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딤전 2:1 ~ 4)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모든 사람을 위하여 간구와 기도와 도고와 감사를 하되 (1)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2)이것이 우리 구주 하나님 앞에 선하고 받으실 만한 것이니 (3)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4)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므로 내가 첫째로 권하노니~~~~~" ; 그가 여기서 명령하고 있는 신앙적인 단련은 우리 속에 하나님께 대한 진지한 예배와 두려움을 유지하고 북 돋아주며, 그가 이미 언급한 선한 양심을 키워나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다. 따라서 그러므로 라는 단어가 여기에 아주 적합한 것은 이 권면이 앞 에서 나온 디모데에 대한 권면으로부터 자연스러운 귀결이기 때문이다. 서 먼저 그는 공적인 기도에 대해 언급하면서 신자들뿐 아니라 모든 인류 를 위해서 기도를 드릴 것을 명령하고 있다. 혹자는 왜 우리가 우리와 아 무 관계가 없는 불신자들의 안녕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위하는가? .형제 되는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해서 기도하면서 그의 전체 교회를 하나님께 천 거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는가? 바깥 사람들은 우리에게 아무 관련이 없 다 라고 이론을 제기할는지 모른다. 바울은 이런 사악한 견해에 반대하면서 에베소 교인들에게 그들의 기도에 교회만 국한시킬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 들을 포함시킬 것을 당부하고 있다.
물론 나는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네 종류의 기도 가운데 세 기도 의 차이점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어거스틴은 바 울의 말을 그의 당대의 의식적 습관에 .맞도록 곡해하는데, 이것은 유치하 다. 보다 간단하게 '간구'는 악으로부터 구출받기를 바라는 요청으로, '기 도'를 우리 자신에게 유익한 것에 대한 요청으로, 이 '도고'를 우리가 당한 상처를 하나님 앞에서 애도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낫다. 그러나 나는 이 종류를 교묘하게 구별하는데 찬성하지 않는다. 아니, 나는 다른 종류의 구별 을 여기서 이끌어낸다. Προσενη(프로슈케-)는 헬라어에 있어서 온갖 종류의 기도에 대한 일반적인 용어요, δεησecS(데-세이스)는 (특별한 요청이 담겨 있는 이상과 같은 형식의 기도를 드린다.
따라서, 이 두 단어는 유(genus) 와 종(species)의 관계에 있다. 엔툭세이스는 우리가 서로를 위 해서 드리는 경기도에 대한 바울의 일상적인 단어로서 이것이 오라틴어로는 'intercessiones' (중재의 기도)이다. 그러나 플라토는 제2 알키비아데스(Alcibiades) 대화에서 이 '단어'를 다른 의미로, 어떤 사람이 자신을 위해드리는 특정한 기도의 의미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책 제목과 거기에 있는 많은 문구를 통해서 '프로슈케-'가 내가 이미 지적했듯이 일반적인 용어라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별로 중요하지 않은 문제를 무리하게 너무 오래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바울은 내가 보기에 단순히 공적 기도를 드릴 때마다 모두를 위해서, 현재 우리와 관련이 없는 자들을 위해서 탄원과 간구를 올리는 것이 옳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을 뿐이다.
용어의 반복은 쓸데없는 것이 아니다. 곧 바울은 우리의 기도에 있어서 ,진지성과 지구성을 :강조하는 뜻에서 일부러 세 단어를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우리가 아는 대로 우리는 종교적 임무에 있어서 얼마나 꾸물대는지 모르며, 따라서 성령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우리를 자극하고 격려하는 데 있어서 많은 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결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감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곧 그는 이 단어를 통해서 하나님께 불신자들의 구원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그들의 번영과 안녕에 대해서 감사드릴 것을 우리에게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날 마다 그의 태양이 착한 사람들과 나쁜 사람들에게 비추이게 함으로써 보여주시는 경이적인 선하심은 우리 모두의 찬양을 받을 만하며, 우리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은 그것을 받을 가치가 없는 자들에게까지 확대되어야 마땅하다.
"2. 임금들과" ; '그가 임금들과 위정자들을 특별히 언언급하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에게 누구보보다도 그들을 미워할 이유가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당시의 모든 위정자들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불구대천의 원수들이었으며,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이 그리스도의 통치를 .확장하는 것만 무엇보다 바람직할 뿐, 그분의 통치를 저지함에 모든 힘과 재산을 다 바치는 자들을 위해서는 기도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사도는 이 난제에 봉착하고서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점을 특별히 명령하고 있다. 인간적인 병폐가 하나님께서 세워놓은 것을 소중히 여기지 않아도 좋 다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인류의 보존을 위해서 위 정자들과 임금들을 임명해 오고 있으므로, 그들이 제아무리 신령한 규정에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는 바로 그런 이유 때문에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것과 그것의 보존을 갈망하는 것을 중단해서는 안된다.
바로 이것이 신자들이 어느 나라에 살든 법률과 위정자들의 명령에 순종할 뿐 아니라 그들의 기도에 있어서 그들의 안녕을 하나님께 위탁해야 하는 이 유이다. 예레미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벨론의 평안하기를 힘쓰고 위 하여 여호와께 기도하라 이는 그 성이 평안함으로 너희도 평안할 것임이니 라"라고 말한 바 있다(렘 29 우리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이 세상의 권력의 지속과 평화로운 상태를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는 것은 성경의 전반 적인 가르침이다. 이는 우리가 주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니라. 그는 이것이 얼마 나 우리에게 유익한가를 보여주고, 잘 정돈된 통치에서 오는 혜택을 열거함 으로써 또 다른 설득을 덧붙이고 있다. 그 첫째는 고요한 생활인데, 그 까 닭은 위정자들에게 평화를 지키는 칼이 쥐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악인 들의 담대성을 견제하지 않는다면 온 세상은 강도와 살인자들로 가득차고 말 것이다.
따라서 평화를 지키는 올바른 방법은 모든 사람이 자신을 헌신 하는 것이며, 김힘 자의 횡포가 억제되는 것이다. 둘째 혜택은 경건의 보 존인데, 이것은 위정자들이 사신앙을 장려하고 하나님의 예배를 유지하며, 거 룩한 것에 대한 존경을 요구하려고 시도할 경우에 가능한 것이다. 세째 혜택 은 공적인 단정함에 대한 관심이다. 다시 말해서 위정자들의 혜택이란 사 람이 동물적인 불결, 곧 수치스러운 방탕에 빠지는 것을 막고 정숙과 온건을 유지하는 데 있다. 이 세 가지가 사라지고 만다면 인간들에게 남는 생활은 어떤 종류의 것이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공적인 평온, 경건, 또는 예절 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관심을 가지고 있다면, 그런 중요한 혜택을 가져오는 방편이 되는 자들을 위해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의 임무라는 점을 명심하도 록 하자.
여기서 우리는 위정자들이 아무런 인정도 없이 오직 잔인한 야만성을 좋 아하는 광신자들은 철폐되기를 바란다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 공의와 예 절을 지키고 신앙을 장려하는 뜻에서 우리가 임금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 이 옳다는 바울과, 임금의 권력만이 아닌 모든 통치가 신앙에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자들 사이에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 것인지 모른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성령을 그 임자로 삼고 있으며, 따라서 광신자들의 제견해는 마귀에게서 온 것임에 틀림없다. 우리에게 이런 혜택을 주지 발못하는 왕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이 옳은가 하고 묻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성령의 지도 아래 <그들이 지금까지 제공하 지 못했던 이 축복을 /우리에게 이제라도 허락할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기 도를 드리는 것이 옳다고 대답하겠다. 따라서 우리는 이미 가치가 있는 자 들을 위해서 기도할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악인들을 선하게 만들어 주실 것을 기도해야 한다.
우리는 땅이 먹을 것을 내도록 되어 있는 것과 마찬 가지로, 위정자들은 하나님께서 신앙과 ,공적 평화,↓그리고 예절의 보호를 위해서 정한 자들이라는 이 원칙을 항상 고수하지 않으면 안된다. .따라서 우리는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할때 그의 축복으로 땅을 비 옥하게 만들어주실 것을 요청하듯이∫ 하나님께서 위정자들을 그의 섭리 안 에서 다른 축복을 베푸시는 데 사용하려고 특정해|놓은 일상적인 수단으로 생 각하는 것이 마땅하다. 바울은 위정자들이그들의 임무상 :우리에게 주는 것으로 이야기하는 이 ,축복이 우리에게 없을 경우, 그것은 우리 조자신의 잘 못이라는 점을 덧붙이지 않을 수 되었다. 그것은 위정자들로 하여금 우리 를 무익하게 만드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로서 때문에 땅이ⅳ황 량하게 되는 경우나 마찬가지이다.:-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잘못 때문에 우 리에게 부과된 이 처벌로부터의 구출을 위해서 기도하지않으면 안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위정자들과 다스리는 위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여기서 그들의 임무를 지적받고 있는 셈이다. 그들이 .각자에게 몫을›으로써 불 공평을 견제하고 평화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건전한 규율을 통 해서 신앙을 증진하고 윤리를 바로잡는 1997년에 열성을 보여야 한다. 그들이 ."그 아들(the Son)에게, 입맞추라"(시2:12)는 다윗의 권면과 그들이 교회 에게 양육하는 아버지와 같아야 한다는 이사야의 말은 아주 조적합한 말이 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예배를 유지하는 면에서 그들의 [도움 을 베푸는 것을 소홀히 할 경우 그들에게는 스스로를 축하할 아무런 이 유가 없다.
"3, 이것이~~~~선하고 일반으실 만한 것이니" ; 그가 내린 명령이 유리한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나서, 그는 그것이 하나님께 기쁨이 된다는 더 강력한 논리에 호소하고 있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을 알게 될 때 그 뜻이 그것을 행하는 모든 이유 가운데 최선의 것이 되어야 마땅하기 때문이다. '선한'이란 올바르고 합법적인 것을 뜻하며, 하나님의 뜻이야말로 우리의 모든 임무를 조정해야 할 원칙인만큼 그는 그것이 하나님께서의 용납이 가능한 것이기 때문에 옳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이 귀절은 면밀한 관심을 필요로 하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거기서 하나님의 선한 뜻(pleasure)을 바라보고 하나님께서 인준하시는 것만을 시도하는 것이 올바르고 적합한 행동에 대한 순수한 규범이라는 일반적인 원칙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또한 경건한 기도의 규범이기도 하다. 곧 우리는 우리의 하나님을 지도자로 삼고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뜻과 명령에 의해서 나아가도록 해야 한다.
이 규범이 우세하게 되었더라면 오늘날 교황주의자들의 기도가 그처럼 오염으로 가득차지는 않았을 것이다. 곧 그들은 죽은 성도들의 중재의 기도에 의지하거나 그들 스스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도하는데, 여기에 대한 하나님의 재가가 있다는 점을 어떻게 입증할 수 있겠는가? 간단히 말해서 그들의 모든 기도 방법에 있어서 하나님께 기쁨이 되는 것으로 무엇을 지적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 이 마지막 논리의 확증으로서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원하신다는 결론이 따른다. 우리의 모든 기도가 하나님의 이 경륜에 일치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결론적으로 그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의 구원을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인간을 불러 그의 진리를 시인하게 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찰되는 결과에서 그것의 원인을 추구하는 논리이다.
다시 말해서 만약에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롬 1:16)이라면 복음 전파를 받는 모든 사람들은 영생의 소망으로 초청받는 셈이나 다름없다는 말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부르심은 은밀한 선택의 한가지 증거인만큼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에 참여토록 하는 자들에게 구원을 소유하게 하시는 것은 복음이 생명의 출입을 보장하는 하나님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서 이 귀절이 예정과 위배된다고 주장하는 자들의 유치한 망상이 명백하게 된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만약에 구별없이 모든 인간이 구원받기를 뜻하고 계신다면 그의 영원한 경문에 의해서 얼마는 구원으로, 나머지는 패망으로 예정된다는 것이 사실이 아니다라는 식의 논리를 편다. 만약에 바울이 이 구절에서 개인들을 두고 말을 했다면 이것을 주장함에 있어서 어느 정도 근거가 있게 될는지 모를 일이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거기에 대해서는 좋은 대답이 있다.
왜냐하면 물론 하나님께서 그의 은밀한 경륜을 외적인 상징에 의해서 우리에게 명백하게 보여주실 때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가 하면서 그의 경륜을 캐고 들어서는 안되지만, 이것이 하나님께서 스스로 모든 각 개인을 상대로 하시고자 하는 내용을 스스로 은밀하게 작정 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의 간단한 의미는 하나님께서 ,복음을 예외없이 모든 사람에게 제공하시고자 하신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지상의 어떤 민족이나 어떤 사회 계층도 구원에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합하지 않는 이 점을 그냥 넘어가겠다. 복음 전파가 생명을 가져 온다는 것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동일하게 구원에 참여할 가치가 있는 자들로 보신다는 그의 결론은 옳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개인이 아니라 계층에 대해서 .말하고 있으며, 그의 유일한 관심은 왕들과 외국 민족들을 이 숫자에 포함시키는 것이다. .그들 또한 복음의 가르침에 참여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사실은 이미 인용된 귀절들과 그와 같은 다른 귀절들로부터 명백하게 드러나고 있다.
이것은 "군왕들아 너희는 지혜를 얻으며"(시2 10)라는 말씀과 동일한 시편의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시 2:8)라는 말씀이 공연한 말씀이 아니다. 여기서 바울의 의도는 우리가 임금들이 어떤 인물인가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의도하신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 또한다는 점 을 보여주는 데 있었다. 사랑의 .임무라는 것은 무엇보다도 구원을 확증하는 모든 사람들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그것을 실천하기 위하여 반드시 경건한 기도를 통해서 간청할 수 있고 확증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과 관련해서 그는 하나님을 '우리의 구주'로 부르고 있는데, 우리가 우리의 구원을 받는 것은 하나님의 과분한 친절 때문이 아니고 무엇인가? 우리를 이미 그리스도의 구원으로 이끌어주신 하나님께서는 앞으로 동일한 은혜를 그들에게도 확대하실 것이요, 우리를 이미 그에게 이끌어주신 그분 께서는 그들 또한 우리에게 덧붙여주실 것이다. 그가 하나님께서 모든 계층과 모든 민족들 가운데서 그렇게 하실 것을 기정 사실로 삼고 있는 것은 선 지자들에 의해서 그렇게 예언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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