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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

1. 성경 (고전 4:6~13)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들어서 본을 보였으니 이는 너희로 하여금 기록된 말씀 밖으로 넘어가지 말라 한 것을 우리에게서 배워 서로 대적하여 교만한 마음을 가지지 말게 하려 함이라 (6)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냐 (7)너희가 이미 배 부르며 이미 풍성하며 우리 없이도 왕이 되었도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 노릇 하기 위하여 참으로 너희가 왕이 되기를 원하노라 (8)내가 생각하건대 하나님이 사도인 우리를 죽이기로 작정된 자 같이 끄트머리에 두셨으매 우리는 세계 곧 천사와 사람에게 구경거리가 되었노라 (9)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어리석으나 너희는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롭고 우리는 약하나 너희는 강하고 너희는 존귀하나 우리는 비천하여 (10)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맞으며 정처가 없고 (11)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12)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13)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6. 내가 너희틀위하여  이 일에 나와 아볼로를 가지고 븐을 보였으니” ; 우리는 여기에서 그 분파의 창립자였던 바울에게 그들이 헌신되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추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이 그렇게 하도록·가르침을 받지 않았으며, 오히려 만용에 감동을 받은 그들이 자신들을 과시하는 선생들에게 맡긴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자신의 이름과 그의 형제들의 이름에 대하여 더 자유롭고 증오감을 덜 불타일으킬 것이므로 특별한 언급을 할 수 있어서, 그 자신의 경우---- 잘못은 다른 사람들에게 있는 것이다—--를 실례를 들고 있다.  동시에 그들에게 귀찮은 방법이 될 수밖에 없는 것 속에서, 그는 당파를 짓는 사람들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고 이 치명적인 분파가 일어나게 된 근원을 그의 손가락으로 지적하고 있다. 그는 만일 그들이 좋은 교사들로 만족하고 있다면, 그 흉사(凶事)가 그들에게 일어 나지 않았을 것이다.

“우리에게서 배워~~~~~” ; 다른 사본에는 ‘너희에게'라고 되어 있다. 둘 다 아주 적절하며, 그 뜻에 있어서 아무 차이가 없다. 바울은 ‘실례를 들기 위하여 나는 이 일들을 나와 아볼로에게 적용시켰으므로, 너희들이 이 전형을 너희 자신들에게 적용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들 앞에 거울로써 제시하는, 우리의 생애의 모범에서 너희들은, 배우기를 바란다.  또는 ‘너희에게 배위라, 말하자면 이 실례를 너희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라'고 말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들이 무엇을 배우기를 원하는가? 아무도 그의 선생님 때문에 다른 사람을 대적하여 뽐낼 수는 없을 것이다. 즉 그들이 자기의 선생들에 관하여 교만을 부릴 수 없으며, 선생들의 이름을 자기 파(派)의 명목 유지를 위하여 또 의견의 차이로 교회를 ·분리하는 데 오용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들이 자신의 칭호 이상으로 무엇인가 가지고 있다고 선언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그의 세력 안에 넣기를 열망할 때, 교만이나 자화자찬은 모든 논쟁의 원인과 시발점이 된다. “기록한 말씀 밖에"라는 귀절은 두 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 것은 바울이 기록한 것을 나타내거나 아니면 그가 인용한 성경의 증거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므로, 독자들이 임의로 무엇이나 택할 수 있다. 

“7.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 그 의미는, ‘누구든지 나타나기  원하거나 야망으로 교회를 혼란에 빠뜨리려는 사람은 공개 적으로 나타나게 하라' 는 뜻이나 나는 누가 그를 다른 사람 앞에 내세우는가, 다시 말하면 누가 그를 다른 사람과 같은 대열에서 빼내어, 다른 사람보다 더 우월하게 하였느냐고 그에게 질문하겠다. 이제 이 전체의 논증은, 하나님께서 그의 교회에 세우신 협정에 의존하고 있다. 말하자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들은 서로 결합하여야 하고, 그들 각자가 자신의 위치, 신분, 기능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영예에 만족하여야 한다. 만일 한 사람이 그의 위치를 포기하고, 다른 사람의 위치로 껑충 뛰 어 오르려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의 직무를 차지하려고 한다면, 그 전체 몸의 운명이 어떻게 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한 머리 아래서 서로 도울 수 있는 그런 방법으로 교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위치와 각자의 신분을 서로 깨닫도록 하자.
 
또 우리는 우리 하나님을 교만하지 않고 겸손히 섬길 수 있는 각각 다른 많은 은사를 받았고, 또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 자신을 적응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그러므로 우월하고 자 하는 사람들의 야망을 고치는 최선의 방법은 그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여, 세상의 그 누구도 그가 고귀한 신분이나 혹은 천한 신분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닫도록 하는것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그렇게 하실 분이다. 하나님은 어떤 사람이 머리의 위치에 올라서도록 그렇게 많은 것을 한 사람에게 주시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모든 일에 영광을 받으시도록 그의 은사를 골고루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신다는 사실을 그들은 또한 깨달아야 한다. 
 
‘구별하다’는 말은 여기서 ‘뛰어나다’는 뜻이다.  어거스탄은 때때로 이 본문을 펠라기안파들을 대적하는데 잘 이용하고 있다.  즉, 인간에게 있는 탁월성은 무엇이나 저절로 되어서 선천적이나 유전적인 것이 아니며, 또. 하나님을 우리의 지배 아래 두는 우리의 자유의지에서 온 것이 아니라, 그것은 순결하고, 값 없이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에서 온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인간의 공적이나 무가치성에 대적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고 있음이 틀림 없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 이것은 앞 절에서 말한 것을 확증하고 있다. 나는 사람에 대해  아무것도 우월성을 가진 것이 없는 인간은 자신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할 아무 권리를 가질 수 없다. 자랑할 만한 아무런 정당성도 없이 자랑하는 것 이상 더 무익한 일이 어디 있을까? 인간은 누구도 자신의 우월성을 주장할 근거를 갖지 못하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자신을 높은 수준에 두는 것은 어리석고 주제넘는 일이다. 한편 그리스도인의 겸손의 참 기본은 자기 만족에 취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안에 선한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우리가 알기 때문이며, 또 한편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선을 심어주셨다면, 그 이유로 모든 것이 더욱 그의 은혜일 수밖에 없다. 한마디로, 우리는 (씨프리안이 말한 것처럼)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으므로 자랑하여서는 안 된다.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 같이 자랑하느뇨.” ; 우리가 우리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이므로, 우리에게는 자랑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점에 유의하여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가 제 1강에서 깨달은, 그리스도가 모든 우리의 축복의 근원이므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하기를 배우게 된다. 그리나 우리가 우리 자신의 자랑을 버리기까지는 그렇게 될 수 없다. 우리가 비어 있을 때, 하나님은 그의 권리가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나타내며, 따라서 우리에게 어떤 칭찬할 만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에서 온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여진다. 

“8. 너희가 이미 배부르며” ; 그는 그들의 잘못된 확신을 진지하게 그리고 분명한 말로 제재하고 있다. 이제 그는 빈정대어 말하면서, 그것을 조롱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마치 자신들의 행복이 완전한 것인 양, 극도로 자만하고 있기 때문이다. 차례 차례로 그는 또한 그들의 오만을 나타내기 시작한다. 첫째 그는 그들이 배부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과거의 일 임을 의미한다. 그 다음 그들이 부자라고 그는 덧붙이는데, 이것은 미래에 속한다.  마지막으로 그는 그들이 지배권을 가졌다고 말한다. 이것은 다른 두 개보다도 더 큰 것이다.  그것은· 마치, ‘너희들이 현재 배부를 뿐 아니라, 미래에도 부요할 것처럼 보일 때, 그보다 더, 너희들이 다스리는 자가 될 때, 너희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동시에 그는 그들의 배은망덕을 은연중에 책망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그를 아주 오만하게 멸시하며, 더구나 그들이 모든.것을 얻은 사람들울 경멸하기 때문이다. 그는, ‘우리를 제외하고’라고 말하고 았다. '아볼로 와 나는, 우리의 일을 하였을지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난 모든 것을 너희들에게 주신것이므로, 우리가 너희들에게 한 것은 우리가 한 것이 아니다. 하 나님의 은사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며,  동시에 너희들이  모든 것을 받았고 사람들을 멸시하는 것은 얼마나 악한 일인가! 라고 말하는것과 갈다. 

“우리가 너희와 함께 왕노릇하기 위하여” ; 이 말에서; 그는 '너희 눈에는 자신이 탁월한 사람같이 보여서 나와 나의 동료들을 주저없이 멸시하지만,  그러나 너희들의 자만이 얼마나 무익한 것인가를 살펴보아라. 우리가 나누어 주지 않은 것을 하나님 앞에서 너희는 자랑할 수 없다. 왜냐하면,  만일 하나님의 복음을 갖는 것이 너희를 자랑스럽게 한다면, 그 복음을 너희들에게 전하여 주는 사역을 한 우리들에게야 그 영광이 더욱 클 것이기 때문이 아닌가?  참으로 이 어리석은 태도는 모든 교만한 사람들에게 공통되며 그들이 모든 것을 자신의 것으로 생각할 때, 그들은 모든 축복을 스스르 박탈하고,  더 나아가서는 영원한 구원의 소망까지도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라는 뜻을 의미하고 있다.

“너희의 왕 노릇 하기를 원 하노라” . 사도 바울은 여기서 그들이 어떤 행복을 가진다면, 그들의 행복을 그가 싫어하는 것은 아니며, 처음부터 그는 그들을 지배하기를 원치 않았고, 다만 그들을 하나님의 나라로 인도하기를 원할 뿐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들이 자랑하고 있는 왕국은 가상적이고 그들의 기쁨은 가짜이고 유해 한 것이라고 그는 밝히고 있다. 오직 참된 영광은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들의 머리 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며, 각각 자기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의 분량에 따르는 것이다.

“9. 내가 생각컨대~~~~~” ;바울이 그 자신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아볼로와 실바누스를 함께 포함하고 있는지 정확하지 않다. 왜냐하면 그는 때때로 사람들을 사도들이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는 바울 자신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것을 더 광범위하게 적용하기를 원한다면, 그가 크리소스톰(Chry sostom)처럼 이해하는것만 아니라면, 나로서는 크게 반대하지 않는다. 크리소스톰은 모든 사도들이 망신을 당한 것처럼, 최하의 위치로 저하 시킴을 당하고 있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미말'(微末)이라는 말로써 그는 그리스도의 부활 후에 사도직의 서열에 포함이 되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그가 죽음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군중들에게 구경시켜지는 사람들 같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있다. '구경거리'라는 의미는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하여 거리에서 끌려다니다가 교수형을 당하기 위하여 감옥으로 끌려가는 사람들을 말한다. 
 
그는 그 자신이 구경거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덧불일 때 더 분명하게 밝혔다.  '사나운 진승들과 싸우거나, 검투사의 경기 또는 다른 고통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처럼 , 나의 고통스런 모습을 응시하는 군중들 앞에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 나의 운명이다. 그리고 나의 경우 그것을 소수의 군중들이 아닌 온 세상에 다 나타내어 보이는 것이다’ 라 고 그는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이렇게 하신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가 낙심하거나 결코 절망하지 않는 바울의 이 놀라운 부동성을 살펴보라  그는 그 자신을 세상의 권세에 맡기지 않고, 다시 말하여 경기장에서 불명예의 경기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섭리에 맡기고 있는 것이다. ‘천사와 사람에게'라는이 문장의 마지막 부분을 나는 분명히 이런 의미로 즉 내가 나 자신을 스포츠의 경기자로서 지구에서만이 아니라 하늘에까지 그 모습을 나타내었다고 본다.
 
이 귀절은 그것을 선한 천사에게 대한 설명으로 보는 것이 불합리한 일로 보이므로, 마귀를 의미한다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바울은 그의 불행을 보는 것을 기뻐하는 사람들이 증인이라고 의미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다만 그가 세상에 대하여 스포츠를 제시하도록 지적된것처럼 보이는 그런 방법으로 하나님께서 그의 생애를 인도하신다고 말하고 싶었을 것이다. 

“10. 우리는 그리스도의 연고로 미련하되……” ;이 대조는 풍자를 통한 폭탄이며, 예리한 비평이다. 왜냐하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든 면에서 행복하고, 인간적인 수준에 따르는 명예를 만끽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그들의 선생과 아버지가 전적인 불명예와 모든 불행으로 고통을 당하는 것을 보는 것은 분명히 참기 어려우며 또한 참으로 불합리한 일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이런 방법으로 자신을 겸손하게 낮추어서, 참으로 신의를 얻어, 그 자신의 허락으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가 갖지 못한것을 갖게 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이런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그 다음에 곧 따라 나오는 짧은 귀절의 논박을 아주 쉽게 받게 된다. 그러므로, 그는 양보에서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현명하고 강하며, 또 특출하다는 반어적인 상태가 된다. 그것은 ‘내가 그리스도를 너희에게 전파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서 오로지 바보가 될 수 있는데 반하여, 너희는 복음과 함께 지혜의 명예를 얻기를 갈망하고 있다’라고 말한 것과 같다. '내가 스스로 바보스러워지든지 또는 그 명예를 가질 때에, 너희가 현명한 자로 블리어지기 원하는 것이 옳은 일인가를 마음 속 깊이 곰곰이 생각해 보아라. 너희들은, 너희들의 선생인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바보가 되고, 너희들이 지혜로와지는 이 두 가지 일이 잘되어 간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지혜로와지는 것은 좋은 의미를 내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결론이 여기서 따른다 왜냐하면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와 인간의 지혜를 혼합하려는 욕망을 비웃으며, 사실상 그들은 전적으로 서로 다른 것을 혼합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그 귀절에 따르는 추리는 비슷하다.  즉, ‘너희들은' 강하고 유명하다. 다른 말로 하면, 너희들은 세상의 부와 자원을 자랑하며, 또 너희는 십자가의 치욕을 참을 수 없다. 한편 내가 비천하고 경멸을 받아야 하며' 너희들을 위하여 많은 결점을 가져야 하는 것이 정당한 일인가? 그러나 이 불평은, 그가 참으로 그들 가운데서 연약하고 비천하였기 때문에, 모두가 더 분명히 이루어진다. 간단히 말하면, 아버지는 미천한 그대로 남아서, 세상의 모욕을 받고 있는데, 아들과 제자들은 유명하고 명성을 얻기를 원할 때에 사태는 뒤바뀜으로, 그는 그들의 허무를 비웃고있는 것이다. ,

“11. 바로 이 시간까지 ~~~~” ; 여기서 사도 바울은 그 자신의 상황에 대한 생생한 묘사를 함으로써、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의 모범에서 교만한 마음을 버리고, 마음으로 순종하며 , 그와 함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영접하도록 하고 있다. 그는 그들이 그를 멸시한 것들을 아주 기술적으로 잘 기억하게 하면서, 복음 전파에 대한 그 자신의 무쌍한 충성과 지칠줄 모르는 열정을 나타내었으며, 또 한편, 그는 그의 적들이 어떤 그런 증거도 보이지 않으면서 최상위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것을 은연중에 책망하고 있다. .

“12.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후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핍박을 당한즉 참고.” ; 우리가 주의 하여야 할 '로이 도루메노이 카이 불라스페 -무매노이:  욕을 먹고 있거나 악평을 듣고 있다" 의 두가지 분사 사이의 구별을 우리가 주의하여야 하는 이외에, 그 말들 자체는 아주 분명하다. '로이 도리아 ; 욕을 하는' 는 가장 무자비하게 물어 뜯는 종류의 재치를 의미하는데, 이것은 가볍게 할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물어 뜯어서, 공적으로 모욕을 가하여 그의 명예를 해치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도레 인' 은 어떤 날카로운 기구를 가진 것처럼 욕설로써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나는 이것을 ‘욕설에 자극을 받은' 이라고 해석 한다. '블라스페 -미아' 는 어떤 사람이 격렬하고 잔인하게 중상을 받았을 때, 거친 말씨로 비난하는 것을 의미 한다.
 
박해를 참고 견디며 그의 박해자들을 위하여 기도한다고 그가 말할 때, 그는 십자가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를 낮아지게 하시고 겸손하게 하였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겸손하게 되는,기쁨을 부여받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 속에서 그는 어떤 사람의 작은 손가락이 닿는 것도 견뎌내지 못하는 그렇게 연약하고 부드러운 거짓 사도들을 책망하고 있을 것이다. 그들의 사역에 대하여 말하떤서 그는 그의 직무가 얼마나 경멸을 받는가를 분명히 보여주기 위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라고 덧붙이고 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의 노동력을 통하여 나는 생계를 유지할 뿐 아니라, 비천한 일을 손으로 한다' 라고 말할 수 있었을 것이다.

“13.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같이 되었도다" ; . 바울은 두 가지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 첫째는 도시의 속죄를 위해서 공공연한 저주의 대상으로 신(神)들에게 바쳐진 사람을 의미한다.  헬라 사람들은 때때로 이런 사람들을 '카다르마타 ; 페물, 쓰레기 , 찌기' 보다는 '카다르모이 ; 청소, 속죄 , 보상' 라고 불렀다.  왜냐하면 그들은 도시의 모든 최와 죄책을 스스로 짊어지며, 또 그 도시민의 다른 죄를 그렇게 하여 깨끗케 하기 때문이다; 전치사 '페리 ; 둘레에, 사방에' 를 덧붙임으로써 바울은 속죄 의식(讀罪儀式) 자체를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이 보이는데, 그 이유는 속죄 제물로 바쳐지는 이런 비참한 사람들을 도시 변두리로 데리고 가서, 그들과 함께 도시 구석구석에·숨어 있는 모든 악을 다 제거하여 더 완전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 복수는 바울이 자신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동료인 다른 사람들에 대하여도 암시하는 것같이 보이는데, 그들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멸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데 있어서 그 자신보다 더 많은 사람을 포함하여야 할 볼가피한 이유는 없다. 다른 단어 '페리페 마; 쓰레기, 먼지' 는 톱밥, 어떤 종류의 쓰레기와 또한 재목 쓰레기 등을 나타낼 때 사용된다. 그러나 이 두 용어에 관하여 부데우스(Budaeus)의 주석을 참고하라. 우리는 우리가 먼저 살펴 본 귀절의 의미에 이것이 어떻게 적용되는가 관찰하여야 한다. 바울은 그 자신의 극단적인 비천을 묘사하기 위하여 자신은 화해의 희생 제물로 지정된 사람과 같이 온 세상의 저주를 받아 마땅한 사람이며, 또 쓰레기와 같은 존재여서 모든 사람들에게 증오를 받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최초의 직유(直哈)에 의하여; 그 자신이 죄를 위한 속죄 제물임을 암시하는 것이 아니라, 불명예와 모욕에 관한 한, 그 자신과 또 모든 사람들의 저주를 받는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사실만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