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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요7:38)

1. 성경 (요7:37~44)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37)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하시니 (38)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39)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어떤 사람은 이 사람이 참으로 그 선지자라 하며 (40) 어떤 사람은 그리스도라 하며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41)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이 살던 마을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42)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43) 그 중에는 그를 잡고자 하는 자들도 있으나 손을 대는 자가 없었더라 (44)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사도 요한이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서 와서 마시라”고 외친 그리스도를 소개해 준것은 우리에게 커다란 유익을 준다 왜냐하면 한두사람을 작고 낮은 목소리로 초대한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도록 큰 소리로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에 고의적으로 귀를 막고 그의 외침을 들으려 하지 않는 사람들 외에는 숨겨질 수가 없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 주님은 사람이 자신의 빈곤을 의식하고 도움 받기를 원하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와서 자기의 축복에 참예하라고 권하고 있다. 비록 자신의 빈곤에 대한 의식이 모든 사람을 치유책으로 인도하고 잇지는 않지만 우리는 모두가 가난한 자요 공허한 자로서 모든 축복이 결핍되어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비참한 내리막길을 걸으며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이 그의 불로서 그들의 마음 속에 배고픔과 목마름을 일깨워 주기까지 자신의 공허함에 대하여 조금도 개의치 않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은혜에 대한 갈증을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성령의 직무인 것이다. 본 성구가 주는 교훈은 첫째로, 축복에 대한 간절함이 없는 자는 아무도 성령의 부요함에 참예하라는 부름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다. 우리는 갈증의 고통이 얼마나 심각한 것인가를 알고 있다. 많은 양의 일을 견디어 낼 수 있는 아주 강인한 사람도 갈증이 심하면 기진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둘째로, 이 말씀은 “부자를 공수로 보내셨도다”라고 한 동정녀 마리아의 노래와도 같은 것이다(눅1:53). 우리를 직접 주께로 나아오도록 부르고 계신다.

 

”마시라” ; 주님은 자기가 마르고 텅빈 저수지가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 음료수를 공급할 수 있는 무진장의 생명샘이라고 선언하고 따라서 우리가 원하는 것을 주님께 구하다면 우리의 소망은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

 

”나를 믿는 자는” ;믿는 자에게는 신령한 것에 부족함이 없다는 의미이다. 또 누구든지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그 안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을 소유하게 된다는 의미이다. 보통 우리가 마시는 물은 갈증을 잠시동안 채워주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믿음을 통하여 영생하도록 솟아오르는 생명샘이 되시는 생명을 마시게 된다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이 말씀은 또한 우리의 믿음의 역량이 얼마나 작은 것인가를 경고해 보여주고 있다. 성령의 은사는 물방울처럼 우리에게 떨어지지만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모신다면 우리의 믿음이 그를 포용할 수 있다면 이 물은 강물과 같이 흐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세상에서는 성령의 은사를 충만하게 받을 수 없는 것이다.

 

”성경에 이름과 같이 ~~~” ; 예언자들의 일반적인 가르침에서 주님은 증거를 취하셨다.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 물은 때때로 그 순수함 때문에 성령에 적용된다. 우리의 더러움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이 성령이 하시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의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살리시고 그의 숨은 능력으로 우리에게 물을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삶의 생기를 상실하게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영으로 거듭나지 못한 모든 사람들은 무슨 생명의 가면을 쓰고 있다 하더라도 죽은 사람으로 간주될 수 밖에 없음을 깨닫게 한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 주님께서 아버지의 오른편에 앉히신 바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는 그의 나라를 정당한 절차를 따라 소유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그 때까지 성령을 충분히 나타내는 일을 연기한 것은 놀라울 것이 없다.

 

“이 말씀을 들은 무리 중에서~~~~” ; 사도 요한은 보다 순수성을 지니고 있엇던 평번한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데 세가지 부류다. 첫째 부류는 예수님을 참으로 선지자로 인정한 부류다. 그러나 그들은 주님의 교훈을 싫어한 것은 아니나 그들의 고백이 경박하고 경솔하여서 선생으로 인정하면서도 주의 말씀하시는 내용을 깨닫지도 못하고 음미하지도 않았다. 두번째 부류는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직접 고백하고 있는 부류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이들에게 반기를 들고 일어남으로 분파가 생기게 된다. 이러한 예에서 우리는 오늘날에도 갖가지 논쟁으로 사람들이 나누일 때 이를 이상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경고를 받게 된다. 세번째 부류는 복음에 있지 않은 부류다.

 

“그리스도가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 그리스도를 거절하기 위하여 구실을 찾는 데는 빈틈 없이 열심을 내지만 바른 교훈을 받아들임에 있어서는 놀랄 정도로 더디며 무감각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종종 그리스도께로 나오지 않는 구실로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한 마로 그 성령 말씀을 가지고 이와 같이 그들 스스로 장애물을 설치한다.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 ; 사도 요한의 뜻하는 바는 그들이 그리스도를 멸시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를 배척하는 악한 일을 할 때 그리스도를 해하고자 하는 잔인한 음모와 정욕이 동반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