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디모데전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딤전4:5)

1. 성경 (딤전 4:1 ~ 5)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후일에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미혹하는 영과 귀신의 가르침을 따르리라 하셨으니 (1)자기 양심이 화인을 맞아서 외식함으로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2)혼인을 금하고 어떤 음식물은 먹지 말라고 할 터이나 음식물은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감사함으로 받을 것이니라 (3)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 (4)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거룩하여짐이라 (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그러나 성령이 밝히 말씀하시기를" ;  지금까지 그는 디모데에게 여러 가지 주제를 두고 용의주도한 충고를 해왔고, 여기서는 왜 그런 관심이 필요한가 하는 점을 밝히고 있는데, 그것은 거짓 선지자들이 와서 그들의 하찮은 고안을 신앙의 가르침으로 제시하고 성결을 외형적인 준수 사항의 문제로 전락시킴으로써 오직 유일한 합법적이고 영적인 하나님 예배를 흐려버릴 위험이 곧 다가올 것으로 성령께서 밝혀주시므로 여기에 대해서 대책을 강구하는 것이 옳았기 때문이다. 사실 하나님의 종들과 여기서 바울이 묘사하는 사람들 사이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있었다. 그 까닭은 인간이란 본능적으로 위선의 경향이 있으므로 사단은 여러 의식과 외형적인 것에 대한 준수를 통해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것으로 쉽게 설득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가르쳐주는 교사가 없지만 거의 모두가 각자의 ,마음속 깊이 가지고 있는 확신이다. 후에 이 오류를 완전하게 만드는 뜻에서 사단의 간계가 덧붙여졌는데, 그 결과 모든 세기에 걸쳐서 참 경건을 파괴하는 거짓 예배를 칭송하는 협잡꾼들이 있어 왔다.

 

이런 파괴에는 또 다른 수행원이 따르고 있으니, 이것 때문에 하찮은 문제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강요를 받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은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것을 스스로 곧 금지된 것으로 생각함으로써 하나님의 법칙을 어기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은 디모데를 통해서 에베소에 있는 교회뿐 아니라 전 세계의 모든 교회에게 거짓 예배를 소개하고 .새로운 법칙으로 양심을 옭아 맴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예배를 더럽히고 신앙의 순수한 가르침을 곡해하는 거짓 교사들을 경계할 것을 경고하고 있다. 이것이 특별히 우리가 명심하지 않으면 안되는 이 귀절의 실제 의미이다. 뿐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더욱 더_주의깊게 받아들이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는 먼저 이것이 성령의 확실한, 결코 희미한 데가 없는 예언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물론 그가 말하는 다른 모든 내용도 성령의 영감에 의한 것임에 틀림 없으며, 우리들이 항상, 그를 바로 그리스도의 도구로 알고 그의 말을 귀담아 들어야 옳지만, 그러나 이것은 너무 중대한 문제이기에 그는 특별히 그가 예언의 영에 의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말하지 않았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 두고자 했던 것이다. 따라서 이 엄숙한 보증을 통해서 그는 이 예언을 우리에게 강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명백하고 거기에는 아무런 모호성도 없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후일에" ;  당시에는 복음의 밝은 빛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어느 누구든 넘어지리라는 것을 아무도 예상할 수 없었다. :그러나 베드로는(벤후3:3) 거짓 교사들이 과거에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던 것과 마찬가지로 그들이 항상 그리스도의 교회를 어지럽힐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지금으로서는 복음의 가르침이 성행하고 있지만 그러나 '사단은 오랫 동안에 걸쳐서 좋은 씨앗을 가라지로 질식시키려는 노력을 쉬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 경고는 바울 자신의 시대에 있어서도 목사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순수한 가르침에 세밀한 주의를 기울이도록 하며, 그들이 속지 않도록 막는 데 있어서도 유용했다. 성령의 예언대로 정확하게 모든 것이 이루어지고 있는 오늘날에 있어서는  더욱 더 이것이 유용하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다가오는 위험에 대해서 그처럼 일찌기 경고할 정도로 그의 교회에 대해서 큰 관심을 갖고 계시다는 점을 특별히 주목해야겠다.

 

사단에게는 우리를 오류로 인도할 계략이 많으며, 그는 무수한 이상한 술책으로 우리를 공격해 오고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속지 않고자 하는 한 우리에게 충분한 무장을 제공해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흑암이 빛보다 더 강력 하다거나 진리가 거짓에게 정복되고 있다는 것으로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으며, 다만 우리가 구원의 올바른 길에서 곁길로 인도될 경우에 우리 자신의 무관심과 무기력에 대한 벌을 받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자신들의 오류에 푹 젖어 있는 사람들은 바울이 여기서 어떤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지 결정하기가 어렵다는 반론을 제기한다. 이것은 성령께서 무의미하게 이 예언을 그처럼 오래 전에 발표하고 선언했다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의도하는 사람이 명백하게 지시되지 않고 있다면 현재의 경고는 쓸데없고, 우스꽝스러운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성령께서 우리를 이유없이 경고하거나 위험을 예고하실 때 그것에 대처할 방법을 우리에게 보이시지 않는 것으로 감히 생각하고 싶지 않다. 바울 자신의 말이 이 거짓된 불평을 반박 함에 있어서 아주 충분한 것으로 보는 것은 그가 우리에게 피하라고 경고하는 악을 손가락으로 꼬집어가며 지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단지 일반적으로 거짓 예언자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거짓된 가르침에 대한 명백한 예를 제시하고 있으니, 곧 이미 지적한 대로 경건을 외적인 의식에 있는 것처럼 대하면서 하나님의 영적 예배를 곡해하고 속되게 하는 교훈이다.

 

"어떤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 그가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대상이 교사들인가 듣는 자인가 하는 문제는 명백하지 않지만, 나는 그것이 후자에게 적용되는 것으로 보는데, 그 이유는 그가 이어서 교사들에 대해 다루면서 그들을 '미혹케 하는 영들'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불경건한 가르침을 전파하며 신앙의 순결성을 더럽히는 자들이 있을 뿐 아니라  '그들에게 그들의 파' 를 형성할 제자들이 결코 부족하지 않을 것으로 이야기함으로써 그 의미가 더욱 더 강조되고 있다. 이처럼 어떤 거짓말이 그 영향을 증대시킬 경우 그것은 더욱 더 큰 고통을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언 급하는 가르침이 언뜻 보기에는 하찮은 것 같고 별로 악이 없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이것은 더없이 무시무시한 악, 곧 '믿음으로부터' 떠나가는 것이다. 어떻게 믿음이 특정한 음식이나 결혼에 대한 금지로 완전히 전복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자기들 '멋대로 왜곡된 하나님 예배'를 고안해 내고 있다는 점과 하나님께서 허용하신 좋은 그것들을 이용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으로써 자신들이 양심의 주인이 되고자 주장한다는 점을 더 깊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예배의 순결성이 곡해되는 순간 어느 것도 더 이상 온전하거나 건전하게 남지 않으며, 신앙이 전적으로 파괴되고 만다. 따라서 교황주의자들은 외적 의식에 대한 그들의 횡포스러운 법에 대한 우리의 비판을 비웃지만, 우리는 더없이 중대한 문제를 다루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 예배가 그런 더러움으로 오염되기 시작하 는 순간 신앙의 교의는 파괴되고 말기 때문이다. 논쟁은 고기이냐 생선이냐, 검정색이냐 잿빛이냐, '수요일이냐 고금요일이냐'가 아니라! 그런 시시한 것들로 하나님의 은혜를 얻고자 하며 육적인 예배를 고안해 냄으로써 스스로를 위해서 하나님 자리에 우상을 만들어대는 자들의 광적인 미신이다. 이것이 신앙으로부터의 배도라는 점을 부정할 사람은 누구인가?

 

"미혹케 하는 영~~~~~~" ;  이것은 선지자 또는 교사들을 뜻하는데, 그가 이런 명칭을 사용한 것은 그들이 성령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떠들어 대며 백성들에게 고자세를 취하기 때문이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어떤 영의 자극을  말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을 .자극하는 것은 동일한 영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때때로 사단은 속아 넘어 갈 만한 불신자들을 속이려고 거짓 선지자들의 입에 거짓말하는 영으로 들어 있는 경우가 있다(왕상22 21~23). 그러나 바울은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않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 12 : 3)라고 말한다. 이러한 말의 근원을 우리는 하나님의 종들의 모든 공적 발언이 하나님의 계시에 의해서 그들에게 왔다는 주장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그들에게 '성령의 명칭 이 허용된 것은 그들이 성령의 도구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후대에 와서 사 단의 하수인들이 원숭이처럼 흉내를 내면서 스스로 동일한 주장을 하기 시 이유에서 작했으며, 마찬가지로 동일한 명칭을 사칭하게 되었다. 바로 이런 요한은 "영들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인가를 시험하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의 의미를 더 자세히 바울은 귀신의 가르침 설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거짓 선지자들과 그들의 악마적인 가르침에 주의 다름없다. 인간들의 양심이 인간적인 고안물들로 속박을 받 하라'는는 말이나 하나님의 예배가 왜곡될 경우 ,이것은 결코 작은 오류가 아니 으며, 동시에 요, 그냥 넘겨버릴 성질의 것이 아니다.

 

"2. 자기 양심이 ~~~거짓말하는 자들이라" ; 이 귀절이 악마와 관련된다면 악마의 충동에 따라서 그릇되게 말하는 사람들과 관련될 것이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사람들의 위선을 통해서 라는 말을 보충할 수도 있다.  그는 특별한 예를 들면서 그들이 위선에 빠진 채 거짓말을 하며 '자신의 양심 마치 뜨거운 쇠 같은 것으로 낙인 찍혀 있다' 는 점을 지적한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가 명심할 점은 이 둘은 모두 전자가 후자에서 발생한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악한 행동에 대해서 뜨거운 쇠로 낙인을 받은 나쁜 마음은 항상 손쉬운 피난처로서 위선을 찾기 마련이다.  곧 그들은 위선적인 구실을 고안해 내서 하나님의 눈을 속이려 하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가공적인 외형적 의식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하려고 발버둥치는 자들이 범하는 잘못이다. 따라서 위선이라는 단어는 본 문맥과 관련해서 이해하 지 않으면 안된다.

 

먼저 그것은 몸짓으로 하나님의 영적 예배를 대치하며, 따라서 그것의 순결성을 더럽히는 그런 종류의 교의와 관련되기 마련이다. 다시 말해서 거기에는 하나님과 화해하고 그의 호의를 사겠다고 인간들이 고안하고 꾸며낸 모든 방법이 포함된다. 그의 의미를 요약하자면 이런 식이 될 것이다. 곧 첫째, 날조된 성결을 도입하는 자들 모두가 마귀의 사주에 따라서 행동하는 것임은 하나님께는 단지 외적인 의식에 의해서만 결코 올 바르게 예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참된 예배자들은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 배하는 자가 신령과 진정으로예배할지니라"(요4:24). 둘째, 외적인 예배 는 위선자들이 고통을 누그러뜨리려는 속셈으로 사용하는 효과없는 약이다. 아니, 자신의 나쁜 마음이 그들의 상처를 은폐하는 데 쓸데없이 붕대를 감 아주는 것과 같으며, 그러한 경우 그들에게는 더 큰 파멸이 있을 뿐이다

 

"3. 혼인을 금하고" ;  거짓된 가르침에 대해서 일반적으로 이야기한 다음 에 그는 여기서 그것에 대한 두 가지 특수한 예를 들고 있는데, 혼인과 특 정한 음식에 대한 금지가 그것이다. 이것의 기원은 참된 성결을 포기하고 미봉책으로서 다른 무엇을 찾는 위선이다. 다시 말해서 이기주의, 증오, 탐욕, 잔인성, 그리고 그와 같은 것을 삼가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님께서 이미 자유롭게 허용하신 것들을 삼가함으로써 스스로 의를 획득하고자 발버둥친다는 말이다. 사람의 양심이 그러한 법으로 짓눌려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떠나서 완전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직 위선자들만 하는 짓으로서 율법이 요구하는 내적인 의를 벌을 받지 않은 채 마음껏 범해 보겠다는 마음이므로 자신들의 내적인 사악을 마치 휘장처럼 감싸는 저 외형적인 의식으로 감추려고 발버둥치고 있다.

 

이것은 성령께서 그처럼 명백한 경고를 주실 때 귀담아 듣기만 했다면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었을 위험에 대한 분명한 예언이다. 그러나 사단의 흑암이 전반적으로 팽배했기 때문에 이 뚜렷하고 엄연한 예고의 빛이 아무 소용 없게 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도가 죽은 지 얼마 안되어서 곧 '엔크 라티스파' 이 명칭은 절제라는 헬라어에서 온 것이다. 타티아누스파, 카다리파, 몬타누스와 그의 파, 그리고 마침내 마니교가 일어났는데, 이 맨 마지막 파에서는 고기 먹는 것과 혼인을 혐오하고 그것들을 속된 것으로 정죄했다. 물론 그들은 타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견해에 따르게 하려던 오만 때문에 교회에서 내어쫓김을 받았지만, 여기서 명백한 점은 그들을 반대하는 사람까지도 필요 이상으로 그들의 오류에 굴복했다는 점이다. 내가 여기서 언 급하고 있는 그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나의 법을 부과할 의사가 없 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그들은 혼인을 피하고 고기를 먹지 말라는 것 들의 미신적인 준수 사항에 너무 큰 의미를 부여했었다.

 

하나님께서는 마치 그가 육적이라는 듯이, 육적인 방법으로 예배될 수 있다는 식으로 상상하는 것이 세상의 특성이다. 사태가 점차적으로 악화된 나머지 횡포가 기정 사실로 확립되고, 그에 따라서 사제나 수도사가 결혼하거나 누구든지 어떤 특정한 1날에 고기를 먹는 것이 합법적이 아니라는 등의 말이 나돌게 되었다. 따라서 우리가 얼마든지 오늘날 이 예언이 교황주의자들에게 적용되는 것 으로 주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의 어떤 계명을 지키는 것보다도 독신과 음식 금지를 더욱더 엄격하게 명령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바울의 말을 :타티아누스파나 마니교 등에게 잘못 적용함으로써 이런 비난을 모면할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것은 타티아누스파에서 동일한 방법으로 바울 의 정죄를 카타프리기안파와 그 원조 몬타누스에게 적용함으로 그것을 피할 수 없었다거나, 카타프리기안파에서 자기들 자리에 엔크라티스파를 죄 있는 당사자로 쉽게 끌어들일 수 '없었다는 이야기와 다름없다. 그러나 여기 서 바울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이 고수하는 견해를 두고 말하고 있으며, 수 백 가지의 파가 제시된다고 하더라도 그들 모두는 음식을 금하는 동일한 위 선에 빠져 있으므로 하나같이 정죄받을 수밖에 없다. 따라서 교황주의자들 이 옛날 이단자들을 그들만이 바울의 정죄의 대상이라는 식으로 제시하는 것은 공연한 짓이다. 우리는 그들도 마찬가지로 동일한 방법으로 죄에 빠져 있는가 아닌가 하는 점에 대해서 관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그들은 혼인과 음식을 전적으로 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특정한 날에만 고기를 금하고, 수도사 사제; 그리고 수녀들에게만 독신의 서원을 요구하고 있다는 점에서 엔크라티스파와 마니교와 다른 것으로 주장한다. 그러나 이것이 황당무계한 변명인 것은 그들이 성결은 바로 이것으로 이루어진다고 여기며, 거짓되고 허구적인 하나님 예배 형식을 세우고 인간들의 양심을 그들이 자유로와면 마땅한 규정으로 강제로 동여매기 때문이다. 유세비우스의 제5권에 보아폴로니우스 글의 단편이 나오는데, 거기서 그는 다른 무엇보다도 몬 타누스가 그는 혼인을 파기하고 금식에 대한 규정을 제시한 것을 비난하고 있다. 간의 자기가 전반적으로 혼인과 음식을 금한 것으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인 수 마음에 이런 사항을 지키고, 이런 것들을 통해서만 하나님을 예배할 있다는 의무감을 부과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반적으로나 특수한 경우에 있어서나 자유로운 것들을 금하는 것은 항상 악마적인 횡포이다. 이 문제는 음식에 관한 한 다음 귀절에서 더욱더 명백하게 드러 날 것이다

 

"하나님이 지으신 바니" ; 우리는 하나님께서 음식 사용 문제에 있어서 우리 에게 허용하신 자유로 만족해야 하는 이유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음식을 이 목적으로 지으셨기 때문이다. 경건한 사람들이 먹 는 모든 음식이 주님께서 그들의 손에 쥐어주신 것이요, 따라서 그것들을 즐기는 것이 잘못이 아니라 아주 적합한 것이라는 점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더없는 큰 기쁨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거저 베풀어주신 것을 어떻게 인간들이 감히 제거하려 하는가?? 그들이 음식을 짓기라도 할 수 있단 말인 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만드시는 것을 무효로 돌릴 수 있단 말인 가? 그러므로 음식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또한 우리가 그것을 자유롭게 즐기도록 허락하셨으며, 인간들이 그것을 금하려 하는 것은 공연한 짓임을 항상 명심하도록 하자.

 

하나님께서 음식을 지으신 것은 '받아들여지도록', 곧 우리가 그것을 즐 기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감사함으로 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 까닭은 우리가 하나님의 후덕하심에 대해서 드릴 수 있는 유일한 보상이 우리의 감사의 증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바칠 것을 요구하는 찬양의 제사를 어떤 색다르고 경솔한 법 시행 으로 방해하는 자들을 더없이 혐오의 대상으로 폭로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유순함과 온건함이 없이는 감사가 있을 수 없으며, 하나님의 자비를 악하게 남용하는 자는 그것을 제대로 인정할 수 없다.

 

"믿는 자들과 진리를 아는 자들이~~~~" ;  그러나 이것은 왜 그런가'? 하나님께 서는 선인과 악인 모두에게 날마다 해를 비춰주시지 않으며(마5 땅이 그의 명령에 따라서 경건한 자들을 위해 식량을 산출한다지만, 가장 악독한 인간들도 그의 혜택을 받고 있지 않는가? 물론 다윗이 시편 104편 14절에 서 묘사하는 일반적인 축복도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여기서 바울의 주제 는 합법적인 함유와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확신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것을 악인들이 누릴 수 없는 것은 디도서 인장15절에 있는 대 로 모든 것을 오염시키는 그들의 불순한 양심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엄 격히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온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오직 그의 자녀들만을 위해서 정하셨으며, 바로 이런 이유에서 그들은 또한 이 세상의 상속자라는 말을 듣고 있다. 다시 말해서 맨 처음에 아담은 그가 하나님과

 

의 관계에서 순종한다는 조건으로 만물의 주인으로 임명받았었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그의 반역 때문에 그는 자신과 후손에게 부여되었던 이 권리 를 박탈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만물은 그리스도에게 복종하는만큼 우리 는 그의 선하심을 통해서 우리의 권리를 전적으로 회복받고 있지만, '이것은 오직 믿음을 통해서일 기뿐이다. 따라서 불신자들이 누리는 모든 것은」그들이 남의 것을 훔쳐내고 노략질해서 갖는 것이나 마찬가지로. 볼 수 좋았다.- 마지막 소절에 가서 그는 신자들을 건전한 가르침을 알고 있는 자로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는 믿음이 있을 수 없기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교황주의자들이 하는 것처럼 산신앙을 혼란스러운 견해인 것으 로 잘못 생각해서는 안되겠다.

 

"4. 하나님의 지으신 지으신 모든 것이해 선하매~~~~" ;  음식이 어떻게 사용되는가 하는 문제는 그것이 어떤 음식인가에 -달려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먹는 사람의 특성에 달려 있다. 사도는 원인을 언급하고 있다. 그가 음식에 대해서 순전한 것으로 선언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것을 창조하셨으며, 그것의 용도가 신앙과 기도에 우리에게 거룩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가 언급하는 피조물의 선함은 인간들과도 관계되는데, ,그들의 몸이나 건강뿐 아니라 그들의 양심과도  관계되는 것이다. 내가 이 점을 밝히는 것은 이 구절의 목적과 아무 관계도 없는 공연한 호기심에 찬 상념을 막는 뜻에서이다. 한 마디로 바울의 의도는 하나님의 손으로부터 우리에게 오는 모든 것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불결하거나 오염되지 않은 우리를 위 한 것이라서 우리는 선한 양심으로 자유롭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흑, 율법시대에는 불결한 것으로 선언되었던 짐승들이 많았으며, 선악을 알게 하는 죽음을 가져오지 않았느냐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 거기에 대한 대답은 피조물들이 깨끗한 것으로 이야기 되는 것은 하나님의 작품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것들이 하나님의 축복과 우리에게 허용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주시는 나무의 열매는 인간에게  정하심, 곧 그가 함께 명령하시는 것과 금지하시는 이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으면 안된다.  

 

"5, 거룩하여짐이니라" ;  감사함으로 '받아들인다''는 귀절에 대한 보충이다.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은 반대되는 것이므로 .이것은 반대 개념에 입각한 논리이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의미하는,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모든 종류의 선한 것들에 대한 성화가 무엇인가 살펴보지 안되겠다. 그는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이루어지는 것으로 밝히고 있지만, 우리는 말씀이 우리에게 유익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그 말씀을 이해하는 데 믿음이 필요하다는 점을 또한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친히 그의 입의 영으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지만, 우리는 이 성화의 축복을 오직 믿음으로만 받는다는 말이다. 여기에 기도가 덧붙여지고 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명령에 따라서 일용할 양식을 구할 뿐 아니라, 그의 선하심에 대해서 감사를 올리기 때문이다. 바울의 가르침은 어떠한 좋은 것이든 그것이 정당하게 우리의 것이라는 양심의 증거가 따르지 않는 한, 그것에 대한 합법적인 소유가 불가능하다는 원칙에 입각하고 있다.

 

이 땅이 우리의 기업이라는 점을 하나님 말씀에 의해서 우리가 확신하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감히 쌀 한 톨이라도 자신의 것으로 주장 할 수 있겠는가? 일반 상직으로 볼 때는 이 땅의 부요함이 자연히 우리의 용도인 것으로 보이겠지만, 그러나 이 세계에 대한 우리의 지배권은 아담 안에서 박탈된 만큼 하나님께서 은혜롭게 우리를 도우시고 그의 아들의 몸으로 병합해 주심으로써 새로 우리를 지상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시기 전에는, 그 결과 우리들이 하나님께서 공급하시는 모든 재물을 합법적으로 우리 자신의 것으로 누릴 수 있게 되기 전에는 우리가 만지는 모든 하나님의 선물은 우리 자신의 오염으로 더럽혀지면, 그 선물은 선물대로 우리에 대해서 불결한 그대로 남아 있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이 정당하게 누리는 문제를, 곧 우리로 하여금 아담 안에서 상실되었던 것을 되찾게 함에 있어서 유일한 방편이 되는 이 말씀과 관련 시키는 것은 당연하다.

 

다시 말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상속자들이 되려면 먼저 하나님을 우리의 아버지로 시인해야 하며, 모든 그리스도의 것들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게 하려면 그리스도를 우리의 머리로 시인해야 한다는 말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모든 선물의 사용은 먼저 거기에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참된 지식과 간구가 따르지 않을 경우는 부정하며, 한 마디의 기도도 없이 시탁에 않거나 배불리 먹고나서 하나님에 대한 아무 생각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은 오직 야만적인 짐승들에게나 적합한 식사법이라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리고 썩을 수밖에 없는 일반 음식에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그 정도의 성화가 필요하다면 영적 성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야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성례전 식탁과 일반 식탁에서의 기도(blessing)의 차이점을 구별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우리가 신체를 육성하는 일상 음식에 대한 감사기도를 드리는 것은 그것을 정당하고 아무런 불결함이 없이 받기 위해서이지만, 성만찬에서 보다 더 엄숙하게 떡과 포도주를 성별하는 것은 그것들이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몸과 보혈의 보증이 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