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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고전1:24)

1. 성경 (고전 1:18~ 25)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8) 기록된 바 내가 지혜 있는 자들의 지혜를 멸하고 총명한 자들의 총명을 폐하리라 하였으니 (19)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냐 선비가 어디 있느냐 이 세대에 변론가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하게 하신 것이 아니냐 (20)하나님의 지혜에 있어서는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 하나님께서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도다 (21)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2)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3)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24)하나님의 어리석음이 사람보다 지혜롭고 하나님의 약하심이 사람보다 강하니라 (25)

 

2. 받은은혜

2022년 10월에 새벽예배 시에 강론되었던 성경이다. 2024년 6월 13일 새벽에 다시 강론되었다. 12절의 바울에게 속한자, 아볼로에게 속한자, 게바에게 속한자,혹은 그리스도에 속한자 등으로 분파가 발생하여 분쟁이 있음에 대한 바울사도의 강론이 이어진다. 바울사도의 후임자는 아볼로였다. 아볼로는 웅변에 능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12절을 통하여 미루어 추정할 수 있는 것은 개척자인 바울사도를 존경하며 따르는 무리들과 아볼로의 현란한 말솜씨에 매료된 이들과 베드로의 권위에 의존하는 자들과, 우월적인 영적 자세를 취하며 바울의 입장을 대변하는 그리스도파로 분파가 된것으로 보인다.  이런 참담한 소식에 바울사도는 "십자가의 도"를 강론한다. 18절은 매우 강한 논조로 바울사도는 강론하고 있다.  '십자가의 도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말한다. 다른 사도들의 단순한 증거를 간접적으로 책망하는 논조(칼빈주석)임을 느끼게 한다.  오늘을 사는 신자는 강단에서 말씀을 증거하는 주의 종의 현란한 말솜씨에 매료되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사모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을 사랑해야 한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신자들이 생명의 말씀은 알지 못한채로 인간인 목회자들을 추종하고 있는지 모른다.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그리스도 인으로 살기를 힘써야 하고 이를 위한 끊임 없는 기도가 필요하다.


3. 묵상 (Calvin선생주석)
"18.  십자가의 도가… " ; ·바울은 이 18절의 처음 귀절에서 양보의 포현을 하고있다.  왜냐하면 만일 복음이 그렇게 꾸미지 않고 보잘것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면 어디서나 복음이 멸시받을 것으로 여겨서 배척을 받기가 쉬울 것이기 때문에, 바울은 스스로 그만큼 인정한 것이다. 그러나 그가 그것이 멸망하는 자들의 견해라고 덧붙였을 때,  그는 그들의 견해에 거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누가 복음이 멸망의 값이 되도록 정죄려는 사람이 있겠는가?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이렇게 이해하여야거한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여진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의 지혜로는 그것을 추천할만한 아무런 매력을 갖지 못하였다는 바로 그이유 때문이다.  그것을 그대로 두어라. 그렇더라도 하나님의 지혜는 그 자체로 빛나는 것을 우라는 알고 있다. 아무리 바울이 이기주의적인 교사들의 그럴 듯한 말에 현혹된 고란도교회 교인들의 잘못된 판단을 간접적으로 책망하였을지라도, 그러나 그는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하나님의·능력을 받은 하나님의 사도들을 책망의 눈으로 보았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설교에 전심전념하느라고 너무 단순하여 그렇게 하였기 때문이다. 십자가가 전파되는 방법은 하나님의 능력이 구원으로 인도하게 하는 것이다. 로마서 1장 16 절의 나의 주석에 나타나 있다. 

[로마서1:16 Calvin선생주석]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그가 경건치 못한 자들의 조롱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미리 선언함으로써 반대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는 복음의 좋은 점들을 천거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이는 로마 사람들이 복음을 일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 이다.  바울이 그 자신은 복음을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그것이 세 상 사람들의 눈에는 치욕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같이 하여 로마사람들이 경건치 못한 자들의 공포와 조롱을 복음이 당하는 것을 볼 때, 그 복음을 그들이 과소평가하지 않도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치욕을 그들이 견디도록 준비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신자들에게 복음의 최상의 가치를 증명한다. 

 

 첫째로,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아주 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 능력은 복음에서 그 빛을 발산해 낸다.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이 우리가 찾아 구하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그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높이고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이같이 확보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따라 우리는 복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능력을 복음에서 발휘하신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 그가 말씀 전하는 직책을 얼마나 귀하계 여기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그는 여기서 어떤 은밀한 계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입으로 말하여 전하는 말씀 전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것을 듣는 데서 물러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며 그의 구원의 손길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유효하게 역사하시지 않고, 오직 성령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내적 교사(inwordteacher)로서 조명하실 때에만 효과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을 덧붙인다.  복음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제공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능력은 보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음이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사망의 맛을 내는 사실은 복음 자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함에 기인한다. 복음은 구원의 한 길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모든 길에 대한 신뢰를 끊어버란다. 사람들이 이 한 구원의 길에서 물러서는 때, 그들은 복음에서 그들 자신의 멸망이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아무 차별없이 초대하여 구원에 참여케 할 때, 그것이 구원의 교리로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거기 복음에 그의 고유한 직책이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인 그리스도께 나타나 있고, 그리고 그에 의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되실 것 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구원이라는 단어는 시종일관하여 죽음과 반대되어 있다. 그 단어가 나오는 때에는, 우리는 논의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멸망과 영원한 죽음의 저주로부터 건져내 주기 때문에, 그것이 확보 해주는 구원은 영생인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 이라는 단어 아래 문맥상에 나타나 있는 대로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시키고 있다. 이는 그가 모든 인류를 포함시키는데, 두 부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민족들을 지칭하는 데, 헬라인을 특별히 선택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듯하다. 첫째로, 복음의 언약에 참여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유대인 다음으로 제일 먼저 허락받은 민족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헬라인들이 유대인들보다 그들의 지리적 이점(利點)과 그들의 언어의 폭넓은 지식때문에 더 나온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듯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사(比詳)를 사용하여, ·복음의 참여에 있어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그들의 우월성과 지위를 박탈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약속과 소명(召命)에 있어서 첫번째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 대해 그들의 특권을 바울은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복음에 동참하는 자들로서 비록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다소 낮은 지위에 있지만 이방인들을 그는 곧 즉시 덧붙여 말한다.]

 

"19. 기록된 바……" ;이사야의 증거를 인용함으로써 바울은 복음의 진리가 세상의 지혜자들이 그것을 비웃는다는 사실로부터 온 편견으로 복음의 진리가 방해를 받아야 하고 멸시의 대상으로 되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를 더욱 증명하고 있다. 선지자들의 말씀으로부터 그들 세상들의 견해가 하나님 앞에서 아무 평가도 받지 못함이 분명하게 밝혀진다. 그 말씀이 이사야 29장 14절에  나타나 있는데  하나님께서 그들의 위선(僞善) 때문에 진노하셔서 '지혜자의 지혜가 없어지고~~~~'의 특별한 형벌을 내리신다고 하였다. 이제 그것이 바울이 취급하는 상황에 이런 식으로 적용이 된다. 그것은 새로운 것도 아니며, 그런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하는 그들의 분별력에 있어서 탁월하게 보이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진귀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런 방법으로 자신의 본연적인 능력을 과시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길잡이가 되고, 또 다른 사람들의 지도자가 되기를 원하는그런 사람들을 곧잘 형벌하신다.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지혜를 멸하셨다. 만일 이런 일이 다른 국민들이 우러러 보는 그런 사람들에게 일어난다면, 그·다른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의 말을 사도 바울의 말과 비교하여 보고, 그 모든 것들을 더 엄밀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가 '지혜를 멸하고, 총명을 폐하리라'고 말하였을 때, 중성동사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하여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주어로 하면서 그들을 능동적이게 만들고 있다. 그러나 둘 다 모두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로 큰 놀라운 사건을 일으키시어, 모두가 깜짝 놀라게 하고 있다.

 

그러므로 ‘지혜를 덜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멸하시는 행위요, 또  '지혜가 폐하다’는 것 역시 하나님께서 널리 미치게 소멸시키시는 것이다.  두번째 동사(아데테언)를 에라스무스(Erasmus)는 reiicere, 곧 ‘배척하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좀 애매하며 때때로 이것은 ‘말살하다'(de/ere)를 의미 하거나, 혹은 ‘지우다' (expungere), 또는 ‘인멸시키다'· (qbliterare)는 뜻을 의미하기도 한다. 나는 오히려 이사야 선지자가 말하는 ‘멸하다’ 혹은 제하다’라는 단어에 부합하기 위하여, 이 말을 취하기를 더 좋아한다.  그런데도 이 이유가 나에게는 더 큰 영향력을 갖는다.  즉 배척한다는 생각이 곧 분명하여진 것과 갈이 주제에 부합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뜻을 자세히 살펴보자.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께서 그들에게서 참된 판단과 지식을 제하여 버렀기 때문에, 참으로 올바론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가진 지도자를 그들이 이제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밝히기를 원하고 있다.

 

그가 다른 귀철(이사야 6 : 10)에서 그 백성이 우매하다고 위협한 것처럽,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몸에서 눈을 빼어버린 것처럼, 그 지도자들이 그렇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지만 이사야가 좋은 의미에서 말하고 있는 ‘지혜'와 ‘총명'이란 단어로부터 큰 어러움이 제기될 수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인간의 지혜가 사악하기 때문에 하니님께 정죄받고, 또 그들의 총명이 무익하기 때문에 배척을 받는 것처럼, 아주 다른 목적은 그의 마음에 품고 이것을 인용하고있다. 나는 이것이 일반적인 설명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령의 말씀이 사도들에 의하여 의곡되지 않은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사도 바울이 그 진리를 곡해하였다고 비난하기보다는 해석가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따르지 않겠다.

 

그리고 다른 관점에서 이사야 선지자의 말씀의 순수한 의미가 사도 바울의 의도에 서투르게 적용되지 않는다. 만일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 하나님께서 그의 온전한 영을 그에게서 거두어 가실 때, 그 사람의 지혜에·우리가 얼마만큼의 신뢰를 둘 수 있을까?  더구나 하나님의 복수의  알반적인 방법은 자기 자신의 이해의 방법으로 둘러싸여 있는 사람을 그리고 그 자체의 눈에 자신이 최대로 현명하게 보이는 그 사람을 무지(無知)로 여기시므로 육신적인 인간이 하나님을 대적하여 일어날 때, 그들이 어리석은 자들이 되고, 그들의 생각이 무익하게 될 때,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가 그들의 교만에 자리를 내주게 되는 것은 조금도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제 우리는 바울이 이 증거를 이용한 것이 얼마나 적절한 일인가를 깨닫게 된다.  이사야는 인간적인 산물(産物)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에 대한 하나님의 형벌은 ‘지혜가 그 지혜자들을 폐할것이다’ 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사야의 이 중거를 세상의 지혜가 하나님을 대적할 때 그것이 얼마나 무용(無用)하고 가치가 없는 것인가를 증거하기 위하여 이용하고 있다.

 

"20. 지혜 있는 자가 어디 있느뇨 선비가 어디 있느뇨" ; 이 모욕적인 언급은 선지자의 증거를 실례로 제시함으로 증가되고 있다. 보통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사도 바울이 이 문장을 이사야 선지자에서 인용하여 온 것은 아니며, 바울 자신의 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사야 33장 18절이라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귀절이 현재의 논증과 어떤 유사성이나 관련성이 전혀 없다.  왜냐하면 이사야는 유대인들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축복이 얼마나 위대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하게 그들 모두에게 보여 주기 위하여 , 그는 산혜립의 멍에로부타 구원하여 줄 것을 약속하고 있으므로 그 때 그는 외국의 폭군으로부터 억압받는 그들의 비참한 상태를 그들에게 일깨위 주고 있다. 그는 그들이 안정이 없는 끊임없이 불안한 상태에 있으며, 그래서 그들은 서기관들과 남세자들에게 위협을 받으며 과중한 공세를 바쳐야 하고, 망대를 계수하는 부담을 져야 하는 것이다.

 

 그보다 더한 것은 그들이 감사를 회상하게 되는 그런 위기적인 상황에 있다고 그가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 문장이 선지 자로부터 왔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이 세상’이라는 말은 마지막 용어(논박자)로 생각될 뿐 아니라, 또한 다른 두 가지 명사들(지혜자와 선비)과도 연결되어야 한다. 그는 이 세상의 지혜자를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지혜의 조명을 받지 않은 자들일 뿐 아니라, 세상적인 통찰력만 받은 그것을 그들의 진리로만 아는 그런 사람들로 부르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비들' 이라는 용어를 교사들을 의미하는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왜냐하면  '사팔'이 히브리어로 ‘말하다, 또는 ‘자세히 말하다’ 를 의미하며 그 명사는 ‘책’이나 혹은 ‘서적'을 나타내는 '세델'로부터 유래되었기 때문이며, 사람들은 학문하는 사람들이나, 책과 친근한 사람들을 '소페 림' 이라고 부른다. 그런 이유로 역시 '소퍼 레가스' 를 때때로 장관이나 혹은 서기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런 이유로 역시 히브리어와 어원을 따라서 그것을 '그람마데이스', 곧  선비라고 번역한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곤란한 문제들이나 얽힌 의문들을 해결하는데 예리함을 나타내 보이는 그런 사람들을 논박자들이라고 부른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말하여, 그는 인간의 자연적인 모든 능력을 압도하며, 그래서 그것이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아무 소용이 없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인간의 지혜를 맹렬하게 공격할 수 있는 좋은 근거를 가지고 있다. 인간의 마음 속에서 그들의 육체에 세겨진 잘못된 확신을 제거하여 그들이 마땅히 정도 이상으로 자만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이라는 사실을 말로는 다 설명 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의 판단력을 형성하거나 그것을 감히 인정한다면, 그들 자신의 지혜를 조금이라도 계속 의뢰하고 있는것 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지혜를 미련케 하신 것이 아니뇨." ; 바울이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인간이 그의 자연적인 이해력뿐 아니라, 경험이나 학문, 예술의 지식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인간의 이해력이 미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그는 세상의 지혜를 성령의 지혜와 대조시키고 있다.  무엇이나 성령의 조명과는 거리가 먼, 인간에게서부터 온 지혜는 모두가 세상 지혜에서  왔다고 말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모든 것을 어리석게 하시고, 어리석은 것으로 정죄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것이 이미 두 가지 방법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 인간이 가진 것은 어떤 지식이나 이 화해를 막론하고 참 지혜에 기초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며,  그들이 영적 교훈을 갖는다는 것은, 마치 앞 못 보는 맹인이 빛깔을 구별할 수 없는 것보다도 더 무가치한 일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아래의 사실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하는데,

 

(1) 모든 과학에 관한 지식은, 그리스도의 하늘 나라의 과학과는 거리가 먼 안개일 뿐이며, (2) 모든 재치를 다 가진 사람일지라도 하나님의 신비를 스스로 이해 하려고 하는 것은, 마치 당나귀가 음율의 하모니를 이해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런 방법으로 바울은 세상적인 지혜에 도취하여 자만하면서 그리스도와 구원의 모든 교훈을 멸시하고, 이 세상 만사에 자기들이 관여하는 데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을 향하여 말하고 있 는것이다.  그는또한 자신의 능력을 믿으면서 천국에 들어갈수·있다고 자만하는 사람들을 역시 꾸짖고 있다.  동시에 어떻게 바울이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와 관계없는 모든 지식을 땅에 던져 버릴 수 있으며, 말하자면 그의 발 밑에 짓밟힌 것을 이 세상에서 하나님의 중요한 은혜라고 알리어질 수 있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 주어진다. 인간을 다른 모든 동물들보다 더 고상하게 만드는 인간의 아성 (理性)보다 더 귀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인간을 그런 방법으로 참 인간되게 정화시키는 자유 양심은 얼마나 명예를 받을 만한 것인가!  한편 그것은 얼마나 많은 진귀한 산물들을 산출하여 내는가!  누가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적 역량과 국가를 이끌어 나가는 정치가들을 칭송하는데, 고도의 칭찬을 아낄 것인가? 더 많은 언급을 팔요로 하지 않는다.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사도 바울이 실험이나 경험으로부터 얻은 지식이나, 인간의 자연적인 통찰력, 혹은 학문을 통하여 습득한 정신적 교육 등을 전적으로 정죄하지 않았다는 데서 분명하여질 뿐 아니라, 그가 이 모든 것들이 다만 영적 지혜를 얻는데 무용(無用)한 것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하였음을 나는 확신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이 자신의 예리한 통찰력을 신뢰하거나 또는·학문의 힘으로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분명히 미친 짓이다.  다른 말로 하면 하늘 나라의 은밀한 신비나 그 지식은 인간의 감성으로는 깨달을수 없는 감추어진 비밀이기 때문에 그것을 조사한다는 것은 아주 잘못된 일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 사도가 여기서 이 세상 지혜의 무용성 (無用性)에 대하여 가르치는 현재적인 상황에 우리의 주의를 제한하면서, 즉 다시 말하면, 그것은 이 세상의 수준에 머물러 있는 것으로써 전혀 하늘나라에 미치지 못한다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리스도를 떠난 모든 인간적인 지혜는 소용이 없으며, 아무리 여러 학문을 터득한 사람일지라도. 하나님께 무지하다면, 그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는 사실 역시 진리이다. 더구나 이것은 하나님의 훌륭한 선물로써 모든 진리 안에 포함됨이 틀림없다. 마음의 기민함, 예리한 판단력, 양심의 자유, 언어 지식이 모든 것들이 불 경건한 사람들의 손에 떨어졌을 때, 어느 면으로 더럽혀진 것이다. 

 

"21.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고로……" ; 이것을 바른 순서로 배열하여 보면 이렇게 된다. 인간이 하나님께서 주신 천부적인 능력(ingenita sibi ingeniiluce)의 그의 빛으로, 하나님의 작품에 난타난 하나님의 지혜를 생각할 때에 그는 하나님의 지식에 도달하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이 질서가 인간이 하나님의 뜻을 어김으로 뒤바뀌었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기 전에 먼저 우리의 눈에 어리석은 것으로 만들었다. 그 후에 하나님의 지혜에 관한 증거로 하나님께서 어떤 어리석은 증거를 우리 앞에 제시하셨다.  인간의 배은망덕은 만사를 순서도 없이 뒤죽박죽이 되게 할 만하였다. 사도 바울은,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을 지혜의 하나님으로 묘사하였는데, 그 사실이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났으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지혜에 대한 참으로 훌륭한 증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창조하신 만물 속에서 그의 놀라우신 지혜에 대한 분명한 거울을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시고 있다. 그 결과 건전한 판단력에 대한 극히 적은 빛을 가진 사람과 또 하나님이 창조하신 지구와 그 이외의 모든 하나님의 작품에 주의를 기울이는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금할 수 없을 것이다. 만일 인간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관찰을 통하여 참 하나님의 지식에 이르게 된다면, 그들은 하나님을 지혜로운 방법으로 알게 되는것이며, 또 그것은 지혜를.얻는 자연적이고 적잘한 방법이다. 

 

그러나 온 세상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 속에서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그의 지혜를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으므로,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으로 사람들을 가르치고 계신 것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지혜를 모두 비우기 전에, 우리가 하나님의 구원의 지식에 도달하지 못한다는 것은 우리의 잘못일 수밖에 없다. 사도 바을은 그가 복음을 ‘전도의 미련한 것'이라고 부를 때, 양보절을 만들고 있는데, 왜냐하면 복음은 분명히 잘못된 확신에 사로잡혀 있는 ‘어리석은 인간’ 그들 자신의 연약한 검열로 하나님의 신성 불가침의 진리를 복종함에 대한 아무 두려움도 느끼지 않는 그런 ‘어리석은 인간을 지혜롭게 만드는 '모로소포이스'  빛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 인간의 이성은 하나님께서 불멸의 생명이 되셨다는 소식보다 더 불합리한 것이 없음을 발견한다. 그 생명은 죽음에 순종하였고, 그 의(義)는 죄 아래 숨겨졌으며, 그 축복의 원천은 저주에 복종하시고, 이 수단에 의하여 인간은 죽음에 서 구속함을 받고, 불멀의 축복을 분배 받 되었으며, 생명을 얻고 죄가 소멸되며, 의가 지배하고 죽음과 저주는 사라지계 된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복음이 지혜에 감추인 것을 알며, 이 지혜는 그 높이에 있어서 하늘보다 높으며, 따라서 천사들도 이 사실에 놀라고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대단히 귀한 귀철이며, 여기에서 우리는 인간의 마음의 무지가 얼마나 큰 것인가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 인간의 마음은 빛으로 둘러싸여 있는데도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다. 이 세상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영광의 놀라운 광경으로 우리에게 하나님을 보여주시는 극장과 같다.

 

그러나 그런 광경이 우리 눈 앞에 펼쳐져 있는데도, 우리는 그것을 보지 못하는 완전한 소경들이다.  이것은 그 계시가 모호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마음으로 멀리 떠나'(mente alienati,· 골 1 : 21) 있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 행위에 대한 의지와 힘이 우리를 실괘하계 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친히 우리에게 공공연하게 나타내어 주셨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볼 수 있는 방법은 오직 믿음의 눈을 통하여서이며, 하나님의 신성(神性)에 대하여 우리가 조금밖에 깨달을 수 없지만,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하나님께 대한 무지를 변명할 수 있는 이유가 되지 뭇할 만큼 충분한 것이기 때문이다(롬 1 : 20). 그러므로 사도 바울이 하나님께서 그의 창조하신 만물을 통하여 알려 질 수 없다고 여기서 말하였는데, 우리는 그가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순수한 지식을 말하는것이라고 이해하여야한다.

 

그러므로 아무도 그 무지를 변명의 이유로 삼을 수 없으며, 인간은 신성에 대하여 얼마쯤은 깨달을 수 있는 수준에 이르도록 자연적인 우주 학교에서 발찬하여 간다.  그러나 그둘은 하나님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아무 생각도 갖지 못하고 있다. 반대로 그들의 생각은 실로 보잘것 없는 것에 즉시 몰두하게 되고, 그리고 빛이 어둠 속에서 비취게 된다. 따라서 인간은 멸시와 태만, 배은망덕과 관계없이 단순한 무지 때문에만 나빠지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롬1:21)라는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며, 또 다론 한편 자연의 안내로는 아무도 하나님을 아는데 이르는 그런 발전을 가져올 수가 없다. 만일 여기에 대한 예외로 철학자들을 제시한다면, 그들이야말로 특별히 우리 인간의 연약함의 현저한 예라고 나는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내가 이미 말한 그 기본적인 지식에서 끊임없이 그들은 떠나고 있으며, 공허하게 방황하면서 잘못된 사색에 빠져들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계 될 것이다. 그둘은 대개가 늙은 부인들보다도 더 어리석은 자들이다. 바울이  ‘믿는 자들이 구원받는다’고 말할 때, 이것은 18절과 일치하며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다"(롬 1 : 16).

 

다시 믿는 자들이 그 수가 몹시 적은데, 그들을 무지하고 어리석은 세상 사람들과 대조시킴으로써 그 적은 수에 당황하게 되는 것은 우리가 찰못된 것이라고 바울은 우리에게 지적하여 주고 있다. 왜냐하면 수적(數的)으로 많은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사역에서 제외된 자들이기 때문이다.

 

"22,-...;23절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이것은 앞의 문장을 설명하는 것으로, 말하자면 어떤 방법에서 복음의 도가 어리석은 것으로 생각되어지는가를 그가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설명할 뿐 아니라, 유대인들이 복음을 싫어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복음에 가치를 거의 부여하지 않고 있다고 말함으로써 그 사실을 확대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유대인들은 그들의 눈 앞에서 기적이 나타나기를 바라고 있다. 헬라인들은 예리함의 매력을 사랑하며, 또 인간의 지혜를 좋아한다. 우리는 사실상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선포한다. 그것은 얼핏 보기에 약하고 어리석은 것 이상의 어떤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므로 외형적으로 보아 하나님께 버림 받은 것처럼 보이는 그리스도가 유대인들에게는 걸림돌이  된다.  헬라인들은 그리스도의 이 십자가의 죽음이 인간의 구속(救讀)의 방법이라는 사실을 들을 때, 그들은 이것을 일종의 우화 정도로 생각을 한다” 고 말하고 있다. 

 

나의 생각으로는 바울이 '헬라인’ 이라고 말한 것은 단순히 이 교도들이나 이방인들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받은 자유주의자들, 혹은 그둘의 특출한 지성으로 뛰어난 사람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제유법(提哈法)으로 볼 때, 다른 모든 사람들도 이 속에 다 포함되고 있다. 그 후에 바울은 유대인과 헬라인을 구별하고 있다. 유대인들이 율법에 대한 지나친 열심으로 그리스도를 공격하였을 때, 그들은 복음을 대적하는 광풍과 같이 정신없이 미쳐 날뛰었다. 마치 위선자들이 그들의 악한 신조 (superstitionibus)를 고수하려고 덤빌 때 그러는 것 같이  한편 헬라인들은 교만에 잔뜩 부풀어서, 그리스도가 마치 실없는 사람인 것처럼 그를 멸시한다.  유대인들이 표적을 그렇게도 열심히 구하는 것을 바울이 책망한 사실은 표적을 구하는 그 자체를 나쁘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들이 나쁜 점이 무엇인가를 그가 밝히고 있는데 바로 아래와 갈은 점들이 지적되고 있다. (1) 반복적으로 계속 표적을 구하고 있는데, 이것은 어느 의미에서는, 하나님을 그들의 율법 아래로. 끌어 내리려고 강요하는 것과 같다. (2) 그들의 어리석은 이해력으로 그들은 이기적을 통하여서 하나님의 언약을 확인하기를 원하였다. (3) 그들은 기적의 최면술에 걸리어, 기적을 경이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4) 간단히 말하면, 그들은 그 많은 기적에 만족하지 못하고 계속 날마다 새로운 기적을 찾고 있는 것이다. 히스기야 왕은 그가 자신에게 나타날 기적에 용기를 얻고 곧 만족하게 되었다는 사실(왕하 19: 29, 20:8) 때문에 비난을 받을 수는 없다. 또 기드온이 두번씩이나 기적을 구하였다(삿 6 : 37, 39)고 해서 그를 책망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론 한편, 아하스는 그가 선지자에 의하여 제시된 기적을 반대하였다고 하여서(사 7 : 12) 정죄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기적을 구한다고 하여 나쁠 이유가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선한 목적으로 기적을 구한 것이 아니 다. ' 다시 말하면 그들은 기적을 구하는 그들의 요구에 제한을 두지 않았으며, 그 기적을 선하게 사용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믿음이 기적으로 말미암아 도움을 받아야 하는데, 그들은 이 기적을 그들의 불신 속에 그대로 남겨두어 더욱 강퍅하게 만들고 있는 것이다. 율법을 하나님께 적용하는 것은 블의한 것이며, 그들의 극악한 탐욕 속에서 그들은 자신의 분수를 잊고 있는 것이다. 기적이 우리를 하나님의 지식으로 인도하고, 하나님의 영적 은혜를 깨닫게 하는 데 반하여, 유대인들에게는 그것이 장애물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그리스도께서는 ‘악한 세대가 표적을 구한다' (막 8 : 12)라고 말씀하시면서 그들을 책망하셨다. 그들의 기적에` 대한 호기심에는 한계가 없었으며 그들은 계속 그것흘 요구하기만 하였다.  그들이 기적을 체험하게 될 때마다 그 기적이 그들을 개선시키지 못하였다.

 

"24.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사도 바울은 이 대구(對句)를 사용함으로써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잘못 평가를 받고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렇게 된것은그리스도 자신에게 잘못이 있거나, 인간의 본성적인 경향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조명을 발지 못한 인간들의 사아에 그 원인이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나아오는 데는 유대인이든 헬라인이든 하나님의 선택에 방해될 것이 없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의 확신을 얻게 되는 것이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나오는 능력을 그 장애물과 대조시키고 있으 며, 또 그는 지혜를 우둔함의 반대로 취급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 본질은 이와 같다. '나는 오작 기적만이 유대인들의 고집에 대하여 어떤 효과를 가잘 수 있으며, 실제로 공허한· 지혜일 수밖에 없는 이것은 헬라인의 건방전 멀시를 약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실에 중요성을 부여 하여서는 안된다. 아무리 우리의 그리스도가 그의 겸손으로 유대인들을 공격하며, 또 헬라인들에게서 경멸의 조소를 받을지라도 그는 모든 민족의 선택 받은 자를 위하여,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 이  모든 장애물을 정복하고, 하나님의 지혜가, 지혜처럼 가장한 것(larvam)을 제거하시는 것이다. ,

 

"25. 하나님의 미련한 것이……" ; 하나님께서 그의 지혜를 분명하게 우리들에게 나타내시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어리석은 방법으로 행하시는 것처럼 그런 식으로 우리를 대하실 때, 그러나 어리석은 것처럼 보이는 그것이 지혜에 있어서 인간의 모든 예리함을 능가한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을 감추시고 연약한 방법으로 행하시는 것처럼 보일 때, 그 연약하게 보이는 것이 인간의 어떤 능력보다 강하시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내가 앞에서 이미 언급한 것처럼 양보의 구문(構文)을 주의깊게 살퍼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하나님께 대하여 어리석음이니 혹은 연약함이니 등의 언사를 쓰는 것이 얼마나 타당치 않은 일인가를 아주 분명히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반어적(反語的)인 표현이 하나님의 모든 영광을 여지없이 하나님에게서 탈취하려는 인간들의 모든 무모한 교만을 논박하기에 참으로 팔요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