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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딤전1:5)

1. 성경 (딤전 1:1 ~ 11)
 우리 구주 하나님과 우리의 소망이신 그리스도 예수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은 (1)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로부터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2)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3)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몰두하지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4)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5)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6)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가 말하는 것이나 자기가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7)그러나 율법은 사람이 그것을 적법하게만 쓰면 선한 것임을 우리는 아노라 (8)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하는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9)음행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 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맹세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10)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우리 구주~~~~사도 된 바울은" ; . 그가 만약에 디모데 한 사람만을 상대로 이 글을 썼다면 자신의 직책을 열거하고 사도직에 대한 자신의 주장을 다짐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에게는 분명히 이름 하나로 충분했을 것이다. 그는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도라는 점을 알고 있었으며, 그에 아무런 증거가 필요없었던 것은 그가 이 점을 적극적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인정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여기서 자기 이야기를 들으려 하지 않거나 기꺼이 받아들이려 하지 않던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가 자신의 사도직을 주장함으로써 그들이 자기 말을 하찮은 것으로 여기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은 그들을 위해서이다. 그는 또한 어떤 인간도 스스로 사도가 될 수 없으므로 자신의 사도 직이 하나님의 명령이나 정하심에 입각한 것이라는 점을 주장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만이 참된 사도요, 존귀를 받을 가치가 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 아버지를 자신의 사도직의 유일한 원천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이름을 덧붙이고 있다. 그 까닭은 아버지께서는 교회 통치에 있어서 아들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일도 하시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모든 행위는 아들과 함께 취해지기 때문이다. 그는 대개 성자에게 더 잘 적용되는 '구주'라는 명칭을 하나님께 적용해서 부르고 있다. 하지만 이것이 성부에게도 잘 어울리는 명칭인 것은 그의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분이 하나님이요, 따라서 우리의 구원의 영광을 그에게 돌리는 것이 '정당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원받는 것은 성부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셨던지 성자를 통해서 우리를 속량하고 구원하는 것이 그의 뜻이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를 가리켜 '우리의 소망'으로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라야 우리는 좋은 소망을 갖기 시작한다는 점에서 특별히 그에게 속하는 명 칭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모든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 동안에서만 발견되는 법이다.
 
"2. 참 아들 된 디모데에게" ;  이 추천이 디모데에 대한 크나 큰 칭송이 아닐 수 없는 것은 바울이 그를 자신의 진정한 아들, 곧 그의 아버지가 되기에 부끄러움이 없는 것으로 인정할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그를 그런 사람으로 인정하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그는 디모데를, 마치 그가 또 다른 바울이라는 식으로 추천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마 23 :9)는  그리스도의 말씀과 너희들이 육신으로는 아버지가 많지만 영의 아버지는 한 분 뿐이다"(고전4 : 15 ; 히12 : 9)라고 하는 사도 자신의 발언과 어떻게 일치할 수 있는가? 나의 대답은 아버지로 불러 달라는 바울의 주장이 결코 하나님께 돌려야 마땅한 영예를 말살하거나 감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흔히 어떤 문제가 다른 문제에 예속될 경우 거기에는 아무 갈등이 없다는 이야기를 한다.

 

이것은 바울의 아버지라는 명칭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사실이다. 하나님만이 신앙 안에 있는 모든 자의 유일한 아버지인 것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과 그의 영의 능력으로 모든 신자들을 중생시키며, 하나님만이 신앙을 부여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통합에 있어서 기꺼이 일꾼으로 사용하는 자들이 이 존귀를 함께 나누는 것을 허용하시지만, 하나님 자신의 것을 그 어느 것도 포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엄격히 말하자면 하나님만이 디모데의 영적 아버지였지만, 디모데를 낳는 데 있어서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바울은 이 명칭에 대한 종속적인 권리를 자신의 것으로 주장하고 있다.
 
"은혜와 긍휼과 평강이~~~~~" ; 그는 여기서 궁휼이라는 단어를 그의 일반적인 습관과는 달리 두번째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마 디모데에 대한 자신의 특별한 애정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은혜가 긍훌에서 나온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은혜를 맨 처음에 두는 것이 정확한 순서는 아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의 은혜로 받아들이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비로우시기 때문이요, 다음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설명 형식으로 결과를 먼저 언급하고 다음으로 원인을 언급하는 것은 아주 흔히 있는 일이다. 나는 은혜와 '평강'에 대해 다른 곳에서 언급한 바 있다.
 
"3. 내가~~~~~~너를 명하여" ;  여기서 이 발언이 불완전한 것으로 끝나고 있거나 "히나" 가 중복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어느 경우든 의미는 명백하다. 먼저 그는 디모데에게 에베소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이유를 지적하고 있다. 바울이 디모데와 같은 사랑스럽고 신실한 동역자와 헤어지게 된 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가 자기의 대리인으로서 아무도 감히 해낼 수 없던 일을 수행하도록 하려는 필요성 때문에 마지못해 그렇게 된 것이다. 이것은 디모데에게 큰 감명을 주었음에 틀림없으며, 그 결과 그는 시간을 허비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보통 이상의 탁월한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여기서 그는 또한 디모데에게 순수한 가르침을 더럽혀 놓는 거짓 교사들을 반대할 것을 격려하고 있다. 디모데에게 에베소에서의 그의 임무를 수행하라는 이 명령에서 우리는 사도의 경건한 관심을 .주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 까닭은 그에게는 새로 많은 교회를 모으는 일로 일손이 바빴으면서도 앞서 세운 교회를 목사없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어떤 필자의 말대로, 우리가 일단 얻은 것을 안전하게 지키는 데는 그것을 얻는 데 필요한 만큼의 능력이 필요하다.  '명한다' 는 말에는 권위의 의미 가 포함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디모데에게 남들을 제지할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 바울의 의도였다.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 ;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헤테로디다스칼레인'은 복합어로서 다른  곧 '새로운 방법'으로 가르친다거나 '새로운 교의를 가르친다'로 번역될 수 있다. '새로운 교의를 따른다'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나에게 만족스럽지 못한 것은 .이것이 교사들만이 아니라 청중들에게도 적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으로 가르친다'로 읽을 경우에는 그 의미가 더 확대되는데, 곧 바울이 ˙디모데에게 그가 그들에게 준 참되고 순수한 방법과 어긋나는 새로운 교수 방법을 도입하는 것을 금하는 셈이 된다. 마찬가지로 두번째 서신에서 그는 디모데에게 자기 가르침의 본질에 집착할 것을 권할 뿐 아니라 '휘포튀포-신'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기 가르침을 생생하게 그대로 닮은 것을 뜻한다. 하나님의 진리가 하나이듯이 그것을 가르치는 방법도 하나뿐이니, 곧 모든 거짓 핑계에서 벗어나 외적인 인간의 웅변의 과시보다는 성령의 위엄을 풍기는 것이 그것이다.

 

어느 누구를 막론하고 여기서 이탈한다면, 그는 '교의' 그 자체를 비뚤어지게 하고 순수하지 못하게 만드는 셈이요, 따라서 다르게 가르치는 것은 형식과 관련되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다. 만약에 다른 것을 가르친다로 읽는다면, 이것은 가르침 그 자체의 본질과 관련될 것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새로운 교의란 복음의 순수한 교의와 정면 충돌하는 가르침을 뜻할 뿐 아니라, .새롭고 야심에 찬 고안으로 순수한 복음을 더럽히거나 속된 공론으로 그것을 흐리게 하는 모든 것을 뜻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모든 상상에 따라서 복음도 그만큼 더럽혀지며 성경을 불경건한 방법으로 하찮은 데 사용하는 나머지 기독교를 교묘한 전시로 만드는 자는 복음을 어둡게 만드는 자이다. 이런 종류의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의 말씀과 바울이 에베소인들에게 간직하도록 당부한 순수한 교의에 위배된다.
 
"4. 신화와~~~~~~착념치 말게" ;  내가 보기에 그가 말하는 신화(fables)란 꾸며댄 거짓이라기보다는 전혀 확고한 데가 없는 우스개와 어리석은 이야기인 것 같다. 거짓되지 않으면서도 허황된 것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의미에서 쉬토니우스(Suetonius)는 신화적인 이야기 라는 말을 하며, .리비(Livy) 는 신화를 말한다 (to fable)라는 동사를 어리석고 비합리적인 잡담을 의미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물론 바울이 여기서 사용하고 있는 헬라어에 있어서 '플뤼아리아', 곧 하찮은 것들을 뜻하며, 자신의 의미를 설명하는 뜻에서 한 가지 신화를 제시하고 있는 만큼 의심할 점이 전혀 없다. 다시 말해서 그가 신화의 한 가지 예로 족보를 언급하는 것은 그것에 대한 모든 이야기가 허구적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이 어리석고 무익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들이 족보와 같은 성격이나 묘사를 하고 있는 신화에 신경을 쓸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사실 쉬토니우스가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말하는 것이며, 학자들 사이에서도 올바른 의식을 가진 사람들에게서 항상 조롱의 대상이 되어오고 있는데, 이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시 말해서 유익한 지식은 소홀히 하고 아킬리스(Achilles)나 아쟈스(Ajax)의 계보를 조사하느라고 평생을 바치거나 프리암(Priam)의 자손들을 추적하느라고 정력을, 탕진한다는 것은 정말 우스팡스러운 호기심이 아닐 수 없다. 유쾌한 잡담이 허용되는 학교에서조차 이것이 용납되지 않는다면, 하물며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지식에 있어서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그가 끝없는 족보로 이야기하는 것은 헛된 호기심이 끝을 모르고 계속 수렁에서 수렁으로 빠져들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경륜(aedifcationem Dei ; 하나님의 :감화시킴, 또는 교화)" ;  이런 종류의 교활함은 인간안에 교만과 허영을 ,길러줄 뿐 하나님안에서는 자라나게 할 수가 없다. 그가 경건한 교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인정하시거나 아니면 그것이 하나님께 순종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기에 그가 상호간의 사랑,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 회개를 포함시키는 것은 이 모든 것이 항상 경건으로 이끄는 신앙의 열매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하나님의 모든 예배가 신앙에만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모든 것이 의존하고 있는 신앙만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게 여겼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 . 그는 교의를 그것의 결과에 따라서 판단하고 있다. 덕을 세우지 못하는 것은 설령 거기에 다른 잘못이 없다 하더라도 모두 배척받아야 마땅하며, 분쟁을 일으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곱절로 정죄를 받아야 한다. 사리추구에 여념이 없이 자신들의 능력을 과시하는 자들이 일삼는 것이 바로 이런 교묘한 질문들이다. 모든 교의를 시험하는 단 한가지 원칙은 교화시키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열매없는 논쟁의 재료에 불과한 것으로 판명되는 것은 하나님의 학교회에 쓸모가 없는 것으로 마땅히 배척받아야 한다. 만약에 이 시금석이 여러 제기에 걸쳐서 적용되었더라면 종교가 많은 오점으로 더럽혀진다 하더라도, 최소한 스콜라 신학이라는 미명 아래 진행된 악마적인 논쟁술은 그렇게 많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신학이란 것은 그 자체에 아무런 가치를 내포하지 않고 있는 논쟁과 공론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그 방면에 더 지식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만큼 그는 비참한 사람 취급을 받을 수 밖에 없다. 물론 그것을 변호하는 데 사용되는 그럴듯한 이론을 내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들은 바울이 이런 종류의 모든 것을 정죄하면서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이 거짓되다는 점을 입증하는 데 결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디모데가 상대할 수밖에 없던 이 원리를 배우지 못한 자들은 자신들에게 율법의 지지가 있는 그것으로 허풍을 떨었는데, 바울은 여기서 이들의 반론을 예상하고서 율법이 그들을 지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그들에게 가르 친 복음과 완전 일치하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의 변호는 오늘 날 교묘한 질문을 좋아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그것과 다를 바 없다. 그들은 마치 그들만 거룩한 신학을 품에 소중히 간직한다는 식으로 우리가 그것을 파괴하려 한다는 이야기를 늘어놓는다. 마찬가지로 바울을 반대하던 자들은 그에게 불리한 감정을 일으키는 방향으로 율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여기에 대한 그의 대답은 무엇인가? 그들의 환상에 종지부를 찍는 뜻에서 그는 그들의 공격에 선수를 치면서 자신의 교의가 율법과 완전하게 일치하며, 율법을 다른 목적으로 사용하고 그것을 남용하는 자들은 바로 장 본인들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도 참된 신 학을 논하는 문제로 말한다면, 신학자라는 맹랑한 명칭으로 우쭐대지만 중 요한 귀절은 삭제시키고 무의미한 것만 늘어놓을 뿐인 저 시간낭비자들이 비참하게 망쳐놓고 만 것을 회복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정작 우리들이라는 점은 아주 뚜렷한 사실이다. 여기에서 경계 나라는 말은 율법을 뜻하는데, 이것은 부분으로 전체를 표현하는 방법이다.]
 
"5. 청결한 마음과 ~~~~나는 사랑이거늘." ;  율법의 목표와 목적이 우리에게 양심과 믿음에서 선한 나오는 사랑을 카르쳐주는 데, 있다면 반대로 그것의 가르침을 이상야릇한 질문으로 바꾸는 자들은 율법의 나쁜 해설자들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이 귀절에서는 사랑이 율법의 두 돌판과 관계되는 것인가, 아 니면 둘째 돌판과만 관계되는 것인가 하는 문제가 별로 중요시되지 않는다. 우리는 물론 성경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언급될 경우에 그것은 대개 이웃 사랑에 대해서만 국한되나, 여기서는 우리의 마음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 고 우리의 이웃을 우리 자신들처럼 사랑할 것을 명령받고 있다. 이 귀절 에서 바울이 사랑 한 가지만 언급하고 있다면 나는 서슴없이 이 사랑을 하 나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이해할 것이다. 그러나 그는 신앙과 선한 양 심을 덧붙이고 있으므로 내가 제시하려는 해설이 그의 문맥과 아주 잘 어울릴 것으로 본다.

 

율법의 요점은 우리가 참된 신앙과 청결한 양심으로' 하나 님을 예배하고, 또한 우리가 서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며, :여기서 그것이나 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의 율법을 거기에 반대되는 목적에 유리하도록. 곡해 함으로써 더럽히는 자들이라는 것이다.5 을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사랑을, 신앙 -앞에 두는 것처럼을보인다는: 점에서 한 가지 의심이 일어날 수도 있다; 나의!5대답은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유치하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비바울은 사랑이 믿음에서 나온다는 점을 또한 명백히 밝히고 있는만큼 사랑이 먼저 언급되고 있다 해서 그것이 제일가는 존 귀를 받는다는 뜻은 아니기 때문이다. 원인은 틀림없이 결과보다 :우선하는 것이며, 바울의 전체 내용은 '율법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은 선한 양 심과 사랑의 어머니인 믿음 안에서 우리를 가르치려는 .뜻에서이다 라는. 것 이다. 따라서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믿음으로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 사이에는 아무런 구별이: 없다. 양자는 신앙의 열매이다.

 

사도행전 15장 9절에서는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 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라는 말과 함께 깨끗한 마음이 언급되고 있으며, 베드로는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도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선 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하여 찾아가는 (것이라"(벤전3:21). 이 구귀절에서 명 백하게 드러나는 점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양심의 정직함없이는 순수 한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바울이 이 먹을 낱낱이 열거하면서 사용 하는 표현을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믿음과 선한 양심에 대해서 자랑하는 것보다 더 쉽고 흔한 일도 없지만, 자신의 행동으로 그들의 온갖, 위선의 자취에서 해방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는 자들은 극소수이다.

 

특별히 우리 는 "거짓이 없는 믿음이라는 표현에 주목해야겠는데, 이것은 선한 양심으 로 그것을 입증하지 않고 사랑 안에서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신앙에 대 한 고백은 모조리 불성실하다는 말이다. [인간의 구원이란 신앙에 의존하는 것이요,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예배는 신앙과 선한 양심, 그리고 사랑으로 이루어지는만큼 우리는 이것이 율법의 요약이라는 바울의 말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다.
 
"6. 사람들이 이에서 벗어나~~~~" ;  그는 계속해서 우리가 도달해야 할 목표 점, 또는 목적을 두고 이야기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여기서 ]분사로 사용되 고 있는 doroxeiv(아스토케인)이라는 동사는 '곁으로 벗어난다' 또는 표적에서 벗어난다 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것은 단 한 가치 목적을 겨냥하지 않는 모든 가르침을 헛된 말'로 정죄하며, 그와 동시에 다른 목표를 겨냥 하는 모든 사람들의 재주와 생각이 덧없이 사라지고 말 것으로 선언하는 홀 륭한 귀절이다. 사실 쓸모없으며 하찮은 것을 경탄하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인간들에게 경건을 세우지 않는 모든 것을 ματαιολοιαν(마타이올로기안)으 로 말하는 바울의 발언은 언제나 진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거룩 한 말씀을 연구하되 확고하게 신앙의 덕을 세우는 일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연구하다가 그것을 남용한 대가로 가혹한 처벌을 받는 F일이 없도록 최대한 의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7.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 여기서 그가 직접 징계하고 있는 자들 은 율법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공격하는 자들이 아니라 스스로 그것의 교사로 자처하는 자들이다. 그가 그런 사람들은 아무런 이해력이 없는 것으로 이야 기하는 것은 그들이 쓸데없이 호기심에 찬 문제로 골머리를 않기 때문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한다 는 말을 덧붙임으 로써 그들의 오만을 꾸짖고 있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이 아무것도 알지 못 하는 문제를 놓고 이러쿵저러쿵 경솔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시시한 교사들 처럼 뻔뻔스러운 사람도 없다는 이야기이다. 오늘날 우리가 보듯이 소르본 느 학교에서는 그들의 결정에 대해서 얼마나 교만하고 뻔뻔스럽게 늘어놓는 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주제는 무엇인가? 인간들의 지성으로부터 완전 히 감추어지고 있으며, 성경의 어떤 '말씀이나 어떤 계시에 의해서 결코 명 확하게 된 일이 없는 것들뿐이다. 그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보다는 그들이 고안해 낸 연옥을 더 자신있게 믿고 있으며, 정도의 중재에 대한 그들의 날 조를 우리가 복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에는 전체 신앙이 무너진다고 하며 아우서올 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하늘의 계급, 관계의 교리, 그리 고 그와 같은 다른 허구에 대해서 그들이 만들어놓은 거대한 수렁에 대해 서 무슨 말을 할 것인가? 목록을 들자면 위한이 없다. 사도는 이 모든 것을 통해서 "무지는 대담하다는 격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지적하고 있는데, 이것 은 그가 골로새서 2장 18절에서 "저가 그 본 것을 의지하여 그 육체의 마음 을 좇아 헛되이 과장하고"라고 말한 대로이다.
 
"8. :그러나~~~~~율법은 선한 것인줄 우리는 아노라" ;  그가 다시 한 번 자 기에 대해서 거짓 비난이 가해지는 것으로 예상하는 것은 그가 이러한 사람들의 허세를 저지할 때마다, 그들은 '뭐라고,' 당신은 율법이 매장되고 인간의 기억으로부터 말소되기를 원한단 말이오 라는 식으로 자신들을 방어하려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거짓된 혐의를 물리치는 뜻에서 바울은 율법이 좋다는 것을 인정하면서 그것이 합법적으로 사용될 필요가 보았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합법적(legitimus)이라- 단어가 법(lex)이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그는 자신의 논리를 돕는 뜻에서 서로 관계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율법이 자신의 가르침과 완전 일치한다는 점을 제시함으로써 이 문제를 더욱더 깊이 다루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바로 이 비난을 그들에게 뒤집어 우고 있다.
 
"9.  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  사도의 의도는 율법이 성취하는 기능을 모두 열거하는 데 있지 않았다. 그보다 그의 '이론은 그가 다루고 있는 자들을 상대로 하는 것이었다. 흔히 있는 일이지만, 율법에 대 해서 가장 큰 열심을 갖는 것으로 여겨지기를 바라는 자들의 전체 생활을 보면 그들이 그것의 가장 큰 멸시자들이라는 점이 드러난다. 오늘날 에 대한 가장 명확한 본은 행위에 의한 칭의를 주장하며 자유 의지를 변호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생활의 완전한 성결, 공로와 보상에 대해서 줄곧 들어대지만 그들의 전체 생활은 그들이 더없이 악하고 불경건하며, 이것 떠 그들이 가능한 한 모든 방법으로 하나님의 노를 격발하고 그의 심판을 담대하게 멸 시한다는 점을 소리높이 외치고 있다. 그들은 선과 악에 대한 자유로운 선 택을 장황한 말로 극찬하지만 그들의 행실은 그들이 사단의 종이라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으니, 그 까닭은 사단이 그들을 가장 엄격한 종살이의 최고 랑에 묶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런 원수들의 오만불손을 견제하는 뜻에서 율법이 의로운 사람에게, 곧 경건하며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적이 못되므로 자신과 자기와 같은 사람들은 율법을 두려 위하거나 증오할 이유가 전혀 없지만, 그들에게 있어서는 율법은 곧 그들을 찔러 죽이는 하나님의 칼이라는 점을 경고하고 있다. 나는 이 귀절에서 보다더 교묘한 의미를 이끌어내려는 학자들이 있다는 점 을 잘 알고 있는데, 그것은 바울이 여기서 율법의 '성격에 대한 신학적인 논 문을 쓰고 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그들은 율법이 주어진 것은 의인들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이 율법은 하나님의 영으로 거듭나게 [된 그녀자녀들) 과 전혀 무관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이 구절의 문맥을 볼 것[같으면 보다더 기간단한 설명을 택하게 하고 있다. 바울은 좋은 법은악한, 도덕에서는 나온다는 속담을 기정사실로 인정하면서, 하나님의 (불경건한 [자들의 방탕을 견제하기 위해서 주어진 것으로 주장하고 있는 이유는 스스로 대학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억제할 법이 필요치 않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한한 인 간치고 법의 제지를 반는 사람들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하 는 질문이 제기된다. 나의 대답은 바울이 여기서 의인으로 (부르고 있는 자 들은 절대적으로 완전한 사람들이 아니라-그런 사람이란 아무데도 없다 -선한 것을 자신들의 마음의 최고의 소망으로 삼으며, (그러기에 그들의 경 건한 '욕망이 외적인 압력이나 견제를 전혀 필요로 하지 않는 '자발적인 법 이나 다름없게 되는 자들이다. 그가 생활에 있어서 법의 순수한7원칙을보 여주는 경건한 사람들에게 대항해서 법을 잘 지키는 것처럼 떠들어대는 원 수들의 뻔뻔스러움을 견제하려 한 것은 바로 이 원수들이야말로 더없이 법 을 필요로 한 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거기에 대한 관심을 갖지 않기 때 문이다. 이 점은 다음 소절에서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악한 행위 에 대한 바울의 목록에 그의 적대자들에 대한 간접적인 비난이 담겨 있는 것 으로 동의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것은 그에 대한 거짓 된 혐의에 대한 간단한 반박으로 여겨질 수 있다. 그들의 율법에 대한 열성, 이 거짓되지 않고 진지한 것이었다면, 그들은 이것을 자신의 사리추구와 어 리석은 이야기의 구실로 삼기보다는 이 모든 잘못과 범죄에 대해서 자신들 을 무장하는 데 사용했어야 옳다.
 
"불법한 자와 복종치 아니하는 자" ;  흑자는 불의한 대신에 불법한 으로 번역하는데, 이것은 헬라어가 drojuous(아노무스; 법이 없는)로 되어 있으며, 나아가 둘째 단어 복종치 않는 과 더욱 동일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죄인들 이란 비천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살아가는 방탕자들이다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 ;  이 단어는 속되고 부도덕한 으로 번 역되는 것이 더 적합하겠지만, 별 의미가 없는 문제에 있어서 너무 세심하 게 나가고 싶지 않다.
 
"10. 사람을 음행하는~~~~ 탈취하는 자" ;  고대 저자들은 다른 사람의 노 예의 납치나 유인, 또는 자유인의 ,위장 판매의 뜻으로 plagium이라는 라 틴어를 사용했다. 보다더 자세한 내용을 알고자 .하는 자들은 플라비안 법 (Flavian law)에 대한 권위자들을 참조하기 바란다. 여기서 바울은 서로 다른 종류의 죄악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든 위반을 간. 략하게 다루고 있다. 이 모든 것의 뿌리는 그가 "불법한 자와 [복종치}아니하는이라는 앞 부분에서 묘사하고 있듯이 오만과 반역'이다. "거룩하지 아 첫째 돌판과 둘째 위반 니한 자와 망령된 자(속된 자)는 각각 율법의 돌판의 자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 그는 비천하고 방탕한 생활을 살아 방법이 세 가는 불순한 사람들을 덧붙이고 있으며, 우리의 이웃을 해치는 정욕을 덧붙이면서 이 세 '가지를 가지로 구별될 수 있으므로 횡포, 불경건, 그는 먼저 횡포를 살인과 인근친 살해 형식으로 순서에 따라 징계하고 있다. 언급하며, :세째로 공강도질과 언급하고, 다음으로 수치스러운 정욕에 대해서 모으 [10 를 기타 범죄에 대해서 계속하고 있다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리는 자.~~~~" ; 여기서  자신의 :복음이 율법과 모순되기는커녕 그것에   대한 최선의 확증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그는 그의 전파에 있어서 주께서 그의 율법 안에서 올바른 가르침에 위배되는 이 모든 것에 대해 선언하는 판결을 지지하는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복음에서 물러서는 차들이란 율법의 핵심을 고수하는 것이 아니라 다만 그것의 그림자를 추구할 뿐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바른 교훈은 그가 다른 곳에서 언급하고 있듯이, '어리석은 교사들을 슬프게 만드는 하찮은 질문과 대조되는 것이다. 이 질문이 가져오는 결과는 마땅히 유해한 것으로 판정될 수밖에 없다.
 
"11. 이 교훈은 영광의 복음~~~~" ;  하나님께서 주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 언급함으로써 그는 이것을 멸시: 주시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복음의 ':영광 을 하려는 자들을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이그는[이어서 제모든 사람들이-그가[ 전 파하는 복음이 오직 하나님의 복음이라는 점을 [이해함으로써, }그가 지금까 하는 것이 지 꾸짖은 모든 우화가 율법 및 '복음과 위배된다는 점을 깨닫게 [◦ 자신에게 맡겨졌다 는 점을 명백히 언급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