없으며, 자기 본위가 내면적으로 독주할 때 외형만의 복장에 단정함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위선자들은 대개 자신의 사악한 의도를 온갖 구실로 덮으려 하므로 우리는 그들의 은밀한 성격을 폭로할 수밖에 없다. 존귀하고 정결한 여자들에게 그들의 특별하고 영구적인 신분의 표로서 정숙을 부정하는 것은 옳지 않으며, 마찬가지로 남자들도 모두 단정의 한계를 지켜야 한다. 여기에 위배되는 것은 무엇이든 옹호할 필요가 없다. 바울은 단정치 못한 예를 몇 가지 지목하고 있는데, 곱슬 꼽슬하게 만든 머리, 보석, 그 리고 금반지 등이 그것이다. 물론 이것은 금보석이 전적으로 금지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런 것들이 반짝일 때 거기에는 앞에서 내가 언급한 모든 악들이 동반되며, 이것은 이기심이나 정숙치 않은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10. "이것이~~~~자들에게 마땅한 것이니라." ;  존귀하고 경건한 여자의 복장이 창녀의 그것과는 마땅히 달라야 한다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바울이 이런 것들을 신분의 표로서 규정하고 있는 것은 경건이, 선행으로 모습을 드러내려 할 경우, 그것은 정숙함에 어울리는 의복에서도 나타나는 것이 옳기 때문이다.
 
"11. 여자는 일절 순종함으로 종용히 배우라." ;  그는 복장에 대해서. 언급한 다음에 여기서는 여자들이 거룩한 집회에서 보여야 마땅한 정숙함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맨 먼저 그는 그들에게 종용하게 배울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이 종용이란 침묵을 의미한다. 곧 그들이 공적인 장소에서 이야기 하려고 나서지 말아야 위한다는 뜻으로, 그는 당장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을 금함으로써 이 점을 더욱 더 명백하게 하고 있다.
 
"12. 여자의 가르치는 것과~~~~~허락지 아니하노니~~~~~~" ;  여자에게서 자신의 가족들을 가르치는 임무를 빼앗고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전적으로 남자에게 맡겨주신 가르치는 직분(a munere docendi)에서 그들을 제외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우리가 고린도전서에서 다룬 내용이다. 혹 어떤 사람이 드보라와 그밖에 하나님께서 과거에 백성을 다스리도록 지명하신 여자들의 경우를 들면서 이 원칙에 도전한다면 거기에 대한 답변은, 곧 하나님의 비상한 행위가 여자들을 그대로 두고자 하는 일상적인 원칙을 없애버리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과거에 여자들이 선지자와 교사의 직무를 맡고 하나님의 영에 의해서 그렇게 하도록 이끌림을 받았다 하더라도 그것은 모든 법을 초월하는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는 일이요, 그것은 .특이한 경우이므로 지속적이요, 습관적인 원칙에 위배되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계속해서 가르치는 직분과 밀접하게 관련된 점, 곧, 남자를 주관하는 문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여자들이 가르치는 일에서 ,배제되어야 할 이유는 가르치는 일이 그들의 신분에 적합하지 않으며, 또 형편상 가르치는 것은 남자들이 여자들보다 신분상으로나 권위면에서 ,우월하기 때문이다.
 
이 논리는 선지자들과 교사도 왕과 위정자 밑에 종속되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아주 강력한 것으로는 보이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남자가 다른 관계에서 동시에 명령하고 순종하는 데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고 대답 하겠다. 그러나 이것이 천성적으로 곧 하나님의 일상 법칙에 따라서 순종하도록 태어난 여자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은 모든 현명한 남자들이 '귀나이코크라티안'  곧 여자들의 통치를 항상 부자연스럽고 괴상한 것(monstrosity)으로 여겨오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자가 가르치는 권리를 빼앗는 것은 하늘과 땅을 뒤범벅으로 만드는 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그는 그들에게 침묵과 여성으로서의 한계를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13. 이는 아담이 먼저 지음을 받았고~~~~" ; 그는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해 야 하는 두 가지 이유를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이것을 법으로 정하셨다는 점과, 또한 처벌 형식으로 그것을 여자에게 부과하셨다는 점이 그것이다. 따라서 그는 인류가 본래 정직한 그 상태에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규정해 놓은 참된 이치(true order of nature)는 여자가 남자에게 복종하는 것을 규정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리고 아담이 그의 첫 위엄으로부터의 타락을 통해서 스스로 자신의 권위를 스스로 박탈했다는 내용이 여기에 대한 반론이 될 수 없는 것은 죄 때문에 생긴 잔재(the ruins) 속에도 신의 축복이 어느 정도 남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자가 자신의 죄로 자신의 위치를 개선한다는 것은 옳지 못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시간적으로는 그리스도보다 앞섰지만 그보다 못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여자가 두번째로 지음받았기 때문에 종속된다는 바울의 이론은 별로 강력해 보이지 않을는지 모른다. 바울은 비록 모세가 창세기에서 말하는 모든 상황을 다 설명하고 있지는 않지만, 자기 독자들이 이 모든 것을 생각해 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세의 가르침이란 여자는 남자에게 언제나 순종해야 한다는 명백한 조건으로 남자에게 종속된다는 뜻에서 나중에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동등한 신분의 '두 머리'를 창조하신 것이 아니라 남자에게 보다 낮은 조력자를 덧붙이셨던 만큼 사도가 하나님의 영원하고 침해 불가능한 계획을 뚜렷하게 제시하는 그들의 창조 순서를 우리에게 지적하는 것은 옳다.
 
"14. 아담이 꾀임을 보지 아니하고~~~~"그는 여자에게 내려진 처벌, 곧 "또 여자에게 이르시되 내가 네계 잉태하는 고통을 크게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며 너는 남편을 사모하고 남편은 너를 다스릴 것이 니라"(창3:16) 하는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그녀가 받은 경륜(counsel)은 피할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그녀로서는 다른 사람의 능력과 뜻에 의존하는 것을 배우는 것이 마땅했으며, 그녀는 남자를 하나님의 명령으로부터 유인 했으니, 그녀에게서 자신의 모든 자유가 박탈되고 멍에 아래 놓이는 것이 마땅했다. 뿐만 아니라 사도는 자신의 이론의 근거를 단순히 범죄(transgression)의 원인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거기에 대해 선언하신 판결에 두고 있다. 그런데 여자의 복종이 그녀의 범죄에 대한 처벌이었으며, 그것이 창조 이후부터 그녀에게 부과되었다는 말에는 모순이 있는 것으로 그들릴 수 있는 데, 그 까닭은 그녀가 죄를 짓기 전부터 종속 상태로 운명지어졌다는 결론이 따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순종이 맨 처음부터  그녀의 자연스러운 상태가 아니었을 이유가 없으며, 종속 상태는 그녀의 죄에서 나온 나중의 결과였을 뿐이라고 대답하겠다. 따라서 복종은 그 이전보다 덜 자발적인 것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흑자는 여기서 아담이 자기 자신의 오류 때문에 타락한 것이 아니라 자기 아내의 유혹에 넘어간 것뿐이라는 견해에 대한 변명을 .찾아낸다. 그들은 오직 여자만 뱀의 계략에 속아 넘어가 자신과 남편이 신이 될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아담에게는 그런 확증이 없었으며 단지 아내의 변덕을 만족시키려고 그 열매를 맛보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이 사단의 거짓말을 믿지 않았던들 하나님께서 "보라 이 사람이 선악을 아는 일에 우리 중 하나같이 되었으니"(창3:22) 말씀으로 그를 꾸짖지 않으셨을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이런 견해는 쉽게 반박된다: 다른 이론도 많지만  내가 그것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그 오류에 긴 반박을 받을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지할 가능성도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이 말을 통해서 뜻하는 것은 아담이 동일한 악마적인 꾀임에 관련된 것이 아니라 그의 범죄의 원인과 근원이 하와에게서 왔다는 것뿐이다.
 
."15. 여자들이~~~~~민음과 사랑과 거룩함에 거하면" ;  벌게이트 ,역에는-'자녀를 :낳는 데 있어서 그들이 믿음 안에서 계속하면'으로 되어 있으며, :대개 이 소절이 자녀들과 관련되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바울은  '자녀들을 낳음' 에 대해서 헬라어인 오직 한 가지 τεκνотоνια(테크노고니아)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이 믿음은 여자에게 적용되지 않으면 안된다. 명사는 단수인데 동사가 복수라는 점이 문제가 될 수 없는 것은 부정명사가 전체 계충을 지칭할 경우 그것은 집합명사의 의미를 가지며, 따라서 동사의 수의 변화는 쉽게 용인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야기가 여자의 모든 덕이 결혼의 임무에 포함되는 것처럼 들리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곧이어 경건한 여성이 마땅히 뛰어나야 하고 그들을 신앙이 없는 자로부터 구별해 주어야 하는 더 큰 덕을 열거하고 있다. 아이를 낳는 것 마저도 그것이 믿음과 사랑에서 나오는 것일 때만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순종의 행위이다. 여기에 그는 '정절' (sanctification; 성화)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기독교 여성에게 적합한 순결에 대한 종합적인 묘사이다. 마지막으로 덧붙인 '온건'(sobriety)은 그가 복장과 관련하여 앞에서 언급 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그것이 다른 생활 부분에까지 확대해서 적용되고 있다.
 
"그 해산함으로." ;  예리하다는 비평가들은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사람이 여자들에게 자녀 낳는 일에 관심을 갖도록 권면할 뿐 아니라 이것을 그들에게 경건하고 거룩한 일로 강요하며,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이것을 통해서 그들이 구원받을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한다고 우습게 여길는지 모른 다. 사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거룩하게 보이고 싶어하는 위선자들은 여러가지 비난을 퍼부으면서 침상에 대해서 얼마나 중상모략을 해오고 있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따위 불경건한 조소는 쉽게 반박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사도는 먼저 여기서 자녀를 낳는 문제뿐 아니라 자녀를 낳고 기르는 데 따르는 극심한 고통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둘째, 위선자들이나 세상의 현명하다는 사람들이 무슨 이야기를 하든, 하나님께서는 음식에 대한 싫증, 허약, 어려움, 아니 해산과 관계되는 무서운 고통, 그밖에 그녀의 다른 모든 임무를 감당하는 것을 거절하지 않고, 하나님께서 그녀에게 정해 놓으신 상태를 하나의 소명으로 여기며 거기에 복종하는 여자를 더 기뻐하신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어떠한 영웅적인 덕을 크게 과시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절하는 여자보다 더 기뻐하신다는 말이다. 여기에 우리는 처벌 그 자체에 이미 구원을 확보하는 수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덧붙일 수 있을 것이다.
 
"구원을 얻으리라." ;  여자는 자신의 성의 연약성 때문에 보다 더 소심하고 겁이 많으며, 더우기 바울이 지금까지 이야기한 점은 제아무리 남자다운 마음을 가졌을지라도 당혹케 하며 혼란케 할 성질의 것인만큼 그는 그가 지금까지 말한 것을 거기에 위로를 더함으로써 완화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영이 우리를 꾸짖거나 비난하고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들면서 승리감을 맛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낙심할 때 다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신다. 여자에게 온 인류 파멸의 책임이 있다는 말은 그들을 낙심하게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들에게 내 하나님의 심판은 무엇일까 하는 질문은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현재의 증거인 복종으로 계속적인 깨달음과 함께 그들을 더욱 더 용기를 잃게 만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들을 위로하고 그들의 상태를 잘 견디도록 하는 뜻에서, 그들이 비록 일시적인 처 벌을 받고 있을지라도 구원의 소망이 그들에게 남아 있다는 점을 지적해 주고 있다.
 
이 위로의 좋은 결과는 두 가지로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첫째, 그들에게 제공된 구원에 대한 소망이 있기에 그들은 자신의 최책에 대한 기억으 로 절망하거나 두려워하게 되지 않으며, 둘째, 이런 종류의 순종이 그들에게 유익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점을 지적받을 때 남편에게 종속되어야 하는 필연성을 보다 침착하고 평안하게 견디며, 그 결과 적극적으로 남편에게 복종하게 되는 것이다. 이 귀절이 교황주의자들처럼 행위에 의한 칭의를 지지하는 방편으로 곡해되더라도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간단하다. 사도는 여기서 구원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의 말은 행위의 공로와 관련된 것으로 사용될 수 없으며, 그래서는 안된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우리를 위해서 정해 놓으신 구원으로 인도하는 데 사용하시는 방법을 지적하는 것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