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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도서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디도서3:5)

1. 성경 (딛3:1 ~15 )
 너는 그들로 하여금 통치자들과 권세 잡은 자들에게 복종하며 순종하며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준비하게 하며 (1)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을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 (2)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3)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4)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5)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그 성령을 풍성히 부어 주사 (6)우리로 그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7)이 말이 미쁘도다 원하건대 너는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 이는 하나님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조심하여 선한 일을 힘쓰게 하려 함이라 이것은 아름다우며 사람들에게 유익하니라 (8)그러나 어리석은 변론과 족보 이야기와 분쟁과 율법에 대한 다툼은 피하라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헛된 것이니라 (9)이단에 속한 사람을 한두 번 훈계한 후에 멀리하라 (10)이러한 사람은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 스스로 정죄한 자로서 죄를 짓느니라 (11)내가 아데마나 두기고를 네게 보내리니 그 때에 네가 급히 니고볼리로 내게 오라 내가 거기서 겨울을 지내기로 작정하였노라 (12)율법교사 세나와 및 아볼로를 급히 먼저 보내어 그들로 부족함이 없게 하고 (13)또 우리 사람들도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필요한 것을 준비하는 좋은 일에 힘 쓰기를 배우게 하라 (14)나와 함께 있는 자가 다 네게 문안하니 믿음 안에서 우리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너도 문안하라 ○은혜가 너희 무리에게 있을지어다 (1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너는 저희로 하여금~~~~~예비하게하며" ;  여러 귀절을 종합해 볼 때 사 도들은 일반 백성으로 하여금 행정관들과 군주들의 권위에 복종하도록 하는 문제에 있어서 고심하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천성적으로 제왕의 권력을 갈망한다. 따라서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굴복하지 않으려 한다. 더구나 당시에는 실제적으로 모든 세상의 권력이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은 이 모든 것을 전혀 존경을 받을 수 없는 것으로 여겼다. 그 중에도 특별히 유대인들은 한 사람들로서 계속 반항적이었다. 따라서 바울은 특별한 임무를 제시하고 나서 일반적인 권고를 하고 있는데,  그 내용은 그들이 조용히 국가의 질서를 존중하고 법률을 지키며 위정자들에게 복종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점을 말하고 있다. 군주들에 대한 복종과 행정관들에 대한 순종이라는 말 속에는 칙령, 법률 및 기타 국가의 의무가 포함되어 있다.
 
"모든 선한 일 행하기를 예비하며"라는 말도 동일한 주제로 생각할 수 있다. 곧 그의 말은 선하고 정직하게 사는 것을 싫어하지 않는 자들은 모두 행정관들에게 자발적으로 순종할 것이다"하는 식이다. 그들은 인간 생활의 보호를 위해 임명된 사람들이므로 그들을 제거하고자 하거나 그들의 명에를 벗어버리려 하는 자는 공평과 정의의 원수요 모든 인간성이 결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을 다음 귀절과 연결해서 읽지 않는다 해도 나는 반대 하지 않겠다. 이 본문에서 그는 틀림없이 우리의 전 생애에 걸쳐서 우리 이웃에게 친절하게 나올 것을 권하고 있다.
 
"2. 아무도 훼방하지 말며" ;  이제 그는 어떻게 그들이 모두 함께 화평과 우정을 다질 수 있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자신보다 남을 깔보는 것이 우리의 천성이요, 따라서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신 은사를 뽑내는 가운데 형제를 멸시하게 되고 이 멸시는 곧 모독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이 제 아무리 남보다 우월하더라도 남에게 뽐 내는 것을 삼가라고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물론 불경건한 자들의 잘못을 눈감아 주라는 말은 아니다. 그는 중상 모략의 성향을 정죄하고 있을 뿐이다.
 
"다투지 말며~~~~~~" ; 이 말로써 그는 사실상 분쟁과 다툼을 피하는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벌케이트역은 이것을 다투지 말며라는 말로서 잘 번역하고 있다. 싸움에는 칼과 주먹이 아닌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기 때문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말을 읽어 보아도 이것이 그의 요점이라는 점은 명백하다. 그가 내리는 처방은 모두에게 친절하고 온순하게 대하라는 것이기 때문이다. 친절은 법률의 가혹성과 대조되는 것이요, 온순은 빈정댐과 대조되는 말이기도 하다. 우리가 무슨 종류의 싸움과 분쟁이든 피하려면 무엇보다도 보다 많은 문제에 있어서 관용을 베풀고 보다 많은 문제를 용서해 주는 법을 몸에 익혀야 한다. 극심하게 가혹하거나 까다로운 사람은 항상 분쟁의 불을 붙이는 불씨를 몸에 지닌 사람과 같다. '모든 사람에게'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제 아무리 천하고 낮은 사람이라도 우리는 너그럽게 .대해야 한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신자들은 불경건한 사람들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관용의 대상이 될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기에 바울은 그런 생각의 근원은 교만인 만큼 그러한 가혹성을 교정하고자 하는 것이다.
 
"з.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  우리가 남에게 퍼붓는 욕이 우리 머리 위에 다시 떨어질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해 보여 주는 것보다 더 우리의 교만을 억제하고 우리의 가혹성을 완화시키는 것도 없다. 자기 자신이 용서를 빌어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사람은 남을 용서하기가 수월하며 우리가 우리 형제들을 용서하지 않으려는 유일한 이유는 우리의 잘못에 대한 무지이다. 하나님에 대한 열정으로 불타는 자들은 사실 죄인들에게는 가혹하지만 그러나 그들은 먼저 자신을 상대로 시작하기 때문에 이 가혹성에는 항상 동정이 섞일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바울은 신자들이 아직도 무지와 눈먼 상태에 사로 잡혀 있는 자들을 가혹하고 비 인간적으로 조롱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그들이 과거에 어떠한 사람이었는가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아직 신앙의 빛을 허락하지 않은 사람들을 그처럼 잔인하게 취급한 것으로 말하면 너회들도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했어야 할 때가 있었지 않느냐. 그 당시 너희들도 누구 하나 자신들에게 불친절하게 나오는 것을 원치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동일하게 남에게 온건한 태도를 보이라" 하는 식이다.

 

바울의 이 말을 우리는 두가지 면에서 적용할 필요가 있 다. 첫째는 지금 주님으로부터 일깨움을 받고 있는 자들은 자신들의 과거의 무지를 회상하고서 겸손해야 하며 남들에게 교만하게 군다거나 그들이 그런 상태에 있을 때 남들이 자신들에게 취급해주기를 바라는 이상으로 다른 사람을 가혹하게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점이다. 둘째는 자기들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오늘날 교회 밖에 있는 자들도 내일은 교회에 접붙여질 수 있다는 점을, 그리고 그들이 잘못을 바로잡고 지금은 그들에게 없는 하나님의 은사를 누릴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는 점이다. 신자들에게 있어서 우리는 이 두가지 일이 일어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과거에는 흑암이었지만 후에는 주님 안에서 빛이 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자신들의 과거의 상태를 생각하고서 동료의식 (쉼파데이아; σνμπ&θαα)를 느껴야 하며 자신들에 대한 하나님의 현재 은혜는 남들도 구원을 받을 수 있다는 증거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겸손히 낮추는 가운데 형제들을 온순하게 대해야 마땅하다.  교만이란 언제나 잔인하며 모든 사람을 깔보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온순하게 지나올 것을 권하는 다른 귀절(갈 6 ::1)에서 그는 우리 각자에게 자신의 연약성을 생각하라고 당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우리가 이미 구출받았지만 한 때 빠져있던 잘못을 생각하고 아직 남들에게 있는 잘못을 너무 가혹하게 꼬집지 말 것을 권하고 있다.  더구나 바울이 묘사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영이 개조하기 이전의 인간성에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난 우리가 얼마나 비참한가를 알 수 있다.

 

먼저 그는 불신자들을 가리켜 어리석은 자라고 부르고 있는데 인간의 모든 지혜란----그가 하나님을 모르고 있는 한----허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불신자들을 가리켜 '순종치 아니한 자' 라고 :말하고 있는데 오직 믿음만이 하나님께 진정한 순종이요, 불신앙은 언제나 교만하고 반항적이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 '아페이데이스'를 '믿지 않음'으로 해석해서 어리석은 면을 묘사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세째 그는 불신자들을 가리켜 '속은 자'라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길과 진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된 자들은 전 생애에 걸쳐서 배회할 수 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불신앙의 성격이지만 이제부터는 거기서 연유하는 결과이다. 곧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악독과 투기로 지낸 자이다. 물론 각 개인이 모두 동일하게 이런 잘못을 범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분야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는 악한 욕망의 노예인 만큼 바울은 불신앙이 각각 다른 사람들에게 야기시키는 모든 열매를 일반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이 문제는 로마서 1장 마지막에서 설명되고 있다. 바울은 이런 특징을 가지고 하나님의 자녀와 불신자를 구별하고 있는 만큼 우리가 신자 취급을 받으려면 마음으로부터 모든 질투심을 제거하고 모든 악의에서부터 자유롭게 되고 상호간에 사랑을 주고 받아야 한다.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묘사하는 다양한' 욕망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된다. 육신적인 인간을 괴롭히는 욕망이란 부서지는 파도처럼 그 사람을 이리 저리로 내동댕이치며 결과적으로 그런 사람은 순간적으로 변하고 만다. 육적인 욕망에 자신을 내던지는 사람이 모두 이런 동요를 면할 수 없는 것은 하나님 경외를 떠난 곳에는 안정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4~7절에 대하여)
이 문장에서 주절을 찾는다면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우리를 구원하셨다' 는 귀절이거나, 아니면 그것이 제대로 형식을 갖추고 있지 않거나 둘 중에 하나이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새롭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자비를 베푸셨기 때문이다'는 말이 된다.이것은 마치 또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너희들을 중생시키실 때 너희들은 남과 다르게 되기 시작한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바울의 말은 있는 그대로 의미가 통하므로 여기에 무엇을 더 보충할 .필요가 없다. 자신을 남들과 같은 위치에 두는 것은 그의 권면이 더욱 효과적이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4.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을 나타내실 때에~~~~~" ; 먼저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나타나신 그때 비로소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맨 처음부터 조상들은 하나님의 인자하심, 자비, 은총을 체험했으며 따라서 이것이 우리에 대한 그의 인자하심과 아버지로서의 사랑에 대한 첫번 계시는 아니기 때문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율법시대의 조상들은 그리스도를 향해 .바라 봄으로써만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볼 수 있었으며 그들의 모든 믿음은 그의 오심에 의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그가 그 인자하심에 대한 확실한 보증을 제시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그렇게 자주 약속하신 구원은 헛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실제로 입증하신 때에 비로소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셨기에 독생자를 주셨으며 (요 3: 16), 또 바울이 다른 데서 말하는 대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하나님은 만대에 걸쳐서 인자한 아버지이시라는 점을 우리는 알고 있지만, ,성경은 세상이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하나님과 화해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상례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를 떠나서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사랑의 이유와 우리 구원의 근거를 찾을 수 없음으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그의 인자하심을 나타내 보이셨다 고 말하는 것도 당연하다.
 
여기서 바울이----우리가 흔히 말하는 대로----그리스도께서 인간으로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드러내신 그리스도의 계시를 말하지 않고 특수한 방법으로 선택받은 자들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복음을 통한 계시를 말하는 데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초림 때 개종한 사람이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영광 가운데 부활하시고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는 구원이 유대 전 지역뿐 아니라 인접 국가에까지 확대되고 있었지만 그 때 바울은 불신에 눈이 가리워진 나머지 온 힘을 다 쏟아 이 은혜를 말살하려고 기를 쓰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여기서 당시의 사람들을 무분별하게 모두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특별히 다른 사람들과 구별된 사람들을 두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과거에는 그들이 지금 흑암 속에서 버둥거리는 사람들과 같은 불신자였지만 이제는 그들이 불신자와 다른 것은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다라는 말과 같다. 고린도전서 4장 7절에서 그는 모든 육신적인 교만을 꺾기 위해서 동일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누 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또는 너를 남보다 더 존경받게 한 사람이 누구인 가 ? 하는 말이 곧 그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라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에 의해 중생되기까지는 우리는 아무 것도 못하고 죄만 지을 뿐이리는 뜻이다. 이 부정적인 진술은 그리스도 안에서 아직 개조되지 않은 사람들은 어리석으며 불순종적이고 각양 정욕에 이끌리고 있다는 앞서의 확언과 관련 된다. 이런 타락의 무더기 속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오기를 바라겠는가?
 
그러므로 인간이 소위 사말하는 자신의 준비물을 가지고 하나님께 접근할 수 있다는 것이야말로 정신 착란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자 신의 손으로 이끌어 그들의 방황을 하나님의 길로 인도하여 주시기 전까지 는 그들은 일생을 통해서 계속 유리 방황할 뿐이다. 한 마디로 바울은 남 들에 비해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참여하도록 선택받은 것은 완전히 하나 님의 자비의 덕으로 돌리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에게는 전혀 의로운 행위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가 믿기 전에 시도한 모든 것은 하나님께서 보사기에 불의하고 가증스런 것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에는이 논리가 성립될 수 없 을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동사가 과거 시제로 되어 있다는 점을 핑계삼아 하나님께서 인간을 부르실 때 그는 인간의 장래 공로를 염두에 '두고 있다는 식으로 변론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 푸심에 있어서 우리의 공론에 의존하지 않는다는 바울의 주장은 과거에만 해당한다는 이야기이다. 따라서 여기서 배제되는 것이 하나님의 부름 이전의 의()라면 장래 의는 고려해 볼 수 있다는 주장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바 울이 거저 베푸신 은혜에 의한 선택만이 선행의 기초라고 말함으로 극구 부 정하는 원리이다. 우리가 선하게 살게 된 이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 혜 때문이라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장차 행위를 내다보실 필요가 무엇이겠는 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시기 전에는 온통 불의가 판을 예상하시고 |부르실 소바울이 과거 행위를 차치고 있었는데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의 장차 있을 의를 수 있었겠는가 ?

 

시시한 소리는 이 정도로 접어 두자: 언급한 것은 모든 공로를 배제하는 뜻에서이다. 그의 의미는 무슨 공로를 내세우려 하지 만 우리의 과거 행위가 무슨 꼴이었던가??'하는 식으로 다시 표현할 수도 있 다. 하나님께서 그의 부르심에 의해 .인간들을 바로 잡아주시기 전에는 장래 역시 과거보다 더 나올 리 만무하다.
 
"중생의 씻음과" ;  이것은 세례에 대한 언급으로 본문 전체를 세례의 면에서 설명하는 것에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물론 이 말은 구원이 물이라는 외형 적인 상징을 통해 확보된다는 뜻이 아니고 세례가 그리스도에 의해 확보된 구원을 우리에게 보증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여기서 신앙을 통해 나타나게 '자비하심'과 '사랑'이란 말에서 그는 먼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 는 인자하심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잘한 일이다. 소우리 속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만한 것이 전무()하지만 하나님께서 소우리를 .사랑하시는 것 은 그가 인자하시고 자비롭기 때문이다. 또한, 하나님은 자신이 모든 인간에 대한 그의 인자하심과 사랑의 증인이시지만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이 자신을 우리의 아버지로 선언하실 때에만 ,이것을 믿음으로 알게 된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신앙으로 부름받기 전에 수많은 하나님의 .은사를 누렸던 사 람인 만큼 여기에서 하나님 아버지로서의 인자하심을 맛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릴 적부터 율법을 배워 .온같은 사람이다. 그렇지만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일깨워 주시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이것은 그리스도 가 우리에게 없다면 우리와 무관하게 되었을 것이다 에 대한 중인과 보증으 로 나타나시기 전에는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무엇인지 모를 정도로 흑암 속에, 묻혀 있었다. .따라서 하나님의 인자하심 신앙의 ,빛을 통해서 만 계시되었다는 것이 그의 의도이다.
 
"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의~~~~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  그는 .신 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우리가 도이미 -구원을 받았다는 점을 가르치고 있다. 따라서 우리가 죄에 얽매여 있기 때문에 사망의 몸을 끌고 다니지만 우리가 신앙으로 그리스도에게 접붙여져 있기만 하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확신할 수 있다. 그러기에 요한은(요 5_:24)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자는 사망에 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라고 기록하고 있다. 조금 뒤에 가 보면 그는 신 앙이라는 말을 소개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위해 확보한 것 을 우리가 아직 충분히 소유하지는 않고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따라 서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의 구원이- 완성되었지만, 우리가 그것을 '완전히 누 리는 문제는 우리의 싸움이 끝날 때까지 지연되고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우리가 "소망에 의해 구원 받았다"는 바울의 발견해 역시 이와 .동일하다(롬 8- 24).
 
바울은 여기서. 신자들을 상대로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 나라에 들어오게 되었는가를 묘사하고 있다. 그들은 결코 자신들의 행위로 구원에 동참할 자격을 얻은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자비에 의해서 믿음으로 하나님께 화 해되는 이 축복을 얻었다는 점을 그는 선언하고 있다. 우리는 그의 말에서 우리가 하나님께 가져 오는 것은 아무 것도 없고 하나님께서 행위와 무관하게 그의 순수한 은혜를 앞세워 우리를 이끌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를 다루고 있다. 세례는 그것이 신앙을 확증한다 는 의미에서-이 계시의 일부이므로 바울이 그것을 여기서 언급하는 것은 옳다. 더구나 세례는 우리가 교회에 들어가는 입문이요 우리가 그리스 도에게 접붙여지고 있다는 상징인 만큼, 하나님의 은혜가 어떻게 우리에게 나타났는가를 설명하는 이 곳에서 세례를 소개하는 것은 적절한 일이다.

 

이 귀절의 사상을 이런 식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비에 의해서 우리를 구원하시고 세례를 통해서 이 구원의 상징과 보증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를 그의 교회로 받아들이시고 그의 아들의 몸에 접붙여 주셨다". 사도들은 세례가 상징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입증하고자 할 때 일반적으로 성례를 가지고 토론하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공허한 상징으로 우리를 속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외형적인 상징을 통해 내면적인 것을 그의 능력으로 성취 하고 있다는 점을 경건한 자들은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세례 를 가리켜 중생의 씻음이라고 발하는 것은 아주 적절하고 타당한 표현이 다. 우리가 상징이 무효화하지 않도록 상징과 상징되는 대상을 관련지율 때, 그리고 상징을 떠 받든다면서 성령에게 속한 것을 탈취하지 않을 때, 우 리는 성례의 능력과 용법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불경건한 사람들은 세례를 받아도 씻음을 받거나 새로 나지도 않지만 하나님에게 있 어서는 그 효력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를 배척하지만 그것은 여전히 그들에게 제공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 은 여기서 세례가 항상 효력을 발휘하고 있으며 세례의 실체와 효력이 항상 관련되어 있는 신자들을 상대로 얘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가 거룩 한 세례를 무효화하지 않으려면 그 세례의 능력을 새로운 생활로 입증해야 마땅하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 ;  하나님의 은혜를 우리에게 명확하게 이해시켜 주기 위해서 상징을 언급하고 있지만 그러나 우리가 온통 거기에만 신경을 쓰지 않도록 하려는 뜻에서 그는 성령을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를 셋 는 것은 물이 아니라 성령이라는 점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에스겔이 "그리고 내가 너희에게 깨끗한 물 곧 나의 영을 뿌려 주겠다"(36: 25,27)라고 말하 는 그대로이다. 바울의 말과 선지자의 말은 완전히 일치하며 동일한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래서 나는 처음에 바울이 성령 이야기를 하면서 세례를 언급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우리를 중생시키고 새로운 피조물로 만드는 이 는 하나님의 영이다. 그러나 그의 은혜는 눈에 보이지 않고 숨겨 있으므로 그것에 대한 눈에-보이는 상징이 세례인 것이다. 새롭게 하심'이라는 단어를 대격으로 해석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6.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사" ; 우리는 그 분 안에서만 입양받는다. 따라서 우리가 우리의 (입양의 담보요 증인인 성령에 동참하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를통해서만 가능하다. '바울은 야 귀절로써 오 직 그리스도의 지체된 자들에게만요. 중생의 영이 [허용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풍성하게" ;  이 말은 우리 각자가 더큰 ,온사에 있어서뛰어나면 뛰어날수 록 [각자는 그만큼 더 우리를 풍요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에우있어서 이빗진 자가 된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돌아[ 때 우리는 완 전히 초라하고 개선한 '것이 전무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아주 빈약하게 받는 사람도 있는 만큼 하나님의 자녀들이 모두그렇게 풍성한 자비를 받 아 누리는 것은 '아니라고 반박하는 사람이 있다면「그 대답은 것이것이다. 곧 못할 만큼 적은 것이라고 말할 어느 사람의 몫도 그에게 그 분량이 '풍성하지 수는 없는데, 그 이유는 성령께서 주시는 북북은 언제나 '홀러 넘치는 생물같 아서 결코 그 근원이 마르는 법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받은 몫이 제 아 무리 작아 보여도 그것은 결코 없어지는 그것이 아닌 만큼 원우리는 그것이 풍성 하다고 얘기할 수 있다.
 
'씻음'과 '성령'; 이 두 단어가 모두 중성: 명사인 만큼 이텔라어에서는 이 것이 [관계 대명사 하나에 연결되고 있지만 그 의미에는 전혀 :차이가 없다. 여기서 관계 대명사가 '씻음'과 연결되면 비유가 더≤적절하게 보일 것이다. 그렇게 볼 때 우리 모두가 풍성하게 씻음을 받았다는 그의 말은 상징 그 자 체가 아니라 상징이 나타내는 것, 그 상징의 실체를 두고 하는 말이므로 우 리 모두가 무분별하게 '세례받는 것으로 볼 수 없다.
 
"7. 우리로 저의 은혜를 힘입어 의롭다 하심을 얻어" ;  중생이란 말을 엄 격하고 정상적인 의미에서 생각한다면 여기서 사도가 '의롭다 하심을 얻다' 를 '중생하다'와 동일하게 만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어떤 때는 이것이 그 의미이기도 하지만, 그렇게 알쓰이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그러나 여기서 적절하고 보다 여자연스런 의미를 포기할 필요가 없다. 바울의 의도는 지금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우리의 ,우리됨에 대한 모든 것을 하나 우리가 님의 은혜로 돌림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남들에게 교만하게 굴지 않도록 하 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자비를 추천하면서 우리의 구원을 온전히 거기에 그돌리고 있다. 그는 지금까지 불신자들의 과오를 다루고 있었기 때문에 그 과오에 대한 치료약이 되는 중생의 은혜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것이 자비를 칭송하지 못하게 가로 막 을 수는 없다. 우리의 죄가 값없이 '용서받았으며 우리가 새로와져 하나님 께 순종하게 되었다는 것은 이 두 축복을 하나로 묶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는 하나님의 값없는 은혜라는 점이 확실하지만 남은 문 제는 '칭의되다'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문맥을 보면 것은 의의 전가 이상의 의미를 요구하는것 같지만 이 말이 바울에게 이렇게 사용되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죄의 용서로 한정시켜 해석해도 무방하다. "저의 은혜를 '힘입어"라는 말에 있어서 우리는 저의를 그리스도와 성부 해석하려고 미말미암아 의 에게 모두 적용할 수 있으며 그 둘 중에 하나만{택하는 쪽으로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은혜로 률 받고 있다는 사실은 언제나 변함이 없기 때문이다.
 
"영생의 소망을 따라 후사가 되게" ; 이 귀절은 설명 형식으로, 있다. 그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로 구원받았지만 우리의!?구원 겨져 있다는 점을 앞에서 지적했다. 그는 이제 우리가 생명의 후사인 것은 우리가 지금 당장 후사가 되었다는 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소망이 우리에 게 그것을 충분하고 완전하게 보장하고 있다는 뜻에서이다. 그 의미를 '우리 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리가 죽어 있을 때 히나님 아버지께서 우 리에게 성령을 베푸심으로 말미암아 그 성령의 능력에 따라 때끗하고 새롭 게 하실 때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해 생명으로 복귀되었는데 이것이 우리의 구원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직 이 세상에 [살고 있는 만큼 영생을 누 리지 못하고 그것을 소망으로 확보하고 있을 뿐이다."
 
"8 이 말이 미쁘도다~~~~~~" ;  우리가 디모데서에서 보아 나왔듯이 사도 바울이 엄숙한 선언을 하고자 할 때 이런 표현을 사용한다: 따라서 그는 곧 이어 서 원컨대 네가 이 여러 것에 대하여 굳세게 말하라"하는 말을 곧 덧붙이 고 있다. '시아베바이우는스다이' 라는 단어에는-수동 접미어 가 붙어 있지만 무엇을 ]강력하게 주장한다는 '능동적인 의미가 담겨 있다. 곧 다른 사람들은 아무 소용없는 이야기를 할 일없이 떠들어대더라도 디도 는 다른 모든 것을 무시하고 확실하고 의심이 없는 것만을 가르치고 거기에 집착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감독이란 자신이 사실 인 것으로 확실하게 아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성급하게 입 밖에 내어서는 안된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0 "이것은 참되고 믿을 만한 만큼 가르치라"하 고 그는 주장하고 있다. 감독의 임무란 확실한 것, 그리고 경건에 보탬이 되 는 것만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고수하는 것이라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배우게 된다.
 
"선한 일을 힘쓰게 (선한 일에 뛰어나게)" ;  각 개인에게 속하는 여러 임무와 경건하고 선한 생활에 대한 ,관심, 이모든 것에대한 교훈을 :그는 하나로 묶어서 이야기하고 있다. 곧 하나님 경외와 정돈된 행동을 헛된 사변과 대조 시키고 있다. 하나님을 믿는 자들이 선행을 그들의 제일가는 관심사로 삼으 라는 이야기이다. '프로이타스다이' 라는 동사는 헬라어에서 여러 가지 의미로 사 용되기 때문에 이 문장은 여러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의 의미를 그들이 그들의 이웃에게 구제를 통해서 도와야 마땅하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Дρσiστασθαι(프로이타스다이)라는단어가 도움을 베푼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도 더러 있지만 그렇게 되면 의 경우에서는 도움을 받아야 하 는 쪽은 ,선행인 것 같다. 따라서 이 해석은 곤란하다. 이 단어를 .'장려하다'. 로 보는 것이 더 잘 어울린다. 프랑스어로는 .avancer(아방세)가 되겠다.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탁월한 사람들처럼 분투하게 하라"로 볼 수도 있다. 아니면 "그들로 하여금 선행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도록 하라"하는 식으 로 취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불신자들이 이런 1일들을 무시하는 것이 통례라 는 점을 생각하면 바울이 신자들의 생활에 있어서 이러한 일들이 지배적인 위치를 러나 이 차지하도록 하라고 명령하는 것으로 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 표현은 애매하지만 바울의 의도는 신자들은 선행을 힘써야 한다는 것이 기독교의 가르침의 목적이라는 점을 명백히 지적하는 데 있다. [그는 신 자들이 이 선행에 대해서 그들의 주의력과 공관심을 바치기를 보바라고 있으며 doovriCwoc(프론티조-시)라는 말로써 그는 실생활에 혜택을 가져오지 못하는 철학적인 사변에 탐닉하는 자들의 헛된 생각을 빗대어 표현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그는 선행만 강조하는 가운데 선행의 뿌리가 믿음이라는 점을 잊어버릴 사람이 아니다. 그는 여기서 열매를 이야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두 면을 생각할 때는 항상 믿음에 그 마땅한 우선권을 둔다. 선행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부탁받는 대상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다. 따라서 그는 이 말로써 믿음이 앞서야 하고 결과 선행이 뒤따른다는 점을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아름다우며" ;  나는 이것을 행위가 아니라 가르침에 대한 수식으로 본다. 곧,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것이 훌륭하고 그들에게 유익이 된다2) 라는 뜻이다. 이렇게 볼 때 그가 디도에게 강조하도록 한 것은 지금 여기서 사람들에게 좋고 유익한 것으로 부르는 그것과 동일하다. T& καλ&(타 칼라) 는 좋은', 아름다운 또는 존경할 만한'으로 번역할 수 있지만 내 생각 에는 훌륭한으로 번역하는 것이 제일 좋은 것 같다. 이 말은 다른 모든 가르침은 결과가 없고 무익하지만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르침은 칭송을 받 아 마땅하다는 뜻이다.
 
"9. 그러나 어리석은 변론~~~~~피하라" ;  이 귀절을 장황하게 설명할 필 요는 없다 그가 변론을 건전하고 확실한 교훈과 대조하는 것은, 비록 찾기 위해서는 구해야 마땅하지만, 알아서 유익한 것을 이해하고 일단 알려진 진 리를 확고하게 고수하려면 순서있게 구하는 데도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모 든 것을 호기심을 가지고 캐묻는 나머지 결코 만족을 모르는 사람들을 가리 켜 변론자 (questionarit)라고 부르는 것은 옳다. 한 마디로 솔본느 학파에 서 최고의 것으로 치는 것을 바울은 여기서 정죄하고 있다. 로마 가톨릭의 전 신학 체제는 질문의 심연에 불과하다. 이것이 어리석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그것이 첫 눈에 그렇게 보인다는 뜻이 아니라스 그들은 지혜를 가장해서 우 리를 자주 속인다- 이런 변론은 경건에 전혀 도움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족보 이야기란 어리석은 변론에 대한 한 가지 실예이다. 곧 인간들은 성 스런 역사의 교훈을 망각하고 족보 이야기나, 그밖에 시시한 이야기를 잡고 늘어지면서 한없이 주책을 부리기 마련이다. 이 어리석음에 대해서는 디모 데전서의 주석 처음 부분에서 다룬 바 있다. 여기에 분쟁을 덧붙이는 것은 옳다. 왜냐하면 변론에 있어서 주요 동기 는 야망이요 그 필연적인 결과는 당장에 보장과 다툼으로 발전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은 모두가 이기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불확실한 것을 무모하게 확증하는 결과가 따르며 이것은 필연적으로 다툼을 낳는다. "율법에 대한 다툼" 이것은 유대인들이 율법을 자신들의 핑계로 내세워 시 작하는 논쟁에 [대한 혐오스런 묘사이다. 이것은 율법 자체가 논쟁을 야기시 킨다는 뜻이 아니라 이들이 율법을 변호한다는 핑계로 의식 준수, 처음식물의 선택 등 기타 터무니없는 문제를 내세워 교회의 화평을 '소란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익한 것이요" ;  언제나 [유익한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라고 가르 치는 이유는 경건에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을 배제하라는 뜻에서이다. 1977년 가들은 아무 쓸모없는 것을 가장 유익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가르치지만, 바울은 신앙과 경건한 생활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은 그 어느 것도 유익한 것으로 쳐주지 않는다.
 
"10. 이단에 속한 사람~~~~~" ;  여기에 이 말을 덧붙이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 가 있다. 우리가 고집 센 사람들을 이론으로 이기려 한다면 싸움에 (끝이의있 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결코 말의 부족을 느끼지 않으며 악한 .생각에 서 새로운 힘을 얻는 가운데 싸움에 있어서 지칠 줄을 모르는 자들이다. 따 라서 디도에게 그가 가르쳐야 할 교의의 형태를 명백히 설명했던 만큼 여기 서는 더 이상 이단과 싸우는 것을 금하고 있는데 한 싸움이 끝나면 또 다른 싸움으로 연결되며 .하나의 논쟁은 또 다른 논쟁으로 발전되기 때문이다. 이것은 사단의 계략이기도 하다. 곧 그는 이런 사람들의 악한 수다를 통해서 선하고 신실한 목사들을 얽어 매어 그들로 하여금 가르침에 대한 관심을 갖 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기다툼을 돌아가시키는 논쟁에 휘말려들지 않도 록 하여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이 양떼를 제대로 보살필 수 없게 되고 수다스런 사람들의 언쟁에서 헤어날 날이 없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런 사람을 피하라는 말은 그들의 야심을 채워주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는 이야기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라는 싸움에 기회를 허용치 않는 것만이 싸움을 피하는 최상의 방법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경고가 꼭필 요한 것은 언쟁에 말려들고 싶지 않은 사람들도 거기에 굴복하는 것을 비 겁하고 수치스러운 것으로 생각하여서 거기에 휩쓸리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 다. -더우기 원수들의 맹공격을 받고도 자극을 반자 않을 만큼 태평한 사람 도 없다. 진리가 공격을 받는데 답변하지 않는 것을 참을 수 없는 모독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또한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나 하고 넘보는 까다로운 사 람과 성질급한 사람들은 이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리스 도의 종들이 이단과의 논쟁에 너무 장시간 과도하게 말려드는 것을 원치 않 고 있다.
 
그가 이단이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는 파악하여야 겠다. 이단과 분리론자는 엄연히 구별된다. 여기서 바울이 이단이라는 말로 써 의미하는 것은, 엄연한 잘못이나 사특한 교의를 옹호하고 변호하는 사람 들 뿐 아니라 그가 지금까지 확실하고, 건전한 가르침에 전반적으로 동의하 지 않는 사람들이 다 포함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이단이라는 말 속에는 죄악스런 욕정에 사로잡힌 나머지 교회의 '화평을 깨뜨리려는 야심만만하고, 무질서하며, 분쟁적인 사람들이 포함된다. 한 마디로 뻔뻔스럽게 교회의 통 일성을 파괴하는 자를 가리켜 바울은 이단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와 견해나 의견을 달리 한다고 해서 모두 이단으로 몰 아서는 안된다. 그리스도인들 사이에도 당파를 이루지는 않지만 서로 동의 할 수 없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바울의 깨어지지 않는 조화 속에서 하나 님의 계시를 기다리라는 말은 '바로 이 점을 염두에 두고 한 이야기이기도 하 다(빌 3:15). "그러나 어떤 사람이 고집불통인 나머지 이기적인 동기에 따라 교회의 몸에서 분리하거나 양떼를 갈라놓거나 건전한 교의의 발전을 방해한 다면 그런 사람은 한사코 경계해야 마땅하다. 이단 내지는 분파주의는 교회 의 통일성에 완전 상치된다. 교회의 통일성은 하나님께서 귀하게 여기 시는 것인 만큼 우리로서는 그것을 신중하게 여겨야 하며 이단을 무엇보다 격리해야 한다. 물론 철인이나 정치가는 분파나 이단이라는 말을 높이 평가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사회에서는 [치욕적인 [것이다: 바울이{이단을 (멀리하고 배척하라는 이유를 이제 :알 수 있을 ,것이다.
 
, 동시에 .우리는 뒤에 이어지는 "한두번 훈계한 후에"라는 말씀에 관 심을 ,가져야겠다.음왜냐하면 우리가 |먼저{^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건전한 마음 으로{돌이키게-노력하지 않고서는 제그를 이단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더우기:여기서 의미하는 훈계는 돌아무런 훈계나, 개인 자격으로 말하는 훈계 가 아니라 목사가 교회의{ 공적인공권위로 베푸는 훈계를 뜻한다. 이단은,엄 숙하고혹독하게 규탄해야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이 귀절을 해석하면서 사특한 교의의 원흉()들을'파문 형식으로 지역제 하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아이들은 더 그이상그 사람들에게 ъ가혹한 처벌을 내릴 필요가 없다고 본다. 그러나 이 견해는 .확정 적인 ,것은 아니다. 감독과 행정관의 의무는 엄연히 구별되기 때문이다. 바울은 디도에게 편지하면서 .행정관의 직무 소관 사항을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오직 감독의 :의무만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중용은 언제나 최선책이다. 따라서, 그들이 치료될 수 있다면, 폭력이나 강압에 이끌려 억제하는 것 보다는 교회의 규율에 따라 교정하는 것이 바람직 하다.
 
"11. 네가 아는 바와 같이 부패하여서~~~~~" ;  회개의 여지가 전혀 없는 자들 을 가리켜 그는 무너진 사람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더 노력해서 그 사람을 되찾을 수 있다면 우리는 그들을 저버리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비유는 일부분만 파손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붕괴되어 개축의 여지가 없는 건물을 두고 하는 말이다. 훈계를 받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스스로 정죄한 자'라는 말을 하고 있 는데 이것은 이 파괴의 상징으로서 악한 양심을 들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그들은 완강하게 진리를 배척하는 만큼 그들의 죄는 틀림없이 자발적 이요 고의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훈계하는 것은 허사이다. 그와 동시에 우리는 상대방이 무너진 사람이라는 것을 '안다'는 말에서 아 무나 붙잡고 무분별하게 이단으로 몰아서는 안된다는 점을 배워야겠다. 감 독은 자기 자신의 격정에 이끌린 나머지 자신이 상대방이 이단인가 아닌가 를 확실히 모르면서도 그를 과격하게 이단으로 취급하지 않도록 경계해야 마땅하다.
 
"13. 교법사 세나~~~~~" ;  이 사람이 국가법에 정통한 사람인지 아니면 모세 율법에 정통한 사람인지 확실하게 연구별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바울의 말에 서 그가 외부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가난한 사람이라는 점을 추측할 수있는 데 아마도 그는 아볼로와 같은 계층의 사람이었던 것 같다. 즉, 유대인들 사 회에서 하나님의 율법을 해석하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들은 법정에서 법률적 인 문제를 다루는 사람들에 비해 궁핍하게 지내는 경우가 허다했다. 바울의 말에서 세나가 가난하다는 점을 추측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보내어'라는 말 을, 그의 참여행에 필요한 일용품을 그에게 공급하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문맥이 가르쳐 주는 그대로이다. 그레데인들에게 이런 집 을 부과한다 해서 그들이 비용을 부담하게 되는 것을 으로 생각하고 불평 하지 않도록 하는 의미에서 그는 그들이 열매없는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는 좋은 일에 [힘써야 한다는 점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이 귀절에 대해서는 이미 논의한 바 있다. 그러므로 이것이 선행에 있어서 뛰어나라는 말이든, 선행을 최우선적인 것으로 여기라는 말이든 자신들의 자선을 베풀 수 있는 기회를 제공받는 것이 그들에게 좋다는 뜻이다. 이것은 물론 그들로 하여금 자선을 베풀 기회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기회가 허용되지 않았다는 핑계를 내세우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다음에 이어지는 문장에 대해서는 다른 서신에서 설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