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전2:5 ~7)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또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자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5)그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자기를 대속물로 주셨으니 기약이 이르러 주신 증거니라 (6)이를 위하여 내가 전파하는 자와 사도로 세움을 입은 것은 참말이요 거짓말이 아니니 믿음과 진리 안에서 내가 이방인의 스승이 되었노라 (7)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5. 하나님은 한 분이시요" ; 이 '말은 언뜻 보기에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기 때문에 그는 모든 민족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논리가 아주 약해 보이지만, 이 논리를 유효하게 만드는 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인간에게 내려가는 방법이다. 크리소스톰과 다른 많은 사람들은 그의 의미를 우상숭배자들이 상상하는 것처럼 많은 신들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본다. 그러 나 바울이나 나의 의도는 다른 데 있는 것으로 본다. 곧 여기에는 한 분 하 나님과 여러 민족을 가진 한 세상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으며, 이 대조 때문에 그는 양자가 서로 관련된 것으로 보고 있다. 그가 로마서 3 장 29절 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은 홀로 유대인의 하나님뿐이시뇨 또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뇨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그렇다. 믿음에 의한 할례와 믿음을 통한 무할례를 의롭다고 인정하시는 분은 하나님뿐이시다.
따라서 당시 많은 계층과 민족들이 신앙에 낯선 사람들이었다는 점에서 볼 때 인간 사회에 제아무리 다양성이 많다 하더라도 모두를 지배하는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에, 바울은 신자들에게 하나님의 하나됨(oneness)을 지적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과 모든 사람들 사이에 하나의 기반(bond) 이 있다는 점과 이 동일한 하나님의 능력 아래 있는 자들은 영원히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소외되지 않고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하고 있다. "하나의 중보자에 대한 이야기도 같은 의미이다. 모두의 창조주와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한 분이시듯이, 하나님께 대한 접근을 우리에게 열어주는 중보자도 한 분이요, 이 중보자가 오직 한 민족이나 특별한 계층의 소수에게만이 아니라 모두에게 허용되고 있는 것은 그가 우리의 죄를 대속하는 방편으로 사용한 제사의 혜택이 모두에게 적용되기 때문이라는 점을 그는 지적하고 있다.
당시로 말하면 대부분의 세상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어 있었던만큼 일부러 그는 멀리 있던 자들을 가까이 이끄는 중보자를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모두'라는 전반적인 용어는 항상 인간의 계층과 관련되어져야지 개인과 관련되어져서는 안된다. 그의 말은 유대인뿐 아니라 이방인들, 비천한 계층의 백성뿐 아니라 임금들까지도 그리스도의 죽음에 의해서 속량되고 있다 라는 식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죽음의 혜택이 모두에게 공통되도록 의도하셨으므로 단 한 명이라도 구원의 소망으로부터 제외하려는 견해를 고수하는 자는 그에게 ,잘못을 범하는 것 이다.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라." ; 그를 사람으로 부름으로써 그가 또한 하나님이시라는 점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과 연합하는 줄(the bond)을 지적하는 것이 여기서 그의 의도이므로 그는 그리스도의 신성보다 인성을 언급하고 있다는 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부터 인간들이 스스로 여러 중보자를 고안함으로써 하나님으로부터 한 걸음 한 걸음 떨어져간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서 자기들로부터 멀리 계신 것으로 잘못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어디서 도움을 청해야 말할지 모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와 같이 계시다는 점을, 곧 그가 우리에게 내려오셨으므로 우리는 그를 구름 저편에서 찾을 필요가 없다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이 고질을 치유하고 있다. 여기서 그가 말하고, 있는 것은 히브리서 4장 15절의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훌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라는 말과 동일하다. .
하나님의 아들께서 우리에게 형제로서의 손을 내밀고 계시며, 우리의 본성을 같이 지심으로써 우리와 함께 연합되어 있다는 사실이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면 어느 누가 이 넓고 곧은 도로를 걷지 않고 불확실하고 거친 생길을 배회하겠는가?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할 때마다 그의 숭고하고 접근할 수 없는 위엄 때문에 두려운 마음이 들더라도 우리를 부드럽게 초청하여 우리의 손을 잡고 이끄시는 사람이신 그리스도를 또한 생각하도록 하자. 이렇게 될 때 우리가 두 려워하고 무서워하던 아버지께서는 호의롭고 친근한 분이 되기 ,마련이다. 이것만이 우리가 자신있게 하나님의 .어전에 나아갈 수 있도록 하늘 나라의 문을 다시 우리에게 열어줄 수 있는 열쇠이다.
그러기에 사단은 모든 세기에 걸쳐서 이 확신을 무너뜨림으로써 인간들이 곁길로 빠져들도록 노력해 오고 있다. .나는 그리스도의 강림 이전에 .그가 어 떻게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을 현혹하여 하나님께 도달하는 다른 방법 을 만들어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확고한 보증을 가지고 이제 나타나셨으며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마 11: 하는 부드럽고 간곡한 말씀이 아직 세상에 울려퍼지고 있던 기독교회의 맨 처음 ,시각부터 그의 자리에 천사를 중보자로 내세우는 음흉한 속임꾼들이 있었는데, 이것은 골로새서(2:1~18)에서 쉽게 알 수 있는 대로이다.' 사단은 당시에 은밀하게 고안해 내고 있던 이 배덕을 후에 천 명 가운데 한 명도 그리스도를 명목상으로라도- 이름이 인정받지 않는다면 실체는 더욱더 미지수로 남아 있기 마련이다 중보자로 인정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강력하게 밀고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건전하고 경건한 교사들을 일으켜서 그들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의 핵심 가운데 한 가지를 회복하고 인간의 마음에 상기시키려 하는 오늘날 교황주의 궤번가들은 그처럼 뚜렷한 것을 모든 방법을 동원해 서 흐리게 하려고 부산하게 공모하고 있다. 먼저 그 이름이 그들에게 얼마 나 싫던지 어떤 사람이 성인들을 들먹이지 않고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언급할 경우 그는 당장에 이단 혐의를 받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감히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을 전적으로 배척할 수 없기에 그는 유일한 중보자가 아니라 한 중보자로 이야기되고 있다는 엉뚱한 설명으로 그것을 피하려 하고 있다. 이것은 바울이 하나님을 무수한 신들 중에 한 분으로 언급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는데, 그 까닭은 하나님이 한 분이라는 말과 그리스도가 한 분이라는 두 발언은 서로 밀접하게 연관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리스도를 다수 가운데 하나로 보는 자들은 하나님에 대해서도 동 일한 해석을 적용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영광을 공 격하는 맹목적인 광기에 사로잡히지 않았다면 그처럼 의기양양해 하며 오만 스러울 수 있겠는가? 그런가 하면 그리스도는 속량의 유일한 중보자로, 성인들은 중재의 중보 자로 부름으로써 스스로 더 재치있는 척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 귀절의 문 맥은 그러한 해석이 터무니없음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 까닭은 바울이 여 기서 분명히 기도에 대해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 우리에게 모두 를 위해서 기도할 것을 당부하는 것은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께서 그의 죽 으심으로 모두를 하나님과 화해시켜 놓았으므로 모두가 그에게 올 것을 바 라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에게서 그의 존귀를 벗기는 데 날뛰는 자들이 여 전히 그리스도인으로 주장하는 가소로운 모습을 보라!
바울이 여기서는 우리에게 남을 위해 중재할 것을 당부하고, 로마서 8장 '중재의 일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 것으로 말하고 있으므로 34절에서는 언뜻 모순된 것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러하다. 곧 성도들이 서로를 돕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중재가 그들에게 중재자가 한 분뿐이라는 사실과 어긋나지 않는 것은 어느 누구도 먼저 자신이 그리스도의 변호를 신뢰하기 전에는 자기 기도나 남을 위한 기도를 허락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서로를 위한 우리의 중재는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를 훼 손하기는커녕 실제로 전적으로 거기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므로 만약 교황 주의자들이 성인들에게 돌리는 모든 것을 그리스도의 유일한 중재에 제종속시 킨다면, 우리와 그들 사이에 쉽게 의견의 일치를 선수 보았을는지에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는 까닭은 그들이 동성인에게 중재의 직무를 양도하지 않을 경우 우리에게 아무런 변호인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흔히 그들은 우리 자신으로서는하나님 앞에 나설 가치가 없기 때문에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스도에게 속하 는 존커를 탈취하고 있다. 성인들에게는 ¡하나님의 고은혜를 [우리가 얻게 할 수 있는 가치가 있다고 말하는 것은 충격적인 모독이다. 모든 선지자들, 사 도들, 순교자들, 아니 천사들까지라도 그럴 없기 때문에 우리와 마찬가 지로 동일한 변호를 필요로 하고 있다. 죽은 자들이 .살아 있는 여자들을 위해서 .중재한다는 것은 ,한낱 그들의 상상 의 조작이요, 우리 기도의 근거를 거기에: 두는 이것은 하나님으로부터 우리 의 신뢰와 그에 대한 ,우리의 주기도를 ,전적으로 철회시키는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 발씀에 근거를 둔 신앙을 하나님께 기도하는 올바른 길로 규정하고 있다(롬10:17).
그러므로 우리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 말씀과, 무관하게 조작해 내는 허구적인 그것들을 배척하는 것은 공당연하다. 이 문제에 대해서 이 귀절의 해석이 요청하는 정도 이상으로 너무 세세히 캐지 않는 뜻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업적에 보대해서 배운 사람들은 그분 한 분만으로 만족할 것이요, 하나님도 모르고 그리스도도 모르는 사람들은 자 기들 멋대로 중보자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말로써 이 귀절의 해석을 요약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나는 그리스도의 중보직을 흐리게 하고, 아니 있었다. 의 매장하며, 아무런 성서적 권위 없이 허구적인 중보자들을 이끌어들이는 교황주의자들의 가르침이 불경건한 불신과 ,사악한 만용으로 가득차, 있다는 결론을 내린다.
"6. 그가 자기를~~~~~주셨으니" ; 여기서 속전에 대한 언급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의 제물로서의 죽음과 그의 계속적인 중재 사이에는 일연적인 관계 가 있기 때문이다(롬8 :34). 이것은 [그의 제사장 지분의 두 면이다. 제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제사장으로 불리는 그것은(히7.: 그의 죽음에 의해서 단번에 우리의 죄를 대속하십으로써 우리와 하나님을 화해시 키셨으며, 지금 하늘의 성소에 들어가셔서 우리를 대신하여 아버지 앞에 나타나셔서 우리의 기도가 그의 이름으로 허용되게 하셨다는 의미에서이다. 여기서 죽은 성인들을 이 직무에서 그리스도의 동료로 삼고, 그렇게 함으로 써 그의 제사장직의 영광을 그들에게 양도하는 교황주의자들의 신성모독적인 사악이 더 폭로되고 있다. 히브리서 4장 끝부분과 히브리서 5장 처음 부 분을 읽어보면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가져오는 중재가 제사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나의 주장에 대한 확증을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또한 고대 제사장직의 모든 체계에 의해서 명백하게 드러나는 점이다. 그러므로 그의 중재 사업의 어느 한 부분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양도할 경우에는 필 연적으로 제사장으로서의 그의 지책이 그에게서 탈취될 수밖에 없다는 결론 이 나온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dutilutpov(안틸뤼트론; 대속물)으로 부름으로써 다른 모든 보상을 제외하고 있다. 교황주의자들은 엉큼하게 그리스도께서 그 의 죽으심으로 지불한 우리의 구속의 대가가 세례받을 때 우리에게 적용되 며, 이 결과 원죄가 파괴되지만 그 후에는 우리들이 보상(satisfactions)에 의해서 하나님께 화해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보편 적이요, 영속적인 혜택을 짧은 기간과 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국한시키고 있 다. 그러나 이 주제는 <기독교 강요>에서 더 자세하게 다루어질 것이다.
"기약이 이르면 증거할 것이라." ; 이것은 이 은혜가 정한 때가 되면 공포될 것이라는 내용이다. 모든 사람을 위하여'(to all ; 모든 사람에게)라는 귀 절은 만약 하나님께서 자신을 화해한 아버지로서 구별없이 모두에게 계시 하는 것이 그의 의도라면, 그리고 그리스도의 구속에 모두가 참여하기로 되 어 있다면, 왜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한 민족을 선택하셨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그는 그런 은혜의 계시에 대한 올바른 시간이 하나님 의 경륜에 의해서 정해졌다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그런 질문에 답하고 있다. 겨울에 나무가 앙상해지며, 전답이 눈으로 덮이고, 초장이 꽁꽁 얼어붙어 버리거나, 봄의 부드러운 온기가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이던 것들을 소생시 키는 것을 보고 우리가 놀라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시사철이 이어지도 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그의 섭리가 다른 면에 있어서도 동일한 권위를 지니는 것을 허용치 않으려 하는가?
하나님께서 확정하신 것을 예정된 시기에 가져오신다는 데 그는 변덕스럽다고 비난할 것 인가? 세상의 눈에는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에게 구별이 없는 구속자이신 그 리스도의 계시가 갑작스럽고 의외였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것 을 갑작스럽게 명령하신 것으로 생각할 것이 아니라 우리의 모든 사상을 그의 경이적인 섭리의 정하심(ordering)에 '복종시켜야 마땅하다. 등이렇게공될 때 우리는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모든 것이 올바른 시기에 '온다는 점을 함께 닫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라는 권면은 바울의 글에 자주 나오고 있는데, 특별히 당시에 그 신기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의[ 어안을 벙벙벙벙 만든, 이 방인들의 부르심과 관련된 귀절에서 그렇다.[ 하나님께서 자신의;은밀한 지 혜로 시간이 이어지도록 정하셨다는 대답으로 만족하지 않는 자들은 언젠가 는 그들이 허비된 것으로 생각한 그 시간을 너무 세세히 캐는 자들을 위해 서 지옥을 준비하는 데 사용하셨다는 점을 깨닫게 될 것이다.
"7. 이를 위하여 내가~~~~~세움을 입은 것은~~~~~" ; 자신이 많은 사람들처럼,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는 주제(subject)에 대해서 무모한 주장을 펴고 있는 것 으로 보지 않으려고 그는 하나님께서 과거에 하나님 :나라에 낯선 자들이었 던 이방인들로 하여금 복음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 자신을 세우셨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그의 이방인들에 대한 사도직은 하나님께서 들을 부르시고 계시다는 확실한 증거였으며, 그러기에 그는 그것을 주장하고 변호하는 데 그처럼 애를 쓰고 있는 것이다. 이다시 말해서' 그것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믿음과 진리' 안에서'- 이방인들의 한 교사라는 점을 주장하며 [맹세나 단언을 그덧붙임으로써 사도 직이 중요한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두 단어는 선한 양심 을 지칭하지만,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대한 확고한 '보장에 의존하고 있 다. 그의 의미는 자신이 진지한 마음뿐 아니라 정직하고 두려움이 없는 양 심으로 이방인에게 복음을 전파하고 있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그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의 명령에 따른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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