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4:14 ~21)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내 사랑하는 자녀 같이 권하려 하는 것이라 (14)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아버지는 많지 아니하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내가 복음으로써 너희를 낳았음이라 (15)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16)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 안에서 내 사랑하고 신실한 아들 디모데를 너희에게 보내었으니 그가 너희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행사 곧 내가 각처 각 교회에서 가르치는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17)어떤 이들은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스스로 교만하여졌으나 (18)주께서 허락하시면 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교만한 자들의 말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으니 (19)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 (20)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내가 매를 가지고 너희에게 나아가랴 사랑과 온유한 마음으로 나아가랴 (2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4절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쓰는것이 아니라……” ;그가 방금 말한 것이 그 반어(反語)를 제하여 버리고 있으므로, 그것은고린도교회 교인들의 감정을 상할 수도 있으며, 그는 지금 그들의 불만에 부딪쳐 그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이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그들을 권고하려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의 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게 하는 것은 아버지의 징계의 효력이며 본질이다. 자기의 죄에 대한 질책을 받을 때, 그 아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 이것이 바로 회개의 시초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징계하는 아버지의 목적은 그 아들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 대하여 불만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바울이 지금까지 말한 것은 고린도교회 교인들로 하여금 자신들에 대하여 부끄러움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 그리고 조금후에 그는 그들이 부끄러움을 느끼도록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자신들의 죄를 깨닫도록 가르쳐줄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그는 그들에게 비난을 퍼붓거나 그들의 죄를 공개하여 망신시키려는 것이 그의 의도가 아니라는 것을 말하려는 것 뿐이다. 우호적인 방법으로 훈계하려는 사람은 모든 부끄러움이 자신과 그가 경고하려는 사람 사이에 그대로 남아 있으며 , 또 그런 결말을 보게 되는 특별한 고통을 받게 된다. 그러나 악한 방법으로 비난을 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드러내며, 그 사람이 모든 사람들의 비난의 대상이 되도록 하여서 그가 치욕을 당하게 만든다. 그라므로 바울은 그들을 비난하려는 의도에서나 혹은 그들의 명예를 손상시키려는 뜻으로 그가 가진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그들에게 부족한 것을 강권적으로 일깨워주려는 것임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교훈의 목적이 무엇인가? 그 목적은 과대 망상에 사로잡혀 있는 교만한, 그러면서도 사실은 텅비어 있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과 함께 십자가의 치욕을 자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하여, 또 그가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철저하게 자랑하는 그런 근거들에 대하여 더 이상 그를 멸시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다.
간단히 말하면, 이 교훈의 목적은 그들이 이전의 교만을 다 버리고, 거짓 선지자들의 공허하고 거짓된 허식보다는 그리스도가 받으셨던 그 고난에 더욱 중요성을 부여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교사들은 여기에서 배워야할 것이 있는데, 곧 책망을 할 때는 이런 온건한 방법을 택함으로써 , 책망을 받는 사람들이 극단적인 가혹함으로 인하여 상처를 받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금언(金言)에 이런 말이 있다. 꿀과 기름에는 식초를 가미하여야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들이 책망하고 있는 사람들을 조소하고 있거나, 또는 그들의 치욕을 기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도록 특벌히 주의하여야 한다. 참으로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도 더 그들이 이유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안녕을 위하여 그렇게 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기 위하여 그들은 고통을 받아야 한다. 만일 내가 말한 그런 온건한 방법으로 그 비난의 예리성을 연마하지 않는다면, 단순한 외침만으로 교사들이 과연 무엇을 이룰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어떤 선행을 하기를 원한다면, 우리의 비판이 우호적인 마음으로 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밝혀주는 것이 옳다.
“15절 그리스도 안에서 일만 스승이 있으되” ; 바울은 그가 아버지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지금 그 자신만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들을 낳았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이 설명이 특별히 자신에게 해당되는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이 비교에 있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모든 권위를 부여하는 거짓 사도들, 그러면서 그들 때문에 바울자신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취급하는 그 거짓 사도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 따라서 그는 아버지와 교사에게 어떤 영예가 주어져야 하는가를 그들이 생각하도록 권고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새로운 교사들을 크게 존경하고 있다. 만일 너희들이 너희들 마음 속에 내가 너희들의 아버지라는 사실과, 그들은 단지 교사들 뿐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나는 반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자신에 관한 이 권위를 선포함에 있어서, 그는 그들이 그렇게 높게 평가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자세를 가졌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들은 너희들을 가르치는 데 고통을 받고 있다. 참 좋은 일이며 잘하는 일이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 아버지의 관심, 아버지의 호의는 교사의 사랑이나 관심, 호의와는 모두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그가 이미 설명한 믿음의 미완성에 대하여 또한 암시를 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아무리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최대의 교만을 부릴지라도, 그들은 믿음에 있어서는 어린이들이며, 이것이 바로 그들을 교사들에게 맡기는 이유이다. 그는 또한 선생들이 그들의 제자들을 가르침에 있어서 항상 제자들이 그 선생들의 교훈만을 따르도록 하기 위하여 기초적인 원리만을 가르치는 참으로 불합리한 잘못을 발견하고 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 이것이 바로 바울만이 고린도교회의 아버지로 인정 받아야 할 이유이다. 왜냐하면 그가 고린도교회를 낳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여기서 유일하신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가 그들을 낳았다고 아주 적절하게 말함으로써 영적 출산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참으로 바울은 복음이 외형적인 이유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가 그를 떠나서는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리스도에게 접붙임을 받았을 때,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출생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자. 그러나 사실은 이것이 복음을 통하여 이루어져야 한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이사야서에서 인용하여 가르친 것처럼 (벧전 1 : 23~25, 사 40 :.6~8), 우리는 본래 육체이며, 풀이고,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그것을 통하여 영생을 얻어 새롭게 되는 ‘썩지 않는 씨앗'이기 때문이다. 복음을 떠나서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저주받고 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가 말씀으로 인하여 출생한 그 하나님의 말씀은, 그 후에도 우리를 기르는 우유이며 우리의 성장을 계속 돕는 영양소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렇게, 즉 '교회에서 매일 매일 하나님을 향하여 출산되고 있는 새 자녀들을 보면서, 왜 바울은 그의 후임들을 아버지라 부르는 것을 부인하는가?' 라고 반대할지 모른다. 그 해답은 아주 쉽다. 즉, 여기서는 그가 교회의 기원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역자들의 사역으로 출생하게 되었다 할지라도, 이 영예는 순수하게 바울에게만 돌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그가 고린도교회를 이룩하였기 때문이다. 다시, 만일 어떤 사람이 ‘모든목회자들이 아버지가 될 수 없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왜 바울은 오로지 자기 자신만이 그 칭호를 누리기 위하여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서 이 칭호를 박탈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는 여기서 비교적인 방법으로 말하고 있다. 따라서 아무리 그 칭호가 다른 관점에서 적절하게 그들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바울과 비교하면 그들은 교사외에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또한 내가 조금 전에 말하였던 것, 곧 바울이 그들 모두 (이를테면 바울 자신과 같은 류의 사람들, 다시 말해서 아볼로, 실비누스, 그리고 디모데와 같이 그리스도의 나라를 확장하기 위한 열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을 아버지라고 부르는데는 어려움이 없으며, 그들에게 바울과 같은 동일한 영예를 주는 데도 아무 어려움이 없다) 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야망에 사로잡혀서 다른 사람들에 해당되는 영예를 자신에게 들리는 그런 사람들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을 빛내기 위하여, 마땅히 바울에게 몰아가야 할 영예를 강탈한 자들이다.
오늘날, 참으로 전 기독교 교회의 상태는 당시의 고린도교회의 상태와 같다. 교회를 아버지와 같은 사랑으로 돌보는 사람들이 얼마나 극소수인가! 다른 말로하면, 자신의 개인적인 보상을 생각하지 않고, 교회의 번영만을 위하여 헌신하는 사람들은 참으로 국소수이다. 한편 자신들에게 돌아올 보상을 위하여 고용된 것처럼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으며, 그들은마치 일정한 어떤 제한된 시간의 임무에 종사하고 있는 것처럼, 또 사람들이 그들의 지배하에 있으면서 그들을 찬양하도록 하는 그런 식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그럴지라도 적어도 가르치는 그런 방법으로 선행을 하며, 거짓 교훈으로 교회를 타락시킴으로 교회를 망하게 하지 않는 그런 많은 교사들이 있다는 것은 좋은 현상이다. 내가 많은 교사들의 수(數)에 대하여 이의(異議)를 나타낼 때, 나는 카톨릭의 사제들 (이 수에 카톨릭 사제들을 포함시킬 가치성을 느끼지 않는다) 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고, 우리와 교리를 같이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며 그리스도의 일보다 자신들의 개인적 영달에 급급해 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모두는 참으로 아버지로 인정받기를 원하며, 또 다른 사람들을 떠나서 자녀들이 우리에게 순종하기를 요구한다. 그러나 자신들이 아버지임을 참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탁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있을까? 다른 더 어려운 문제가 아직도 남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에 계신 단 한분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시기 때문에(마 23 :9) 땅에 있는 자를 아무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말라고 금하셨는데, 어떻게 바울이 감히 아버지라는 칭호를 자기 자신에게 적용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이다. 여기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엄밀히 말하면 하나님만이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우리의 육신의 아버지이시다. 그러나 사실상 육체에 관계되는 한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이름을 그가 자녀들을 주신 사람들에게 허락하셨다. 그러나 영혼에 관한 한은 ‘아버지’의 권리와 칭호를 하나님께만 해당되도록 하셨다. 이런 이유로 하나님은,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 12장9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영의 아버지’라는 특별한 칭호를 가지셨고, 이 땅위의 아버지들과는 구별되는 것이라고 나는 고백한다.
그러나 하나님만이 홀로 그의 능력으로.영혼들을, 산출하시기 때문에, 그들을 중생시키고 그들을 살게 하신다. 그러나 이 목적을 위하여 그의 종들의 사역을 이용하시며 이 사역에 있어서 그 사역자들을 아버지라고 불러도 아무런 손상이 없다. 왜 냐하면, 그렇게 하여도 하나님의 영예에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영적 씨앗이다. 그 말씀에 의하여 또 그 능력을 통하여 하나님만이 홀로 우리의 영혼을 새로 태어나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결코 하나님의 사역자들의 수고를 배제하지 않으신다. 만일 당신이 하나님께서 무엇을 스스로 이루시고 , 또 무엇을 그의 사역자들을 통하여 성취하시기를 원하시는가를 주의 깊게 살펴 본다면 당신을 어느 의미에서 하나님만이 아버지의 영예를 가지게 되며 또 하나님의 권리를 손상함이 없이 이 이름이 사역자들에게 얼마만큼 적절하게 해당되는가를 쉽게 알수 있을 것이다.
“16절. 내가 너희에게 권하노니 ~~~~” : 이제 그는 그 자신의 말로써 아버지와 같이 잘못을 고치려는 마음으로 그들에게서 원하는 것, 곧 그들이 그의 아들들이기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아버지와의 관계를 끊을 수 없다는 사실을 또 아들들이 가능한 한 아버지를 닮으려고 애쓰는 것 이상으로 더 정당한 일이 있겠는가? 그러나 그가 명령보다는 요청으로 이것을 권고하려고 할 때 그는 뭔가 그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얼마만큼 그를 닮기를 원하는가에 대해서는 그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자' 된 것 같이 하라고 덧 붙이는 다른 귀절 (고전11:1)에서 분명히 밝혀지고 있다. 이 동일성은 항상 유지되어야 하는데 우리는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는 사람들을 제외한 그 어떤 사람도 우리가 따라서는 안되도록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취급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안다.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십자가의 치욕을 피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아버지를 멸시의 대상으로 만들었다. 왜냐하면, 그가 이 세상이 제공하는 영광을 잊고 그리스도 때문에 받는 치욕을 더 자랑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들 자신만을 생각하고, 사실은 경멸을 받을 수밖에 없는 아무것도 아닌 것, 세상의 표준으로는 요행이라고 할 수 있는 다른 것들 만을 생각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그를 본받으라고 그들을 권고하고 있으며, 모든 것을 견디기 위하여 그리스도에게 순종하도록 그들을 권고하고 있다.
“17절 이를 인하여……” ; 이 뜻은, ‘나의 생활태도가 참으로 무엇과 같은가를 당신들이 알도록 하기 위하여, 또 나 자신이 과연 당신들이 따를 만한 모본이 되는가를 알기 위하여서는 디모데의 말에 당신들은 귀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이 관계에 있어서 신뢰할 수 있는 증거를 줄 수 있는 입장에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두 가지 사실이 한 사람의 증거에서 확신으로 나타나는데,
(1) 그가 말하여야 할 사실에 대한 지식, 그리고
(2) 그의 충성이다.
바울은 디모데가 이 두 가지를 모두 갖추었다고 알려주고 있다. 그가 디모데를 그의 사랑하는 아들이라고 부를 때 그는 디모데가 바울을 잘 알고 있으며, 바울 자신의 모든 형편을 익히 알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는 디모데를 하나님 안에서 신실한 자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또한 두 가지 일을 디모데에게 책임지우고 있다.
첫째로 디모데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마음속에 그들 스스로 기여하여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위 주어야 하며, 이 점에 있어서 그는 그들에게서 잘못을 발견하게 된다.
둘째로 그는 바울의 가르치는 방법이 어떻게 모든 면에서 불변적이며 일관성이 있는 것인가를 그들로 하여금 깨닫도록 하게 하는 일이다.
그러나 마치 바울이 스스로 다른 사람들에게 보다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더 강압적으로 선포하고 있는 것처럼 또는 그가 다른 곳에서와는 아주 다르게 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처신하고 있는 것처럼, 거짓 사도들의 거짓 선전의 공격을 받고 있는 것은 대단히 그럴듯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는 이것이 그들에게 알려져야 할 훌륭한 이유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운 사역자는 그의 교수 방법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여야 하며, 또 이 계획을 계속 지켜나가야 한다. 그래서 바울처럼, 실제적인 상황에 기초한 방어의 준비가 없이는 받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반대가 부딪쳐 오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18절·,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지 아니할 것 같이~~~~” ; ·선한 사람들의 부재시(不在時)에 우월권을 쥐고 오만을 부리면서 무례하게 교만을 피우는 것이 거짓 사도들의 습관이다. 바울은 그들이 그의 실재(實在)를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또 그들의 악한 양심을 드러내기 위하여, 그리고 그들의 잘못된 고집을 꺾기 위하여 그렇게.하고 있다. 기회가 현재 그 자체이므로 모욕을 받고 있을 때,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종들을 공공연히 대적하여 일어날 때, 참으로 그것은 때때로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아무것도 감춘 것이 없는 것처럼 정당한 경쟁에 나타날 수 없으며, 오히려 그들의 음험한 계교로 인하여 그들 자신의 신빙성의 결핍올 드러내는 결과를 가져온다.
“19절 그러나~~~~~내가 너희에게 속히 나아가서” ; 바울은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없는 동안에 그들은 마치 그것이 오래 지속되기라도 할 것처럼 그들의 깃털로 자신들을 장식하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의 그 의기양양함이 얼마나 공허한 것인가를 그들은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가 도착함으로 번쩍거리는 불빛과 같이 그들을 치기라도 할 것처럼 그렇게 몹시 그들을 놀라게 하고 있지는 않다. 아무리 그들이 다른 방법으로 속일지라도, 그들은 바울이 하나님으로부터 능력을 받은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그들이 중압감을 갖도록 하며 그들의 양심을 공격하고 있는 것이다.
"주께서 허락하시면"이라는 귀절은, 우리가 이 보증이 없이는 다른 사람에게 장래에 대한 어떤 약속이나 또는 개인적인 계획을 세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말하여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한에서만 그 모든 일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은 단 한시간의 삶에 대한 보장도 없는 인간들이, 10년 후의 미래에 대하여 계획을 세우는 어리석음을 야고보는 아주 적절하게 비웃고 있다(약 4 : 15). 우리가 그런 표현을 계속 사용하지. 않을지라도 그렇게 습관이 들도록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 좋으며, 이렇게 거듭 되풀이 함으로써 우리는 모든 우리의 계획이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도록 능동적으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교만한 자의 말을 알아볼 것이 아니라, 오직 그 능력을 알아보겠노니.” ; ‘말' 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거짓 사도들이 기쁨을갖는 종알거림으로 이해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힘은 말을 적절하게 그리고 매력적으로 구사하는 데 있기 때문이며, 그들에게 성령에 대한 열망이나 그 효능이 아주 결핍되어 있기 때문이다. '능력' 이라는 말을 바울사도는 열심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사역자들이 가진 영적인 효력임을 의미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뜻은, ‘나는 그들이 그렇게 거만을 부릴만한 그런 정당한 근거가 있는지 잘펴 보겠으며, 또 그들이 모든 영광을 자신에게 돌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 스스로로 이룬 것인 양 하는 그들의 말의 유창함으로 나는 그들을 평가하지 않겠다. 만일 그들이 나의 눈 앞에서 어떤 확신을 얻고 싶다면 그들은 사기꾼들(lar. vatis)로부터 참 그리스도의 종들을 구별하는 능력을 나타내어 보여야 한다. 그 이외의 다른 방법으로는 그들을 조사할, 그리고 그들의 허위를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연기와 같은 것으로 그것이 보이는 것은 그들이 공허한 웅변으로 그들의 진실을 나타내려고 하기 때문인 것이다 .
“20절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 하나님께서는 그의 말씀으로 교회를 다스리시는 까닭에, 왕권을 가진 것처럼, 복음(evange/ii administratio)에 의한 통치는 때때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불리어진다.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이나 이것을 목표하며, 이 목적을 위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즉, 하나님은 우리 가운데서 우리를 통치하시는 것이다. 바울은 이 왕국은 말(sermone)에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공허한 울림 외에는 아무 내용도 없으면서, 유창한 말로 그럴듯하게 지쩔이는 것은 조금도 놀라울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르치는 데 있어서 피상적인 매력이나 기술은 겉으로 잘 꾸미고, 화장을 곱게 한 육체와 같다. 그러나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대로 능력fvirtutem)은 영혼과 같다. 우리는 이미 복음 설교의 본질은 확고한 참 권위로 충만한 것과 같은 그런-것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이 권위는 사역자가 말(sermone)로보다 능력(vir lute)을 가지고 행동할 때 나타난다. 다른 말로 하면, 그는 자신의 능력이 나 웅변에 의존하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데 열정적인 영적 무기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며,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흔들리지 않는 확신성을 가지며, 그 이외의 다른 모든 은사들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이런 것들 없이는, 아무리 설교가 유창하고 화려하다 할지라도, 설교는 죽은 것이며, 결국 아무런 힘도 갖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바울은 고린도후서 5장17절에서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새로운 피조물일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사상은 갈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우리가 외적인 허영 (externis Jarvis)에 만족하지 않고, 거룩한 성령의 내적 능력(internaevirtuti)을 계속 지켜 나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비록 이런 말로써 거짓 사도들의 야망을 억제할지라도, 그는 동시에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리스도의 종의 개념을 사실은 거의 중요하지 않은 것을 중요한 요소인 양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 된 판단을 책망하고 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사상이다. 이것을 자신들에게 적용시키는 사람은 또한 우리들에게도 적용시키려 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은 말(ling ua)을 떠나서, 우리가 자랑하는 복음이 어디에 있으며 어디에 새 생명이 있고, 또 영적 효력이 어디에 있느냐고 한다. 이것은 일부 사람들의 입장만은 아닌 것 같다. 세상에는 복음을 호의나 명성을 얻는 데 필요한 세속적인 어떤 지식의 일종으로, 그리고 또 취미나 예리함 쯤으로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능력'이 곧 기적이어야 한다고 나는 믿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 반대의 경우에서 우리는 더 광범위한 적용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21절 너희가 무엇을 원하느냐 .. …” ;·이 서신을 몇 부분으로 나누는 사람들은 이것을 제 5장의 서두라고 말하여야 할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어리석은 자만심과 그들의 공허한 신뢰, 야망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잘못된 그들의 판단을꾸짖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그들을 괴롭히는 악과 그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악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은 그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너희들은 마치 너희들의 일이 굉장한 지반 위에 서 있는 것처럼 교만해 있지만, 그러나 너희들은 부끄러움과 슬픔으로 가득차 있는 비참한 자신들의 상황을 깨닫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너희들이 이런식으로 계속 나가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나의 부드러운 태도를 떠나서 엄격한 아버지처럼 너희들을 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위협은 그가 그들에게 준 자유보다 더욱 비중이 큰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그가 그들에게 부드럽고 온유하게 대하는 것이 그의 임의로 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을 맹렬하게 몰아 세우고 있는 것이라고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내가·그렇게 되기를 원한 것은 너희들이 선택한 것이다. 나는 온유하려는 사람이다. 그러나 만일 너희들이 계속 그런 식으로 나간다면, 나는 매를 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그는 그들을 위한 아버지로서의 위엄을 선포하고 난 뒤 강력하게 그의 입장을 내세우고 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가 말한 대로 스스로 그 방법을 첫째로 준비하지 않았거나 또 그들에게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시해 주지 않았다면, 이와 같은 경고로 '사작하는 것은 참으로 어라석은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매'라는 말을 목사가 그의 교인들의 잘못을 고치는 데 있어서 엄격하게 대하는 것을 의미 하고 있다. 이것에 대조적으로 그는 사랑(carita_tem)과 온유한 마음으로 대하고 있는데, 이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미워서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반대로, 사랑에서 우러나와 자식의 잘못을 고쳐주려는 마음 때문이다), 그의 이들에게 노하였기 때문에 슬픈 표현과 준엄한 말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더 분명하게 그리고 말로 나타낸다면, 아무리 아버지가 어떤 표현을 쓸지라도 아버지는언제나 그의 아들을 사랑한다. 그러나 그는 그 사랑을 조용하고 사랑의 방법으로 가르침으로써 그 사랑을 나타낸다.
그런데 그 아들의 죄를 아버지가 발견하게 되면 그는 준엄한 말로 또는 매로 그 아들을.고쳐주계 된다. 그때의 아버지는 마치 노한 사람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사랑은, 맹렬한 훈련이 계속되는 동안은 숨겨져 있다. 바울이 온유한 마음으로 사랑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어떤 해석가들은 이 ‘매'라는 말을 과문으로 받아들인다. 나는,-그 파문을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위협한 그 준업성의 일부분으로 여기지만, 그 것을 모든 준업한 성질의 책망을 포함하기" 위하여 더 광법위하계 켜용하려 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좋은 목회자가 가져야 할모법적인 태도가 무엇인가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왜~효卜떤_목회츠1-=49 시`람들을 그라스도에게로_인;-~화 7J::원하여 잡밭져주온웁굴rzll:=:되 어 야지 , 임:지 루=교인들을_대초t~~ 안 곧이 다. 그는 인一온유함을 7난전한처L계속 _zl-져으J;=:하며=二볼가피 한 경 운호굿l의 하고는-엄격화제~인들을二태호F여쇠3=_얀급탄다. 그라나=푈요할 멘엔느주챠~01크 윷들의 야二한다-~훈을z찰-받으L들oL고 자발적 인=ob람들 七드럽켄-대하고, 않고하고=오한한규t'£r,E-은 준엄 하계_다루어 °뇨할-팔요 상이-:::았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교리만으로 이루어지고 그 이외의 것은 아문것도 없다는 것이 아님을 잘 알고 있다 하되님의二말씀_속에는 목회좌 효눅1 의=쁘릎-:.율:±:있는~다 그녀화여 주:는-날카로운 책 망이一성 경 초곳~-.tl!l-나-있는크~t발견화계적l다. 사람들의 완고합 때문에 본태는 온 유한 목회자둘이 업져하고 준업한 다론 직무의 일부를 행사하지 않을 수 없 는 사태가 종종 발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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