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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전2:16)

1. 성경 (고린도전서2:6 ~ 16)
그러나 우리가 온전한 자들 중에서는 지혜를 말하노니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또 이 세상에서 없어질 통치자들의 지혜도 아니요 (6)오직 은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말하는 것으로서 곧 감추어졌던 것인데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7)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 (8)기록된 바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9)오직 하나님이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까지도 통달하시느니라 (10)사람의 일을 사람의 속에 있는 영 외에 누가 알리요 이와 같이 하나님의 일도 하나님의 영 외에는 아무도 알지 못하느니라 (11)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12)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13)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14)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15)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주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1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6.  우리가 .....  지혜를 말하노니" :  바울 사도는,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이나 무지한 사람들이 교양이 없이 맹렬한 기세로 지혜를 비난하는 것처럼 그런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그가 순수한 지혜를 가졌다는 사실을 덧붙이고 있다. 그러나 이것온 판단력이 있는 사람만이 평가할 수 있는 것이다· 그는 '온전하다’는 말을 충만하고 완전한 지혜를 가진 사람들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라, 건전하고 타락하지 않은 판단력을 가진 사람둘에게 적용하고 있다. 헬라 사람들이 ,'텔레이오스' 라고 항상 번역하는 히브리어는 ‘전체' , '완전한' 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나 그는 겸하여 그의 설교에 호응햐지 않는 사람들을 책망하고, 그것이 그들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나의 설교가 어떤 사람에게 적용되지 않는다면, 그들이 곡해하고 타락하였다는 사실을 그런 방법으로 충분하게 증거하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건전한 사색과 적절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언제나 그것을 최상의 지혜로 인정할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한편 바울의 설교가 모든 사람들에게 적용된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항상 정당한 평가를 받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그가 건전하고 공평한 판단력에 호소하는 이유인데 ,  그는 세상에 무관심하여 순수한 지혜인 교훈만을 선포하고 있다.

 

'우리가 말하노니'라고 말함으로써, 그는 어떤 사람이 그가 알려지지 않은 것을 자랑하고 있다 고 항의할까봐, 놀라운 지혜의 훌륭한 실례(實 例)가 알려 지도록 하고 있다.

 

"이는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 ;  그는 어떤 사람이 교훈에는 후원자가 거의 없고, 참으로 그 교훈은. 가장 탁월한 지적 능력의 소유자들로부터 멸시를 받는 것이라고 항의할까봐 복음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미 언급하였던 사실을 다시 되풀이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발적으로 그런 항의가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고 있다.  그라나 그런 방법으로 그는 자신의 입장을 그렇게 하도록 어느 일부분도 양보하지 않고 있다.

 

"또 이 세상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니요." ;  이 세상 관원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그는 재능이 있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뛰어난 사람들을 지칭하고 있다. 때때로 세상에는 그 사고형이 날카롭지는 못하지만, 그들의 인품 (人品)때문에 존경을 받는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외적인 모습(larvis)에 조금도 놀랄 것이 없으며, 사도 바울은 그들이 모두 멸망하고 소멀될 것이라고 덧불이고 있다. 영원한 의미를 가진것이 사라지고 소멸될 권세를 가진자들이 자기 자신마저 영존(永存)하지 못할 것을 의뢰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즉, 하나님의 나라가 나타날 때, 이 세상 지혜는 사라지게하며, 일시적인 것은 영원한 것으로 변화한다. 천국과 부패하지 않은 하나님의 왕국과 비교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7. 비밀한 가운데 있는 하나님의 지혜" ; 이 세상 관원들이 복음의 교훈을 귀하게 평가하지 않는 이유로 그가 제시한 것은, 이 복음의·교훈이 신비에 싸여 있으며, 또 같은 이유로 감추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복음은 인간의 영적 통찰력 이상으로 높은 것이기 때문에 세상에서 지적으로 최상위에 있다고 인정받는 사람들이 그들로서는 그 수준에 이를것갈이 보일지 모르나, 그러나 그들은 결코 복음의 교훈의 경지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한편,  그들은 복음의 교훈이 그들의 발 밑에에 패배한 것처럼 그 중대성을 무시하고 있다. 그 결과 그들이 복음의 교훈을 멸시하면 할수록, 그들은 더욱 복음에서 멀어지며, 그보다도 더 불행한 것은, 그들이 '복음의 교훈'에서 멀리 떠났기 때문에 그들은 그 복음을 도저히 깨달을 수 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광을위하사 만세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  복음이 감추어진 것이라고 말하였기 때문에,  이것을 들으며 그 어려움에 놀라게 되는 믿는 사람들이 이 복음으로부터 떠나 낙심할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는 위험에 직면하여,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 복음에 기쁨을 갖도록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그것을 주셨다고 선포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이 감추어진 지혜는 인간에게 아무 관계가 없으며, 또 그것은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하기 때문에 인간이 그것을 고찰하는 것도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하자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하나님이 영원하신 뜻에 의하여 그것이 우라에게 알리어진 것이라고 가르친다고 나는  말한다.

 

그러나 그는 뭔가 더 중요한 것을 그의 마음에 품고 있다.  즉, 조용한 비교에 의하여 그는 더 분명한 빛 안에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우리에게 주어진 은혜를 제시하였고, 율법아래 살았던 우리 선조들보다도 더 나은 신분으로 우리를 만들어 주었음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로마서 마지막 장에서 더 자세히 밝혔다. 첫째로 그때, 그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예정하셨는가로부터 논증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어떤 목적으로 모든 것을 다 예정하셨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정하신 복음을 들음에 있어서 우리는 아무것도 잃지 않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 하나님은 친히 우리의 능력에 맞도록 하나님을 우리에게 적응시키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사야가 말한 것이 여기에 적용된다(사 45 : 19). "나는 흑암한 곳에서 은밀히 말하지 아니하였으며 야곱 자손에게 너희가 나를 헛되이 찾으라 이르지 아니하였노라.

 

둘째로 복음에 끌리도록 하기 위하여, 또 우리가 복음을 깨닫기를 열망하도록 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또한 하나님의 목적은 우리를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그 복음을 우리에게 주셨다고 결론 짓고 있다. 이 말씀속에서 역시 사도 바울은 우리의 선조들과 우리를 비교하고 있는데,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조들에게 그 영예를 주시려 하지 않으셔서 그의 아들이 오실 때까 지 지체하였다고 그는 말하고 있다.

"8. 이 지혜는 이 세대의 관원이 하나도 알지 못하였나니" ;  만일 당신이 ‘그들 자신의 능력으로'라는 말을 덧붙인다면 일반적으로 사람에 대해서 보다 그들에 대해서 더 주장될 것이 없으며, 인간의 겸손에 대해서도 더 이상 말할 것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가장 위대한 것에서 우리의 가장 적은 것 으로 향하는 그런 방법에서 우리가 무엇을 성취할 것인가? 물론 우리는 관 원들이 다론 사람들보다 더 문맹스럽고 무지하기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있 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서 그들만이 총명하고 지혜롭게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더 간단하게 하기를 좋아한다. '에피토폴루', 즉 일반적으로 자주 일어나는 이런 일들에 대하여 보편적인 확언을 잘하는 성경의 빈번한 관례를 따라서 나는 더 간단한 것을 좋아하며, 그리고 역시 단 한번 일어난 '에피 엘라돈', 즉 대단히 드문 그런 일에 대한 보편적인 부정법을 역시 사용한다. 그런 점에서 만일 그 서열에 있어서 다른 사람들 보다도 뛰어난 사람들이 약간 있다면, 그리고 그 사람이 동시에 하나님에 대한 순수한 지식을 소유하였다면 (사도 바울이 말한 것과)부조화는 없었을 것이다. 

 

"만일 알았더면……" ; 하나님의 지혜는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빛나고 있었다.  그러나 관원들이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음으로써 한편으로는 의와 지혜에 대한 명성이 특출한 유대의 지도자들이, 다른 한편으로는 빌라도와 로마 황제가 주도권을 잡을 수 있었다. 이것이 바로 인간적인 표준에 따라 현명하다고 하는 자들의 극단적인 어 리석음을 나타내는 분명한 증거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이 논증은 약하게 보일 수도 있다. 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의 진라를 생소하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보는 것이 아니라, 고의로 그 진리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보아야 하는가? 설령 그런 공공연한 반역을 우리가 보지 않는다 하더라도, 성령을 거역하는 다른 죄와 하나님에 대한 고의적인 고집을 보게 되는데, 어느 때 인간이 알면서 의식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반대하며, 그 말씀에 대항하는 반기를 드는가?  이것이 예수께서 바리새인들과 그리스도를 알고 그와 연합한 자들(요 7 : 28)을 증거한 이유인데, 그가 그들의 무지의 변명을 재거할 때, 그리고 그를 핍박하는 불경건한 자들의 잔인성을 비난할 때, 신실한 아버지의 종은 진리에 대한 그들의 증오를 받을 아무 근거가 없어진 것이다.

 

 나는 무지 (無知)에 는 두 종류가 있다고 대답한다. 하나는 무모한 열정에서 일어나는데, 이것은 선(善)을 단순히 배척하지는 않지만, 그러나 그것을 악이라고 생각한다. 무지 때문에 아무도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 앞에서 악한 양심에 대하여 비난을 받지 않지만, 거기에는 위선, 자만, 조롱이 항상 혼합이 된다.  그러나 때때로 판단력과 이해력이 인간의 마음 속에 ·숨겨져 있어서 다른 사람에게 뿐만 아니라 자신에게도 분명히 무지임이 나타난다. 바울도 역시 그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 전에는 그와 꼭 같은 상태였다.  그가 그리스도를 미워한 이유는 율법에 대한 왜곡된 열정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그는 위선이 없다거나, 자만심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 앞에서 용서받을 수 있었을는지 모른다. 그러나 이런 악들은 완전히 무지와 우매함으로 묻혀 있어서 그 자신 이것에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았거나 또 그 사실을 느끼지도 못하였다. 다른 또 하나의 무지는 단순한 무지보다는 더 광적이고 혼란스러운 것이었다. 하나님께 대항하여 일어 나는 사람들은 말하자면 격분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면서도 깨닫지 못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일반적인 결론은, 불경건한 자들은 항상 어리석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바로 문제이다. 즉, 때때로 무지가 악을 덮어버리기 때문에 인간이 그 악을 마치 그 자신 감각이 없는 사람처럼 깨닫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선의(善意)로 자신들을 속이는 사람들의 입장이며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야말로 어리석은 환상이다. 때때로 악은 우위(優位)를 차지하여 양심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인간이 맹렬히 타는 불길과 갈이 그런 악으로 돌진하여 들어가게 사도 바울의 말은 놀라운 것이 못 된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인간을 무지 속에서 현혹시키어 방황하게 하는 인간적인 그런 방황의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였다. ,....

 

"9. 기록된바·…·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 귀철, 이사야서 64장 3절(70인경 4)에서 인용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그 의미가 분명하고 쉽기 때문에 해석가들은 그것을 설명하는 방식으로 약간 그렇게 한다. 그러나 더 자세히 관찰하여 보면 두 가지 대단히 다른 큰 차이점이 나타난다. 그 첫째는 바울이 사용한 말로써 그는 선지자(이사야)의 말과 일치하지 않고 있다.  둘째는 바울이 그 선지자에 대한 다른 귀철에 관계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따라서 그의 진술이 잘못 적용되고  있는 것 갈다. 그러면 우리는 먼저 그 말씀들을 생각해 보자.

 

그들이 모호하기 때문에 해설자들이 그것들을 각각 다른 방법으로 설명하고있다. 어떤 사람은 그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예로부터 사람들이 듣지도 못하고, 그들의 눈으로 깨닫지도 못하였으며, 당신을 제하고는 신을 보는 눈을 갖지 못하였다. 당신은 그를 찾는 사람을 향하여 그런 방법으루 행동하셨다' (facial).

 

다른 사람들온 그 말을 하나님께 대한 설명으로 해석한다. "오 하나님 당신을 제외 하고는,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위하여 당신이 행하신 것을 보는 눈도,  듣는 귀도 없읍니다.  그 선지자의 악에 대한 문자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예로부터 인간은 듣지도 못하고 그들의 귀로 깨닫지도 못합니 다. 당신 외에는-'신(혹은하나님)을 보는 눈이 그들에게는 없으며, 그는 그를 찾는 자를 위하여 행 할 것입니다(혹은 준비 할 것 입니다)' . 만일 우리가 '엘로힘 ; 하 나딥' 을 대격(對格)으로 읽는다면 관계대명사-who(그)가 보충되어야 하였을것이다.  그리고 얼핏 보기에 이 해설은 선지자의 문장에 더 적철한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그 다음에 나오는 동사가 3인칭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 바울이 의미하는 바와는 거리가 더 멀고, 그것은 다른 이유들보다 더 큰비중을 우리에게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바울의 입을 통하여 자신을 나타내신 것울 보면서 하나님께서 이사야에게 기록하도록 하신 하나님의 성령보다 더 확실하고 신실한 해설자가 누구이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악한 자들의一불의한 비난을 격퇴하기 위하여, 나는 히브리어 구문의 성격이 선지자의  참 의미인 이것을 허용한다고주장한다. 즉,  ‘오 하나님, 눈이 보지 못하고, 귀가 듣지도 뭇합니다. 그러나 오직 당신만이 홀로 당신을 찾는 자들을 위하여 항상, 역사하심을 알고 있읍니다. '갑작스런 인칭의 변화는 어려울 것이 없다. 우리는선지자들이 보통 그렇게 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으므로, 그것에 구애받을 필요는 없다. 만일 첫째 해석을 어떤 사람들이 더 좋아한다면, 그들은 우리를 비난하는 입장에 있지 않을 것이며, 또는  사도가 그 말씀의 간단한 뜻으로부터 분리되는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행 동학다' ( '어 떤 사람이 그렇 게 행 동하다’ 라고 읽 도록 만든다)라는 동자와 유사한 단어를 첨가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그 들이 학는 것보다 덜 보보충을 하는 것이다. 선지자가 ‘사람의가움속에 그런 것들이 들어갑'에 대하여 따르는 어연것을 포함시키지 않을지라도, 그 구(句)는 ‘당신을 제외한'이라는 절로부 터 다론 특칭이 확정되는 것은 아니냐 왜냐하면 그가 지식을 하나님에게만 돌리기 때문에, 그는 그것으로부터 인간의 육체적인 생명을 배제할 뿐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모든 능력도 배제한다. 그러므로 그 선지자가 시각과 청각에 대해서만 언급을 하고 있을지라도, 그는 함축적으로 마음의 모든 능력을 다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그것들은 두 가지 서체로서 이 매개체를 통하여 우리가 이해에 도달하는 그런 일들에 관한 지식을 알 수 있다.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이란 어구(語句)를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헬라어 번역자들을 따르고 있다. 헬라어 번역자들은 한 서신에서 다른 서신으로의 유사성을 잘못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번역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성구(聖句)의 요점에 대한 차이를 만들지 않으므로 그는 보편적인 해석에서 떠나기를 원치 않았다. 우리는 거듭 거듭 그가 받아 들일 수 있는 본문에 대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말씀이 동일하지 않을지라도, 의미의 전정한 차이는 없다.  이제 나는주제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 귀절에서 선지자는얼마나 놀랍게도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이 필요로 하실 때, 그의 백성들을 도와주시는 것을 기여하며 또 경건한 자들에게 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다는 것을 선포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바울이 여기서 논의하고 있는 영적 교훈과 영생의 약속과 함께 이것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  이 문제에 대한 해답으로 세가지 방법이 있다.

 

선지자가 언급한 지상의 축복이, 이것들을 일반적인 진술로 생각함우로쩌 꿀어들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것이며, 믿는 자들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영 적 축복을 참으로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서 매일 믿는 자들에게 내려주시는, 단순히 하나님 의 은혜로 이해하기를 좋아한다. 그것들을 취급하는 데 있어서 우리는 항상 그들의 외형을 떠나서 생각하여야 하며, 또 그들의 원인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더구나 그 원인은 하나님의 값 없으신 은혜이며, 이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은 우리를 그의 양자 중의 한 사람이 되게 하신나 .. ' 이런 문제들을 적철하계 할당하기를 원하는 사람은, 그 은혜를 단순히 보 아넘길 것이 아니라, 이 모든 것에 하나님 아버지의 은혜라는 옷을 입히며, 이런 방법으로 그는 일시적인 은혜에서'영생으로 인도함을 받게 된다. 이것은 적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 논증을 전개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운 것이다·. 만일,안간의 마음이 하나님의 지상적(地上的)인 은사를 쳐도합 수 없다면, 어떻재 그 높흡처국의 용혜를 감히 측량할:수 있겠는?~_? 논리 나 나는 이미 그 해석。! 나블 러고교 만족시켰다는 ~},~~· 보여주었다. 

 

"10. 오직 하나님이……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  모든 인간이 소경이며, 하나님의 천심에 이르는 인간의  마음이 박탈당 하였다고 결론을 내리면서, 사도 바울은 이제 신실한 자들이 우매함으로부터, 곧 하나님의 영광이 성령의 특별 조명으로 그들을 인도하심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신비를 깨닫는 인간의 마음이 어리석고 의심이 많을수록 하나님의 성령의 계시로 나타나는 우리의 믿음은 더욱 확실하게 된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축복으로 바꾸시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선하심을 깨닫게 된다. 

 

"성령은 모든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  이것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신 계시 안에 믿는 자들이 더 안전하게 거 하도록 하기 위하여 믿는 자들에 대한 격려로서 덧붙여지고 있다. 그것은 마치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을 증거로 갖는 것으로 만족하도록 하자. 왜냐하면 하나님 안에서 성령이 너무 깊어서 깨닫지 못한다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통달하다’ 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깊은 것' 이라는 말을 여러분은, 우리가 조사하지 못하도록 된 비밀스런 판단으로 이해하여서는 안되고, 구원의 전체 교훈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성령으로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성경에서 우리에게 무익하게 재시될것이다.

 

"11.누가 알리요····" ; ·바울은 여기서 두 가지 일을 가르쳐주기를 원하고 있다.

(1) 복음의 교훈은 성령의 증거에 의하여서만 이해될 수 있으며,

(2) 성령으로부터 그런 증거를 가진 그런사람들의 확신은그들이 믿는것을그들의 손으로 실제로 만진 것 처럼 그렇게 확고하고 강력 한 것이며 , 이것은 성령은 신실하고 정확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것을 우리의 영적 유사성(sim ilitudine)을 통하여 증거하고 있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들은 그 자신의 생각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른사람들은 그 사람의 마음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모른다. 비슷하게 하나님의 목적과 뜻도 그렇게 모든 사람들에게 감취어져 있으며 누가 하나님의 의논 대상이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바로 이것이 ‘지성소술로서, 인간이 감히 근접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성령께서 친히 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주시고, 또 만일 우리 인간의 이해력으로는 깨달을 수 없는 것들을 우리가 분명히 깨달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다면, 주저할 것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성령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하나님에 관한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한편, 이 유사성은 모두가 적합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말이란 인간이 각각 자신의 생각과 사상을 전달하는 독특한 정신적 작용이기 때문에, 그러므로 인간은 이 방법을 통하여 서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잘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 못하는 것일까?  위선과 거짓말로써 인간은 때때로 분명하게 나타나기보다 불명료하게 되며, 따라서 그들의 참 마음의 상태는 하나님의 말씀이 절대적 진리이며, 또 하나님의 살아있는 형상이신, 그 하나님의 방법대로가 아닌 상태가 되고 만다. 그러나 우리는 사도 바울이 어느 정도까지 이 유사성을 나타내기를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다른 사람이 도저히 알 수 없는, 인간의 내면적인 이 생각은 본인 자신만이 오로지 알고 있을 뿐이다. 그가 다론 사람을 이해시키는 언어를사용하지 않는다면, 그사람도 타인에게 그가 참으로 뜻하는 바를 적절하게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가 이 두 가지를 다 이문다면 이 다온 전술에 어떤 차이도 만들지 않을 것이다. 아직도 그 자신의 영이 참으로 그것과 가까운 그런 경 우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 사이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한편 인간은-다른 사람을 이해한다. 다른 한편, 하나님의 말씀은 연약한 인간의 마음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높 은 경지에 있는 일종의 숨겨진 지혜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성령제서 우매한 인간의 눈을 열으실 때까지,j 어두음에 빛을 비추시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속에있는 영(靈), 여기서 우리는사람의,영이 이해력의 영(anima) 웅의미한다는 접에 유의하여야 한다•I 만일 사도 바울이 인간의 지식이 능 려 구 자체이고, 영이 아님을 깨닫는 것이라고 말하였다면 그는 정확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영이 이해의 능력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  사도 바울은 대조법을 사용합 으로써, ,그가이미 말한, 확신을 더 굳히고 있다. 그는 ‘우리가 받은 게시 의 영은제상에 속한 것이 아니므로, 법처럼 제상 일에-~대이거나, 무이한 것을 따르는사람, .또 방황하고 유동적인 사람은'이제 변덕이 십하거나 또 는 우리를 의혹이나.·혼란에 빠뜨리는 사람이다, • ~러나 하나님으로부터 온 사람,· 그리고 모든 하늘 나라의,r일을 생각하는 사람은 참되고 불변의 전 리를 갖추었으며, 모든 의혹의 가능성을·다 버린 사람이다’라고 말하고 있 다. ' 이것이 바로, 믿는 사람들이 계속적인 혼란의 상태에 있다는 궤변가들의 국악한 본질을 논박할 수 있는 적철한 귀철이다. 그들은 믿는 사람들의 마 음 속에, 그들야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살든지 아니든지 간에, 의혹을 불러 일으키기를 원하고 있으며, 그들이 인정하는 유일한 구원의 확신온 도덕이 나, 그럴듯한 어떤 추리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이렇게 합으로써 그들온 믿음을 두 가지 방법으로 파멀시키고 있다.

 

첫째로:' 그들은 만일 우리가 온 혜의L상태에 있는가 의십하게 되기를 원하고,, 그리고 다시, 그들온 우리 자 신의 최종적인 견인에 대하여 확신을 갖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그러나 여 기서 사도 바울은 일반적인 방법, 죽 선택받은 자들이 성령의 확신에 의하 여 그들이 영원한 구원의 소망을 갖도록 되었다는 사실을 일반적인 방법으 로 알려주고 있다. 만일 그 궤변학자둘이 그들의 원리를 계속 고집하기를 원한다면,i그들은 거룩한 성령의 선택자들을 탈취하고 성령 그 자체마저도 불확신속에 빠뜨려야 될 것이다•

 

이 두 가지는 모두짜도바울의 가르침에 공공연하계 배치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Ci ' '-성령에 의하여, 양십이 ,우리의 양십을 향하시는 하나님 의 선하신 뜻의 분명한 증거인 믿음의 확신을 알며, 이것이 분명히 하나님 을 아버지로 부르게 한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우리의 믿음을 세상 위로 높아 들어 올리고. 있으며, 그 상승된 위치로부터 그 믿음이 세상의 모든 욱 신적인 교만을:내려다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얼마나 무업하게 인간의 지혜가 그 지혜를 자랑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믿음 이 항상 혼들리고 주저하계 될 것이다. 이 인간의 지혜가 얼마나 오만한지, 하나님의 아들이 교만하고 영웅적인 대오만의 반대 아태 밟히기도 하였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들을 알기 하려 하심이라." ;  '알다’라는 단어는 신뢰에 대한 확신올 더 갖게 하기 위하여 사용되었 다. 그러나 그것이 자연적인 방법으로나 또는 우리의 정신적인 이해력에 위 하여 획득되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계시에 의하여서만 얻어지든것이다. 바울은 ‘이런 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다’라고 말하고접있다. 그 것들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죄의 용서를 통하여 하나님께 우리가 화목 됨으로써 우리가 얻게 되는 축복이며, 이 축복으로우리가 영생의 소망을갖 계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 더구나. 우리는 우리를 중생케 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 자산이 성화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며, 또 우리가-하나님과합 께 살기 위하며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지고 있는 것이다. 사도::바울은 에 베소서 1장 18철에서 그것을 이렇게 요약하고 있다. '그의 부르십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13.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 직 성령의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  사도 바울은 자신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 는데, 그는 아직도 그의 사역의 위임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그 사역의 가장 위대한 일들, 곧 성령의 가르치십, 우리의 구원에 관한 모 든 것,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귀한 그리 스도의 보화들에 대 한 은밀한 계 시로 이루어졌다고 말할 때, 그것은 그 자신의 섣교에 대 한 놀라운 찬사이 다. 그는고린도교회가그것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를 깨닫도록 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다. 한편 그는 앞에서 그가 한 양보로 되돌아오고 있다. 즉 그의 설교는 어떤 말의 수식으로 미화(美化)되고 하계 아름다운 문체를 가전 것도 아니고, 있지도 않으며, 또 찬란 을 설교하는 것으로 그 다만 그가 성령을 동하여 배운 것 자신 만족하고 있 다고 사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사람의 지혜의 가르친’ 이란 말은 인간의 지식의 향취를 나타냄을 사도 바 울은 의마하며, 또 수사학자의 법칙 0 취자들의 찬사르 -로 세련된 것을 나타내거나, 혹은 청 므 받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x 있음을의미한다. }랑스럽계 철학적으로 과장하고 공허하고 허식적이기보다'그러나 ‘성령의 가르치신 것'이란 말로써 사도 바울은, "C' 신실하고 단순한 문체에 적합한, 그리고 성령 의 위엄을 보존하기에 E 1 적절한 그런 뜻을 의미하고 있다. 말을 잘하기 위해서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지혜가 여지로 또 공중의 찬사를 우리가 받지 못하게 할까봐 신경을 곤두세운다.'그러나 사도 바울의 섣교·방법은 성령의 능력이 그의 설교 안에서 나타나도록 하는 그런 방법이었으며, 어떤 의적인 지원을 받지 않고, 순수하고 단순한 방법으로 설교를 하였다.

 

"신령한 일은 신령한 것으로~~~~~~~" ;  '나 는헬라어 동사 <1urKpeJJE<10a,(쉼 크리 네 스다이 )가 여 기 서 는 aptare, 즉 ‘조정 하 다'' 혹은 ‘응용하다’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는 접을 의십하지 않는다. 왜 냐하면 이 것 은 때 때 로 그 단어 (Budaeus가 Aristotle로부터 의 인용에 따라)의 의미이기 때문에, <1ur£ptµa(쉼크리마) 여시 무언가 ‘연합하다,' 혹은 ~데 묶다! 동의 뜻으로 사용되 고 있다• 그리 고 분명 히 그것 은, 다음 사람들이 그것을 ‘비교하다’로 해석하는 것보다 바울의 문장에 훨씬 더 적철하다. 그러므로 그가 그 말들을 실재에 적응시킬 때, 신령한 것은 신령한 것으 로 적용시키거나 혹은 결합시키고 있는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그가 신령 한 하늘의 지혜를 언어의 겁소성과 적철하게 결합시키고 있으며, 그.런 방법 으로 성 령 의 그 능력이 친히 공공연하게 나타나고 있 다. 한편 사도 바울은, 과장된 문체(文體)와지혜를 과시하면서, 인간의 갈채받기에 급급히l-하며 마 치 순수한 전리가 완전히 부족하거나, 어울리지 않는 허식으로 하나님의 영 적 교훈을 더럽히려는 그런 사람들을 질책하고`있다. .

 

"14. 육에 속한 사람 .." ;  사도 바울은 ‘육에 속한 사람• (animalis homo)이 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고 말하듯이 비열한 욕망에 사로잡 혀 있는 사람이나, 또 감각적인 것을 추구하는 사람을 나타낸다고 의미하지 않고, 인간적인 능력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그 반 대 용어를 대조시킴으로써 더욱 뚜럿이 나타나는데, 그는 여기서 ‘육에 속 한 사람’과 ‘신령한 사람’을 대조시키고 있다. 신령한 사람은 그의 마음이 성령의 조명의 인도를 받는 사람을 나타내고 육에 속한 사람은 그들이 부르십을 받을 때에 육신처인 상태 그대로(in puris naturalibus) 남아 있는 사 람을 의미합이 룰림없다. 영(anima)~..:.유신으로 들러싸여 있다 •. 그러나 성 령 께 사 초자연적 인 은사(ex dono_s~pernaturali)루 나타나신다. . 사도 바울은 그가 전에 다루었던 문재를.다시 제시한다.,.페냐하면 약한자 들을 넘어지게 할 수 있는 장애물, 곧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멸시하면서 대 적하였던 사실 때문에 그 장애물을 제거하기 위해서이다. 그는 무지(無知) 로부터 오는 멸시에 대하여 우리가 마음을 쓰지 말 것을 가르쳐 주고 있으 며, 만일 우리가 태양의 광채로부터 우리의 눈을 갑지 않는다면, 구 장애 물이 우리를 믿음의 대열에 서지 못하도록 방해하지 못할 것이다. 믿음의 맹 인들은 태양의 광채로부터 눈을 감았기 때문에 그들이 보자.:.못하는 것이 아 닌가 !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를 귀하게 보시고 그에게 특별한 은혜를 베풀 어 주셨는데도 그 은혜를 거철하는 사람은 가장 배은망덕한'사람이며, 그렇 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은혜를 받지 못하며, 대조적으로 그· 상을 받는 사람 이 희귀한 것이다. . ;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깨닫지도 못하나니" ;  바울은 이렇게 말 하고 있는 것 이 다 •. '즉 ‘순수한 인간 수준의 자혜 밖에 못 가전、사람은 봅음의 맛을 깨달을 수 없다. 그러면 어떻게 그 인간적인 수준에밖에 못 미치고 있 는 것일까? 그 이유는 그들의 우매함 때문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것이 복 음의 위업을 감소시킬 수 있는가? 간단히 말하여, 무지한 사람들이 복음을 경멀할 때, 복음의 가치를 그들 자신의 척도로 재면서 다른 사람들의 평 가에 단순히 호응하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복음의 위대성에 대한'논증으 로서 이렇게 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들이 복음을 알지` 못하기 때문 에 이 복음이 멸시당하고 있다 고 가르치며, 또 이 복음은너무 십오하기 대 문에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고, 너무 숭고하기 때문에 인간의 지혜로는 이해 할 수가 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지식으로는 미칠 수가 없고, 그 가 벼운 향취조차도 인간으로는 맛볼 수 없는 이 지혜는얼마나눌말만한 것인 가!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인간이 그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도 어리석 은 것으로 정죄하는 그 사실 때문에 인간의 교만을 은연중에 비난하고 있으 면서도 동시에 .그는 그가인간의 연약함이 영적 이해력을 가질 수 없다고말 할 때, 인간의 마음의 어리석1음보다는 그 연약합이 얼마나 위대하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 . ' 그는 그것이 인간 의지의 고집센 자만·때문일 분 ~~니라, 인간 스스로 신령한 일둘을 이룰 수 없다는 마음의 무력합 때문이타고 가르친다• 만일 ,안 간이 현명하여자길 원하지 않았다고 그가 말했다면, 그는 전리에 대하여 말 하고 있을 분일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그들이 그 능력을 갖지 않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로부러 우리는 믿음이란 우리의 결정에 의하여 좌우되는 무엇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것이라는 것 울 말할 수 있다.

 

"이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 복음의 교훈은 성령으로부터 오게 되는데 이 성령만이 복음의 교훈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참된 해설자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의 조명을 받을 때까지는 판단력에 있어서 인간의 마 음은 필연적으로 혹암일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서 우리가 추· 론할 수 있는 것은, 모든 사람이 본연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이 논증은 실패하고 만다. 물론 우리 모두의 인간 생활에 팔요한 요소인, 말하자면 이성(理性)의 빛이 하나님의'성령으로 부터 왔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그의·자녀들에게만.값있는弓것 이라고 생각하시는 하늘의 지체인 특별 계시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이유 때문에 복음이 누구에게나 구별없이 믿음으로·구원 받을 수 있도록 자유로운 그런 방법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1보편적으로 주어졌다코 생 각하는 그런 사람들의 무지를 용납할 수 있는 근거를 더욱 제공할 수가 없 는 것이다. ’ _, L

 

"15.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 ; 육에 속한1사람의 판단력을 제거 하면서, 사도 바울은 이제 신령한 사람만이 이 문제에 대하여 적철하게혀} 단할 수 있다고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령께시만o'1 하나님을 알며, 하나님의 일과 하나님의 일이 아닌 다른 것들을 분리하는 것이 』하나 닙 특유의 칙무이기 때문이다. 즉 무엇이 하나님의 것인가를`증명하고,.-11 뢰할 가치가 없는 것은 다 제거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뜻은 이렇다. 곧 ‘이 관계에 있어서는 육체의 분벌력이 개입할 여지7} 전혀 없다 ! 하나 님의 신비에 대하여, 거짓에서 진리를 분벌하고, 하나님의 교훈을 인간의 날 조와 구별할 수 있고 또 속지 않는 그런 확고하고 건전한 하나님의 신비에 대한 지식을 가전 사람만이 참으로 신형한 사람이다.' 한편 ‘아무에게도 판 단을받지 아니하는’ 것은 믿음에 대한 확신이 자기들 좋을 대로 하나가 파 멸하고 마는 인간(사실상 인간은 천사보다 더 우월하계 창조되었다는데도) 의 지배력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 대권~權)은 인간에게 칙접으로가 아니라, 신령한 자들이 판단을 할 때 그들의 안케자로잡는 하나님의 말씀에 는 것이며, 이것은 참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기 있 위하여 하나님께 서 '-그들에게선포하신 것이라는 사실에 우리는 주의하여야 한다• 그것은 인 간의 확신이 확고하게되었을 때 일어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인간의 판 단의 불확실성을 초월하기 때문이다. 더구나 판단이라는 말에 주의하자 사도 바울은 그 말을 우리가 전리를깨 닫도목 성령의 조명을 받을 분 아니라, 우리가 진리와 오류 사이의 의혹 속 에 서 방황하지 않도록 하기 위 하여 분별의 영 (靈)을 받고, 또 우리 가 을 피하고 또 어떤 것을 따라야 어떤 것 하는지를 결정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성 령의 조명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누가 신령한 사람이며, 그령계 많은 빛을 받는 사 람을 우리가 어다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e 즉 우리가 항상 많은 무지(無知)로 둘러싸여 있고, 가중하여가는 악의 위험에 빠지기 쉬운 때에,- 더구나 가장 우수한 사람들이 거듭 타락하여 가고또따 멸하여 가고 있는 이때에, 그 해답은 간단하다. 곧 사도 바울은모든 잘못 으로부터 하나님의 성령으로 새롭게 된모든 사람들을 ,그가 말하는 것처럼, 이 능력을 모든 사람들에게 다 의 지성 아란 종교의 교훈을 -l:J 적용시키는 것이 아니고, 그는 단순히-인간 -,-과하는 데 무용할 분이며, 이런 방법에있어 서 판단할 권리는 오직 하나님의 성령에게만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그 자신이 거듭났는지에 따라, 판단하고 또 확신을 갖는다 또 그가 받은 은혜 의 분량에 따라, 올바르게 판단하고 또 확신을 갖는다.--- 그 이상온 결코 될 수없다.  .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  한 자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나는 이미 왜 바울이 신령 씀에만 기초를 둔 믿음의 지 않는가의 이유, 곧 오직 하나님과 그의 말 하는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설명하였다. 느리는 인간의 취향에 따라 유지되거나 또는 몰락 그가 후에 말하고 있는 어떤 다는 것은 이 사상과 선지자의 영 (靈)이 다른 선지자에거~ -,순종한 불일치하는 것온 아니다. 선지자들이 다른 선지자들에게 주의 'E!. 그 순종의 이유는 단순히 각 훈까지 확고하게 남아 있고, 亡기울여, 확인된 하나님의 전리가 최 또 모든 사람들이 그 전리를 받아둘일 수 있기 위하여, 그들의 계A l를 멸시하거나 거철하여서는 안 되기 때룬이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바울은 천지 위에 높이 계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믿음의 찬 리를 나타냄으로써, 이 믿음의 지 려는 것이다•· , I· :I• , 고리가 인간의 판단력을용납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그러나 '휘프 우데노스' 는 말하자면 중성인 ‘아무것도 아닌 것에 의하여'로 읽을 수 있으므로 그것은 어떤 사물을 나타낼 수는 있어도 인간을 나타내는 것은 아니다. 이런 식으로 그 대조는 더 완전하여진다• 즉 하나님의 성령을 받은, 신령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지만, 그가인 간의 지혜나 이성(理性)에 복종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무에게도’ 판단 을 받지 않는다. 그리고 바울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식과 율법, 그리고 인 간의 비난으로부터 경건한 사람의 양십에 아무런 거리껍이 없는 것이다.

 

"16.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  사도 바울은 1 } l=서 40장에서 나타나 는 것을 살펴보고 있는 것 같다 .. 이사야 선지자는 여기서 이렇게 묻고 있 다. "누가여호와의 신을 지도하였으며 그의 모사가 되어 그를 가르쳤으랴" (사 40 : 13). 사도 바울 역 시 이 런 방법 으로 이 질문을 사용함으로써 가르 치기를 원하고 있다. 즉 인간의 마음이 복음 속에 나타나 있는 하나님의 온 밀한 뜻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가?

 

"그러나 우리 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  사도 바울이 이 말씀을 믿 는 일반 사람을 지칭하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지, 아니면 성직자들만을 가르 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왜냐하면 어느 경우든 모두가 이 문맥에 다 잘적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바울 자신과 또 다른 신실한사 역자들을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하고 싶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의 종들이 아무 두려움 없이 그들이 전파하는 복음이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입 울 전파할 수 있도록하기 위하여, 인간의 이해력을 초월한, 성령의 인도아 테 가르침을 밭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