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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요7:30)

1. 성경 (요7:25 ~36)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25) 보라 드러나게 말하되 그들이 아무 말도 아니하는도다 당국자들은 이 사람을 참으로 그리스도인 줄 알았는가 (26)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그리스도께서 오실 때에는 어디서 오시는지 아는 자가 없으리라 하는지라 (27)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너희가 나를 알고 내가 어디서 온 것도 알거니와 내가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니라 나를 보내신 이는 참되시니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28) 나는 아노니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났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라 하시니 (29) 그들이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30)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그리스도께서 오실지라도 그 행하실 표적이 이 사람이 행한 것보다 더 많으랴 하니 (31) 예수에 대하여 무리가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그를 잡으려고 아랫사람들을 보내니(32)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33)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하시니 (34) 이에 유대인들이 서로 묻되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그를 만나지 못하리요 헬라인 중에 흩어져 사는 자들에게로 가서 헬라인을 가르칠 터인가(35)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한 이 말이 무슨 말이냐 하니라(36)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예루살렘 사람 중에서 어떤 사람이 말하되 이는 그들이 죽이고자 하는 그 사람이 아니냐” ; 불경건한 자들이 원하는 만큼의 복음의 진보를 방해하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손으로 저들의 노력을 막으시고 저들을 흩으시기 때문에 그들의 노력이 효과를 거두지 못한다는 것을 확실리 알아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어디서 왔는지 아노라 ~~” ; 우리는 그리스도의 비천함을 보고 악한 자들에 의해서 멸시받았던 이 겸손이 우리를 하늘의 영광까지 끌어올리도록 그리스도를 바로 보는 법을 배우도록 하여야 한다. 그렇게 할 때, 그분이 태어나야 했던 베들레헴은 우리가 영원한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문이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며 외쳐 이르시되 ~~~” ; 주님의 논조는 복음의 신앙이, 온 세상이 달려들어 이를 뒤엎어 치려 할지라도 조금도 약화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비록 악한 자들이 그리스도로부터 그에게 속한 것을 취하여 간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진리는 확고하게 그대로 서 있기 때문에 주님은 완전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스도는 자기가 멸시의 대상이 되어 있음을 안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에게 굴복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를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자들의 교만을 누르고 놀랍도록 승리하셨다.  모든 신자는 이와 같은 불굴의 정신으로 무장해야 할 것이다.  아니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께 대항해서 일어나는 악한 자들의 오만을 진멸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신앙은 굳건한 토대 위에 서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경건한 교사들은 온 세상이 건전한 교훈을 저항한다 할지라도 이를 저지하기 위하여 위와 같은 믿음에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된다.

 

”너희는 그를 알지 못하나” ; 주님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자기를 모르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참 지혜는 하나님을 바라보는 데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자기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씀하실 때 그는 무턱대고 이러한 확신을 갖게 된 것이 아님을 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의 본에 의해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가볍게 일컫고 우리의 취지를 변호해주고 후원해 주시는 분으로 함부로 자랑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경고해 주고 있다.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주제넘게 하나님의 권위를 가지고 있다고 자랑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실 자기가 스스로 지어낸 말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주장하는 광신자들보다 하나님의 판단을 거절하는 데 더 대담한 사람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이와 같은 그리스도의 말씀은 교만하고 어리석은 확신을 경계해야 할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진리를 발견한 이후에는 사람의 의견을 용감하게 저지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편에 계심을 확신하는 사람은 세상의 거만과 교만의 송사를 조금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이는 내가 그에게서 낫고 그가 나를 보내셨음이니라” ; 어떤 사람들은 이 두 가지 문구를 구별하여 전자는 신적인 본질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고 후자는 주님께서 육신과 인성을 취하실 때 아버지께서 그에게 내려주신 직분을 가리킨다고 말하고 있다. 비록 나는 거부할 정도로 강경하게 말하지는 않지만 나는 주님께서 그와 같이 간교하게 말씀하셨다고 믿지 않는다. 나는 물론 이 말씀에서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을 유추할 수 있다고 인정한다. 그러나 이것은 아리우스파의 교리를 반박하기에 충분한 그리스도의 신성에 대한 증거는 되지 못한다.

 

”저희가 예수를 잡고자 하나 손을 대는 자가 없으니~~~~” ; 하나님의 보호하심에 따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폭력으로부터 지키심을 받았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에서 우리는 일반적인 교훈 하나를 얻을 수 있다.  그것은 우리가 오늘날까지 살아왔지만 각 사람의 죽을 시간은 하나님에 의해서 작정되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많은 사고의 위험 아래 있는 우리가 또 인간과 짐승의 위험과 많은 질병의 위험 앞에 노출되어 있는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가실 때까지 모든 위험으로부터 안전하다고 하는 것은 사실 믿기 어렵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불신에 대항하여 싸워야 한다. 첫째로, 우리는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교훈을 붙들어야 하며, 둘째로 그 목표를 그리고 여기서 얻을 수 있는 권고를 포착해야 한다. 즉 우리는 각자가 염려를 하나님께 맡기고 각자의 소명 가운데 봉사하며 어떠한 공포에 의해서도 자신의 임무에서 움직여서는 안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자기 한계를 넘어서 행동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섭리에 대한 확신이 하나님께서 친히 명령하는 것을 지나쳐서는 안된다. 

 

“무리 중에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말하되” ; 그리스도께서는 귀머거리와 고집불통에게 설교를 했던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는 약간의 열매가 따랐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이 불평한다 할지라도 다른 이는 미소를 짓고 또 다른 이는 중상과 비방을 한다. 비록 많은 차이점이 나타난다 해도 복음 전파에는 효력이 따르게 마련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씨를 뿌리고 때가 되어 열매가 나타날 때까지 꾸준히 기다려야 하는 것이다. 여기에 “믿는다”는 말은 분명하게 쓰이고 있다. 그들은 주님의 가르침보다는 기적에 더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께서 메시아라는 확신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되어 있었고 그에게서 가르침을 받을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믿음을 위한 준비를 믿음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예수께 대하여 무리의 수군거리는 것이 바리새인들에게 들린지라” ; 이 말씀으로 보건대 바리새인들이 항상 그리스도가 알려지지 못하도록 경계했던 것이 분명하다. 처음에는 복음서 기자가 바리새인들만을 언급했지만 곧이어 그들과 한 패였던 대제사장들이 언급되고 있다. 이들은 율법을 옹호하는 열성파라는 인상을 주기 위하여 그리스도를 다른 이들보다 더 신랄하게 반대했던 것이 분명하다. 바리새인들과 대제사장들은 서로 의견을 달리했던 사람들인데도 사단의 지도 아래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일에 공모한다. 바리새인들이 그들의 횡포와 교회의 부패상을 변호하는 데 그와 같이 열심이었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의 나라를 지키는 일에 얼마나 더 열심을 내야 하겠는가?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 어떤 사람은 주님께서 이 설교를 그곳에 있던 무리에게 하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또 다른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체포하기 위하여 보냄을 받았던 관원들을 향하여하셨다고 생각한다.  나로서는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멸하려고 계획하고 있던 그의 원수들을 향하여 말씀하고 있다고 믿는다. 주님은 그들의 노력을 비웃고 있다. 아버지께서 정하신 때가 오면 그들의 노력은 허사로 끝날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또한 다음과 같은 일반적인 교훈을 얻는다. 복음 전파에 의하여 주님께서 우리를 구원의 소망으로 부르실 때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에베소서 2장 17절에서 복음의 도를 그리스도의 내려오심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도 이유가 있는 것이다. 만일 주님께서 내밀고 있는 손을 우리가 잡기만 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아버지께로 인도하실 것이다.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으로 오지도 못하리라” ;그리스도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이나 다름없다 “이제 너희에게 참을 수  없고 어울리지 않는 듯한 나의 임재도 잠깐 동안에 불과하다. 이제 곧 너희는 나를 찾으나 헛수고일 것이다. 나는 육체적으로뿐 아니라 능력에 있어서도 너희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을 것이며 하늘에서 너희의 멸망을 지켜볼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찾는 것이 어떤 성격의 것인지를 질문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복음을 배척하는 데 있어 극도로 완악했던 버림받은 자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그들의 구속주로서 그들과 함께 하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들은 회개치 않음과 마음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그들의 길을 막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은혜받을 만한 때”(사58:9)에 부지런히 하나님께 나아가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나태함에 얼마나 오랫동안 참으실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는 말씀에 그는 미래 시제 대신 현재 시제를 쓰고 있다.

 

”이 사람이 어디로 가기에 우리가 저를 만나지 못하리요~~~~” ;복음서 기자는 사람들의 어리석음이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고의적으로 이 말을 덧붙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