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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요8:59)

1. 성경 (요8:56~59)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56) 유대인들이 이르되 네가 아직 오십 세도 못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 (57) 예수께서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내가 있느니라 하시니 (58) 그들이 돌을 들어 치려 하거늘 예수께서 숨어 성전에서 나가시니라 (59)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 오늘 말씀으로 주님은 전에 그들에게 거절하셨던 것을 허락하신다. 즉 아브라함이 그들의 조상이라는 사실 말이다. 그러나 주님은 아브라함의 이름으로부터 오는 반론이 얼마나 약한지를 그들에게 보여주신다.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브라함이 평생토록 가졌던 단 한 가지 목적은 나의 나라가 번성하는 것을 보는 것이었다. 그는 내가 없을 때 나를 사모했지만 너희는 내가 있을 때 배척했다”라고~~~.   주님께서 여기에서 아브라함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적용된다. 그러나 이 가르침은 아브라함이 온 교회의 아버지가 되는 점에서 아브라함에 관해서 더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므로 경건한 자들 가운데 포함되기를 원한다면 당연히 그리스도의 임재를 기쁨으로 받아야 한다. 아브라함은 그것을 열렬히 사모했다. 이는 ‘기뻐하다’는 낱말이 크고 열열한 애정을 암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문이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믿음의 눈을 가졌다 할지라도 어떻게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을 뵐 수 있었느냐고 하는 것이다.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믿음에 따라 그리스도를 보는 정도가 다르다’ 고 하는 것이다. 옛 선지자들은 주님께서 그들에게 약속하신 대로 그리스도를 뵙는 것은 허락되지 않았다. 즉 주님께서 하늘로부터 인생들에게 내려오셔서 자신을 자세하고 완전하게 보여주셨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서 배우게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소원을 물리치지 않으신 것과 똑같이 주님은 지금도 자기를 사모하는 어느 누구도 실망시키지 않으시고 그의 경건한 소원을 만족케 해주신다는 사실이다. 

 

”오십 세도 못 되었는데~~~~~~” ; 마치 그들이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네가 오십 세가 되었다고 주장한다 할지라도 분명코 너 자신을 그렇게 나이가 많은 것 같이 보이게 할 수는 없다’라고~~~. 그러므로 주님의 얼굴이 실제 연령보다 더 늙어 보였거나 또는 본문에 언급된 년수가 태양력이 아니었다고 짐작하는 사람들은 헛수고를 하는 것이다. 

 

“아브라함이 나기 전부터 ~~~~~” ; 주님은 자신이 인간의 모습 외에 더 위대하고 더 높은 것을 소유하고 있음을 그들에게 깨닫게 하신다. 그런데 그것은 육체의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오직 믿음의 눈으로만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말씀은 두 가지 면에서 설명될 수 있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의 영원한 신성에 관계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히브리서 13장 8절에서 처럼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느니라”라고 한 사도의 증거 한 주님의 구속자이심과 그의 능력과 은혜가 모든 시대에 공통되었다는 점에서 나는 후자가 더 넓게 뒷받침해 준다고 생각한다.

 

”저희가 돌을 들어~~~~” ; 그들은 율법의 명령을 따라 그리스도께서 돌에 맞아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므로 이렇게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이 맹목적인 열심에서 나온 미친 것임을 추론하게 된다. 그들은 사건의 진상을 알아볼 귀는 가지고 있지 않지만 살인한 손을 준비하고 있다. 주님께서 비밀스러운 능력으로 자기를 구출한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오늘날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도 그리스도를 몰아내고 교회를 그렇게 더럽히면서도 어리석게 교회의 가면을 자랑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