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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요9:41)

1. 성경 (요9:34~41)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 하고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 (34) 예수께서 그들이 그 사람을 쫓아냈다 하는 말을 들으셨더니 그를 만나사 이르시되 네가 인자를 믿느냐 (35) 대답하여 이르되 주여 그가 누구시오니이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36)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37)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3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보지 못하는 자들은 보게 하고 보는 자들은 맹인이 되게 하려 함이라 하시니 (39)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이르되 우리도 맹인인가 (40)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맹인이 되었더라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느니라 (41)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 나는 그들이 그 소경을 눈먼 상태를 이런 태도로 대하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즉 아무 결함이 없다고 자부하는 그들이 불행하고 불우한 사람들에 대하여 동정하고 있다고 그들은 마치 그가 죄의 흔적을 가지고 태어난 사람처럼 그를 모독하고 있다. 이는 모든 서기관들이 영혼이 한 생애를 마칠 때 새로운 몸으로 들어가 거기서 그들이 전에 지은 죄에 대하여 형벌을 받는다고 마음에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소경으로 태어난 자는 그 순간에도 그의 죄로 말미암아 부정해져 있고 오염되어 있다고 결론 짓고 있는 것이다. 이 의곡된 비방은 어느 사람의 죄를 항상 하나님의 채찍으로 추정하지 않도록 조심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이미 우리가 살펴 본대로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재난을 가하시는 데는 여러가지 목적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 위선자들은 이 불행한 사람을 모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또한 그의 거룩하고 선한 여러가지 경고도 배척하고 있다. 자기가 멸시하는 사람에게서 가르침을 받는 일이 어렵다는 것은 아주 흔한 일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경청해야 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누구를 통해서 말씀하시든지 우리는 어느 사람이건 멸시하지 않도록 하자. 그리하여 하나님께서 아주 천하고 우리를 가르치기에 보잘 것 없는 사람을 사용하신다 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 보시기에 양순하고 순복하는 사람들이 되자, 이는 교만이 우리의 귀를 막을 때와 또한 우리의 유익을 위해서 우리를 경고하는 자들의 말을 애써 들으려 하지 않을 때 보다 더 심한 재앙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종종 우리의 교만한 마음을 낮추시기 위해서 무익하고 천한 사람들을 택하여 우리를 가르치시며 경고하신다. 

 

“이에 쫓아 내어 보내니라” ; 그들이 그를 실제로 출교할것을 뜻한 것 같이 보인다. 그리하여 그의 출교당함은 법적인 위세를 보였을 것이다. 이 해석이 문맥과도 잘 맞는다. 왜냐하면 만약 그들이 육체적으로만 쫓아냈다면 그것은 주님의 귀에 들려 올만큼 중요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께서 그 일을 들으신 사실처럼 추측하게 되는 것은 그들이 매우 중요하고 엄숙한 의식을 행하는 것처럼 그 일을 행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이 예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바는 그리스도의 원수들의 출교 선언을 두려워 하기에는 얼마나 사소하고 적은 일이냐 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다스리시는 교회로부터 출교를 당했다면 그것은 우리를 사탄에게 내어주는, 우리에게 내려진 두려운 심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지 않는 그런 곳으로부터는 만약 우리를 내어 쫓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는 자진해서 나와야 한다. 우리는 물론 악인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욕보이는 그런 무모한 심판을 두려워 할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를 만나사~~~~” ; 만약 그가 회당에 그냥 머물러 있었다면 그는 점차 그리스도로부터 떠나는 위험에 돌입하여 악인들이 당하는 그러한 멸망에 빠지게 되엇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지금 성전 밖에서 배회하는 그를 만나신다. 그리고 제사장들에게서 쫓겨난 그를 영접하시며 넘어진 그를 일으키시고 사형 선고를 받았던 그에게 생명을 주신다. 우리는 우리 시대에서 같은 일을경험 했다. 루터와 그와 같이한 사람들이 교황의 악한 폐단을 비난하기 시작 했을 때 그들은 순수한 그리스도교에 대한 조그만 관심도 거의 가지고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교황이 그들에 대해서 노발대발하여 무서운 칙령으로 그들을 로마교 회당에서 내어 쫓은 후에 그리스도께서 손을 내밀어 그들에게 자신을 온전히 나타내 보이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가까이 임하시도록 우리가 복음의 원수들로부터 멀리 떠나 있는 것 보다 더 좋은 일은 없는 것이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 주님은 지금 어려서부터 율법의 가르침 속에서 양육함을 받고 또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약속한 사실을 알고 있는 유대인에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질문은 주님께서 그에게 메시아를 좇아가서 자신을 바치라고 권고하시는 말씀이나 같은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그 당시의 관습과는 달리 더 명예로운 이름을 사용하고 계신다. 이는 메시아는 단지 다윗의 자손으로만 이해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누구시오니까 내가 믿고자 하나이다” ;소경의 대답을 미루어 볼 때 비록 그가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직 확실하고 분명한 것을 알고 있지 못했을지라도 그는 믿음의 자세를 가진 양순한 사람이었던 것이 명백하다. 그의 말은 “나는 주님을 나에게 지적해 주시자 마자 영접할 분비가 되어 있습니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소경이 선지자로서의 그리스도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원하는 것을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분으로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가 경솔하지 않고 주님의 가르침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 그리스도의 이 말씀은 소경을 냉담하고 조그만 분량의 믿음 이외의 더 높은 곳으로 이끌어가지 못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그의 능력이나 아버지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이유 또는 주님께서 인간들에게 가지고 오신 것을 언급하지 않으신다. 그러나 믿음에 있어서 중요한 일은 우리의 죄가 주님의 죽으신 희생을 통해서 정결케 된 것과 또한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하게 된 사실을 아는 것이다. 또한 주님의 부활은 주님이 십자가 위에서 죽었던 그 사망에 대한 승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또한 우리가 육신과 죄에 대하여 죽고, 의에 대하여 살게 하시며 또 우리가 주님의 성령으로 새로와진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소경과 대화히신 것의 전부를 진술하지 않거나 그렇지 않으면 소경이 그리스도의 제자 중 한 사람이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곁으로 왔다는 것을 단순히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믿음의 시작에서 주님은 그를 인도하여 주님에 대한 더 온전한 지식에까지 이르게 하기 위해서 그에게서 그리스도를 인정받기 원하셨다는 것을 나는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절하는지라” ; 여기의 “절하다”는 낱말은 무억을 뜻하는가? 소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확신해서 마치 정신 잃은 사람처럼 경이 중에 그 앞에 꿇어 엎드렸던 것이다.

 

”내가 심판하러 이 세상에 왔으니~~~~” ; “심판”이란 낱말은 이 대목에서 단순히 악인과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내리는 형벌로 해석할 수는 없다. 이 낱말이 조명의 은혜로 확대되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 그것을 심판이라고 부르시는 것은 혼동되고 어지러운 것을 참된 질서로 회복시키는 이유에서이다. 그러나 주님은 이것이 인간들의 일반 여론과는 달리 하나님의 놀라우신 계획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씀하고 있다. 타락성은 배은망덕한 마음으로 그들은 두배로 소경이 되고 또한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판단으로 전에 참 빛이었던 그들의 눈을 완전히 멀게 하신다. 우리는 이제 이 대목의 전 요지를 깨닫게 된다. 즉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소경은 보게하고 또 스스로 지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미련한 사람이 되게 하는 데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리새인 중에 예수와 함께 있던 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 우리는 위선이 언제나 교만과 악독으로 가득차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교만은 자기 만족에 있었고 그들의 현상과 떨어지기를 거부한 데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악독은 마치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병을 지적하셨을 때 그들에게 심한 상처라도 입힌 것처럼 그리스도에게 논쟁을 걸며 덤벼든 데 있다. 따라서 그들은 그리스도와 그가 그들에게 베품 은혜를 경멸했던 것이다.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 “너희가 너희 죌를 인정했다면 그 병은 전혀 고칠 수 없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스스로 건강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너희는 절박한 상태에 남아 있는것이다”라고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주님께서 너희가 소경되었더면 죄가 없으려니와”라고 말씀하실 때 주님은 무지를 무해하고 용서해 줄 수 있는 것이라고 덮어주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다만 병은 그ㅡ 증세가 참으로 실감될 때에만 쉽게 치유될 수 있는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눈먼 소경이 구원을 갈망할 때 하나님은 그를 도울 준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기 자신의 병에 둔감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멸시하고 업신 여기는 자들은 고침을 받을 구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