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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신앙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눅19:33)

예수님의 공생애 중 마지막 일주일이 시작되는 순간을 누가는 누가복음 19장 28절로부터 기록하고 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 가시더라"라고 ~~ 벳바게와 베다니 두 마을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예수님은 두 제자들을 맞은편 마을로 가서 아무도 타보지 않은 나귀 새끼를 끌어오라고 명하셨다. 제자들은 즉시 순종했고 명하신 대로 나귀 새끼를 이끌고 주님 앞에 제자들은 왔고 예수님은 제자들이 안장을 대신하여 자기들의 옷을 걸쳐 놓은 그 나귀의 등에 타고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셨다.

 

이 말씀을 Calvin은 다음과 같이 그의 주석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나귀를 끌어 오도록 제자들을 보내신 것은 여행으로 피곤하셨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목적을 위해서였다. 자기 죽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엇으며 주님은 이 엄숙한 의식으로 자기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고 싶어 하셨다. 주님은 세례를 받으실 때부터 자기 나라의 본질을 보여주기 시작하셨다. 지금까지 왕이라는 칭호를 잘 사용하지 아니하시다가 지금에 와서는 자기가 왕이심을 공공연하게 공언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자기가 진행해야 하셨던 길의 마지막이 멀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러므로 하늘을 향하여 길을 떠나실 시간이 가까왔을 그때 주님은 자기 나라를 땅 위에다 공개적으로 시작하기를 원하셨다.  이 모습은 우습게 보였을지 모른다. 그러나 이는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시키는 것이었다. 왕으로서의 존귀를 주장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나귀를 타시고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셨다. 실로 당당한 광경이었다. 이 나귀는 이 행사를 위하여 빌려 온 것이었고 안장과 다른 장식이 없어서 제자들은 옷을 그 위에 펴야만 했던 것은 심히 부끄러운 표징이었다. 큰 무리가 주님과 함께하고 있었음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은 어떤 자들이었던가? 아무런 생각도 없이 마을로부터 나온 자들이었다. 찬양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나 어떤 자들로부터의 찬양이었던가? 가난하고 멸시를 받고 있던 대중으로부터의 찬양이었다. 주님은 일부러 모든 사람들의 조롱을 받으려 하고 계시는 것 같았다. 그러나 자기 나라에 대한 증거를 제시하시고 그 나라는 땅의 나라들과는 전혀 관계가 없으며, 이 세상의 일시적인 부안에 세워진 것이 아님을 교훈하기 위하여 주님께서 이 방법을 택하신 것은 필요한 일이었다. 이 광경이 이방 사람들에게는 무의미한 것으로 보였을는지 모르나, 하나님은 오래전에 자기 선지자를 통하여 자기 백성에게 구원을 회복시켜 주기 위하여 찾아오실 왕은 이와 같으실 것을 선언하셨던 것이다.]

 

주여 그 크신 은혜에 감격하고 또 감격하며 오늘 하루를 베드로의 고백처럼 "육체의 남은 때"를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겠습니다. 샬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