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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고전2:5)

1. 성경 (고린도전서2:1 ~ 5)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1)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 (2)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3)내 말과 내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4)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 (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사도 바울은 그의 교훈의 방법에 대하여 설명하면서, 그는 동시에 복음적인 설교의 '일반적인 성격'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제 그는 그의 안에서 멸시를 받는 것은 무엇이나 복음 그 자체의 본질로 둘러싸여 있으며,  어느 의미에서 자신은 그것으로부터 분리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하여 그는 다시 자신에게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인간의 웅변이나 지혜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으며, 그 준비는.그에게 뭔가를 이룰 수 있게 할지도 모른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그는 계속 덧 붙여서 그가 그의 부족으로 인정한 그 결핍 요소들의 사실 때문에, 그런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는 하나님의 능력이 바울의 복음 사역에 있어서 더욱 분명하게 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그 진리를 조금 후에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한편  그가 인간적인 지혜를 갖지 못하였다고 양보를 하면서도 그는 하나님의 증거를 그가 선포한 사실을 주장하고 있다.  어떤 해설가들이 비록 ‘하나님의 증거'를 수동적인 의미로 설명할지라도,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이 그 반대적인 의미로 생각하였을 것을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 '하나님의 증거'는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으며 다시 말하면, 복음의 가르침은 하나님께서 그 저자이며 증인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제  ‘말씀' 과  '지혜'를 구별하고 있다. 이것은 내가 앞에서 말한 것을 확증하고 있으며, 그가 말하는 것은 단순한 공론(空論)이 아니며, 인간 학문의 전체 문화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2.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직정하였음이라." ; 헬라어 '크리내 인' 이 때때로 '에클레게인',곧  뭔가 가치 있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을 의미하므로, 만일 그것이 그 문장 구조(헬라어)에 일치하기만 한다면, 나의 번역이 적절한 번역이라는 사실을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아무도 부인하지 않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그것을  "나는 어떤 지식의 일부도 귀하게 평가하지 않는다” 고 고친다면, 거기에도 어떤 무리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뭔가 빠진 것을 보충하여 넣는다면, 그 문장은, 이렇게 아주 잘 될 것이다.  “나는 나 자신의 노력으로 무엇을 알려고 하거나, 단순히 지식을 얻기 위한 것이 제일 중요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그리스도 이외의 것을 지식이나 혹은 지식의 내용인 것처럼 결코 생각치 않음을 확고히 밝힌 다른 해석을 즉석에서 반대하지는 않는다.  만일 그렇다면 헬라어 전치사  '안티' 가  자주 그렇듯이 보충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첫번째 해석이 옳든지 아니면 두번째 해석이 더욱 옳든지 간에, 그것은 결국 이렇게 된다. "내가 언어 구사력이 부족하고, 또 더 세련되고 정교한 화술(話術)을 갖지 못한 이유는 내가 그런 것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며 사실상 나는 그런 것들을 무시한다.  오직 나의 유일한 관심은  한 가지 — 곧 그리스도를 소박하게 전파하는 것 뿐이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이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에 관하여 십자가 이외에는 아무것도 선포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그 겸손이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데서 제외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것은 이런 말과 같다. 즉  ‘십자가의 불명예가 내가 그리스도를 구원의 원천으로 우러러 보는데 조금도 방해가 되지 않으며 또 나의 모든 지혜가 그리스도 안에 집약되어 있음을 발견하는 데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지 않는다.  — 교만한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멸시하며, 십자가의 치욕 때문에 그를 배척한다.'  이 짧은 귀절은 '원인에 추가 '아욱세一신' 하는 방법으로써 그 오만한 교사들을 더욱 초조하게 하는데 이 교사들은 이미 그리스도에게 잘못된 생각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대망(大望)은 뭔가 더 고상한 어떤 지혜로 말미암아 그들의 명성이 높아지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귀한 성구이며, 우리는 여기에서 신실한 사역자들이 무엇을 가르쳐야 하는 것을 배울수 있고, 또 우리가 우리의 생애를 통하여 배위야할 바를 배우게 된다. 이것과 비교할 때, 세상의 다른 모든 것은 배설물로 여겨진다

 

 "3.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며~~~" ;  바울은 앞에서 간단히 언급 하였던 것을 여기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 데, 즉, 사람들의 눈에는 그가 탁월한 인물로 보일만한 어떤 훌륭한 점이나 특별한 것이 없다. 그러나 그는 바울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게 하는 그의 사역의 명성을 과소 평가하려는 그런 방법으로 그의 적대자들이 찾는 것을 그들에게 양보하고 있다. 그는 인간적으로 보면 보잘 것 없고 겸손하기 때문에 아무 영예로울 것도 없는 사람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그는 인간의 어떤 도움 없이도, 그렇게 많은 사역을 하는 그의 능력에 있어서 하나님의 능력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스스로의 명성을 얻는 교만한 사람들이 오직 자기를 자랑하기에 여념이 없을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헛된 과시에 놀라고 있 는 고린도 교희 교인들에 대하여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렇게 희상하는 사람은 그들 가운데서 많은 효과를 가져야 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자신의 발전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적인 아무 자질도 갖지 못하였으며, 또 그 것으로사람들의 호감을 살 수도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의 설교를 도와주신 놀라운 그의 성공을 보았던 것이다. 더구나, 참으로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의 설교가운데 임재하심올 보았으며 그들의 두 눈으로 그 사실을 보았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바울의 소박함을 무시하고 뭔가 더 장엄하고 세련된 그의 형태의 지혜를 광적(狂的)으로 사모하면서 생명의 성령보다 잘 꾸미어 가장을 한 외형적인 어떤 모습에 사로잡혀 있으므로, 이런 그들이 허식을 사랑하는 것은 너무 분명하지 않는가?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은혜를 한번 체험한 그들이 하나님의 능력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무엇보다 먼저 그들의 마음을 두드리고 있는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다. 여기서 그리고 이후에도 몇번 나타나는 데  '연약성에 의하여 바울이 일반적으로 의미하는 바는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데 있어서 어떤 사람의 위치와 위업에서 무엇이나 깎아 내릴 수 있 다는 것이다. 두려움과  공포는 이  약함의 결과이다. 그러나 이 두 낱말을 설명할 수 있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그 한 가지 설명은, 그가 계속적으로 맡고 있는 이 과업의 크기를 생각하면서, 그는 불안해 하고있으며 그 책임을 면하기 위하여 대단히 큰 염려를 갖지 않는 것도 아니다. 다른 또 하나의 설명은  그가 많은 위험으로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그는 계속적인 두려움과 끊임없는 불안에 싸여 있다는 것이다. 

 

그중 어느 하나가 그 문맥에 아주 적절한 것인데, 나는 두번째 것이 더 간단하다고 생각한다. 참으로 이런 겸손은 주의 종들에게 적절한 것이며  따라서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고, 다른  한편으로 경외심으로 그 어려움과 그 과업의 , 탁월성을 바라보면서, 그들은 경외하는 마움으로 그일에 접하고, 두려움으로 종사하게 될 것이다. 자신(自信)을 가지고 임하는 사람들과 오만한 기분으로 덤비는 사람들 혹은,그들이 그 일과 대등한 것처럼 무모하게 하나님의 말씀사역을 행하는 사람들은 참으로자기 자신도 모르고 또 그 일의 본질도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두려움을 연약함과 결합하였는데, 연약함은 무언가 경멸의 대상이 될 수 있으며, '여기서 두려움' 이 위험과 어려움에 관계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이 두려움은 사실이 증명하는 것처럼, 바울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역을 이루는 것을 방해하는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주  분명하다.  하나님의 종들은 자신들을 위협하여 오는 위험을.깨닫지 못할 만큼 그렇게 어리석지도 않으며, 또한.그 위험의 영향을 받지 않을 만큼 그렇게 무감각한 사람들도 아니다. 결코 그렇지가 않다!  사실 그들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이유 때문에 심각하게 깨닫게 될 것이다.

 

(1) 즉, 그들이 비천한 것을 알기 때문에 그들은 오직 하나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게 된다.

(2) 그들은 참 자기 부정을 배우게 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라고 하여 불안감을 갖지 않은 것은 아니며, 다만 그것을 조절하여서 위기 속에서도 겁내지 않았으며 이렇게 하여 그는 불굴의 인내와 힘으로 사단과 세상의 모욕을 견디어 낸 것이다.  한마디로 하면 모든 어려움을 저항력으로 뚫고 나간 것이다. 

 

"4.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  그가 '지혜의 권하는 말'이라고 말할 때,  바울은 그것을 진리보다 기교를 부리려고 애쓰고 노력하는 웅변술을 나타내는 것을 뜻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는 인간의 마음을 사로잡는 예리한 표현력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인간 지혜에 대한 설득력을 말하는 데 있어서 정당하다. 하나님의 말씀은 그 위엄으로 우리를 강권하시는데, 강력한 힘으로써 그 말씀은 우리를 순종하게 한다. 다른 한편 인간의 지혜는 그 매력을 가지고 있 는데 그 매력으로 이 지혜가 교묘하게 환심을 사며, 또 화려한 장식을 한다.  말하자면 인간의 지혜는 이런 것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바로잡는 것이다. 이것을 대항하여 바울 사도는 대부분의 해설가들이 기적이라고 정의하는 ‘성령과 능력의 증거'를 제시한다.

 

그러나 나는그것을 광범위한 의미로 해석한다. 즉 하나님의 손길은 사도들을 통하여 모든 방법으로 능력있게 나타나도록 그 능력의 손길을 뻗치고 계시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성령의 능력에 대하여 환치법 '카다 휘 팔라게 엔' 을 사용함으로 ‘성 령과 능력' 을 나타낸다고 보이거나, 혹은 성령의 임재가 그의 사역에서 어떻게 분명히 나타나는가를 기적과 결과들을 통하여 확실히 나타내려고 ‘하는 것 같이 보인다. 그가  '아포데 익 시 스' 라는 단어와 증거 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적절하다. 우리의 어리석음·때문에, 우리가 하나남의 사역을 자세히 보았을 때도, 마치 하나님께서 열등한 도구를 사용하시어 하나님의 능력이 많은 베일로 가리위진 때처럼 되어서, 우리에게 분명하게 나타나 보이지를 않는다. 다른 한편 바울의 사역을 격려하면서, 어떤 인간의 힘이나 세상적인 도움이 전혀 작용을 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의 손길이 뻗치어서, 말하자면 하나 님의 섭리의 손길만이 나타나서, 분명히 하나님의 능력이 더욱 선명하계 나 타나게 되는 것이다.  

 

"5.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있지 아니하고……" ; 여기서 ‘있다' 는 말은 ‘존재하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이 은혜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사실로부터 그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지혜에 의존함이 없이 그들 가운데 계신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 위에서만, 그들의 믿음이 그 기초를 세우는데, 이것은 사람이 아닌, 하나님 위에 기초를 둔 것이다.  만일 사도 바울의 설교가 유창한 웅변술에 의하여 유지되었다면, 그는 더 탁월한 웅변가에 의하여 타도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더구나, 웅변가의 화려한 웅변에 의존하는 그런 진리라면, 아무도 그것을 참 진리라고 하지 않을 것이다. 참으로 진리는 세련된 웅변에 의하여 도움을 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진리가 웅변에 좌우되는 것은 아니다. 다른 한편 그 자체로서 확립될 수 있고, 모든 것을 유지하기에 독립적인 것은, 더 능력 있는 것임이 틀림없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의  능력이 그 안에서 빛나고 있으며,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세상의 어떤 도움도 필요로 하지 않는 바울의 설교에 대한 추천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그러므로 바울의 설교가 하나님의 권위를 부여받고 있다는 사실을 그들이 알 때에, 그들이 그의 설교를 배척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한편, 사도 바율은 여기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믿음에 대하여 말하는 이런 방법은 이 문장이 만인에 게 다 적용된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 우리는 믿음의 특징이 하나님 안에서만 있는 것이며, 인간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믿음의 확신은 대단히 위대하므로, 그것은 지옥의 모든 책략이 습격한다 할지라도 붕괴시키지 못할 것이며 신실하게 잘 이기고 모든 공격을 견뎌 낸다  이것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것을 확고하게 믿지 않으면, 그리고 우리가 믿는 것이 인간의 어떤 날조가 아니라는 것을 확신하지 않는다면 도저히 가능 할 수 없다.  그러나 믿음이 적절하게 하나님의 말씀 위에만 기초하고 있을지라도, 이 두번째  후원을 추가하는 것 ----곧 믿는 사람들이 그들이 듣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 기원을 하나님께 두고 있다는 그 능력의 결과에 대하여 아는 것---은 적절한 것이 못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