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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딤전3:1)

1. 성경 (딤전3:1 ~ 7)
 미쁘다 이 말이여, 곧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함은 선한 일을 사모하는 것이라 함이로다 (1)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절제하며 신중하며 단정하며 나그네를 대접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2)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오직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며 돈을 사랑하지 아니하며 (3)자기 집을 잘 다스려 자녀들로 모든 공손함으로 복종하게 하는 자라야 할지며 (4)(사람이 자기 집을 다스릴 줄 알지 못하면 어찌 하나님의 교회를 돌보리요) (5)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교만하여져서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함이요 (6)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비방과 마귀의 올무에 빠질까 염려하라 (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미쁘다 이 말이여" ;  크리소스톰은 이 귀절이 앞에 나온 항목에 속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나는 찬성하지 않는다. 바울은 중요한 발언의 서언으로 이런 표현을 자주 사용하며, 앞에 나온 주제는 이 정도의 강력한 표현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가 이제부터 말하려 하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므로  이 귀절이 다음에 이어지는 내용의 중요성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도록 하자. 다시 말해서 바울은 이제 목사의 임명과 교회 통치 문제에 대한 새로운 토론을 시작하고 있다.
 
"사람이 감독의 직분을 얻으려 하면~~~~~"바로 앞 장에서 가르치는 직분을 여자들에게 금했기 때문에 여기의 이 말은 그 직분 자체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까닭은 먼저 그처럼 중대한 임무 수행으로부터 여자들을 제외하는 이유가 있다는 점을 명백히 하는 것이요, 둘째는 오직 여자들만 제외하고 남자들은 무조건 다 받아들인다는 인상을 피하려는 것이요, 세째는 디모데와 기타 다른 사람에게 그들이 감독을 선택함에 있어서 얼마나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가를 경고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것을 앞 장과 관련시켜 본다면, 여자들은 이 직분을 받는 것이 합당치 않음은 물론이려니와 남자라도 무분별하게 거기에 응해서는 안된다는 내용이다.
 
따라서 그는 이 일이 아무나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일이 결코 아니라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그는 이것을 καλ6ν(칼론)이라는 단어를 써서 묘사하고 있는데, 틀림없이 그는 플라토가 자주 인용한 옛날 속담 δυσκολα τα *αλα (뒤스콜라 타 칼라), 곧 탁월한 그것은 힘들고 .어렵다는 점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다. 또한 그는 어려움을 탁월성과 연관시키고 있다. 아니, 감독의 직분이란 귀한 것이기 때문에 따라서 모든 사람에게 속하지 않는다는 논리를 펴고 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바로 어느 주석가도 바울의 이런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 그것은 충분히 밝혀진 것으로 생각한다. 일반적인 의미는 이 직분이 힘들고 어려운 것인 만큼 감독을 받아들임에 있어서 신중을 기해야 하며, 그것을 열망하는 사람들은 자신에게 그런 중대한 짐을 감당할 능력이 있나 없나를 ,세밀히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무지는 항상 저돌적이며, 사물에 대한 신중한 지식은 사람을 온건하게 만든다. 능력도 지혜도 없는 사람들이 종종 자신만만하게 통치의 끈을 쥐려 하는 것은 그들이 눈을 감고 거기에 달려들기 때문이다.  그러기에 퀸틸리안(Quintilian)은 가장 위대한 웅변가는 벌벌 떨지만 무지한 사람들은 용감하게 말한다고 한 바 있다. 감독의 직분을 추구하는 데 그런 만용을 제지하는 뜻에서 바울은 먼저, 그것이 고상하며 한가한 자리가 아니라 '하나의 일'이라는 점을,  또, 그것은 일반적인 일이 아니라 탁월한 일이요, 실제로도 그렇지만 힘들고 어려움으로 가득찬 직분이라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고 확장하며, 주님께서 몸소 그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영혼들의 구원을 보살피며, 하나님의 기업인 교회를 다스리는 중대한 사명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아들을 대표한다는 것(sustinere personam Filii Dei)은 결코 가벼운 일일 수 없다.
 
그러나 이것은 여기서 설교하는 것이 나의 당면한 의도가 아니요, 바울이 다음 장에서 이 문제를 다시 언급할 것이다. 여기서 어떤 상황에든 감독의 직분을 추구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질문이 제기된다. 왜냐하면 인간의 욕망이 하나님의 부르심에 선행한다는 것은 모순된 것으로 보일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은 무모한 욕망은 정죄하지만 이 직분에 대한 억제되고 온건한 열망은 용납하는 것으로 보인다. 내 자신의 견해의 이기적인 야망이 일반적으로 정죄받아야 한다면, 그것이 감독직과 관련될 때는 더 비난을 받아 마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는 여기서 성화된 사람들이 자신의 교의에 대한 지식을 교회의 교화에 .적용하려는 경건한 욕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가르치는 직분을 추구하는'것이 전적으로 나쁘다면, 사람들이 거기에 대한 준비 과정으로 청춘을 바쳐 성경을 공부할 필요가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신학교라는 것도 사실 목사들의 유치원이 아니겠는가?  따라서 이렇게 배운 사람들은 그들이 이 직무를 받아들이기 이전에도 자발적으로 자신과 자신의 일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고, 또한 그래야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그들이 스스로 :나서는 가운데  자신의 욕망에 따라서 스스로를 감독으로 세우지 않고,  그들의 수고가 필요할 경우 단지 이 직분을 받아들일 자세를 갖춘다는 전제가 따르고 있다. 그리 고 설령 그들이 교회의 규정에 따라서 부름을 받지 않게 된다 하더라도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알고 자신보다 남을 택한 문제를 불쾌하게 여기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만이 그 자신의 욕망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 있는 사람들이고 그의 뜻을 이렇게 받아들일 것이요, 그렇게 될 때 남들을 더 귀하게 여길 수 있으며 그들을 시기하지도 않을 만큼 온전한 자가 될 것이다.
 
여기서 교회 통치란 너무나 어려워 사람을 이끌어가기보다는 차라리 건전한 판단을 가진 사람을 두려워할 정도가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경건한 이들이 그것을 열망하는 것은 자신의 근면이나 덕에 대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기때문이 다른 곳에서는 지적하듯이 우리의 충족함이 되시는 하나님의 도움을 의지하기 때문이라고 대답하겠다(고후 3: 5).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뜻하는 감독의 직무를, 특별히 초기시대가 그 당시 습관 때문에 그것의 참 의미를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에 비추어 주목할 필 요가 있다. 바울은 감독이라는 명칭에 모든 목사들을 포함시키고 있으며, 그 의미는 각 장로단에서 자기 형제들을 주관하도록 선발된 자를 뜻한다. 그러므로 이 단어는 목사나, 사역자 또는 장로와 동일하다는 점을 명심하도록 하자.
 
"2. 그러므로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으며" ;  그러므로 라는 단어는 내가 제시한 설명을 확증해 주고 있다. 곧 그는 이 직분의 위엄으로부터 그것이 일반적인 사람이 아니라 희귀한 은사를 부여받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는 추 론을 내리고 있다. 일반적인 번역의 취선한 일', 에라스무스 번역의 '존귀한 일'이라는 식이 이옳은 번역이라면, 이 추론을 다음 발언과 관련시키는 것은 그렇게 부적당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는 감독이 "책망할 그것이_없기를" 바라고 있다. 이것을. 그는 디도서 1장 7절에서 ανξκλητον(아빙클레-톤)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 두 단어의 의 미는 그에게는 '그의 권위를 훼손할 아무런 치욕거리가 없어야 한다는 것 이다. 물론 잘못이 전혀 없는 사람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의 평판에 해를 미치지 않는 일반적인 실수(이것은 제아무리 탁월한 사람에게도 있기 마련이다)의 짐을 지고 있는 것과 창피스러운 치욕으로 먹칠하는 것은 별개 문 제이다. 따라서 그는 감독들에게 권위가 결핍되지 않도록 하는 뜻에서 선발 받은 자들은 선하고도 존귀한 평판을 받으며, 두드러진 잘못이 하나도 없어야 한다는 점을 명령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단지 디모데에게 그가 선발할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직분을 열망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활을 세밀하게 검토할 것을 지적하고 있다.
 
"한 아내의 남편이 되며" ;  이것을 그가 한 교회의 목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보는 것은 유치한 넌센스이다. 보다 더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해석은 감독이란 한 번 이상 결혼하지 않았어야 하며, 따라서 자기 아내가 죽은 뒤로 지금은 결혼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는 것이다. 그러나 디도서 제1장에서는 남편이었던 자가 아니라 남편인 자로 되어 있으며, 그리 고 제 5장에서는 과부들과 관련해서 이야기하며, 그는 여기서 현재 시제로 된 것을 과거 시제로 사용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이 그의 의도였다면, 그의 말은 그들의 양심을 생각해서 이런 종류의 올무를 놓을 마음이 없다는 고린도 전서 7장 35절의 말씀에 모순될 것이다. 유일하게 올바른 주석은 일부 다처제가 유대인들 사회에서 거의 합법적이었던 시대의 감독에게 명백히 금지되는 것으로 보는 크리소스톰의 그것이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상들에 대한 그릇된 모방에서 온 것이다. 곧 그들은 아브라함, 야곱, 다윗과 같은 인물들이 동시에 한 아내 이상과 결혼한 것으로 읽으며, 따라서 그들에게도 그렇게 하는 것이 허용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한편 그것은 그들 주위의 백성들에게서 배운 부패 행위였다. 즉, 동양인들은 조금도 양심적인 자세나 신실성을 가지고 결혼생활을 하지 않았다. 어떻든 당시 일부다처제는 유대인 사회에 아주 만연해 있었으며, 감독에게 이런 오점이 없어야 한다는 바울의 주장은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성령께서 이 문제에 대해서 후에 일어난 악마적인 미신에 대한 예방 조치를 취하신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찬동할 수 없다. 이것은 바울이 '감독이 독신의 강요를 받을 수 없는 것은 결혼이란 모든 신자들에게 아주 적합한 상태이기 때문이다' 라고 이야기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것은 그들이 결혼해야 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 조금도 그 직무의 위엄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점을 전거하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부부간의 신의를 지키지 않는 부정한 사람의 상징인 일부다처제를 감독에게 금하는 것으로 보는 나의 해설이 더 간단하고 더 좋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모든 인간에게 죄악스러운 것을 꼭 감독의 경우에만 정죄할 것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제기될 수도 있다. 거기에 대한 해답은 간단하다. 그것이 특별히 감독에게 금지된다는 사실은 곧 다른 사람들에게는 자유롭게 허용된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느 경우에 있어서나 바울은 하나님의 영원한 법칙에 위배되는 것을 정죄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 아내와 연합 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라는 하나님의 경륜은 확정적인 것이다(창2: 24). 그러나 그는 감독들의 경우에 있어서 특별히 치욕스러운 것을 다른 사 람에게서는 어느 정도 용납했었는지 모를 일이다.
 
이것은 한 아내를 가진 사람이 두 번, 세 번 결혼할 수 없다는 것이 미래에 대한 법칙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바울은 단지 과거에 그런 실수에 대한 죄가 있는 사람들을 감독단으로부터 배척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미 저질러진 일과 교정될 수 없는 것은 참을 수 밖에 없지만,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반 백성에게 국한된 이야기이다. 거기에 대해 무슨 대책이 있을 수 있겠는가? 유대사상 밑에서 일부다처제에 빠진 사람들이 그들의 둘째, 세째 아내와 이혼해야 했는가?  그러나 그런 이혼에도 잘못이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는 이미 나쁜 결과로 남은 것에 대해서는 덮어두고, 다만 그런 홈으로 얼룩진 자는 감독이 될 수 없다는 단서만 붙이고 있다.
 
"근신하며(soberminded; 온건한 마음을 지니며)" ;  에라스무스는 이 단어 를 '경성하는' 으로 번역하고 있다. 헬라어 ivndalcos(네-팔리오스)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다 있으므로 독자들은 마음대로 선택하기 바란다. Σωфρονα(소프로나)를 내가 온건한이 아니라 '절제하는' 으로 번역하는 까닭은 절제에는 온건보다 더 넓은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아담한 (orderly 예의바른) 사람이란 점잖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이다. 
 
"나그네를 대접하며" ;  이 손님 접대란 낯선 사람들에 대한 것으로, 이것이 초대 교회에 보다더 혼한 풍습이었던 까닭은 정직한 사람들이나 특별히 유명한 사람들은 주막에서 묵는다는 것이 수치스러운 일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은 사정이 다르지만 여러가지 이유에서 생각할 때 이것은 언제나 감독에게 아주 필요한 덕이 될 것이다. 더우기 신자들을 무참하게  박해하던 그 당시에 있어서는 많은 사람이 갑자기 거처를 옮길 필요가 있었으며, 감독들의 집이 은신처가 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공교회의 회원들이 상호간에 도움을 베푸는 것은 시대적 요청이었으며, 여기에는 손님 접대도 끼어 있었다. 만약 감독들이 다른 사람에게 이 손님 접대의 임무에 대한 길을 제시하지 않았더라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들의 본을 따라서 이 친절 행위를 소홀히 하고 맡았을 것이요, 결과적으로 가련한 망명객들은 절망 계속에 내던져진 처지에 놓였을 것이다.
 
"가르치기를 잘하며," ;  가르치는 일에 대해서는 디도서에서 매우 강조하고 있으며, 여기서는 다만 가르치는 기술이 간단히 언급되고 있다. 누구나 심오한 학문에 뛰어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며, 거기에는 가르치는 재능이 따라야 한다. 말주변의 결핍, 불충분한 정신적 능력, 또는 일반 사람들과의 충분한 접촉의 결여 때문에 지식을 자신 전 속에 가둬두고 있는 사람이 많다. 그런 사람일수록 옛 말대로 자신과 시인들에게 노래를 불러야 하며, 나가서-뭔가 다른 일을 해야 한다. 사람들을 다스릴 책임을 맡은 자에게는 가르칠 자격이 갖춰져 있어야 한다. 그리고 여기서 요구되는 것은 수다스러운 혀가 아니다. 달변이지만 그 속에 덕이 되는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사람들이 많다. 바울은 그보다도 하나님의 말씀을 그의 백성에게 유익하게 적용 할 줄 아는 지혜를 추천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교황주의자들이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의 원칙이 자신들에게 적용되지 않는 것으로 주장한다는 점이다. 나는 모든 내용을 일일이 열거하지는 않겠지만, 이 면에 있어서는 그들이 바울의 이 일에 무슨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일까? 그들에게는 가르치는 은사가 아주 하찮은 것이요, 천하고 흔한 것으로 배척하지만, 바울에게는 그것이 감독의 특별 관심이요, 으뜸가는 배려의 대상이었다. 모두 알고 있듯이 바울의 의도가 감독의 지책만 걸머진 채 말 못하는 벙어리 됨을 자랑으로 여기면서 오직 무대의 복장으로 성장하는 데만 신경을 쓰는 것과 얼마나 거리가 먼 것인지 모른다. 그들은 뿔모양의 갓, 귀금속 반지, 은십자가와 그밖의 시시한 것들이 교회의 영적 통치를 대신하는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러나 실제로 교회의 영적 통치는 사 람이 영혼으로부터 .떨어질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가르치는 일과 따로 떼 어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3.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no brawler; 언쟁하는 사람이 아니며)~~~~" ;  헬라인들은 단지 술 취함 뿐 아니라 무절제하게 술 마시는 모든 행위를 이 단어를 써서 표현했다. 과도하게 술을 마시는 것은 목사로서 어울리지 않음은 물론이며, 대개 더욱 더 흉한 일들, 가령 다툼, 어리석은 태도,부정, 기타 언급할 가치조차 없는 많은 일들을 결과로 가져오기 마련이다. 그러나 다음에 이어지는 대조법은 바울의 의도가 더 깊은 데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곧 그는 구타하는 자를 다투지 않는 자와 대조하고 있으며, 더러운 이익을 탐하는 자를 탐심이 없는 자와 대조하고 있는데, ∂παροινο (호파로이뉘스), 즉 술 마시는 자는 부드럽고 친절한 사람과 대조되고 있다. 술에 빠지며 난폭한 성격을 가진 남자들은 감독직에서 제외되어야 한다는 크리소스톰의 해석은 옳다.
 
그러나 구타하는 자를 혀로 상처를 입히는 자, 곧 중상모략이나 격렬한 비난에 잘 빠지는 자로 보는 그의 견해에 대해서는 찬성할 수 없다.  감독이 폭력을 사용하는 문제는 별 의미가 없다는 그의 논리를 내가 확신할 수 없는 것은 바울이 여기서 군인 사회에서 흔하지 만 그리스도의 종들에게는 아주 어울리지 않는 군대적인 난폭함을 일반적으 로 꾸짖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분쟁을 책임있는 권위의 행사로 해결하기보다는 주먹을 휘두르거나 일반을 매들기를 더 좋아하는 것이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일인가는 다들 알고 있는 바이다. 따라서 그의 구타자들이란 의미는 위협과 무사적인 행동으로 나오는 사람들이다.
 
"더러운 이를 탐하는(홈정역)" ;  이것은 모든 탐욕적인 사람들에 대한 표현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탐욕에는 사도가 여기서 언급한 이 비천함이 깔려 있다는 이야기이다. '부자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당장 부자가 되고자 한다' 고 주베날(Juvenal)은 말하고 있다. 그 결과 모든 탐욕스러운 사람들은 그들의 부정직하고 불법적인 이득 추구에 대한 증거가 공공연하게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전적으로 거기에 매달리고 마는 것이다. 이 악을 그가 돈에 대한 멸시와 대조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이 그 악을 바로잡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거듭 반복하지만 가난을 참을성 있게, 그리고 자발적으로 참지 못하는 사람은 .필연적으로 치사하고 더러운 탐심의 희생이 될 수밖에 없다.

 

그는 '구타자'를 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는 사람과 대조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관용하다'(gentle)란 술에 빠지는 것에 대한 반대말로서 해를 당할 때 침착하게 절제하는 마음으로 견딜 줄 알며, 많은 그것을 용서해 주는 사람, 모욕을 삼킬 줄 아는 사람, 지나친 엄격함으로써 타인에게 두려움의 대상이 되지 않으며, 자기가 마땅히 받을 것이더라도 지나치게 받아내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 사용되고 있다. 다투지 않는 사람이란 분쟁이나 입씨름을 피하는 사람이다. 이것은 그가 다른 곳에서도(딤후2:24)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라고 밝히고 있다.
 
"4~5절. 자기 집을 잘 다스려~~~~~" ;  감독이 인간의 일상생활에 대한 체험이 없어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훌륭하고 능숙한 가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요청하고 있다. 우리들이 제아무리 독신주의와 일상생활과 거리가 먼 철학적인 생활을 칭송한다 하더라도 현명하고 생각이 깊은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알고 있으며, 인간관계에 따르는 여러 임무에 충실한 사람이 교회를 다스리기에 훨씬 더 잘 훈련되고 .적합한 사람이라는 점을 자신들의 체험을 통해서 배워오고 있다. 다음 귀절에서 그는 자신의 가정을 다스릴 줄 모르는 사람은 하나님의 교회를 통치하기에 부적합하다는 말로써 이 점을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오늘날 숱한 감독들, 아니 자신의 게을러 빠지고 한가한 생활에서부터 마치 .동굴과 소굴에서 끌려나오듯 끌려나오는 거의 대부분의 감독들의 경우이다. 그들은 야만인과 같으며, 모든 인정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의 인준을 사고 있는 사람은 가정 문제에 있어서 재치있고 약은 사람이 아니라 자신의 가정을 건전한 규율로 다스리는 법을 익힌 사람이다. 그는 특별히 가장의 성격을 잘 드러내게 되는 자녀들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감독에게 방탕하고 치욕스러운 생활을 하는 자녀들이 있다는 것은 크나 큰 수치가 될 것이다. 그는 다음에 아내들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지만, 여기서는 가정의 가장에 국한하여 말하고 있다. 디도서 1장에서 그는 단정함의 의미를 설명하고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감독의 자녀들이 제멋대로 하거나 불 순종해서는 안된다는 점을 밝힌 다음에, 곧 이어서 그들이 방탕이나 무절제의 비난을 받아서도 안된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간단히 말해서 그의 의미는 그들의 행동이 모든 정숙, 온건, 그리고 단정함에 있어서 규모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보다 작은 것에서부터 보다 큰 것으로 논리를 전개하고 있는데, 자기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모든 백성을 통치할 수 없다는 점은 명백한 논리이다. 필수적인 특성의 결핍은 고사하더라도 자신의 가정 생활 때문에 멸시를 받는 사람이 백성들을 상대로 무슨 권위를 행사할 수 있겠는가?
 
"6. 새로 입교한 자도 말지니" ;  그 당시에 탁월한 능력과 학식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가지게 되었지만, 바울은 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고백한 직후에는 감독으로 삼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그것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그 까닭은 그런 개종자들은 대개 허영심이 많아서 오만과 야심에 곧장 휩쓸리기 쉽기 때문이다. 바울이 여기서 이야기하고 있는 내용을 우리는 우리 자신의 체험으로 확증할 수 있으니, 그것은 새신자들은 담대하고 성급할 뿐 아니라 마치 구름 위를 날 수 있는 것처럼 터무니없는 자만으로 들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서 그들의 기고만장한 생각들이 억제될 때까지 그들을 감독직에서 제외하는 데는 그러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마귀의 정죄~~~" ;  세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διαβ6λos(디아볼로스) 를 사단으로 보는 사람도 있고 중상자들로 보는 사람도 있다. 나는 전자를 택하는데, 그 이유는 iudicium이라는 라틴어가 중상모략의 뜻으로 쓰이는 경우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의 정죄를 긍정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소극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소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나는 여기에 동의한다. 그 이유는 그것이 위험을 강조하는 훌륭한 반 명제로 쓰이고 있으며, 이 경우 그 의미는 하나님의 교회 위에 세움을 받은 자가 자신의 교만으로 마귀와 같은 동일한 정죄에 빠지는 일이 없도록' 이라는 식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는 이것을 그런 사람은 마귀에게 자신을 정죄할 계기를 준다는 긍정적인 의미로 보는 견해를 배척하지 않지만, 크리소스톰의 번역이 더 진실에 가깝다.
 
"7. 또한 외인에게서도 선한 증거를 얻은 자라야 할지니~~~" ;  경건한 사람이 우리에 대해서 거짓말을 퍼뜨리려고 더없이 적극적인 불신자들을 자신의 정직성의 증인으로 삼아야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일는지 모른다. 사도의 의미는 외적인 행동에 관한 한 불신자들까지도 그가 착한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이 하나님의 모든 자녀를 이유없이 모략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의 사회에서 영예롭고 정직하게 행동하는 사람을 악한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바울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정직에 대한 인정 이다. 그 이유가 덧 붙여진 것은 그가 마귀를 정죄하는 그 정죄에 빠질까" 하는 뜻에서이다. 나는 이 문장을 그가 공공연하게 욕을 먹는 나머지 자신의 마음을 강팍게 하기 시작하며, 더욱 더 모든 종류의 사악, 곧 그로하여금 마귀의 올무에 빠지게 하고 말, 사악에 자포자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의미로 해석한다. 수치심이 없이 죄를 짓는 사람에게 무슨 소망이 남아 있 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