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전1:15~20)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5)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6)영원하신 왕 곧 썩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고 홀로 하나이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하도록 있을지어다 아멘 (17)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교훈으로써 명하노니 전에 너를 지도한 예언을 따라 그것으로 선한 싸움을 싸우며 (18)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19)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2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5. 미쁘다~~~~이 말이여" ; 자신의 사역을 수모와 부당한 비난으로부터 변호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는 이제 자기 원수들이 자신에게 불리 한 치욕으로 제시했을지도 모르는 것을 유리하게 바꿔놓고 있다. 그는 자 신이 사도직으로 부름받기 이전의 상태가 교회에 유익하다는 점을 보여주 고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바울에게 그의 은혜에 대한 보증을 제시 하심으로써 모든 죄인들을 불러 확실히 사죄를 받을 것으로 기대하게 하 셨기 때문이다. 그가 난폭하고 야비한 들짐승같던 데서 목동과 목사로 바 뀌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께서는 인간의 죄가 제아무리 중하고 크다 하더 라도 구원에 대한 접근이 아무에게도 막혀 있지 않다는 확고부동한 자신 감을 모든 인간에게 가져올 수 있는 그의 은혜에 대한 훌륭한 본을 주신 셈이다.
먼저 그는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구원하시려고 임하셨다 는 일반적인 말 을 서론으로 삼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아주 중요한 문제를 다룰 때 항상 취 하는 태도이다. 신앙의 교의의 핵심을 스스로 잃어버린 상태에 있는 우리들 이 구원을 얻으려면 그리스도에게 나와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수천 번 구원을 제공하고, 그리스도 께서 손수 우리에게 그의 구원 사역을 선포하심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계속 두려워하거나 아니면 속으로 그것이 사실인가 하고 의아해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 최악의 용서에 대한 의심이 조금이라도 마음 속에 파고들 때 마다 우리는 그것이 확고부동한 진리요, 아무런 논박이나 이의 없이 받아들 여져야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우리의 방패로 사용함으로써 이 의심을 몰아 내야 할 것이다.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은 죄인들 이라는 단어이 다. 그리스도의 일이 구원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하는 사람들이라도 이 구 원이 죄인들에게 속한다는 것을 믿기가 더 어렵다고 고백하기 마련이다. 우 리의 마음이란 항상 자신의 값어치를 곰곰이 생각하기 마련이지만 우리의 무가치성이 명백하게 드러나는 순간 우리의 확신은 시들어버리고 만다. 따 라서 어떤 사람이 자기 죄악의 짐을 더욱더 절감할수록, 그는 그리스도께서 오신 것은 의인을 위함이 아니라 죄인들에게 구원을 가져오려는 뜻에서였다 는 점을 신뢰하면서 더욱더 큰 용기를 가지고 그에게 자신을 내맡겨야 한다. 우리는 본 귀절에서 바울이 자신에 대한 지금까지의 말을 그리스도의 사역 이 일반적인 진리에 기초를 두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 . 우리는 사도가 여기에서 거짓된 겸손에서 이런 말을 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는 겸손할 [뿐 아니라고 참되며, 자 신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나오는 고백을 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러나 흑 자는 만약에 '그가 건전한 교의에 대한 무지 때문에 넘어졌으며, 그다른 면에 있어서는 인간들 삶을 살았다면왜 .자신을 죄인 가운데 제 일가는 자(primum)로 여기는가 하는 질문을 할는지 :모른다. 이 귀 절에서 우리는 특별히 불신에 [오만과 격렬한 잔인이 따를 경우, 얼얼마나 하 나님 보시기에 심각하고 중대한 죄가 되는가를 경고받고 있다. 인간은 바 울이 자신에 대해서 고백한 것을 흔히 경솔한 열성의 결과로 따돌리기 쉽 지만, 하나님께서는 '신앙의 순종을 얼마나우고귀한 것으로 '여기시는지 오 만하게 지속되는 불신을 .한낱 작은 죄로 여기는 것을 허용치 않으신다. 우리는 이 구절의 가르침을 유의할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세상 보기에 는 아무 해가 없을 뿐 아니라 탁월한 '덕을 지니고 있으며 모든 칭송을 받 을 만한 생활을 하는 사람이라도 :복음의 교의에 반대하고 '자신의 불신을 고집할 경우, 가장 '지독한 죄인 평가운데 하나로 취급받게 된다는 사 실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오만하게 반대하는 위선자들의 모든 허 세가 하나님 보시기에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하는 점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16.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괴수와 같은 내 안에서-영역)" ; 여기서 그는 자신이 다시 죄인들 가운데 으뜸가는 자 (primo)라는 점을 밝히고 있는만큼 이 귀절의 의미는 앞의 '것과 동일하다. 곧 맨 처음부터 하나님께서는 분명하고 폭넓게 볼 수 있는 그의 은혜의 본 을 보여주셨으며, 결과적으로 그가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에게 오기만 한다 면 사죄를 얻을 것이라는 점을 아무도 의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바 울에게서 우리가 추구하는 은혜에 대한 눈에 보이는 모형을 보게 될 때 우 리의 모든 불신은 제거되고 만다.
"17. 만세의 왕~~~~" ; 그는 자신의 감사함을 표현할 말을 찾지 못한 나머지 이 절규를 내뱉고 있다. 바울에게서 감정의 ,격발을 볼 수 있는 :것은 주로 주제의 막대함 때문에 압도된 나머지 할 말을 잃게 되는 경우이다. 바 울의 회심보다 더 경이로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그와 동시에 그는 그 의 본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부르심에서 나타나는 은혜를 생각할 때마 다 '경탄에 사로잡히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우리 모두에게 ]권면하고 있다.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 ,숭고한 찬송이 그의 과거 생활에 대한 모든 기억을 덮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얼마나 오묘한 하나님의 영광인가! 여기 서 하나님의 것으로 돌려지고 있는 속성들은 물론 언제나 그의 것이지만, 이 문맥과 아주 잘 어울리는 것이다. 그는 하나님을 영원한 왕, 곧 결코 변 하지 않는 만세(all ages)의 하나님으로 부르고 있다. 그가 하나님을 보이 지 아니하는' 분으로 부르는 것은 그가 다음에 지적하듯이 하나님께서 접 근할 수 없는 빛 가운데 거하고 계시기 때문이요, 그가 하나님만을 홀로 지혜로운 분'으로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의 모든 지혜를 어리 석은 것으로 만드시고 헛된 것으로 정죄하시기 때문이다.
이 모든 것은 깊 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라는 로마서 11 장 33절 그의 결론과 일치하 고 있다. 그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깊고 불가해한 지혜를 대하되, 그의 일 들이 우리의 마음을 입도한다 하더라도 계속 의아해 할 정도로 경탄하는 자세로 대하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홀로'(only)라는 말이 하나님만의 모든 영광을 뜻하는가, 아니면 하나님만을 홀로 지혜로운 분으로 부르는 것 인가, 아니면 유일한 하나님으로 .부르는 것인가 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약간 의 는 의문이 있다. 나에게는 둘째 의미가 최선의 것으로 보이는데, 그 이유 를 이것이 인간의 이해가 어떻게 하나님의 은밀한 경륜에 굴복해야 하는가 잘 지적하려는 그의 주제와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그가 하 정하는 나님께서만 것이 모든 영광을 받으실 가치가 있다는 점을 말하고 있는 것을 부 광에 아니니, 그 까닭은 하나님께서 그의 피조물들에게 하나님의 영 하나님의 대한 흔적을 뿌려놓으시고 있지만, 그래도 그 영광은 여전히 .통째로 것 그대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머지 두 가지 해석도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아무에게도 영광이 없다는 점을 명백히 해주고 있다.
"18. 아들 디모데야 내가 네게 이 경계로써 명하노니~~~~" ; 그가 지금까지 자신과 자기 위치에 대해서 사이야기한 것은 핵심에서 벗어난 지엽적인 문제였다. 디모데에게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자신의 의도였으므로 그는 먼저 자신의 권위를 확립하고 거기에 반대하는 자들의 견해를 반박할 수 밖에 없었다. 이제 자신의 사도직이 과거에 .그가 그리스도의 나라에 대항 해 싸운 적이 있다 해서 그만큼 존경을 덜 받거나 이런 반대에 부딪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입증했으므로 다시 자기 권면의 핵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경계는 그가 처음에 언급한 바로 그것이다. 그는 디모데를 자신의 아들로 부름으로써 그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보여줄 뿐 아니라 그를 사람들에게 추천하고 그리고 그를 더욱 더 격려하는 뜻에서 그는 그가 하나님의 영으로부터 어떤 종류의 증거를 받았었는가 하는 점을 그에게 지적하는데, 그의 사역이 신의 인준을 받고 있다는 점, 곧 그가 인간의 투표로 선발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계시로 부르심을 입었다는 점을 깨닫는 것이 그에게 있어서 크나 큰 확신의 원천이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대에 맞게 살지 .않는 것도 수치스러운 일이라면 있 는 힘을 다해서 하나님의 판단을 '무시하는' 것은 얼마나 더 수치스럽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예언' 들이 무슨 예언인가를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 혹자는 바울이 특별한 계시의 지시를 받아서디 모데에게 직무를 수여한 것으로 생각한다. 나도 여기에 동의하지만 다른 사 람들도 같이 이 계시를 받았다는 점을 덧붙이는 이유는 바로 이런 이유에서 바울이 소복수를 사용하고 있음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 말에 서 디모데를 교회에 추천하는 뜻에서 그에 관한 여러 예언이 주어졌다는 점 을 알 수 있다.그는 너무 젊었기에 연령 때문에 면시를 받을 우려가 있 었고, 바울은 젊은 사람을 너무 일찌기 장로(presbyter)의 직무에 추천한다 는 비난을 받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그에 게 라 힘들고 큰 일을 맡겨주셨으니, 그 까닭은 그는 일반적인 (사역자가) 아니 사도들 다음가는 자였으며, 종종 바울이부재중에는 그를 대신했기 때 가 문이다. 따라서 그의 직분이 무모하게 사람들에게서 수여된 것이 아니라 그 는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그 19일을 위해 선발되었다는 점을 .입증하기 위해서 흔한 특별한 증거가 필요했다. 선지자라는 칭호로 존경을 받는 것은 [당시에 일이 아니었지만, 디모데의 경우는 특별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먼저 그 자신의 :음성의 인준을 받지 않은 채, 오인간들의 투표에 의해서 이 직분을 수행하도록 일반아들이는 것을 원치 .않으셨다. .말해서 그가 예언자들의 계시에 의해서 부름을 받기 전에 그의 사역을 수행하는 것은 그의 뜻이 아니었다. 사바울과 바나바가 이방인들의 교사로 임명될 때도 똑같았다. 이것은 새롭고 비상한 출발이었으며, 이것만이 경솔한 개혁이라는 위험의를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혹자는 하나님께서|의 예예언자들을 통해서 디모데가 어떤 종류의 사역 자가 될 것을 예언하셨다면, 무엇 때문에 그에게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점을 증거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예언들을 그가 거짓된 것으로 만들 수라도 있었단 말인가? 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나의 대답은 곧 그 결과가 오직 하나님께서 약속하셨던 그대로일 수밖에 없었 지만, 그와 동시에 게으름과 무기력에 빠질 것이 아니라 자신의 순종을 통 해서 스스로 하나님의 섭리의 생생하고 적극적인 도구로서의 모습을 드러내 는 것이 디모데의 임무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울은 그에게 더욱더 큰 열성 을 자극하는 뜻에서 얼마든지 하나님께서 그를 도와주셨으며, 그에 관해서 교회에게 보증을 제시하시면서 사용하신 예언들을 그에게 상기시켜 줄 이유 가 있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왜 자기가 부름받았는가 하는 점을 지적 받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 선한 싸움을 싸우며"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디 모데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주신 이 인준을 의지하면서 더욱더 용감하게 싸 워야 옳다는 뜻이다. |우리가 우리의 현재 행동이 바로 하나님의 명백한 임 명에 따른다는 점을 깨닫는 것만큼 우리에게 담력을 주는 것이 또 어디 있 겠으며, 그 외에 또 다른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무장 과 방어요, 이 도움이 있을 때 우리는 결코 패하지 않을 것이다. 싸움'이 라는 단어에는 결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 이것은 모 든 신자들에게 전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군대에 있어서 지 도자와 기수로 불러도 무방한 기독교 교사들에게 특별히 적용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서 사역에 투쟁이 따를 수밖에 없겠지만 너는 하나님 의 말씀으로 무장되어 있다는 점을 기억하고서 승리에 대한 확고한 소망을 가지며 이것으로 새로운 용기를 얻도록 하라'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선한 싸움'이란 영광스럽고 쓸모가 있으며 우리가 하나님의 지휘 아래 싸우는 그 러한 싸움이다.
"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 나는 이 '믿음'이라는 단어를 일반적인 의미에서 건전한 가르침을 뜻하는 것으로 본다. 후에 그는 믿음의 신비 라는 말도 이런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교사가 복음의 순수한 진리를 고수하고 선한 양심과 정직한 열성으로 그것을 섬기는 것이야말로 가장 필 수적인 것이 아닐 수 없다. 이 두 가지가 있는 곳에는 나머지는 저절로 따 르기 마련이다.
"어떤이들이 이 양심을 버렸고" ; 선한 양심에 믿음이 동반하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가를 보여주는 것은 이약한 양심의 벌이 올바른 길에서 떠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하고 정직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지 않고 악한 성 향에 이리저리 끌리는 자는 그들이 처음에는 건전한 이해로 시작한다 하더 라도 결국에는 그것을 완전히 상실하고 만다. 이 귀절은 우리의 주목을 요 하는 곳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건전한 교의라는 보화는 값을 매길 수 없 는 것이요, 그것을 상실하는 그것을 무엇보다 가장 두려워해야 옳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그것을 지키는 유일한 길은 선한 양심으로 고수하는 것이 라는 점을 우리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배 척하고 불경건한 종파에 달려가 합세하거나, 가증스러운 오류에 말려드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두려움이 우리에게 견인(to persevere)할 힘을 주는 것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위선을 그런 종류의 눈 멈(blindness)으로 벌하시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교 훈을 받을 수 있다. 먼저 복음의 교사와 사역자들, 그리고 그들을 통한 전체 교회는, 참된 교의에 대한 거짓되고 위장된 고백은 거기에 기혹한 처벌이 따르는 만큼, 기피할 것을 권고 받고 있다. 다음으로 일단 그리스도와 복음을 고백한 자들이 그들 과거의 미신에 떨어질 뿐 아니라 설상가상으로 더 욱더 가증한 오류에 홀리는 것을 볼 때, 당황해 하는 많은 사람들의 난체 를 이 귀절은 제거하고 있다. 이러한 본을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복음의 영 예를 공공연하게 옹호하고 있을 뿐 아니라 그것이 더럽혀지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점을 공공연하게 선언하고 있는 셈이다. 이것은 모든 세기 의 체험을 든 오류의 통해서 배울 수 있는 것으로서 처음부터 기독교회에 일어난 그 원인은 바로 이것인데, 어떤 때는 관심이, 어떤 때는 사리 추구가 계기로 되어 하나님께 대한 순수한 두려움이 사라지게 된 것이다. 따라서 악한 양심이야말로 모든 이단의 어머니이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는 대로 이 믿음을 정직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인 수일이[없는 무수한 사람들이 들짐승처 럼 쾌락주의자들의 광기에 몰려들고 있으며, 결과 [그들의 위선이 폭로되 고 있다.뿐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모독이 만연하고 있으며, 거의 모든 계층 사람들의 방종하고 기타락한 :생활은이, 세상에서 거의 정직을 .찾아볼 수 없다는 점을 보여주며, 따라서 지금까지 켜져 있던 빛이 곧 꺼져버리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복음의 순수한 이해를 아주 극소수에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되고 말았다. 파선에 대한 비유는 아주 적절한 것으로서 우리가 신앙에 상처를 입히지 않고 그대로 항구에 도착하고자 한다면 우리의 선한 양심을 진로의 항해사 로 삼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파선의 위험이 있다는 점을 우리에게 년지시 일 러주고 있다. 악한 .양심은 마치 폭풍우치는 바다에서의 소용돌이처럼 신앙 을 가라앉혀 버릴 수 있다
"20. 후메내오와 알렉산더" ; 바울은 이 두 사람 가운데 첫사람에 대해 두 번째 서신에서 다시 언급하고 있는데, 거기서는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는 그의 말에서 그가 당한 파선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추측컨대 알렉산더 도 이 터무니없는 오류에 미쳤던 것 같다. 바울의 동료 가운데 한 사람이 그런 무서운 타락으로 멸망할 정도라면 오늘날 사단이 여러가지 유혹으로 사람들을 속여넘기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는 줄 안다. 그는 이 두 사람을 디모데가 잘 알고 있을 사람으로 언급하고 있다. 나는 틀림없이 이 알렉산더가 바로 사도행전 19장 33절에서 에베소의 소요를 진압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한 것으로 소개되는 사람으로 본다. 그는 에베소 소속이었으며, 우리가 이미 지적했듯이 이 서신은 주로 에베소 교우들의 혜택을 위해서 쓰 여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알렉산더가 무슨 목적으로 왔었는가를 알게 되며, 또한 우리가 신앙을 끝까지 안전하게 고수하려면 선한 양심으로 그것 을 소유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점을 알게 된다.
"내가 사단에게 내어 준 것은" ;이미 고린도 전서 5장 5절과 관련해서 언 급한 바 있듯이 흑자는 이것을 비상한 징계의 부과를 뜻하는 것으로 보면서 바울이 같은 서신 12장 28절에서 언급하는 δυναμιs(뒤나미스), 곧 능력들 과 관련시킨다. 사도들에게는 경건한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은혜와 호의의 증거로서 치료의 은총이 부여되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불경건하고 반역적인 사람들을 마귀에게 넘겨주어 고문을 당하게 하거나 그들에게 다른 처벌을 부과할 수 있는 능력으로 무장되어 있었다. 베드로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행 5 : 1), 바울은 마술사 바예수의 경우에서(행 13: 6) 이 능력의 행사에 대한 예를 우리에게 각각 보여준 바 있다. 그러나 나는 이 규절이 추방을 뜻하는 것으로 보려는 .까닭은 고린도의 근 친상간적인:사람이 다른 어떤 처벌을 받았다는 견해가 도무지 가능한 이론의 지지를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약에 바울이 그를 추방함으 로써 사단에게 넘겨주었다면 왜 동일한 표현이 여기서도 동일한 의미를 지 닐 수 없겠는가? 그리스도께서 그의 나라의 자리를 주장하는 것은 교회 안 에서이므로 교회 밖에서는 사단의 지배가 있을 뿐이다. 따라서 교회로부터 끊기는 사람은 그가 교회와 화해하고 그리스도에게 돌아오기 전에는 필연 적으로 사단의 횡포 .아래 떨어질 수밖에 없다. 내가 여기서 한 가지 예외를 두는 것은 바울이, 그 죄악의 ;극악성 때문에 이 두 사람에게 영원한 추방을 선언했을 수도 있지만, .나는: 감히 여기에 대해서, 확정적인 주장을 펴고 싶 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훼방(모독)하지 사무말게 하려 함이라" 하는 말은 무슨 뜻인가? 교회 로부터 내쫓겨지는 자는 그가 더 이상 일상의 규율에 얽매이지 않고 더 오 만불손하게 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스스로의 행동에 있어서 더 큰 자유를 누리기 마련이다.
나의 대답은 그들의 사악이 제아무리 높게 아 오른다 하더라도 그들에 대한 문은 굳게 잠겨 있을 것이요,- 따라서 그 들의 본이 양떼들에게 아무 해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제약한 사람들이 자 기들도 동일한 믿음을 가졌노라면서 무슬슬 들어올 경우 그들은 더없이 큰 해를 끼치가 해를 끼치는 마련이다. 따라서 그들을 지적해서 공적으로 수치를 _줄 경우 통합이 그들에게서 제거되며,그렇게 될 :제아무리-단순한사 람이라도 그들이 불신앙적이며 가증스럽다는 점을 모르게 되는 일이 |없을 것이요, |따라서 :각자는 그들과의 사업을 피하게 될 것이다. 그러 있는 일이 지만, 그들이 이와 같은 국낙인을 받을 때 스스로 자신들의 악한 길에서 돌아 서기도 한다. [이와같이 추방이 때에 따라서는 사람들을 더욱더 보비참하게 만 들기도 하지만 그들의 .무자비성을 길들임에 있어서 조항상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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