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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디도서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디도서2:13)

1. 성경 (딛2:9~15)
 종들은 자기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여 기쁘게 하고 거슬러 말하지 말며 (9)훔치지 말고 오히려 모든 참된 신실성을 나타내게 하라 이는 범사에 우리 구주 하나님의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10)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11)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12)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13)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14)너는 이것을 말하고 권면하며 모든 권위로 책망하여 누구에게서든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15) 
 
2. 묵상 (Calvin선생주석)
"9. 종들로는~~~~~~"바울은 여기서 예를 들어 설명할 뿐이지 상세하게 그들의 임무를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은 이미 밝힌 그대로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는 상전들에게 "범사에 순종하며 기쁘게 하고" 라고 말할 때에 기쁘게 하라는 말은 선한 것에 국한시키는 것이 당연하다.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뜻'에 일치하는 것만을 행하여야 한다는 다른 귀절과 비교할 때, 명백하게 드러나는 점이기도 하다. 사도들이 남의 권세 밑에 있는 자들에게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거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인간은 복종하는 것을 가장 싫어하며 복음을 핑계삼아 반항하는 가운데, 그들이 불경건한 자들의 지배에 굴종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목사들은 이런 반항심을 누르고 억제하는 일에 최대한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그는 여기서 하인들에게 흔히 있는 두가지 잘못, 곧, 건방진 말, 대답과 도둑질하고 싶은 마음을 정죄하고 있다. 고전 회극에 보면 하인들이 자기 주인들을 조롱하는 과도한 말장난이 많이 나오는데 옛날 사람들 이 종과 도둑을 서로 뒤바꿔 쓴 이유를 알 수 있다.  이런 면에 있어서 개인의 생활을 훈계하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다. '충성'이란 주인과의 관계를 규정하는 말로서 주인들의 일을 실천하는 데에 거짓이나 악의 없는 충성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10. 교훈을 빛나게 하려  함이라" ;  우리의 존경받는 행동으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 주고 있는 그의 교훈을 빛나게 하라는, 권고는 우리에게 깊히 생각할 점을 제시한다. 사실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우리는 우리의 나쁜 행실로 수치를 당하며 우리의 행위로 판단을 받는 것이 상례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여기서 또 한가지 생각할 점이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거의 사람 취급을 받을 수 없을 정도로 천박한 상태에 있는 종들을 통하여 영광을 받고자 하신다는 점이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종이란 '오늘날과 같은 가정의 하인'들이 아니라 돈 주고 사온 노예로서 가축과 같은 소유에 불과한 자들이었다. 그런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빛나게 한다면 존귀한 위치 에 있는 자들은 천박함으로 그 이름을 더럽히지 않도록 더욱 더 힘써야겠다.
 
"11.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  그는 특별히 금방 말한 노예들을 염두 에 두면서 구원이 모든 사람에게 미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히고 있다. 물 론 그는 개인이 아니라 다양한 생활 양식을 가진 모든 계층의 인간을 두고 말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노예들에게까지 미치고 있다는 점을 크게 강조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제아무리 비천한 사람이라도 멸시하시지 않는 만큼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받아들이기를 소홀히 하는 것은 극히 어리석은 짓이다.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  그는 구속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논 리의 기초를 두고서 우리로 하여금 '경건하고 올바른 생활을 살아가는 데에 열성을 다할 것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쓸데 없는 사변()에 집 착하는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에게 거룩한 생활을 하도록 권면하는 사람이 훌륭한 교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우리로 원수의 손에서 건지심을 입고 종신토록 주의 앞에서 성결과 의로 두려움이 없이 섬기게 하리라 하셨 도다(눅 1 : 74, 75)라는 스가랴의 예언 그대로이다. 같은 의미로 바울은 하 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었다."라는 말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 님의 은혜 그 자체가 우리에게 우리의 생활을 바로 잡을 것을 가르치시고 있 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자비를 전파하는 일을 재빨리 방탕의 구실로 삼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무관심 때문에 타인생활의 갱신을 생각지 않는 사람 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의 계시에는 필연적으로 경건한 생활에의 권 고가 수반하기 마련이다.
 
"12. 경건치 않은 것과 ~~~다 버리고" ;  그는 우리의 생활을 바로 잡는 원칙을 제시하면서 과거의 생활 양식을 먼저 청산할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예로 들어 지적하고 있다. 경 건치 않은 것이란 말 속에는 그들이 지금까지 범해 온 미신 뿐 아니라, 사람 들이 진리를 알기 전까지 그들을 지배하는 하나님에 대한 비신앙적인 무관 심도 포함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형식적으로는 신앙을 표명하지만 마음으로 부터 하나님을 두려워하거나 경외하는 것이 아니라, 잠든 양심을 그대로 간 직하고자 하며 하나님을 섬기는 일 같은 것은 아예 뒷전으로 제쳐 놓고 말기 때문이다.

 

이 세상의 정욕이란 육신적인 모든 생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주 님께서 우리를 그에게 이끌어 주시기 전에는 우리의 생각은 이 세상을: 향하여 고 있을 뿐이다. 하늘의 생활에 명상은 중생 이후부터 시작된다.:곧 그 전까지는 우리의 욕심은 이 세상을 지향하고 있으며 증거기에 집착되어 있다.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 그는 그리스도인 생활의 '포괄적인 요약으 로서 이미 이 세가지를 언급한 바 있다. '경건'이란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서 신앙심을 두고 하는 말이요,' 의'  란 인간을 향해. 행사하는 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이 두가지를 겸비한 .사람은 '완전한 .덕을 구비한 .셈이다. 하나님: 의 율법에 있어서 이보다 더 높은 일반전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경. 건의 실제는 율법의 첫째 돌판과 관련된 것이므로 그가 여기서 '말하는 절제 (근신)라는 말도 율법을 지키라는 뜻으로 1받아 들여야 제한다. 앞서 인내를 두고 말한 바 있지만 여기서 절제는 양자에 대한 일종의 .양념으로 첨부되고 있다. 어떤 때는 인내를, .또 어떤 때는 절제를 가리켜, 거룩한 -생활의 완성 으로 언급하고 있는 데 여기에는 모순점이 없다. 없다. σωφροσνη(소승프로쉬네←) 에는 인내의 의미도 포함되는 만큼 이 양자는 선로 각각 다른 특성이 아니다.. 를 그는 이 세상에서"라는 말을 덧붙이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 생활을 우리의 진실성의 시험대로 삼고있기 때문이다. .선행의 .열매가 아직은 나타나지 않고 있지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선행을 계속하는 것이 당 연하다. 이것에 대해서 그는 계속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다.
 
"13. 복스러운 소망~~~~~기다리게 하셨으니" ;  그는 장차 불멸의 소망에 그 의 권고의 기초를 두고 있는데 사실 이 소망이 우리의 마음에 확고한 티를 두고 있는 한 우리는 전심전력을 다해 :하나님께 사헌신할 수밖에 :없다: 다 른 한편 세상과 육신에 대한 삶을 중단하지 않고 있는 자들은 이 영생의 약 속의 의미를 실제로 파악한 사람들이라고 볼 수 없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를 하늘로 불러 주심으로써 우리를 이 땅에서 제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소망'이란 소망하는 것들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 고 달리 해석하게 되면 어법상 맞지 않는다. 그는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예비 하신 복된 삶을 가리켜 소망이라고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와 동시에 그는 우리가 언제 그것을 누릴 것이며 우리가 무엇을 바라고 있어야 하는가를 말하 면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원을 바라고 생각하도록 당부하고 있다.
 
여가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영광이란 하나님에게만 독특한 영광일 뿐 아 니라 그 때에 온 사방에 퍼지므로 [말미암아 그의 모든 선택자들이 동참하게 될 그러한 영광을 의미한다. 여기서 크신 하나님이라고 자칭하는 '것은 인간 들이 헛된 세상에 현혹된 나머지 할 수 있는 대로 축소하는, 아니 근절하고자 하는 위대성이 마지막 날에 가서 완전하게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다. 이 세 상의 영광이 우리 눈에 밝게 보이는 한 하나님의 영광은 흑암에 묻혀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 그는 세상의 헛된 자랑을 모두 홀 으실 것이요 따라서 그의 영광의 광채가 위대함을 흐리게 할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될 것이다. 사실 주님께서는 날마다 그의 사역을 통해서 .그위 위엄을 드러내시고 있다. 그러나 인간은 눈이 어두워 그것을 보지 못하고 있기 때 문에 그것이 여전히 흑암 속에 숨겨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은 비록 하나 님을 멸시하거나, 최소한 그의 진정한 탁월성에 따라 그분을 존경하지 않지 만 바울이 신자들에게 신앙으로 마지막 날에 계시될 영광을 곰곰히 생각하 게 하는 것은 하나님을 높이 떠받드는 뜻에서이다.
 
다음으로 크신 하나님이요 구주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밀접한 관계 로 읽어야 하는가 아니면 성부와 성자를 구별해서 크신 하나님과 우리의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분리하여 읽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하지 않다. 아리안 파에서는 여기서 후자의 해석을 잡고 늘어지면서 성 자는 성부보다 못하다는 점을 입증하려고 한다. 곧 바울이 성부를 가리켜 크신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를 성자와 구별하려는 뜻에서라는 주장 을 편다. 이 거짓된 주장을 반박하는 뜻에서 정통파 교회 교사들은 두 명칭 이 모두 그리스도에게 적용되고 있다는 점을 강력히 주장해 오고 있다. 그 러나 아리안 파의 주장에 대한 보다 간단하고 확실한 반박은 따로 있다. 곧 바울은 크신 하나님의 영광의 계시를 말하고 바로 그리스도를 덧붙임으로써 이 계시가 그를 통해서 (in His person) 존재한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이 것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하나님의 영광의 위대성이 우리에게 계시될 것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우리가 여기서 배울 점은 두가지이다. 첫째 선행을 증대시키고자 원하는 최 대의 동기는 장차 부활의 소망이어야 하며 둘째, 신자들은 항상 그것을 똑바 로 바라 보는 가운데 올바른 길을 걷는 일에 지치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그것에 완전히 매달리기 전에는 세상의 '온갖 허영에 휩쓸릴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심판의 주로 강람하시는 모습 때문에 우리가 공포에 싸이 지 않을까 해서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심판관이자 구주로서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14.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  .이것은:그리스도의 '죽음의 목적내지는 '효력에 입각한 '권고이다.3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서 자신을 제 공하신 것은 우리를 최의 속박으로부터 속량해서] 우리를 자신의 소유로 삼 으려는 뜻에서였다. 그의 은혜에는 (새로운) 생명이 따를 수 밖에 {없으며 계 속해서 지죄를 기점기는 자들은 구속의 *축복을 무효화하는셈이다. 그러나 우 리가 죄의 속박에서 구출된 것은 우리도 하나님의 의를 섬기도록 하려는 뜻 에서이다.
 
그는 곧 이어서 선한 일에 열심하는 친 백성'에 대한 그의 -두번째 요점 을 말하고 있다. 이 말의 의미는, 우리가 아직도 세상의 죄악스런 욕망의 그물에 얽매여 있게 된다면 우리에게는 구속의 열매가 무익하게 된다는 뜻 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선행을 행하도록 성별되었다는 점을 강조하는 의미에서 그는 깨끗하게 '하사'라는 말을 여기에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 우리에게 제거하신 바로 그 오 염으로 우리 자신을 다시 더럽게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15. 너는 이것을 말하고" ;  이 마지막 문장은 디도에게 이 덕을 세우는 가르침에 계속 집착하고 그것을 지겨워하지 말 것을 당부하는 권고와 동일하 다. 이러한 당부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는 이 가 르침에 권면과 징계를 덧붙일 것을 당부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람이란 강권 을 받지 않으면 자신의 임무를 제대로 기약하지 않기 때문이다. 바울의 모 든 말을 이해하고 그것을 항상 읽는 사람은 교훈과 징계를 동시에 행할 것 이다.
 
"모든 권위로~~~~~" ;  나는 여기서시기서ёπιταγν(에피타겐 )을열심히 명령을 내리 는 것으로 보는 에라스므스의 견해를 찬성하지 않는다. 크리소스톰은 이것을 더 극악한 죄악에 대한 가혹성으로 보고 있는데 오히려 그의 견해가 더 타 당하다. 그러나 그도 역시 바울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고 있다고 볼 수 없다. 그의 요점은 디도가 이런 모든 것을 가르치고 있어서 스스로 권위와 존경을 세우는 것이 마땅하다는 것이다. 호기심에 사로 잡힌 나머지 사소한 일을 가지고 화를 내는 사람들은 경건하고 성결하게 살라는 명령을 시시하고 웃 기는 것으로 알고 싫어하기 때문이다. 디도에게 이런 중오를 대처하도록 하 는 뜻에서 바울은 디도의 가르침에 그의 권위를 더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누구에게돈지 업신여김을 받지 말라" ;  이 말도 같은 이야기이다. 이것은 디도로 하여금 그의 정직한 생활로 사람들의 주의와 존경을 사도록 하라는 권고로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 물론 성결하고 흠 없는 행동이 가르침에 권위를 부여하는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바울은 디도 개인이 아니라 교인들을 상대로 편지하고 있는 만큼 바울의 의미는 다르다. 당시 사람들의 귀는 얼마나 고상했던지 단순한 복음 같은 것은 우습게 여겼으며, 신기한 것만 찾으려는 갈증 때문에 덕이 들어 설 자리가 없었으므로 그는 그들의 교만을 꺾으면서 건전하고 유익한 교훈을 결코 멸시하지 말라는 점을 당부하고 있다. 이것은 처음에 말한 것을 확증한다. 곧 이 서신은 한 개인이 아니라 그레데 사람들을 상대로 쓰여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