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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도서

감독은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책망할 것이 없고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급히 분내지 아니하며 술을 즐기지 아니하며 구타하지 아니하며 더러운 이득을 탐하지 아니하며 (딛1:7)

1. 성경 (디도서1:1 ~9)
 하나님의 종이요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인 나 바울이 사도 된 것은 하나님이 택하신 자들의 믿음과 경건함에 속한 진리의 지식과 (1)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 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2)자기 때에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이 전도는 우리 구주 하나님이 명하신 대로 내게 맡기신 것이라 (3)같은 믿음을 따라 나의 참 아들 된 디도에게 편지하노니 하나님 아버지와 그리스도 예수 우리 구주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네게 있을지어다 (4)내가 너를 그레데에 남겨 둔 이유는 남은 일을 정리하고 내가 명한 대로 각 성에 장로들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5)책망할 것이 없고 한 아내의 남편이며 방탕하다는 비난을 받거나 불순종하는 일이 없는 믿는 자녀를 둔 자라야 할지라 (6)오직 나그네를 대접하며 선행을 좋아하며 신중하며 의로우며 거룩하며 절제하며 (8)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이는 능히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슬러 말하는 자들을 책망하게 하려 함이라 (9)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하나님의 종~~~~" ; 바울이 자신의 사도직을 두고 이처럼 상세 제시하게 설명하는 데서 우리는 그가 디도 개인뿐 아니라 교회 전체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디도는 그의 사도직에 대해서 전혀 의심을 제기 하지 않은 사람이요, 자신의 권위를 입증하고 주장하고자 할 때는 자신의 소명에 대한 칭찬을 늘어 놓는 것이 바울의 습관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그가 편지쓰는 사람들의 성격에 따라서 그는 이런 장식을 진하게 사용하기도 하고 가볍게 사용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무례하게 반항을 일삼는 자들을 바로잡는 것이 그의 목적이었으므로 그는 자신의 사도직을 장황한 말로 극찬하고 있다. 그가 이 편지를 쓰는 것은 디도가 자기 방에서 혼자 읽도록 하려 뜻에서가 아니라 공중 앞에서 낭독하도록 하려는 뜻에서이다.
 
먼저 그는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으로 부른 다음에 그의 사역에 대한 특별한 명칭, 곧, 그리스도의 사도 라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그는 유개념에서 종개념으로 차원을 낮추고[있다. 다른 데서도 밝힌 바 있지만 '종'이란 모든 신자들을 하나님의 종으로 부를 수 있다는 뜻에서의 일반적인 종속관계를 뜻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특정한 직무가 부여된 일군을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의미에서 옛날 선지자들은 이 명칭으로 불리어졌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이 선지자들 중에 으뜸이다. "보라, 나의 종, 나의 택한 사람을" (사 4242 : 1).

 

이와 같은 뜻에서 다윗은 자신의 왕적 위엄을 두고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고 있다. 아마 바울이 자신을 가리켜 하나님의 종이라고 부르는 데는 유대인들을 안중에 두고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그에게 비교하면서 그의 권위를 훼손하는 버릇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그리스도의 사도로 여김을 받고자 하는데 이것은 그가 히나님의 종이라는 점을 이런 식으로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그는 이 두 명칭이 서로 일관될 뿐 아니라 불가분의 관계로 맺어져 있다는 점을 보여 주고 있다.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의 믿음" ; 자신의 사도직을 의심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하나님의 선택받은 사람들의 구원과 관련시켜 믿으라는 강력한 이유를 대고 있다. 이것은 마치 나의 사도직과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의 믿음 사이에는 상호 관련이 있다. 따라서 버림받은 자이거나 참된 진리에서 떠난 자가 아니고서는 아무도 이것을 거절할 수 없다 라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선택받은 자들이란 당시에 살아 있던 사람들만이 아니고 창세 이후에 선택받은 사람들 모두를 두고 하는 말이다. 곧 자기는 아브라함과 모든 조상들의 믿음에 배치되는 교의를 가르치고 있지 않다는 뜻이다. 따라서 오늘날 바울의 후계자로 취급받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이와 동일한 가르침의 일군이라는 점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말 속에는 믿지 않고 오만한 자들이 많다고 해서 복음이 전혀 훼손을 받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그 당시에도 교회에 속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대다수가 그리스도의 순수한 가르침을 거절하는 거기에서 믿음이 약한 사람들은 분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무분별하게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버림받은 자들에 불과하다는 점을 바울은 입증하고 있다. 다른 데서(롬 9.:7) "육신으로 아브라함에게서 태어난 자가 모두 아브라함의 합법적인 자녀는 아니다"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진리의 지식과" ; 여기서 '그리고'라는 계사는 앞의 말을 설명하는 것으로 '곧', '즉' 하는 말과 같다. 물론 그것이 신앙에 대한 충분한 정의 는 되지 못하지만 현재로서는 적절한 정의를 내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의 사도직이 온갖 협잡과 오류와는 무관하다는 주장을 뒷 받침하는 뜻에서 그의 메시지는 다들 잘 알고 있는 확실한 진리, 곧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예배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 뿐이라는 점을 그는 선언하고 있다. 그러나 어휘 하나 하나에는 각자 특유한 의미가 담겨 있기 마련이므로 그것을 각각 상세하게 검토하는 것이 중요하다.
 
먼저 그는 신앙을 가리켜 지식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을"상식과 구별할 뿐 아니라 가톨릭에서 고안해 낸 미형성된,또는 함축적인 신앙과 구별하려는 뜻에서이다. 그들이 함축적인 신앙이라는 말로서 의미하는 것은 확실한 이해가 결여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진리를 아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을 밝힘으로써 지식없는 신앙이란 있을 수 없다는 점을 간명하게 보여 .주고 있는 셈이다.
 
:그는 진리라는 말로서 임금의 필수적인 성질인 확실성을 보다 분명하게 설명하고 있다. 왜냐하면 믿음은 개연성으로 만족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것만을 고수하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서 모든 진리를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헛된 인간적인 지식과  반대되는 진리를 두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진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신 만큼 그것만이 '진리'라는 명칭을 받기에 합당하기 때문이요, 그것이 성경  여러 곳에서 지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요 [16]: 13),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이니이다"(요 17: 17). "누가 너희로 하여금 진리를 순종하지 못하게  홀리더냐"(갈 3 : 1). 진리, 곧 하나님의 아들의 복음을 들으라"(골1:5).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진리를 아는 데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딤전 2 : 4) , "이 교회는 진리의 기둥과 터라"(딤전 : 15). 한 마디로 .'진리'란 우리를 온갖 오류와 거짓에서 해방시키는 하나님의 순수하고 올바른 .지식이다.- 우리의 일생을 통해서 잃은 양이 방황하는 것처럼 비참한 일도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 진리를 더욱 더 귀하게 받들어야겠다. 경건함에 .속한" 이라는 귀절은 지금까지 자기가 이야기해 온 진리에 대한 수식어일 뿐 아니라 자신의 가르침의 효과와 목적을 동시에 추천하는 말 이기도 하다. 그의 가르침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올바른 예배'를 굳게하고 인간 사회에서 순수한 신앙을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는 벨릭스와(행 2410)와 아그립바(행 26.:1) 앞에서 그의 가르침이 헛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니라는 점을 변호한 바, 있으며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건덕을 세우지 못하는 사악한 질문은 경건한 자들이 배척해야 마땅하므로 교의의 적합성 여부는 그것이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 경외를 가르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달려 있다는 지적은 있었다. 따라서 우리는 경건에 있어서 가장 앞서 있는 사람이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의 제자요, 진정한 신학자로 여김을 받으려면 인간의 양심을 하나님 경외 위에 세우는 사람이어야 한 다는 점을 배우게 된다.
 
2절. 영생의 소망을 인함이라 이 귀절은 분명히 원인을 나타낸다. 헬라어 전치사 €π&(에피)의 의미가 이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것을 소망 때문에'나 소망에서' 로 번역할 수 있다. 하늘의 생활에 대한 명상이야말로 참된 신앙과 경건한 마음의 시작이다. 같은 의미에서 그는 골로새 (교우들의 신앙과 사랑을 칭찬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을 의존하 도록 하고 있다(골 1:5). 사두개인들과 그 밖의 우리의 소망을 이 세상에 국한하는 사람들은-그들의 주장이 무엇이든-하나님에 대한 멸시를 낳을 뿐 이요, 고작해야 인간을 동물의 수준으로 전략시키고 있을 따름이다. 여기서 볼 수 있듯이 인간들로 하여금 이 세상으로부터 저 하늘을 바라보도록 하는 사람이 바로 훌륭한 교사이다.

 

물론 우리에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구원보다 하나님의 영광이지만 지금 우리는 어느 것이 먼저 오느냐 하는 문 제를 다루고 있는 것은 아니다. 단지 하고 싶은 말은 인간이란 확신을 갖 기 전에는 하나님을 진정으로 추구할 수 없으며 따라서 하늘의 생활에 대한 소망을 가르쳐 주는 사람이 없을 때에는 인간이란 경건을 생각할 수 없다는 점이다.
 
하나님이~~~~~약속하신 것인데 어거스틴은 이것을 영원한 때 전부터' (before eternal times)로 읽기 때문에 시간의 영원성 문제에 있어서 난관 에 봉착한다. 그래서 그는 마침내 영원한 시간이라는 말을 모든 고대를 거 슬러 올라가는 시간으로 설명하고 있다. 물론 그 의미에 있어서 어거스틴, 제롬 및 다른 주석가들은 하나님께서 세상의 터가 놓이기 전부터 그가 지 금 복음을 통해서 계시하고 있는 구원을 베풀기로 작정하셨다는 점에 있어 서는 의견의 일치를 보고 있다. 따라서 여기서 사용하는 약속하신이란 말 은 작정하신(decreed)에 대한 부정확한 표현이다. 인간 창조 이전에는 하 나님께서 약속을 할 대상이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에서 물론 이 해석을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전반적으로 검토할 때 다른 해석, 곧 영생이 수세기 전에 약속되었는데 그것은 당시 생존하고 있던 사람들만 이 아니고 우리 세대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있다는 해석을 받아들이자 않을 수 없다. 하나님께서 데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라* (창 2218)하신 말씀은 아브라함만의 축복이 아니라 그 후에 살아 남는 모든 사람들을 두고 하신 것이다. 디모데후서 1 장 9절에서는 다른 의미에서 영원한 때 전부터 (before times eternal) 구원이 인간에게 주어졌다는 말 을 사용하고 있지만 이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양쪽에 사용된 단어의 의 미는 동일하기 때문이다. 'alwν(아이온-)이라는 헬라어는 세상의 시작부터 끝까지의 끊김이 없는 시간의 흐름을 뜻하는 만큼, 디모데서의 바울의 의미 는 시간의 흐름이 시작되기 전에 하나님의 선택받은 자들에게 구원이 베풀 어졌다, 제도는 예정되었다는 뜻이다.

 

그러나 약속을 말하는 이 구절에서는 만 세대를 포함하고 있지 않다. 곧 창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않고 있 다. 단지 구원이 먼저 약속된 이후로 많은 세대가 지나갔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들이 이 영원한 때 그리고라는 표현을 여러 '세대에 대한 간단한 표현 방법으 로 받아들이고자 한다면 그렇게 해도 좋다. ¡그러나 [구원은 그것이 약속되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예정에 의해 주어진 것이므로』디모데서에서는 구원을 베푸는 행위를 세대(all ages) 이전에 두고 있는데 따라서 우리는 디모데시 에 있는 말을 모든' (all)으로 이해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여기서는 단지 약속이 여러 세대의 '흐름보다 더 역사가 .길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이 약 속은 세상의 시작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보때문이다.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는 로마서 1장 2절에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때에야 선포되기 시작한 복음을 가리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해서 성경에 약속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 다. 현 세대에 보여진 은혜와 옛날 조상들에게 주어진 약속은 크게 커다르기 때문이다.
 
거짓이 없으신의 αψevδs(아프슈데-스)는 단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 는 뜻에서가 아니라 우리의 신앙을 확증하는 뜻에서 덧붙여진 단어이다. 우 리의 구원의 ,문제를 다룰 때마다 우리는 그것이 속속이거나 거짓말할 수 없는 분의 말씀에 근거하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사실 모든 신앙의 유일 한 기초는 하나님의 불변한 진리다.
 
3절. 자기의 말씀을 전도로 나타내셨으니...... 하나님께서 옛날부터 여 러 선지자들을 통해 말씀하실 때 :말씀의 부분적인  계시가 이미 있었지만 그 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그때까지 선지자들이 희미하게 예언했던 것을 '밝히 드러내셨으며 이방인들이 언약으로 받아들여진 '것도 그때부터였으므로 바 울은 과거에 부분적으로 보여졌던 것이 이제 나타나게 설치되었다는 말을 하고 있다. 자기 때에 라는 말은 갈라디아서 4장 4절에 나오는 '때가 차매'라는 말 과 동일한 뜻이다. '그는 주님께서 이 일을 행하기로 선택하는 시간이 가장 적절한 때라는 점을 우리에게 상기시키고 있는데 이것은 그것이 왜 보다 일 찍 나타나지 않았는가, 아니면 왜 그것이 내일이 아니라 오늘인가" 하는 식 으로 뻔뻔스럽게 따지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이다. 이런 .무모한
 
호기심을 억제하는 뜻에서, 그는 시간이란 하나님의 손에 있으며 그의 마음 대로 처리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가르치고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모든 것 이 올바른 질서와 올바른 시간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믿어아겠다. 자기의 말씀을" 에서 우리는 *******에 의해서 (by)라는 전치사를 덧붙여 읽거나, 아니면 문장을 완성시키는 데 있어서 아무 것도 덧붙이려 하지 않는 다면 여기서 바울이 그리스도를 가리켜 말씀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 야 한다. 나는 이 해석이 '억지가 .아니라면 그대로 받아들이겠다. 물론 요한 도 요한 1서 1장 1절에서 이런 식으로, 곧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라는 뜻으로 말하고 있 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나는 더 단순한 의미로,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통해서 생명을 나타 내신 것으로나 아니면 복음 전도를 통해서 생명의 말씀을 나타내신 것 으로 받아들이고자 한다. 전도 란 공포된 복음이요, 이 복음을 통해 서 우리가 듣는 요점은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어졌으며 그분 안에 생명 이 있다는 점이다. 더우기 모든 사람이 구별없이 그런 위대한 직무에 적합한 것은 아니요, 또 한 어느 누구도 스스로 그 직무를 자기의 것으로 만들어서는 안되므로 바울 은 늘 그러듯이 여기서 그의 소명을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른 데 서도 여러 번 살핀 바 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을 결정하셨다는 증거를 제시하 기 전에는 아무도 이 존칭을 자기의 것으로 삼을 수 없다는 점을 배우게 된 다. 왜냐하면 사단의 일군들도 자기들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고 주장하 지만 그들의 말에는 진실성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언급하는 자신의 부름 받음에 대한 문제는 우리가 이미 잘 알고 있는 바요, 충분히 입 증된 것이다.

 

이 구절에서 우리는 왜 사람들이 사도로 부름받았는가를 알 수 있는데 그것은 복음을 전파하기 위해서였다. 이것은 내가 복음을 전할지 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 니하면 내가 화가 있을 것임이로다"(고전 9:16)하는 말 그대로이다. 따라 서 태만과 사치 속에 파묻혀 벙어리 행세하는 자들이 이 사도들의 후계자라 고 자처하는 것은 너무도 맨뻔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구주 하나님 그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동일한 명칭을 사용 하고 있는데 사실 두 분이 모두 우리의 구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방법 은 다르다. 성부께서 구주이신 것은 그가 우리를 영생의 후사로 삼으려고 성 자의 죽음에 의해 우리를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자께서 우리의 구주이신 것은 그가 우리의 구원의 담보와 대가로 자신의 보혈을 쏟으셨기 때 문이다. 이처럼구성자는 우리의 연구원을 성부에게서 :우리에게 가져 오셨으며 성부께서는 성자를 통해 그것을 부여하셨다.
 
"4. 같은 믿음을 따라 된 나의 참 아들 디도에게~~~" ; 여기서 말씀의 일 군이 어떤 의미로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이끄는 자들을고영적으로:보노낳는다 고 말하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곧 자신도 낳은"바 된 사람이라 그는 의미에서이다. 이런 그뜻에서 바울은 자신이 디도의 아버지라고 부르지만 는 즉시 이 신앙이 두 사람 :모두에게 공통적이라는 점을, 곧 양자는 하늘에 한 아버지를 모시고 있다는 점을 :덧붙이고 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자신 이 원하는 자들을 중생시키는 데 있어서 사용하는 자들이 자신과 함께 영적 으로 아버지라고 불리우는 것을 1허용하시지만 하나님 (특유의 대권()은 독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 :스스로는 아무 할 수 없고 다만 :성령의 효력을 통해서만충일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귀절의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 는 이보다 앞선 서신, 특별히 디모데전서를 참고하기 바란다.
 
"5. . ~~~~~~둔 이유는" ;  이러한 서두에서 우리가 분명히[알$수 있는 것은 그 가 디도 개인을 위해서 충고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를 다른 사람 [앞에_칭 찬함으로써 아무도 그를 거역하지 못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바울은 자신이 디도를 후임자로 선택했기 때문에 모두들 그를 자신의 대리자로 인정하고 마땅히 존경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사도들은 특정한 지역을 .할당받은 것 있었다. 따라서 조적합한 1일을 완성하도록 하는 고린도에서 교회의 -기 이 아니고 온 세상에 복음을 전파할 의무를 지니고 있다. 사람을 자신들의 대리자로 선택해서 자신들이 시작한 것이 그들의 통례였다. 이런 의미에서 ,바울은 자기가 초를 놓았지만 이 야기하고 있다. 이 기초 위에 건물을 세워야 할 사람은 따로 있다는 점을 이 가것은 모든 목사들에게 해당하는 독립무이다. [왜냐하면 곳곳 에서 교회는 세상 끝까지 커가고 발전할것이기때문이다.

 

그러나 디도의 경우에는 일반적인 목회의 임무보다도 교회를 조직하는 임무를 부여받고 있 었다. 이미 기초가 잡히고 질서가 잡힌 교회에 목사들을 모두어 가르치게 하 는 것이 보통이었지만 디도의 경우는 아직 제대로 질서가 잡히지 않은 교회 를 조직하고 거기에 확정한 통치와 훈계 방법을 일부여하는 임무를 안고 있었 다. 기초가 놓이자 바울은 떠났으며 건물을 땅 위에 세우며 구조를 갖추도 록 하는 것은 디도의 임무였다. 이것이 아직 부족한 일을 바로 잡고 하는 귀절의 의미이다. 교회 건축 이란 당장에 완성될 수 있는 간단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바울이 얼마 동안 그레데에서 지냈는가 하는 문제는 확실하지 않지만 얼마동안 거기서 지내는 동안 그리스도의 나라를 세우는 데 정성을 다 기울였음에 틀림없다.

 

그의 재능은 어느 인간이 추종할 수 없는 것이요, 그의 수고는 지칠줄을 몰랐지만 그는 그의 일을 다 해결하지 못한 미완성인 채로 두고 떠났다. 우리는 여기 서 문제의 심각성을 보게 된다. 우리가 오늘날 체험으로 아는 대로 무너진 교회를 어느 정도의 상태로 회복시키는 데는 1,2년으로써 충분하지 않다. 수 년간 부지런히 일을 한 사람이라도 아직 고칠 점이 많다는 것을 발견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더구나 자신이 시작한 일을 남에게 완성하도록 양보하는 데서 우리는 바울 의 결손을 엿볼 수 있다. 물론 디도는 그에 비해 훨씬 뒤진 사람이었지만 그는 지체없이 그를 가리켜 자신의 일을 마무리짓는 "에파노 르도--테-스" (교정자) 라고|부르고 있다. 이것은 경건한 교사들이 본받아야 할 점이다. 곧 각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대로 무엇이든지 이기적으로 성취 할 것이 아니며 각자가 서로를 돕는 가운데 한 사람이 크게 성공했을 경우 에 그를 시기할 것이 아니라 축하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
 
그렇지만 바울이 바로 잡고자 했던 일은 그가 몰라서, 잊어 버리고, 아니 면 무관심하게 내버려둔 일들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완성되지 못한 그 러한 일들이었다. 한 마디로 그는 본인이 그레데에 더 남아 있었더라면 무엇 을 변경시키거나 개조함으로써가 아니라 시간 부족상 할 수 없었던 것을 보 완하고자 했던 일을 디도에게 부탁하고 있다. 이 일은 하루 아침에 다 이루 어질 정도로 쉬운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각 성에 장로둘을 세우게 하려 함이니" ;  교회의 영적 건축에 있어서는 교회 의 통치를 맡아 볼 목사들을 임명하는 것이 교의() 다음으로 중요한 일 이다. 그러기에 바울은 무엇보다도 이 점을 여기서 언급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목사들의 사역이 없이는 교회가 안전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겠다. 따라서 얼마의 사람이 모인 곳에는 목사를 세워야 마땅하다.: 각 성에 목사를 한명씩 두라는 이야기는 한 곳에 한 명 이상을 두어서는 안된다 는 뜻이 아니고 어느 성읍이든 목사없는 성읍이 있어서는 안된다는 뜻이다. 

 

장로 란 나이가 많아서 그렇게 로부르는 것은 아니다. 디모데같이 젊은,나이에도 이 임무를 맡도록 선택받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 언어에서든 통 치자들을 가리켜 장로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을 존경하는 뜻에서이다.디모 데전서에 보면 두 종류의 장로가 있지만 여기서 말하는 것은 교사(doctores) 를 두고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확하다. 곧 가르치도록 임명받은 사람들이다. 그는 곧 이어서 감독 이야기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6 [∞그러나 디도에게 모든 교회의 목사들을 임명하라고 말하는 것은 그에게 너무 많은 권위를 부여하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이것은 거의 국왕의 권 한이나 다름없으며 개 교회의 선택권과 목사단의 심판권을 박탈하게 되며 마침내 교회의 전반적인 통치를 속되게 하는 처사가 되고 말 .것이다.' 대답은 간단하다.

 

곧 그는 디도에게 모든 것을 혼자서 임의대로 대한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으로써 그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교회의 감독으로 세우도록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선택할 때 대회 의장으로서 할 것을 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사실 필요한 일이다. 이런 표현법은 아주 흔하다. 사실은 공적인 모임에서 집정관들을 선발했는데도, 집정관은 그들을 세웠다고 말한다. 그와 같은 의미에서 누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모든 교회에서 장로들을 임명했다고 말하고 있는데(행 14: 23) 이것은 그들이 단독으로 임의적인 방법에 따라 개 교회에서 단련도 받지 않고 알려지지 않은 목사들을 임명했다는 뜻이 아니고 그들이 교인들의 선택을 받았거나 요청을 받고 있는 적격자를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 귀절에서 우리는 당시 교회의 사역자들은 동등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람이 저 사람에 대해서 권위와 심판을 행사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오늘날 교황제도 아래서 판치고 있는 성직 임명이라는 속된 관습과는 무관하다. 이 사도의 방법은 전혀 달랐다.
 
"6. 책망할 것이 없고~~~~~" ;  디도가 어떤 사람을 거절하는 경우 너무 가혹하다거나 엄격하다면서 대들지 못하도록 하려는 뜻에서 바울은 모든 책임을 자신에게 전가하고 있다. 곧 그가 묘사하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받아들이지 말라는 명백한 지시를 주고 있노라고 선언하고 있다. 바로 앞에서 디도에게 목사 임명 시 대회 의장으로 통할하도록 권한을
부여한 사람은 자신이었다는 점을 선언했듯이 여기서는 디도가 악한 사람, 또는 악의적이거나 무지한 사람에게서 가혹하다는 거짓 비판을 받지 않도록 그의 명령을 질서 정연하게 정리해 보여주고 있다. 이 귀절은 우리에게 합법적인 감독의 상()을 묘사하고 있는 만큼 우리 는 그것을 상세하게 검토해야겠다. 그러나 나는 이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디모데전서 1장에서 설명한 바 있으므로 여기서는 가볍게 다루는 것으로 만 족하겠다.
 
책망할 것이 없고 "아넥클래톤" 라는 말로써 그는 아무런 잘못이 없는 사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 그가 뜻하는 것은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킬 만한 불명예로 얼룩지지 않은 사람이 다. 곧 홈이 없는 평판의 사람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직무를 맡을 사람이 왜 한 아내의 남편이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디모데전서 1장에서 이미 설명한 바 있다.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일부다처제가 어찌나 성행했던지 이 타락한 관습이 거의 법이 되다시피 했 었다.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두 아내를 데리고 있었다면 믿고 나서 둘째 아내를 저버리는 것은 비인간적인 처사가 되는 셈이다. 따라서 사도들은 나쁜 것이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그것을 용납한 것이 다.

 

더구나 이미 한 번 이상 결혼한 사람들이 비록 한 아내만 데리고 삶으 써 회개의 표적을 보여주고자 한다 하더라도 그들은 이미 자신들의 무절제 를 드러내 보여 준 사람들이므로 그것이 그들의 평판에 오점이 될 수 있었 다. 이것은 마치 바울이 그들에게 결혼생활이 깨끗하며 한 아내로서 만족하 는 인자들을 선택하도록 당부하면서 여러 아내를 데리고 사는 가운데 정욕을 드러낸 사람들은 배제하고 있는 것과 같다. 그와 동시에 자기 아내가 죽어 홀아비가 되어 재혼하는 사람은 한 아내의 남편으로 취급하는 것이 마땅하 다. 바울은 그들에게 한 아내의 남편 '이었던' 사람이 아니라 현재 한 아 내의 남편인 사람을 선택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믿는 자녀를 둔 자" ;  사려 분별과 진지함은 목사의 필수 요건이므로 그의 가족들이 이런 자질을 함께 가지고 있는 것이 바람직하다. 자신의 가정을 다스리지 못하는 사람이 어찌 교회를 다스릴 수 있겠는가? 더구나 감독은 본인이 비방을 받지 않아야 할 뿐 아니라 그의 전체 권속도 정숙하고 조존경을 받는 사람들이어야 한다. 이와 같은 의미에서 그는 감독의 아내의 자질을 상세하게 디모데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다. 첫째 자녀들이 믿어야 한다는 필 수 요건의 의미는 그들이 건전한 경건의 가르침과 하나님 경외를 중심으로 양육받았다는 점이 분명해야 한다는 뜻이다: 둘째 그들이 너무 호사스럽게` 사는 사람들이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절제와 소박에 대한보그들의 '단련이 안 정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사세째로 그들이 f'불순종하는 자녀들이어서는 안 되는 이유는 자기 자녀들의 존경이나 순종을받지 못하는 사람은 자기 교우들을 훈육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7. 감독은 ~~~~책망할 것이 없고" ; 그는 다시 감독직분을 사모하는 자들은 깨끗한 평판을 누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점을 반복하면서 교회는 하나님의 독집인 만큼 그 곳에서 다스리는 사람은 누구나 말하자면  하나님의 청지기라는 점을 지적함으로써 이 말을 확중하고 있다. 좋지 않은 평판을 가진 나쁜 청지기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사람들에게서 욕을 먹기 일쑤이다. 따라서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가정의 지배자가 되는 것은 더욱 용납할 수 없는 노릇이다. 에라스므스는 벌게이트 역에서 따온 '라틴어 dispensator, 곧 집행관이라는 말을 여기에 적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바울의 의미를 충분히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선택하는 일에 있어서 아주 신중을 기하도록 하는 의미에서 그는 감독의 직분에 청지기라는 명예로운 명칭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곧 감독 직분은 하나님의 집의 통치자인 것이다. 이것은 그가 디모데에게(딤전 3 : 15) "너로 하나님의 집에서 어떻게 행하여야 할 것을 알게 하려 함이니 이 집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교회요 진리의 기둥과 터이니라" 라고 말한 그대로이다.
 
또한 이 귀절은 장로나 감독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준다. 왜냐하면 그는 공식적으로 장로라고 부르던 자들을 여기서는 감독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제롬이 그의 주석에서 이 귀절을 풀이하면서, 그리고 에바그리우스(Evagrius)에게 보낸 서신에서 밝히고 있듯이 그는 두 이름을 아무 구별없이 동일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여기서 우리는 성령에 의해 사용된 언어가 뒤로 물러나고 사람들의 뜻에 따라 도입된 용법이 성행하는 것을 볼 때 사람들이 얼마나 인간적인 견해를 존중하는가를 알 수 있다. 내 견해로서는 초대 교회 때부터 각 감독회에서 한 사람을 대회 의장으로 두는 관습에 잘못이 없다고 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모두에게 주신 이 직분의 명칭을 한 사람에게만 양도하고 나머지 사람들에게서는 박탈하는 것은 부당하고 터무니없는 일이다. 더구나 성령의 언어를 전혀 다른 의미로 곡해하는 처사는 과격하고 불경건한 만용의 색채가 짙다.
 
"제 고집대로 하지 아니하며~~~~~" ;  감독에게 있어서 이런 결점을 규탄하는 데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곧 자발적으로 자기에게 나오는 자들을 친절 하게 대할 뿐 아니라 뒷전으로 물러서는 ,자들 또한 권해서 모두 그리스도에 게 이끌어야 하는 것이 그의 임무이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디온(Dion)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너무 자기 자신에게만 집착하는 고집은 고독과 밀접한 관 련이 있다. 즉, abbouseca ёρημlas loct ξυоικOS(아우다데이아 테스 에 레-미아스 에스티 크쉬노이코스)라는 말을 하고 있는데 저마다 자기 이익만 생각하고 남에게 자신을 맞추려 하지 않는 곳에서는 친목과 우정이 귀하게 여겨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온갖 고집(αbokons; 아우다데--스) 은 기회만 있으면 분열을 조장한다. 여기서 이 고집이 분쟁을 야기시켜 교 회를 산산 조각내는 것이야말로 얼마나 치명적인 역병()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는 이 결점을 먼저 :가르침을 일반을 수 있는 마음, 그 리고 모든 사람에 대한 친절과 겸손을 대조시키고 있다. 감독 스스로 배우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면 그는 결코 가르칠 수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틴은 능숙하게 가르칠 수 있을 만큼 충분히 인내하며 배워라하는 씨프리안의 말을 칭찬하고 있다. 더구나 감독은 때때로 충고와 경고를 필요 로 한다. 그들이 충고 받을 (것을 싫어 한다거나, 건전한 교훈을 배척한다면 교회에 끼치는 피해는 극심할 것이다. 여기에 대한 처방은 그들이 자신들을 기만하는 데 있어서 지나치게 현명하지 않는 것이다.
 
내가 '필라가돈'이라는 말을 에라스므스처럼 '선한 것들을 사랑하는 자'로 보지 않고 '친절한 행위에 전력을 다하는' 으로 보는 것은 바울이 이것을 손님 접대와 연관시켜 탐욕과 비열을 대조시키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8. 의로우며" ;  이것은 아무에게도 악을 행하지 않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요, 거룩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두고 하는 말이다. 플라톤마저도 이 두 단어의 차이점을 구별하고 있다.
 
"9. 미쁜 말씀의 가르침을 그대로 지켜야 하리니" ;  이것이 감독중에서도 특별히 가르치도록 선택받는 감독의 제일가는 자질이다. 교회는 말씀이 아니고서는 다른 무엇으로도 다스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감독이라고 말씀에 능통할 뿐 아니라 그 말씀을 꾸준하게 고수할 것을 원하고 있다. 도바울이 특별히 이점을 강조하는 것은 어떤 사람은 색다른 가르침에 쉽사리 휩싸이고 마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자신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거나, 두려움에 휘말릴 경우 진리의 수호를 저버리는 수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하나님의 진리를 확실히 받아들이는, 정말 확실히 받아들여 그들이 그 진리에서 떨어질 수도 그 진리가 그들에게서 빠져나갈 수도 없게 된 사람들만을 선택할 것을 못박고 있다. 흔들리지 않고 진리를 수호해야 할 .목사가 그 교의를 고수하지 못하고 마는 변덕보다 더 위험한 것도 없다. 한 마디로 목사는 학식이 많을 뿐 아니라 순수한 가르침을 결코 저버리지 않을 정도의 열성을 겸비하고 있어야 한다.
 
'가르침을 그대로' 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가르치는 일이 교회를 키우는 데 유용해야 한다는 뜻이다. 바울은 보통 경건에 보탬이 되지 못하는 것 은 그 어느 것도 가르침'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것이 제 아무리 재치있다 해도 무익하고 헛된 생각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가르치는 자는 가르치는 일로"(롬 12: 7)라는 말도 이런 뜻이다. 곧 가르치는 자는 듣 는 자들에게 유익을 끼치도록 힘쓰라는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목사의첫 번째 임무가 건전한 교의에 대한 지식에 '능통하는 것이요, 둘째 임무가 그의 고백을 불굴의 용기로 고수하는 것이라면, 세째 임무는 그의 가르침의 방법을 덕을 세우는 데 맞추는 것이다. 곧 야심적인 마음에서 쓸데 없이 호기심을 돋구는 괴상한 가르침을 따라 이리저리[날아 다니는 것이 아니라 교회의 확고한 혜택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는 능히~~~~~" ;  목사에게는 두 음성이 필요하다. 하나는 양을 모으는 음 성이요, 다른 하나는 이리와 도둑을 쫓는 음성이 그것이다. 성경은두 가지 일을 다할 수 있는 방법을 목사에게 제공하고 있으며 성경에 [대해서 올바로 배운 사람은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자들도 다스리고; 진리의 원수들을 물리 칠 수도 있을 것이다. 목사가 "바른 교훈으로 권면하고 거스려 말하는 자들 을 책망할 수 있을 것"이라는 바울의 의미는 성경을 이렇게 두 가지 방법으 로 사용하라는 뜻이다. 우리는 여기서 감독이 가져야 할 진정한 지식이 무 엇이며 그는 그것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가를 배울 수 있다.

 

감독은 올바 른 신앙을 고수할 때 비로소 현명한 것이요,그의 지식을 교우들의 건덕을 세우는 일에 사용할 때 그는 그 지식을 올바로 사용하는 것이다. 바 울은 하나님 말씀이 가르침을 받을 수 있는 자들을 다즈리는 데 적절할 뿐 아니라 원수들의 완강한 반대를 부서뜨리는 데도 .말씀이 적절하다는 말을 하 고 있는데 이것은 말씀에 대한 지극한 찬사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진리 의 능력은 모든 거짓을 쉽게 능가하고도 남는다. 이제 가톨릭교 감독들로 하여금 사도들의 계승을 자랑해보시도록 하라. 그들의 대부분은 모든 가르 침에 어찌나 미숙하던지 그들의 무지가 그들의 감독직과 전혀 무관한 것으 로 여겨질 정도로 나타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