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 4:1 ~ 5)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1)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2)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3)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4)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사람이 마땅히 우리틀 그리스도의 일군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르 여길지어다.” ; 사람들이 좋아하거나 혹은 싫어하는 이유 때문에, 교회가 유해한 여러 파당으로 찢기는 것을 보는 것은 중대한 일이므로, 바울은 말씀의 사역에 대하여 논의를 계속하고 있다. 여기서 순서상 세 가지 일을 살펴보게 된다. 첫째는 교회 목사의 직무의 한계를 정하는 것이며, 둘째로 그는 어떤 사람이 명칭만을 내세우거나, 그 직무에 용기를 내는 것만으로는 만족하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그 직무에 따르는 의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함을 나타내고 있다. 세째로 그에 대한고린도교회 교인들의 판단이 아주 잘못되었으므로, 그는 그들과 자신 모두를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불러오고 있다. 그러면 첫째로, 그는 교회의 교사에게 주어져야 하는 신분에 대하여 나타내고 있다. 이 문제를 취급함에 있어서 그는 사역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이 없도록, 또 인간이 마땅히 평가받아야 할 수준 이상으로 높게 평가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자신이 언급할 내용에 제한을 가하고 있다. 그가 제한을 가하고 있는 두 가지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극히 위험한 일이다. 왜냐하면 말씀을 경멸하는 것은 사역자들의 퇴보를 가져오며, 또 한편 만일 그들이 그들 자신이 받아야 할 이상의 처우를 받게 되면, 사역자들이 자유라는 유리한 점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대적하는 일을 하면서, 하고 싶은 대로 방종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이 말하는 절제는 그들을 그리스도의 사역지들이라고 부르는 데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이 자신의 일을 하는 입장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섬기도록 고용한 하나님의 사역을 하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들이 교회를 거만하게 지배하도록 임명된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능력아래 있음을 암시하고 있다. 한마디로 그들은 종들이며 주인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라는 추가문은 사역의 성격(genus)을 나타낸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의 직무가 하나님의 비밀을 분배하는 일에 제한되어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그들은 우리가 말하는 대로 ‘손에서 손으로' 즉, 자신들의 기호에 맞는 것이 아닌,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것을 다른 사람들에게 넘겨 주는 것 뿐이라는 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곧 "하나님은 자신의 천국의 지혜를 그들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그들을 그의 아들의 사역자들로 선택하신 것이다. 그 이유 때문에 그들은 그 임무에만 자신을 엄격하게 제한하여야 한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하나님의 비밀은 소홀히 하고, 인간이 지어낸 이상한 일들----이것을 오로지 세상적인 지식의 표준으로 삼아 그들의 선생들을 평가하는 이유이다----- 에 너무 현혹되어 따르기 시작하였다고 간접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복음이 그 내용상 하나님의 신비임에 대하여 자랑하고 있다. 더구나, 성례가 이 신비에 부가물로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하는 책임을 진 사람들은 역시 성례로 베푸는 권세를 가졌다고 할 수 있 다.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 이것은, ‘만일 관리직(dispensatio)이 잘못되면, 관리 (dispensator)가 안된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갈다. 통치의 참된 관리는 의무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 귀절에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왜냐하면 오만한 방법으로 가톨릭 교도들이 단순히 ‘사역자들'이라고 그들이 불리어진다는 구실 아래 그들이 하는 모든 일과 , 가르치는 모든 일에 권위를 부여하려는 것을 우리가 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순한 칭호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기 때문에, 소명을 받은 사람이 그 사명을 성실히 수행하지 않으면 그 바른 소명만으로는 그 사람에게 충분한 것이 못된다.
그러므로 가톨릭 교도들이 그들의 우상의 전제적 지배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위장된 이름으로 우리에게 나타날 때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역에 있어서 보다 더 중요한 것을 바울이 요구하고 있다고 대답하여 주자. 그러나 만일 모든 것이 적절하게 고려되었다면, 우리는 교황과 그의 추종자들이 그 직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성실성이 부족할 뿐 아니라, 그 사역 자체도 부족한 것임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귀절은 악한 교사들에 관한 논의에 관계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의 영광이나 교회 건립보다는 다른 목적을 가진 모든 사람들에게 관계되는 성구이다. 그것은 진리를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이 일치하게 신실한 것이 아니라, 마음 속 깊은 곳에서 하나님께 헌신하고 그리스도의 왕국을 증진시키려는 열망을 가진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리고 참으로 어가스틴은 고용군에게 이리들과 좋은 선생 사이의 중간 위치를 유용하게 할당한다. 더구나 그 귀절에서 어거스틴은 그리스도께서 또한 좋은 청지기로부터 지혜를 요구하신다는데 대하여 바울이 말한 것보다도 더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 의미는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는 ‘충성스러운'이라는 것을 건전하고 지혜로운 생각을 가져야 하는 양심의 순결성을 의미하고 있다: 바울은 ‘충성스러운 종’을 정직한 마음과 지식을 가지고 참되고 순결하게 사역자의 직무를 이루어가는 그런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3.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 다른 사람들이 이것을 '다르게 설명할지라도 내 생각은 은유적으로 '심판'을 의미하는 ‘날'이라는 단어를 취하는 것이 더 쉽다. 왜냐하면 관리의 공의를 지적하였던 날들이 있고, 어떤 날을 위해서 파당들이 인용되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의 말씀이나 진리에 의해서가 아닌, 사실은 하나님은 의자에 앉아 계시고 인간의 환상이나 경솔함에 따라 재판이 이루어지는 ‘인간의 날' 이라고 부른다. 바울은 ‘인간이 그들 좋을 대로 재판석에 앉도록 내버려 두라 하나님께서 그들이 결정한 것은 무엇이나 다 무효로 하시고 말테니까'라고 말하고 있다•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그에 대하여 그것으로부터 그들의 마음을 결정하도록 하기 위해서 바울이 그의 신실성을 그 묘사의 중심으로 가져오고 있음이 남아 있다. 그러나 그들의 판단력이 부패하였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제쳐놓고, 그리스도의 심판대에 호소하고 있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외형적인 외모에 끌리고 있으며, 참되고 적절한 특성의 표지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고 있는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왜곡되고 맹인과 갈은 그들의 판단을 멸시하고 있다고 아주 대담하게 입증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외적으로 인간의 찬사를 받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아니며, 또 만일 자신들이 인간의 찬사의 대상이 된다면 행복해 하는그런 거짓 사도들의 허영심에 일침(一針)을 가하고 있다.
또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오만을 신랄하계 비난하고있는데, 그 이유는 오만이 바로 그들의 판단력을 어둡게 하는 원천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울이 한 교회의 비난을 배척하며 인간의 판단으로부터 자신을 예외로 취급할 무슨 권리가 있는가라는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이것은 모든 사역자들이 교회에 의하여 판단 받을 수 있는 그들의 공동 운명이라는 사실에 비추어 제기될 수 있는 질문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이렇다. 즉 그것은 좋은 목사가 그의 가르침과 생활이 교회의 ·판단으로 증명되는 좋은 표식이며, 또 그가 시험의 빛을 피하지 않을 때, 선한 양심을 나타내는 기호가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바울 자신은 고린도에서 교회의 판단에 복종할 준비가 분명하게 되어 있었으며,·만일 적당한 질문 방법이 그들에게 있었다면, 그의 생활이나 교훈에 대하여 피력할 수 있는 준비가 갖추어져 있었다. 왜냐하면 그는 때때로 그들이 이 능력을 가졌다고 생각하며, 또 그들이 바르게 판단할 뜻을 가졌음울 진지하게 알고 있기때문이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목사가 적대적이고 부당하게 지시된 욕망으로 자신이 과대평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때, 또 공의와 진리가 설 자리가 없음을 발견할 때는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께 호소하여야 하며, 특별히 진실되고 적절한 조언을 들을 수 없을 때에는 주님의 판단에 의지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들은 이렇게 처신하여야 한다는 것을 기억하도록 하고, 그들의 가르킴과 생활이 평가를 받아야 하며 더 나아가 자발적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여야 한다. 즉 만일 그들을 대적하는 어떤 불평이 있다면, 그들이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유없이 정죄를 받거나 그들의 사건이 해명되지 못한 채 판단을 받는다면, 인간이야 어떻게 생각하든지 무시하여 버라는, 관대한 수준으로 자산을 끌어 올려, 아무 동요없이 하나님의 판단을 기다리도록 하여야 한다. 오래전에, 선지자들이 그들을 대적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을 멸시하는 강퍅한 사람들을 다루어야 했을 때, 그들이 그 극악한고집을 짓밟는 것과 같은 명령자의 위치에서 그들을 다루었을 때,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하나님위 권위와 진리의 빛이 뒤집히는 결과가 왔다. 그러나 어떤 사람이 자신을 그가 자신의 결백을 변명할 기회를 갖게 되었다거나 혹은 그가 자신의 결백을 증명할 필요성을 갖게 될 때, 그리고 하나님께 호소하게 될 때, 그는 이런식으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지 않을 것이며 그런 방법은 오히려 그의 큰 오만을 드러내는 결과가 될 것이다.
“나도 나를 판단치 이니하노니.” ;; 이 의미는 내가 자신을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 중의 하나일지라도, 나도 감히 자신을 판단하지 않겠다. 하물며 내가 알고 있는 것처럼 나 자신을 알지도 못하는 당신이 어떻게 나를 판단할 수 있다는 말인가? 라는 뜻이다. 그리고 그는 비록 그가 개인적으로 어떤 잘못을 전혀 모를지라도 그것은 그가 하나님의 눈앞에서 무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함으로써, 자신을 판단하는 위험을 강행하지 않는다고 증거하고 있는 데 , 그러므로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스스로 선포하는 것은 그들이 하 나님에게만 속하였다는 것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는 내가 자신을 철저히 살펴보았을 때, 나는 나의 통찰력이 내 존재의 내적인 면을 살피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만이 판단하실 수 있고,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권리를 가지고 있으므로, 그것이 바로 내가 이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이유이다. 당신은 무슨 근거로 그보다 더 할 수 있다고 선포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개개인이 자신들에 대하여 각사람이 그의 형제에 대하여, 또 모든 사람들이 그들의 목사에 대하여 모든 종류의 판단을 금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일 것이므로, 우리는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선악으로 판결되는 인간의 행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경정에 의하여 평가되어서는 안되는, 각 개인의 가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각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고 무슨 영예를 그 사람에게 줄 것인가를 결정하는 것은 하나님의 특권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바울을 멸시하고, 무모하게 하나님께만 속하는 시험귄울 마치 그들 자신이 재판관이라도 되는 것처럼, 다른 사람들을 높은 지위에 올려 놓았다. 이것이 그가 이미 언급한 ‘인간의 날'로써, 말하자면 인간이 심판대에 올라, 마치 그들이 신(神)들인 것처럼, 하나님께서 유일하신 심판주로 삼으신 그리스도의 날을 앞질러 처리하고 있는데, 그들은 각 사람에게 그의 위치에 대한 명예를 부여할 때에 어떤 사람은 높은 위치에, 또는 최하의 낮은 자리로 좌천시키고 있다. 그러나 무슨 원리로 그들이 이런 구별을 짓는 것인가? 그들은 표면상으로 나타나는 것에 주의를 기울일 뿐이며, 그외의 것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들에게 고귀하고 자랑스럽게 보이는 것이 때때로 하나님께는 증오의 대상이 되어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사역자들은 나무가 그 열매로 구벌 되듯이, 이 세상에서 그의 공적으로 인하여 구별된다는 것을 더 반대한다면, 나는 이런 것이 참으로 사실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들을 바울이 취급하여야 했던 사람들로 우리는 생각하여야 한다. 그들은 단순히 겉치례만을 좇는 사람들이며, 또 판단을 내리고,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친히 절제하셨던 권세를 자랑하고 있는 자들이다. 이 권세는 천국에서 사람들에게 각 각 그 위치가 주어질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우리가 성실하다는 것을 알게 된 사람들에 대하여 결심을 하고, 또 그들을 그렇게 추천한 데 대하여 그는 아무런 제지를 하지 않는다. 또 그는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서 누가 악한 일꾼들인가를 우리가 결정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어떤 사람이 야망심에 불 타서 다른 사람들에게 나타난것이 분명할 때 그들이 그럴 만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상황에 대한 적절한 설명이 주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의 철면피를 그가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4. 내가 자책핥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나……” ; 여기서 바울이그의 전 생애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것이 아니라. 그의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한데 대하여서만 말하고 있다는 사실에 유의 하자, 만일 그가 참으로 자신에게 아무 잘못이 없다는 생각울 가졌다면, 로마서 7장 19절에서 토로한 불평은 진실이 아닐 것이다. 즉, 그가 행하지 않으려는 악은 그가 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 전적으로 자신을 말기지 못하도록 죄가 그를 방해하게 된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신 안에 거하고 있는 죄를 깨닫고, 그것을 고백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사도직에 관하여서는, 여기서 그가 취급하고 있는것은 바로 그 문제인데, 그는 여기에서는 그 자신 흠이 없고 성실하게 그의 임무를 수행하였으므로 어느 면으로든 양십에 거리낌이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일반적인 증언이며, 또 얼마나 그가 바르고 거룩한 마음을 가졌었는가를 분명히 나타내 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모든 죄에 대하여 순결하고 자유로움으로 칭의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왜냐하면 하나님은 분명히 우리보다도 예리한 통찰력을 가지고 계시므로, 우리에게 찬란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도 그의 눈에는 부정하게 보인다. 하나님의 준엄한 공의를 우리의 생각으로 판단하지 말라는 탁월하고 유익한 경고가 여기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지각은 보잘것 없고, 하나님은 인간의 평가 수준을 초월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하여 너무 관대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대단히 준엄한 재판관이시다. 그러므로 "사람의 행위가 자기 보기에는 모두 정직하여도 여호와는 심령을 감찰하시느니라"(잠 21 :2)는 솔로몬의 말은 진리이다.
가톨릭 교도들은 믿음의 확신을 기초적으로 뒤혼들기 위하여 이 귀절의 우월성을 들고 있으며, 만일 그들의 가르침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우리의 전 생애를 비참한 불안 속에서 허덕일 수 밖에 없으리라고 참으로 나는 고백한다. 우리의 공적(功續)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으신다면, 어떻게 우리가 평안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가톨릭 교도들의 중요한 근거로부터는 끊임없는 양심의 갈등 밖에 일어날 것이 없다고 본다. 그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안에서 값 없으신 자비가 우리에게 주어졌음을 강조하고 있으며,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 하시는 사실을 확신 있게 알게 된다.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 아무것도 판단치 말라” ; 이 결론에서 바을 사도가 무엇이나 모든 판단을 다 정죄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검사가 없는 조급하고 경솔한 판단을 정죄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각 사람의 특성을 편견 없는 눈으로 보지 않고, 야심을 가지고 보았으며, 어떤 사람은 과대평가하고 어떤 사람은 과소평가 하는 잘못을 범하였으며, 또 각 개인의 공적을 결정하면서, 인간 이상으로 인간의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러므로 얼마나 많은 것이 우리에게 허락되었고, 우리가 시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며, 그리스도의 날까지 연기된 것은 어떤 것인가를 우리가 알아야 하고, 또 이 한계를 넘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어떤 것은 지금 우리에게 분명히 나타나 있고, 다른 것은 그리스도의 날까지 파 묻히고 숨겨져 있다.
“그가 어두음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 만일 이것이 그리스도의 날에 대한 참되고 적절한 설명이라면, 이 세상 일은 많은 사물이 어두움에 싸이지 않는 그런 질서 있는 곳이 못 된다. 즉 세상에는 많은 사물이 어두움에 싸이지 않도록 할 만큼의 빛이 없다. 나는 인간의 생활과 행위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그 절의 둘째 부문에서 그는 무엇이 암흑과 무질서의 이유이어서, 모든 것이 지금 분명하지 않는가를 설명하고 있다. 물론 인간의 마음 속에는 잘 알 수 없는 은밀한 것이 있으며 깊은 비밀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인간의 생각이 밝히 드러날 때까지는 항상 어두음이 있을 것이다.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 이것은 ‘너희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마치 자신들이 경기의 감독자 같이, 어떤 사람에게는 왕관을 주고 다른 사람에게는 불명예를 준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갈다. 그러나 이 권리와 이 기능은 그리스도의 것이다. 너희들은 이것을 아직 왕관을 받을 시기가 분명히 이닌 때에 왕관을 수여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참으로 그가 알게 하실 그 날을 지적하셨다. 이 설명은 선한 양심의 확신에서 일어나는데, 우리가 우리의 칭찬을 하나님의 손에 맡길 ·때, 우리가 인간의 갈채와 그들이 사용하는 공하한 말을 도외시할 때, 이 진술은 역시 은혜를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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