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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고전3:9)

1. 성경 (고전3:1 ~ 9)
형제들아 내가 신령한 자들을 대함과 같이 너희에게 말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을 대함과 같이 하노라 (1)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밥으로 아니하였노니 이는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였음이거니와 지금도 못하리라 (2)너희는 아직도 육신에 속한 자로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어찌 육신에 속하여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3)어떤 이는 말하되 나는 바울에게라 하고 다른 이는 나는 아볼로에게라 하니 너희가 육의 사람이 아니리요 (4)그런즉 아볼로는 무엇이며 바울은 무엇이냐 그들은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들이니라 (5)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께서 자라나게 하셨나니 (6)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 (7)심는 이와 물 주는 이는 한가지이나 각각 자기가 일한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8)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밭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9)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형제들아" ;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육에 속한 사람들에 대하여 말하였던 것을 이제 적용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십자가의 가르침에 그들이 별로 흫미를 갖지 못하는 것이 그들 자신의 잘못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그들이 지나치게 자신만만하며, 아직도 그들의 상업적인 생각에 매달려 교만을 부리고 있으면서, 복음의 순수성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큰 혐오와 어려움을 갖고 있는 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그 결과 그들은 사도 바울을 무시하고, 그의 설교의 거룩한 효력을 경멸하면서, 요란함과 과장적인 교사들에게 더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의 이 교만을 억제하기 위하여, 사도 바울은 그들이 하나님의 신령한 지혜를 받지 못한, 육의 마음에 압도되고 있는 육의 사람들 중에 포함되고 있다고 단언하였다. 참으로 사도 바울은 그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름으로써, 그의 가혹한 책망을 부드럽게 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들을 질책하는 그 책망을 숨김없이 다 쏟고 있는데, 곧 그들의 마음이 육적(肉的)인 흑암으로 질식된 상태에 있으므로 그것이 그의 설교를 그들이 듣지 못하도록 장애물이 되고 있다고 힐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아직도 그들이 복음을 듣기에 적절하지 못하고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한데, 어떻게 하면 건전한 판단력을 갖게 될 수 있을까? 그러나 사도 바을은 여기서 그들이 완전히 육적인 사람들, 하나님의 성령의 빛을 전혀 갖지 못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건 아니고, 아직도 그들이 육의 마음으로 가득차서, 이 육적인 것이 성령울 방해하고 성령의 빛을 꺼버리는 것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들이 비록 은사를 완전히 갖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그들의 생활 속에서 성령보다는 육적인 요소가 더 많이 있기 때문에, 사도 바울은 그들을 욱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이것은 그 다음에 곧 그가 덧 붙임 말로써 아주 분명하게 나타난다. 즉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pueros 'in Christo)이라고 불렀는데,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자녀로 택함을 받은 자들이 아니라면, 그들을 어린 아이들이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며, 이 양자됨은 하나님의 성령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아이들……" ; 이 표현은 때때로 아주 좋은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예를 들면, 베드로는 우리를 "갓난 아이들"(벨전 2 : 2)같이 취급하였고, 또 예수님께서도,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눅 18 : 17)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 말이 나쁜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이해력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4장 20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 처럼, 우리가 댜 악에는어린 아이가 되고, 지혜에는 그렇게 되지 말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구별은 어떤 모호한 질문에 아주 분명한 해답이 된다. 에베소서 4장 14철 말씀이 여기에 일치된다.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 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라 함이라" 
 
"2.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  여기서 어떤 사람은 사도 바울이 사람에 따라서 각각 다른 그리스도를 나타내 보이고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질문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이것은 사도 바울의 교훈의 본질을 나타내기 보다는 그의 가르침의 방법이나 형태를 가리키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동일한 그리스도께서 어린 아이들에게는 우유도 될 수 있고, 장성한 사람들에게는 밥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갈은 복음의 진리가 양쪽으로 다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양 계층에 모두 적절하계 적용되기 위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현명한 교사는 그가 가르치는 대상의 이해하는 능력에 따라서 그 교훈을 적절하게 적용시키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다. 말하자면 약하고 무지(無知)한 사람들을 가르칠 때는 아주 기본적인 것들부터 가르치기 시작하여야 하며, 그들이 따라올 수 없는 높은 수준의 것을 가르쳐서 는 안 된다.
 
간단히 말하여 , 그는 한 방울씩 조금씩 그의 교훈을 떨어 뜨리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 많이 제공함으로 결과적으로 손실을 가져오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이 초보적인 것들 속에는, 더 강한 자둘에게 주는 충분한 교훈에 못지않는 팔요한 지식이 포함될 것이다. 이런 관계에서 어거스틴의 〈요한에 관한 섣교〉(98)를 읽으시라. 그러므로 이것은, 그들이 위험을 느끼기 때문에 날조된 변명을 늘어 놓으면서 복음에 대하여는 더듬거리며 분명하지 않온 언급을 하는 그런 거짓된 자들을 증명하여, 이 바울에게 있어서 이것이 그들의 모범이 된다고 주장한다. 한편 그들은 그리스도를 그들과는 아주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분으로 알게 하며, 또 참으로 많은 덮개로 가리우고 있기 때둔에, 그 결과 그들은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숙명적 인 무지 속에 항상 가두어 두고 있다. 나는 그들이 가져온 많은 부패에 대하여 말하지 않는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철반밖에 나타내지 않고 있으나 그 것도 그리스도께서 조각 조각 찢건 상태인 그대로이다. 그들의 위장은 비열 한 우상 숭배일 분 아니라, 그들의 오법을 따르라고 그령게 하는 것이며, 그 들은 많은 거짓말로써 어떤 선행을 즉각 해치고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것과 그것이 얼마나 다론가는 아주 명백하다. 왜냐하면, 우유는 영양분이 들어 있는음식물이고 독약이 아니며, 어린 아 이들의 성장에 적합하고 유익한 식품이기 때문이다.
 
"이는 너희가 감당치 못하였음이거니와……" ; 그러므로 그들이 너무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아야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무엇보다 먼져, 제일 처음에 그가 그들에게서 발견한 것을 보여 주고 있으며 , 다음에 , 아직도 그들 가운데 있는 같은 잘못, 곧 더 이상 보고 있을 수 없는 것들을 덧 붙여 말하고 있다. 최소한 그들은 그들이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을 때, 육적인 것을 버려야 했으며, 그리고 우리는 바울이 그의 교훈이 마땅히 그들에게서 발전을 이루 어야 하는데도 방해를 받고 있음을 불평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일 청취자가 그의 발전의 속도가 빠르다면, 좋은 교사는 그가 완성의 목표에 도달할 때 까지 항상 더 높은 수준으로 그를 인도하는 것 이 좋은 교사의 임 무이다.
 
"3. 너희가 아직도 육에 속한 자로다." ;  육에 속하는 한, 곧 육적인 부패가 인간을 지배하는 한, 그것이 인간의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님의 지혜가 그 사람에게 들어가는 것을 거부당하고 있다. 이것 때문에,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학교에서 어떤 발전을 이루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먼저 우리 자신의 지식과 의지를 버려야 한다. 비록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종교적인 어떤 희미한 빛이 있었다고 할지라도, 그러나 대부분이 꺼진 상태였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분쟁이 있으니" ;  그 증거는 그 결과로부터 온다. 왜냐하면, 시기와 분쟁과 당파는 육적인 결과이며, 이런 것들이 나타나 보이는 곳에서 그렇게 될 만한 무리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런 악들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서 나타나고 있었으며, 그러므로 바울은 그들이 분명히 육에 속한 사람들이라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는 역시 갈 라디아서 5장25철에서도 같은 논중을 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라, 그둘이 신령한 자들로 인정받기를 원하였으므로 그는 그들이 입술의 거짓 고백을 부인하고, 그들의 행위를 살펴보도록 권하고 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여기서 적용하고 있는 적절한 순서를 주의깊게 살펴보자. 질투로부터 분쟁이 나오고, 이 분쟁이 가열되면, 위험스러운 파당을 불러오게 된다. 더구나, 이 모든 악의 모체(母體)는 바로 야심이다.
 
"사람을 따라 행함이 아니리요." ;  여기서부터 ‘육에 속한' 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저열한 욕망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고, 궤변가들이 그런 것처럼 육적인 근원인 관능적인 것을 불러오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은 육에 속한건(全) 인간을 나타내는 것이다. 육적(肉的)인 지도를 받는 자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인도를 받는 사람이 아니다. 사도 바울의 정의에 따르면, 그런 사람들이 육에 속한 사람이므로 육체와 인간의 본연적인 능력은 절대적으로 동의어(同意語)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다른 곳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고 후 5 : 17)이 되기를 요구하는 좋은 이유를 갖게 된다•
 
"4. 어떤이는 말하되……" ; 사도 바울은 이제 그 파당(그가 고린도 교회의 한 사람인 것처럼 그렇게 말합으로써, 그는 그의 설명에 더욱 힘을 주고 있다), 곧 각 사람이 그들의 특벌한 교사를 자랑하면서 , 마치 그리스도가 그들 모두의 교사가 아닌 것처럼 파당을 짓고 있다는 분명한 형태를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더구나, 사람들이 계속 이와같이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고 하는 곳에서는, 복음이 거의 발전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많은 말로 이것을 공적으로 고백하였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그들이 심취되고 있는, 잘못된 헌신을 꾸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공허하게 떠벌이는 사람들이 자신의 목적 달성을 위하여 사람들에게 계속 호감을 나타내 보이기를 원하는 것처럼, 그들은 그들 자신의 선생에게 부당한 찬사를 쏟으면서, 동시에 사도 바울과 그와 같은 사역자들을 멸시합으로 그들의 일그러진 모습을 노출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 이다. 
 
"5. 그런즉~~~~~ 바울은 무엇이뇨" ; 이제 바울은 사역자들에 대한 적합한 견해에 대하여 논하고, 또 그들이 하나님으로부터 성직(聖職)을 받은 목적에 대하여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는 질투의 비난을 피하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의 이름보다는 자기와 아볼로의 이름을 지적하고 있다. 사도 바울은 ‘저희는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너희로 하여금 믿게 한 사역자(使役者)들이니라' 고 말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 부터 바울은 그리스도를 제외하고는 그 누구도 믿음을 부여하는 영광에 대하여 자만할 수가" 없다고 추론하고 있다. 이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들이 믿음의 사역자 곧 그들을 따르는 사람들을 얻게 된 것은 그들 스스로의 힘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능력이시 타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으로 그가 사역자들의 권위를 축소시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그러나 그는 그 사역자들이 당연히 가져야 할 권위 이하로 하감시키고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그 인허에 대한 보증은 그들이 성령의 도구라고 불리어질 때, 다른 사람들에게 교훈의 효과가 확실히 나타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비교할 수 없는 믿음의 보화를 분배하는 사역자들로 사용하신다고 하실 때, 그 목자들은 혼히 사용되는 그런 설명으로써 영예가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주께서 각각 주신 대로……" ; 〔칼빈의 라탄어 : '????. 헬라어 : ' 카이 에 카스토 호스 호 큐리 오스 에도켄' 바울의 비교를 나타내는 불변사 '호스', 즉 … 대 로(as)는, 각각(to each)을 의미 하는 '에 카스로'  다움에 온다. 그러나 그 순서 는 바뀌었다. 그러므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여지기 위해서는 내 생각에는'to each as' (un.icuique sicut)보다 'as to each' (sicut unicuique)를 택하고 싶다. 한만 어떤 사본들에서는 Kttl(카이 ; 즉, 그리고)라는 접속사가 빠져 있어서 한 문장으로 되어 있으며, 이렇게 해서 ‘하나님께서 각자에게 주신 것처럼 · '그 사역자들을 통하여 너희가 믿었다’가 된다. 만일 우리가 둘째 절이 첫번 설명에 추가된 것으로 받아 들인다면, 바울은 그가  ‘사역자'라는 말로써 의미하는 바를 더욱 분명하게 나타내게 된다. 그것은 마치 그가 “사여자 둘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사역을 사용하시는 자들이며 , 그들은 그들의 사역이 그 자신의 힘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의 섭리를 받는 자들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갈다. 
 
그러나 내가 채텍한 사본이 나의 생각에는, 진리에 더 가까운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따른다면, 그 문장이 더 분명하여질 것인데, 그 이유는 그것이 아래와 같이 두 절을 다 만족시킬 것이기 때문이다. 처음 절에서의 사역자들은 그들의 봉사륜 그리스도의 뜻에 따르는 자들이며, 따라서 여러 분은 그리스도를 믿게 될 것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무엇 을 성취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온사 이외의 어떤 것으로도 또 그들 자신의 방법으로는 아무것도 이룰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그둘은 아무 것도 자신에 대한 자만을 갖지 않는다. 이것은 개인이 가전 어떤 것도 그근 원이 그 자신이 아닌 다른 데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6.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사도 바울은, 은유에 의하 여, 말씀의 본질에 의하여 또섣교의 가치에 의하여 가장 적절하게 예증되어 지는 사여울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었다. 땅이 열매를 맺기 위하여서는, 땅 을 갈고, 씨를 뿌리며, 또 다른 여러 농경상의 과정이 팔요하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이 다 갖추어졌을 때라도, 만일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태양빛을 주시고, 또 그보다도 더욱 놀랍고 신비한 하나님의 능력으로 소에게 풀을 주시지 않는다면, 그 농부의 수고는 헛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그 모든 것이 결실하도록 하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있어야만, 농부의 수고는 헛되지 않을 것이며, 또 그가 뿌린 씨앗이 결실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한 알의 씨앗이 썩어서 새싹이 나는것처럼 놀라운 일이 또 어디 있겠는가? 말하자면 사역자들은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경작자들이다. 
 
그러면 그후에 도와주는 사람들은 예를들면, 물울 대어주는 사람들과 같다. 사역자들은 씨를 땅에 뿌렀을 때, 그 씨가 자라 그 결실한 것을 거둘 때까지 그들이 할수 있는최선을그 땅에 기울이는 그런 책임을 진 사람들이다. 그러나 열매를 맺히기 위한 그들의 실제적인 노력의 결실은 인간의 노력의 산물(産物)이 아닌,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으로 참 진리인 것이다.  그러나, 이 귀절로부터 말씀을 뿌리는 일(설교)이 얼마나 필요하며, 또 계속적으로 그 일을 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우리는 관찰하여야 한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인간의 도움 없이도 땅을 축복하시는 것은 어렵지 않으며, 그 결실을 인간의 많은 노력이나, 땀, 또 실패 등에 좌우되지 않고 땅에서 식물을 결실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간이 땀 흘려야 하도록 하시고, 땀은 그 인간의 경작에 따라 결실을 내도록 하셨으므로, 따라서 우리는 노력하여야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만일 하나님께서 원하시기만 하시면, 인간의 노력과는 아무관계 없이 잠자는 사람들에게 믿음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으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방법, 즉 복음을 들음으로써 믿음이 생기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방법을 무시하고,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믿는 사람은, 마치 밭 갈기를 포기하고, 씨 뿌리기를 게올리하여, 모든 농사에 필요한 작업울 하지 않으면서, 하늘에서 음식물이 그들의 입으로 떨어지기를 기다리는 사람과 똑 같다. 우리는 이제 사도 바울이 말씀을 계속적으로 선포하여야 하는 데 대하여 뜻하는 바를 배웠다.
 
씨앗이 뿌려졌을지라도 그 씨앗의 성장을 돕는 다른 사람들의 끊임없는 보살핌이 없이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이미 씨앗을 받은 사람은 그 씨앗의 성장에 물이 필요하며, 그가 충분히 성장할 때까지는 물의 공급이 중단되어서는 안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인생이 끝날 때 까지 그 물의 공급이 팔요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고린도 교회에서 말씀의 선교에 바울의 뒤를 따랐던 아볼로는, 바울이 심었던 씨앗에 물을 주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7. 그런즉 심는 이나·~~~~~~~ 아무것도 아니로되……" ;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갈이 그들의 사역(심고 물을 주는 사람들一역자주)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님은 분명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왜 이런 식으로 그것(그들의 사 역-역자 주)을 과소 평가하고 있는지 그 이유를 살펴 보아야 한다. 먼저, 참으로 우리는 그가 성례에 관한 것처럼, 사역자들에 대하여 두 가지 방법으로 곧 잘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바르게 주목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대대로 그는 사역자들을, 하나님께서 무엇보다도 먼처 영혼들의 중생을 위하여, 그  다음으로 그들을 영생으로 인도하고, 죄를 용서받으며, 사람의 마음을 새롭게 하고, 하나님의 천국을 건설하여, 사단의 권세를 파멸시키는 성직자들로 임명하였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바울은 사역자에게 씨를 뿌리고. 물을 주는 의무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그의 수고가 결실 없는 헛것으로 돌아가지 않도록 거룩한 성령의 능력을 그에게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 비슷하게, 다른 성구(고후 3 : 6)에서 그는 자신을, 의문(儀文)이 아닌 성령의 사역자로 부르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들의 마음 속에 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편 그는 사역자를 주인이 아닌 종으로 생각한다. 곧 손이 아닌 도구로, 결국은 하나님이 아닌 인간으로, 따라서 그는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능력으로 그 사역이 유효적이 되도록 하지 않으신다면, 사역자들의 사역은 헛것이 되며 또 참으로 죽은, 아무 소용 없는 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 견해에 대한 이유는, 그것이 단순하게 사역자에 관한 문제만으로 그친다면, 우리가 그처럼 인간에게 많은 관심울 기울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 서 성령의 은혜로. 그 사역자를 사역하게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성령의 은혜가 항상 사람의 말과 연합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제정하신 그 사역이 분명히 헛되지 않도록 하시는 그런 방법으로 그 사역에 그의 성령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리스도 자신에게 속한 것을 인간에게 돌리기 위하여 그것을 제거하거나 축소시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그 사역과 분리된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의 능력이 그 사역에 있어서 유효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판단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때때로 너무많은 인간적인 요소들을 만드는 이 사실의 유리함을 취한다.
 
우리는 이 잘못, 곧 하 나님은 따로 한편에 계시고, 사역자는 또 다른 편에 각각 동떨어져 있는 그런 잘못을 수정하기 위하여 분별력을 가져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인간 본연의 위치에 서는 것이 얼마나 팔요한 일이며, 또 인간이 그 능력에 있어 서 얼마나 무력한가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귀철에서 사역자들이 그리스도와 비교가 되게 나란히 함께 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배위야 한다. 이 비교가 되게 하는 이유는, 하나님의 은혜의 중요성을 벌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은, 사여자들에 대한 지 나천칭찬을 아끼지 않기 때문이며,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의 것을 탈취하여 그것을 인간 그들 자신에게 돌리게 되는 까닭이다.
 
그러나 바울은 항상 가 장 적철한 조화성을 주장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번성하계 하셨다”라 고 그가 말할 때, 그는 인간 스스로의 사여온 아무런 결실이 없다는것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른 성구(聖句)에서 역시 동일한 추리가 성례에 적용되고 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토양을 경작하는 우리의 사역을 배척하시지 않을지라도, 그리고 그 사역이 무결실로 들아가도록 하지 `않을지라도, 하나님은 그 사여의 성공 이 오로지 하나님의 축복에만 혼하여, 모든 칭송이 하나님 자신에게로만 돌아오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의 사역이나 노 력, 그리고 그 위급성에 대한 어떤 이득을 연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하나님 께서 우리의 사여과 노력, 그라고 인내를 번창케 하여 주시지 '않는 한, 우리는 발전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고, 무엇이든지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루게 될;것이다.
 
"8. 심는 이와 물주는 이가 일반이나" ;  다른 요소들을 설명에 첨가함으 로써 바울 사도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자기들의 파(派)나 당을 위하여 그 들의 선생들의 이름을 들어 유리한 조건을 얻으려는 찰못을 밝혀주고 있다. 이 선생들은 한 가지 일을 위하여 서로 연합된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며, 동시에, 그들의 의무를 포기하는 대가를 치루는 일 이외에는 결코 나누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파당을 짓는 그 사람들이 찰못된 것이다. 바울은, ‘그들이 일반’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을 다르게 표현하면, 그들은 매우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기 때문에, 그들의 결합은 도저히 분리될 수 없다. 그 이유는 한가지 목표가 그들모든 사람들 앞에 놓였고, 또 그들온 한분 하나 님·울 섭기며, 그리고 갈은 사역에 전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일 그들이 하나님의 일을 신실하계 수행하기 위하여 그들의 노력을 기울여 헌 신한다면, 그들은통일을 괴할 것이며, 서로 ‘주고 받으며' 공동적으로 돕게 될 것이다 • 그들의 이름이 논쟁을 블러 문재가 다르다.일으키는 표준이 되는 것과는 아주 이것은 교역자들이 서로 단합하도록 격려하는 좋은 귀철이 다. 그러나 한편, 바울 사도는 분당의 구실을 만드는 야망을 가전 교사들을 간접적으로 질책하고 있으며, 그리 고 그렇 게 함으로써 그들은 그리 스도의 종이 아닌 헛된 영광을 구하는 자들임을 분명히 밝히고, 또 그들이 씨를 뿌리거나 물을:주는 수고를 하는 것이 아니타, 뿌리를 뽑고 볼테우는』자들이 라고 꾸짖고 있다. .
 
"각각 자기의 일하는 대로 자기의 상을 받으리라." ;  사도 바울은 여기서 모든 교여자들이 그들 앞에 놓여전 마땅히 가져야할목표가무엇인지를가르쳐주 고 있는데, 그 목표는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이다 ... 그는 세상의 영광에 도취되어 .쓸데없는 것을 생각하는 이런 야망에 가득찬 교사들에게 하나님의 십판을 일깨워주기 위하 야이렇게 말하고 있으며, 또한 우아한 모습과 공허한 허영이 ·가져다 주는 헛된 박수갈채의 허무에 취하고 있는,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경고하기 위하여 이렇게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그는 이 말을 합에 있어서 아무런 양 십의 부끄러움을 받지 않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조금도 겁내지 않고 담대하게 하나님의 십판을니]다보고 있기 때문이다. 야망에.찬 사람들이 세상에 대하여、 집념하는 이유는 그들이 하나님께 자신을 완전히 말기는 법을 배우지.못하였기 때문이며, 또 그리스도의 천국이 그들의 눈앞 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 가운데 나타나시자마자, 인간의 칭송을구하기에 급급하던 그들의 갈망은 소멀되고 만다.
 
"9. 우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이요" ;  이것은 최상의 논증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에 종사하고 있으며, 우리가 우리의 노력을 바치고 있는 것도 하나님께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공의로우시므로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상을 잃게 하지는 않으신다. 이런 이유로 인간을 바라보거나, 인간의 보상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하나님의 사역에 대한 놀랄 만한 사실이  있으니,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친히 모든 일을 스스로 하실 수 있는데도, 우리와 같은 보잘것 없는 인간을 들어서 하나님의 조력자로 삼으시고, 우리를 그의 도구로 사용하신다는 사실이다. 가톨릭 교도 들이 자유 의지를 내세우는데 이 본문을사용하는 것은참으로 어리석은 일 이다. 왜냐하면, 여기서 바울은 인간이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무엇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의 은혜로 행하신다는 사실을 가르쳐주 고 있기 때문이다. 어만사람들은, 하나님의 ·일꾼이었던 바울이 그의 동료 들, 말하자면, 다론 선생들의 동역자였다고 말한다. 이 견해는 나에게는 무 리이며 여지인 것같이 보인타·
 
그리고 사실상, 이 이상한 구분을 우리가 믿 도록 강요할 아무런 이유가 없는 것이냐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전율 이룩 하고, 그의 포도원을 경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칙무이고, 하나님께서 사역자들을 하나님과 함께 일하시도록 연합하시는데, 그것은 사도 바울의 의도의 아주 잘 부합이 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공동 목적을 위하여 사 여자들이 하나님과 함께 사역하는 그런 방법으로 행하시기도 하시고, 또 때 로는 친히 하나님 혼자의 힘으로 행하시기도 하신다. 사역에 대한 상에 대 해서는 나의 〈기독교 강요〉 3-18을 보시오.
 
"너희는 하나님의 발이요 하나님의 집이니라." ;  이것은 능동태와 수동태의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능동적인 의미는, 너희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참 농부가 되시며, 곡식을 거두어 들이시는 그런 방법으로, 인간의 수고에 의하여 하나님의 밭에 심기어진 자들이라는 것이다. 또 다시 너희는, 하나님께서 참 건축가가 되시는 그런 방법으로 인간에 의하여 건축되었다는 뜻이다. 한편 수동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우리는 너희를 경작하고, 하나님의 말씀의 씨를 너희의 가슴에 뿌리고 물을 주는 수고를 하였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일을 우리의 이익을 위하여서 하거나, 혹은 그 결실이 우리의 것이 되기 위하여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나님께 순종함으로 헌신하기 위하여 한 것이다.
 
너희를 건축하려는 우리의 열정 속에는 우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려는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희들이 하나님의 기르시는 나무가 되고 집이 되게 하려는 관심 때문이다. 이 두번째 해석이 나에게는 더 타당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내 생각 에는 바울이 여기서 참 사역자들은 자신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위하여 헌신한다는 사실을 설명하기를 원하였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에서 우리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올바르게 하나님께만 소속 되어야 할 때에, 사람들에게 잘못 끌리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사도 바울은 참으로 그들을 하나님의 동역자라고 부름으로써, 이미 은유법을 사용하고 있으며,  다음에 는 그의 논증의 변화를 가져오고, 또 그 규모를 넓히기 위하여, 다른 은유, 곧 건축가를 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