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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요8:12)

1. 성경 (요8:12 ~ 20)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12) 바리새인들이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증언하니 네 증언은 참되지 아니하도다 (13)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여도 내 증언이 참되니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거니와 너희는 내가 어디서 오며 어디로 가는 것을 알지 못하느니라 (14)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 (15) 만일 내가 판단하여도 내 판단이 참되니 이는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계심이라 (16) 너희 율법에도 두 사람의 증언이 참되다 기록되었으니 (17) 내가 나를 위하여 증언하는 자가 되고 나를 보내신 아버지도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느니라 (18) 이에 그들이 묻되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내 아버지도 알지 못하는도다 나를 알았더라면 내 아버지도 알았으리라 (19) 이 말씀은 성전에서 가르치실 때에 헌금함 앞에서 하셨으나 잡는 사람이 없으니 이는 그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음이러라 (20)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나는 세상의 빛이니” ; 그리스도께서는 이 일반적인 말씀으로 유대인과 이방인, 유식한 자와 무식한 자 그리고 귀족과 서민과의 차별을 없애기를 원하셨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이 빛을 찾을 필요를 알아야 한다. 이는 이 세상이 암흑이고 또 그들 자신이 완전히 소경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한, 아무도 비취임을 받고자 그리스도께 자신을 드리려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빛을 얻는 방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보였을 때 우리는 소경으로 정죄를 받고 있는  것이며 또한 우리가 빛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이 흑암과 캄캄한 밤으로 비유되고 있는 것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한 가지 유의하여야 할 것은 조명의 힘과 기능이 그리스도의 육체적 임재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몸으로는 멀리 떨어져 계시지만 복음의 가르침과 그 성령의 비밀한 능력으로 날마다 그의 빛을 우리에게 비추어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복음과 그리스도의 영에 의해서 비추임을 받은 것을 알 때까지 우리는 이 빛에 대한 정의를 가지지 못한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모든 지식과 근원이 그리스도 안에 감취어져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나를 따르는 자~~~” ; 그리스도께서는 이 가르침에 즉각 약속을 확증하고 있는 권면을 부언하고 계신다. 그리스도의 지배를 받고자 자기를 내맡긴 모든 자들이 탈선할 위험이 없다는 말을 들을 때 우리는 경각심을 가지고 그리스도를 따라야만 한다. 그리스도를 솔직히 말하자면 손을 내밀어 우리를 자기에게로 이끌어 주시는 것이다. 그 약속이 크고 거대하기 때문에 그 능력도 또한 충만한 것이다. 그리하여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자들은 어둠 속을 통과할 때라도 확실한 길을 가게 된 것을 분명히 알게 된다. 그리고 그것도 잠시 동안만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그렇다. 그것이, 즉 “어두움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고 미래 시제로 말씀하신 중요한 뜻이다. 이것은 또한 빛의 영속성을 분명하게 진술하고 있는 그 하반절의 뜻이기도 하다.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사람의 수가 극소수이기 때문에 세상에 오류와 미신의 빽빽한 흑암이 다스리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바리새인들이 가로되~~~~” ; 그들은 자기를 변명하는 말을 믿지 말라는 격언이 있다는 이유로서 반대한다. 객관적인 증거를 제시하지 않는 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터무니 없다는 것이다.

 

”내가 나를 위하여 증거하여도~~~~” ;사람마다 자기를 변호하면 이에 의심을 받으므로 율법을 자기 입장에 유리하게 말할 때 그 사람의 말을 믿지 말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온 세상 위에 계신 하나님의 아들에게는 적용되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부루에 속한 분으로 간주되어서는 안 될 뿐 아니라, 오직 그의 말씀으로써 모든 사람들을 정상화하는 특권을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부여받으셨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어디서 오며~~~” ;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기원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부터 왔음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성한 가르침이 인간의 법의 규제를 받아야 한다면 부당하며 불합리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자기 육체를 낮추심으로 종의 형체를 입고 오셨을 때, 사람들은 그를 멸시했기 때문에 주님은 장차 그에게 임할 부활의 영광을 그들에게 상기시키고 계신다. 이 복음서에 나타난 그리스도의 위엄이 우리 속에 굳게 세워지기 위해서는 우리는 항상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영광을 주목하면서 주님께서 세상에서 말씀하시는 것을 들어야 한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 두 가지 면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중 하나는 육체의 타락한 관점에서 판단하는 것이거나, 다른 하나는 사람의 외모를 보고 판단하는 것이다. 두 가지 다 본 성구에 잘 맞는다. 왜냐하면 육체의 태도가 지배하는 곳이나 또는 사람에 대한 차별이 심판을 지배하는 곳에는 진리나 공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육체를 성령과 대조할 때 그 뜻은 한층 확실해지는 것 같다. 그러므로 주님은 그들이 정당하고 유력한 심판자가 되지 못함을 말씀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아무도 판단치 아니하노라” ;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께서 사람과 같이 판단하지 않는다는 의미로 주장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들은 그 이유를 시간에 두는데, 즉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계시는 동안은 심판자의 직분을 아직 취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어거스틴은 두가지 설명을 하고 있지만 결론에 도달하지 못한다. 그러나 전자의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다. 이 성구는 두 절로 되어 잇다. 그 한 절은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지 아니하신다는 것’이고, 다른 한 절은 ‘만약 그리스도께서 판단하신다 할지라도 그의 판단은 확고하고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 판단이 신적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말씀하고 있는 그 앞절을 본문의 내용에 한정시킨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는 그 원수들로 하여금 교만심에 대한 가책을 더욱 깊이 받게 하기 위해서 그들이 맘대로 판단할 특권을 가지면서도 그리스도를 정죄할 수 없는 것과 그리스도께서 단지 가르치시기만 하시고 판단자의 직권 행사를 삼가하고 있는 것을 비교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만일 내가 판단 하여도~~~” ; 그리스도의 판단은 권위가 부여받을만하다는 의미

”내가 혼자 있는 것이 아니요~~~~” ; 그리스도께서 행하시며 가르치시는 모든 일이 신적인 것으로 간주되어야 한다는 의미다.

 

”너희 율법에도~~~~” ; 그리스도는 자신을 아버지와 구별하심으로 자신을 말씀 듣는 무리의 입장에 적응시키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그의 직분상 이렇게 하고 계신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세상에 계실 때 아버지의 일군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그가 가르치는 모든 말씀이 아버지께로부터 난 것이라고 주장하고 계신 것이다.

 

”네 아버지가 어디 있느냐~~~” ; 오늘날 가는 곳마다 그리스도를 그렇게 담대하게 경멸하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보내심을 받는 분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이다.

 

”너희는 나를 알지 못하고~~~~” ; 그들의 무식을 책망합니다. 그들이 아버지에 대해서 물었지만 아들이 그들 앞에 와 계신 것을 보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그렇게 확실하게 공개된 하나님의 아들을 멸시한 자들이 끝내 아버지께로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그들의 교만심과 배운망덕에 대한 공변된 형벌이다. 죽을 인생이 하나님의 손에 의해서 높임을 받지 않는 한 어떻게 그가 하나님의 높이까지 올라갈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그리스도 안에서 인생들에게 자비의 손을 펴시기 위하여 인간의 비천에까지 내려오셨다. 그런 고로 이와 같이 그들에게 가까이 오신 하나님을 거절하는 자들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는 것은 당연하지 않은가?  이 똑같은 사실이 우리 모두에게 전해지고 있다는 것을 알자 그리스도로부터 시작되니 않고서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은 누구나 미궁에서 방황하기 마련이다. [고후3:18 을 참고하라]

 

”이 말씀은 ~~~하셨으나” ; 사도 요한은 이 성구로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능력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그 이유는 조금 전만 해도 그들이 죽이려 하던 그리스도께서 성전에서 말씀을 공공연히 가르치셔도 그들이 그것을 용납할 만큼 강권함을 받았기 때문이다. 성전에 대한 그들의 치리권은 절대적이어서 그들은 폭군의 횡포로서 성전에서 권력을 휘두르고 있었으므로 말 한마디로 그리스도를 추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교사의 직무를 취하셨을 때 어찌하여 그들은 즉각 그리스도를 강제로 붙잡지 아니하였는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게 하시고 또 친히 그리스도를 보호해 주셨으므로 맹수가 이 주님을 향하여 그 턱을 벌리고 있으면서도 주님께 손을 대지 않은 사실을 깨닫게 된다. 주님은 다시 그의 때를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우리의 살고 죽는 것이 사람들의 뜻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뜻에 있음을 가르쳐 주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