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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요7:53)

1. 성경 (요7:45~53)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그들이 묻되 어찌하여 잡아오지 아니하였느냐 (45)아랫사람들이 대답하되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하니 (46) 바리새인들이 대답하되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47)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자가 있느냐 (48)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그 중의 한 사람 곧 전에 예수께 왔던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50)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51)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52)[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53)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아랫사람들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로 오니” ; 이 악한 제사장들이 왜 그리스도를 잡아오지 않았느냐고 물을 때 그들은 마치 자기들의 명령을 그 무엇도 반대해서는 안되는 것처럼 자기들의 권세를 과장하고 있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 ; 주님을 죽이려 하던 이 사람들이 마치 망치로 얻어맏고 쓰러진 사람들처럼 단순히 그리스도의 음성에 압도되어 뒤로 물러가 엎드러진 사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의 말씀에는 악인들이라도 두렵게할 만한 커다란 능력이 있음을 배우자, 그러나 이것이 그들의 멸망이 되었으니 그러므로 우리는 조심하여 마음의 부드럽게 함은 받되 낙담하지 말자 오늘날에도 우리는 그 하속들과 아주 흡사한 사람들을 많이 본다. 복음의 가르침에 갑복하기를 싫어하고 또한 그리스도께 굴복하기는 커녕 그들은 여전히 대적의 진영에 머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나쁜 사람들이 있다. 즉, 그들은 악인들의 환심을 사기 위해서 비방하는 말을 총동원하여 그 가르침을 비난하기 때문이다. 마음 속으로는 그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임을 확신하면서도 말이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 ; 하나님께서 대제사장에게 결정권을 위임하신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가 율법을 따라 결정할 것을 뜻하셨던 것이다. 그러므로 목사들이 어떠한 권위를 가지고있던지간에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예속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가장 높은 자로부터 가장 낮은 자에 이르기까지 모든 사람이 제 자리를 지키게 되며 하나님 홀로 높임을 받으시게 되는 것이다. 만약에 정직하고 진실하게 자기의 사명을 수행하는 목사들이 스스로 권위를 주장한다면 그것은 거룩하고 합법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서 인간의 권위만을 내세울 때 그것은 헛되고 무용한 자랑이다.러나 악한 자가 교회를 주관하는 일이 종종 있는 일이므로 우리는 일단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떠났을 경우에 사람에게 아무것도 돌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으면 않된다.

 

“이 무리는 ~~~~” ; 그들의 교만심의 첫면은 제사장의 이름의 권위를 사용하여 모든 사람을 지배하고자 하느데 있었다. 그 다음 면은 그들이 나머지 사람들을 무가치한 자들로 멸시하는데 있었다. 자신들을 과신하는 자들은 언제나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 경멸적이고 또한 형제들에 대한 경멸은 언제나 자기 사랑을 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은 온 무리들을  저주 받은 자로 선고하고 있다. 그러면 어째서 그런가? 분명히 율법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들은 변명한다. 그러나 다른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즉, 그들은 자기들의 교단을 떠나서는 거룩함이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이 지식은 소수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잘못된 자아심에 부풀어서 자신들을 일반 대중으로부터 분리시킬 수도 있으나 그 지식은 하나님의 모든 자녀들에게 공통적인 것이기 때문에 가장 작은 자로부터 가장 큰자에 이르기까지 같은 믿음의 순종으로 함께 모일 수 있는 것이다.

 

“니고데모가 그들에게 말하되” ;사도 요한은 니고데모를 주립적이고 또한 경건한 교리를 엄숙하게 변호하는 자로서가 아니라 진리를 억압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는 자로서 묘사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니고데모를 “밤에 찾아왔던 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일면적으로는 그를 부끄럽게 하기 위함이었다. 만약 니고데모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는 감히 경건치 않은 자들의 분노에 맞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를 더욱 기탄없이 변호하지 못한 것은 그의 지나친 두려움에서 기인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뜻하는 바는 니고데모가 아직도 밤의 은닉에 대한 동경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가 그리스도의 참된 제자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사도요한은 니고데모가 전에 밤에 그리스도께 찾아왔었지만 공공연히 대적 가운데 남아 있어서 그들의 진영에서 신분을 같이하고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런 점에서 이것은 한층 더 주위 깊게 주목할 문제이다. 즉, 오늘날 니고데모와 같은 체 하면서 이 가면을 쓰고 하나님을 조소하면서도 벌 받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많다고 하는 점이다. 그들의 주장대로 그들이 니고데모와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을 시인한다 하더라도 그러한 태도가 어떻게 그들을 돕겠는가? 니고데모는 먼저 말을 듣기 전에 그리스도를 정죄해서는 안된다고 말하고 있다. 강도나 살인자에 대해서도 이와 똑같은 말을 할수 있습니다. 죄인을 정죄하는 것보다 무고한 자를 석방하는 것이 낫다는 것은 잘 알려진 속담이기 때문입니다. 더우기 그리스도의 인격을 뚜렷이 드러내고자 하는 열심으로 그는 그 가르침 자체를 버리며 포기하고 있다. 우리가 여기서 경건하고 믿는 사람에게 무슨 가치를 찾을 수 있는가? 이와 같이 후에 열매를 맺은 복음의 씨가 지금은 그 사람의 속에서 막힘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러나 주님께서는 겉으로 보기에는 다 없어져 버린 것 같은 교훈을 가지고 은밀히 뿌리가 나게 하고 오랜 세월이 흐른 후에 싹이 나게하며 처음에는 홱실히 낙태된 것 같이 하시지만 후에는 생명과 활기가 넘치게 하신다.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 그리스도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갈릴리 사람들 뿐이라고 그들은 말하고 있다. 이것은 비난하는 말이다.

 

“다 각각 집으로 돌아가고” ; 이제 이 장면을 끝맺고 있는 놀라운 광경을 자세히 주목해 보라. 만약 누가 제사장들의 치리하던 방법, 그들의 분노와 그들의 임의로 행사할 수 있는 권세를 무장한 경호원도 없이 맨손 맨 주먹만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본다면 그리스도는 틀림 없이 처치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무시 무시한 음모가 저절로 사라지고 또 이 모든 사람들의 노도와 같은 맹렬한 분노를 벌였을 때 누가 그들의 흩어짐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한 것이었다는 것을 시인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