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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고전5:5)

1. 성경 (고전 5: 1 ~ 8)
너희 중에 심지어 음행이 있다 함을 들으니 그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 누가 그 아버지의 아내를 취하였다 하는도다 (1)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그 일 행한 자를 너희 중에서 쫓아내지 아니하였느냐 (2)내가 실로 몸으로는 떠나 있으나 영으로는 함께 있어서 거기 있는 것 같이 이런 일 행한 자를 이미 판단하였노라 (3)주 예수의 이름으로 너희가 내 영과 함께 모여서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 (4)이런 자를 사탄에게 내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영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 (5)너희가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적은 누룩이 온 덩어리에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6)너희는 누룩 없는 자인데 새 덩어리가 되기 위하여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되셨느니라 (7)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묵은 누룩으로도 말고 악하고 악의에 찬 누룩으로도 말고 누룩이 없이 오직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으로 하자 (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너희 중에 십지어 음행이 있다합을 들으니~~~”: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그들의 논쟁은 교만과 극도의 자신감(自信感)에서 일어난 것이므로 바울은 아주 적절하게 그들의 악(morbos)에 대하여 설명함으로써 그들이 겸손해져야 할 것을 깨닫도록 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그들 중의 어떤 사람이 계모와 악한 관계를 갖도록 허용되고 있는 것이 대단히 치욕스런 일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그 남자는 그의 아버 지로부터 그의 계모를 유혹하였는지, 아니면 매음녀로서 그 여자를 결혼이라는 허울 속에 두고 있었던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 의혹은 벌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자(前者)의 경우 그것은 극도로 악하고 가증한 간통이며, 또 후자(後者)의 경우일지라도 자연스러운 존경과 정상적인 관계로써는 아주 부당한 간음이기 때문이다. 이제 바울은 그가 책망하고 있는 이 문제가 의심의 여지가. 있을 수 있는 불확실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지 않기 위하여, 그 사실이 모든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다 알고 있는 일이라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나는 '홀로스 ; 일반적으로' 라는 단어가 의심스러운 소문이 아닌, 분명한 사실, 곧 많은 사람들의 큰 공격의 이유가 되고 있는, 사방으로 널리 알려진 소식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바울이 이것은 이방인들 가운데에서도 결코 허용이 되지 않는 근친상간이 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계모와 상간하였던 르우벤의 간음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스라엘 민족이 그런 오점을 그들의 역사에 지니고 있기 때문에, 바울이 이스라엘 사람들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치 이방인들의 역사가 그런 류의 많은 간음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 그러므로 그들의 가상적인 생각은 바울이 생각하는 것과는 완전히 동떨어전 것이다. 왜냐하면 유대인들보다 이방인들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그가 그 죄악의 추악성을 더욱 강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들은 이 치욕스런 일이 마치 합법적인 것이기나 한 것처럼, 허용하고 있다. 이런 일은 이방인들 가운데서도 용납되지 않는 일이다.  아니 그보다는 더 이린 일을 공포스런 눈으로 바라볼 뿐 아니라, 참으로 극악무도한 것 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이 이런 음행은 이방인 중에서도 없는 것이라고 확언 할 때, 그는 그런 일이 이방인들 가운데서는 결코 일어난 일이 없었던 일이라거나 혹은 그들의 문학 작품 속에 결코 들어 있지 않다는의미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비극 작품들은 분명히 그런 주제의 내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이방인들의 증오의 대상으로서, 마찬가지로 몸서리치고 두려워하는 기괴한 일로 여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짐승같은 욕망으로써 자연스러운 도덕 그 자체를 파괴하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한 사람의 죄때문에 모든 사람을 책망하는 것이 옳은 일이냐고 질문을 한다면, 나는 이렇게, 즉, 고린도 교회 교인들은 그들 교인 중의 한 사람이 범죄하였는 데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뒤에서 살펴보겠지만, 마땅히 준엄한 형벌을 받아 마땅할 치욕스런 행위를 묵인함으로써 그들은 사실상 그 행위에 격려를 보내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 지라고 대답하겠다.

“2. 그리하고도 너희가 오히려 교만하여져서 “ ;그는, ‘너희가 마당히 그 치욕스런 부끄러움에 몸을 떨어야 할 일임에도 불구하고 교만을 부리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고 있느냐?' 라고 말하고있는것이다. 바울은 최상의 가능한 자질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일지라도 조금도 자만할 이유가 없다고 분명히 확언하였는데, 그 이유는 인간은 자신 스스로의 힘으로 아무것도 이룰 수 없으며, 사실상 그 모든 가능성들이 결코 하나님의 은혜 이외의 다른 것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그는 다른 방법으로 그들을 공격하고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너희들이 치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을 보면서도 무슨 염치로 그렇게 교만하고 의기 충천해 있는 것이냐?  너희들은 부끄러운 일들로 에위싸여 있으면서도 교만을 부리다니 참으로 눈먼 소경이 되었구나. 이것은 말하자면 천사들과 사람들의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그가  ‘어찌하여 통한히 여기지 아니하고’ 라고 말할 때 그는 대조적인 논증을 하고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통한(痛恨)히 여기는 곳에 교만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이때 이런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왜 다른 사람의 죄에 대하여 에통해 해야 하는가라고. 그 이유는, (1) 교인들 사이에 있어야 할 친교 때문에 그들 중 어떤 일부 사람들의 치명적인 타락은 다른 교인들 모두에게 영향을 미칠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며, (2) 그런 '부끄러운, 행위가 교회 안에서 일어나면 그 죄책(罪責)은 그 범죄자 자신에게만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 전 교인이 연대적인 책임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하나님께서는 아내나 자식들이 잘못하면 그 아버지가 부끄러움을 당하계 하였으며, 또 온 가족이 가족의 한사람으로 말미암아 치욕을 받게 하신 것이다; 교회 안에서 어떤 불명예스런 죄악이 발생할 때마다 전 교회가 그 불명예로 더럽혀진다는 사실을 각 교회마다 깊이 깨달아야 한다. 더우기 우리는 한 사람의 신성모독 죄 곧 아간의 범죄 (수 7_: 1)가 전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의 진노를 임하계 하였음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한다. 한 사람의 죄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무죄한 모든 사람들에게 진노를 발하시는 그런 무자비함이 하나님의 진상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진노하심에는 항상 분명한이유가 있다· 사람들 가운데서 일어나는 한 사람의 범죄로 인하여 모든 사람들을 벌하심 으로써, 하나님은 그 악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몸이 전염되고 오염되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주기를 원하신 것이다.

우리는 교회가 한 개인의 죄를 마치 그들이 전체 몸을 포함한 온 가족이 불행을 당한 것처럼, 그 개인의 범죄를 슬퍼하는 것이 교회의 임무라는 사실을 우리는 여기서 쉽게 추리하여 알 수 있다. 우리가 그 잘못을 뉘우침으로 거룩하여지려는 열망에 볼타게 될 때 경건하고 의로운 개심(改心)이 시작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다른 방법으 로는 그 가혹함이 고통을 충만하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일 행한 자틀 너희 중에서 물리치지 아니하였느냐.” ; 바울은 이제 고린도교회 교인둘에 대한 책망, 곧 그들이 그 무서운 증오의 대상인 법죄를 눈 감아버린 데 대한 그 무관심울 신랄하게 꾸짖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교회가 교인들 가운데 발생하는 어떤 잘못을 엄격한 훈련으로써 고치고, 재거할 수 있는 이 능력을 부여받았다는 사실이 분명히 나타남을 깨달을 수 있으며, 또.불의를 재거하기에 노력하지 않는사람은 결코 용서받을 수 없음도 분명히 나타나고 있다. 바울이 여기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을 정죄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그들이, 한사람이 법죄한 데 대하여 그 법죄를 징계하는 일에 아주 무관심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이 권력을소유하지 못하였다면, 그들을 책망하는 바울의 책망은 정당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 파문의 권력은 이 귀절로 말미암아 이루어지는 것이다.  한편, 이 형벌의 방법이 교회에 주어졌으므로, 바울은 마땅히 그럴 만한 상황이 되었는데도 이 권력을 행사하지 않는 사람들은 죄를 범하고 있는 것 이라고 알려주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이 잘못을 꾸짖는바울이 고린도 교인들에게 볼의를 행하고 있는 것이다.

“3. 내가 실로·…” ;·이런 경지에서 볼 때 고린도교회 교인들은그들의 의무를 행하지 못하고 있으며, 바울이 그들의 게으름을 정죄한 후, 이제 그는 무엇을 할 것인가를 보여주고있다. 이 오점을 씻기 위해서는, 그 음행한 자들을 믿음의 사회에서 내쫓아야 한다. 이렇게 하여 그는 파문을, 고통거리를 제거하는 치유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그것을 경원하고, 계속 악에 빠져 있는 동안 그렇다는 것이다. 그가  ‘몸으로는 떠나 있는' 동안 이미 그런 결의를 하였다고 말할 때, 그런 방법으로 그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의 부주의에 대하여 더욱 신랄하계 항의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속에 함축적인 대조가 놓여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울이 이렇게 말한 것과 같다. "너희들은 이 병을 오래 전에 즉시로 치유하여야 했다. 그것이 계속 너희들의 눈 앞에서 묵인된 채로 있었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는 나까지도 그것을 그대로 둘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어떤 사람이 마땅히 큰 소리로 항의를 하여야 할 경우인데도, 그가 말리 떨어져 있을때, 그는 들려오는 소문의 힘에 대하여 조급한 판단을 내리게 된다. 바울은 그가 ‘영(靈)으로는 함께 있음을 주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그가 직접 그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이 의무의 길이 그에게 분명하다는 것을 나타내고, 또 그의 눈으로 그 사실들을 보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파문의 방법에 대하여 가르치는 것을 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4.. 주 예수의 이름으로~~~~” ; 만일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면, 우리가 합께 모이는 것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왜냐하면 악한 자들은 악을 모의하고, 불의를 음모하기 위하여 모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모이기 위해서는 두 가지가 팔요하다. 즉  (1)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름으로써 그 모임이 시작되어야 하며, (2),하나님의 말씀에 일치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질‘ 수 없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하나님의;성령의 인도하심을 빌면서, 그리고 그들의 모든 계획이 하나님의 은혜로 성공적인 결과를 이룰 수 있도록 기도하면서 마음 속으로 하나님을 부를 때에만, 그들이 맡은 어떤 일의 약속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좋은 출발을 하기 위하여서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것처럼, 또한 ‘하나님께 물어보아야'(사30 : 2) 한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본 후에 그들은 자신을 굽히고, 모든 계획을 완전히 하나님의 뜻에 복종시켜야 한다. '만일 이것이 가장 중요하지 않은 행위에 따르는 수속 절차여야 한다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들에 있어서는 얼마나 더한 것이 따라야할 것이며, 특별히 우리가 우리 개인의 일보다 하나님께 관계되는 일을 맞을 때는 어떠하겠는가 !  예를 들면 파문이 인간들의 뜻이 아닌 하나님의 명령이었을 때, 그러므로 우리가 파문권을 행사하게 될 때마다 하나님을 떠나서 어디에서 우리가 시작할 것인가?

간단히 요약하면,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이라고 권고하였을 때 그는 그들이 입술로만 그리스도의 이름을 그렇게 많이 부르고 고백하라고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악한자들이 그럴 수 있는 것처럼), 그리스도를 전심으로 마음에서부터 찾아야 한다고 가르치고 있다. 더구나 그렇게 말함으로써, 그는 그들이 하고 있는 일의 심각성과 중요성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 주 예수의 능력으로’라고 덧붙이고있다. 왜냐하면 만일 그약 속이 사실이라면,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타"(마 18 : 20)는 말씀 그대로이며, 그런 모임에서 하는 일은 무엇이나 모두가 그리스도의 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합법적인 파문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추리할 수가 있는데, 그것은 그 파문이 하나님의 권세에 의존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역시 이행되어야 한다. 즉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마18 : 18). 그러나 이 진술은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의 마음 속에 일반적인 공포심으로 때려서는 안 되므로, 신실한 목회자들이나 모든 교회들이 다같이 바울이 여기서 말한 대로 그런 심각한 문제를 아주 공손하게 처리해 가야한다.  그리스도의 능력은 인간들의 뜻이나 의견에 좌우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한 진리에 있는 것이다. 

“너희가 내 영과 할께 모여서 ••• …” ;.'나와 함께 모여서'' 그러나 이 모임은 영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이 육체적으로 함께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바울은 그가 직접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이 함께 할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바울은 그가 사도이지만 스스로 자신의 욕심을 따라서 파문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 공동 결정으로 처리하기 위하여 교회의 협의를, 채택하고 있다. 참으로 그는 철처하게. 그 방법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들과 연합하였을 때 그 권력이 한 개인에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주 분명히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군중들이 충고를 따르지 않으면, 군중들이 온건하게 또 위엄을 가지고 어떤 일을 결코 처리하지 못하므로 옛 교회에서 임명한 장로회는 말하자면 장로들의 모임 (collegium se_ni~rum)인 공등 의회가 사건의 제1회 심의를 의뢰 받았다. 물론 그들이 이미 판결한 그 사건은 백성들에게로 내려온다.  그것이 어떤 사건이든지간에, 그 사건은 그리스도와 사도들이 설립한 대로, 교회의 질서를 따라 잘 지켜지며, 그리고 파문권은 사실상 공정하게,한 사람의 손에서 그의 권위로 그가 원하는 사람을 처리할 수 있도록 한 사람에게 주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파문의 문제가 일어났을 때 이 정규직인 준비가 유지되어야 하며、이 특별한 훈련은 장로들의 모임에서 함께 논의되고 교인들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 사실에 주의하여야 한다. 또한 이것이 전제정치를 방지하는 치유책이 된다는 점에 유의하자. 그리스도에 관한 훈련(Christi disciplinae)에 반대하는 것은 최대의 전제(專制)이며, 만일 모든 권력이 어느 한 사람에게 집중된다면 그 전제의 문은 활짝 열려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

“5. 이런 자를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 이는 육신은 멸하고~~~~” ; 다른 여러 권세와 함께 사도들은 악한 자와 강약한 자들을 사단에게 내어주는 권세를 받았으며 , 사단에게 그들을 내 어 중으로써 다른 사람들을 바르게 인도하는 경 고로 삼고 있으므로, · 크리소스톰(Chrysostom)과 그를 추종하는 자들은 바 울의 이 말을 그런 종류를 형벌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으로 간주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다른 귀철, 곧디모데 전서 1장20철의 알렉산더와후메내오에 게 대한 설명과 일반적으로 일치하고 있다. 이렇게 하여 그들은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어떤 준업한 신체적인 형벌을 가하는 것 분이라고 쏘로서는 전체 문장을 더 자세히 살펴볼 때, 구리고 동시에 다음 서신에서 말하는 것을 비교하여 볼 때에 나는 그 해석운 억지인 것으로 보 며 바울이 의미하는 바와는 일치하지 않고, 그것은 다만파문을 나타내는 것 으로 생각한다. “사단에게 내어 주었으니"라는 말은 파문을 설명하는 아주 져철한 방법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교화를!다스리시는한,·사단은 교회 밖에 있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어거스탄(Augustine)역시 사도의 말에 대한 그의 재 68회 설교에서 갈은 설명을하고 있는데 ,그는 여기서 이 귀철에 대하여 자세 한 설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교회의 친교 속에 있으며, 구리슨느一 도~덕화 책임 아래 머물러 있기 때문에, 나는교회 밖에 있는사람들은9어 L 며에서 사단에게내어준·11}.!민 사람들이며, 또 그리스도의 다스림에서 멀리 떠나 분리관 자들이기 ,.때문에사단에게 내어준 바된·자들이라고 생각한다 •. 그 다음에 .C육신은 멀하고'타는 성구가 뒤따르는데, 이것은 다소 완화하 는 방법으로부가되어전 것이댜 바울은 고칩을 받고 있는 사람이 완전히 사 단에게 내어준 바된 것이라거나 혹은 영원히 사단의 노예가 된 것임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형벌은 일시적인 것이요, 더우기 이 형벌을 인하여 더 향상될 것임을 나타내고있다. 영혼에 관한한, 구원과형벌은 영원한?것 이자만, 윤체의 정최는 일시적인것이다. 그는, “하나님께서-그를 그의 왕국 에서 보호하도록하시기 위하여, 우리는 그를 이 세상에서 일시적으루 정죄 할 것이다” 타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하여 이 해섣을 논박하려는 반대들은 제거된다. 이런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파문의 '형벌은 육체보다는 영혼에 대한 것임을가르치고있으며,' 그들은 그것이 어떻게 육체의 멸망이 탄 불리어질 수 있는가라고 질문한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미 앞에서 암시한 대로, 육체의 멀망온 오칙 이 근거위에서는 영혼의 구원과는 아주 다론 문제라고 대답한다. 전자(前者)는 일시적이지만, 후자(後者)는 영원 한것이다. 바울이 히브리서 5장 7철에서 그리스도에 관하여,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라고 말한 것은 이만 의미에서 그리스도의 죽을 생명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교회가 죄인들을 가혹하게 벌하여 그들을 교회 탑으로 추방하지 않는 이유는「하나님께서 그들을 남겨두시기 때문이다. 만 일에 파문의 규율이나 그 원인, 팔요성, 목적, 그리고 파문을 철재있게 적 묘}는 문제 등에 대하여 더 알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의 〈기북교 강요〉(4. 12)를 참조하기 바란다.

“6. 너희의 자랑하는 것이 옳지 아니하도다……” ;그가 그들의 자랑을 정최 (定罪)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 받은 칭호 이상으로 자신들을 상위(上位) 에 놓고 있을 뿐 아니라, 또 그들의 그 과오 속에서 아주 기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찍이 바울은 인간에게서 모든 자랑을 제거하였다.  왜냐하면, 아무리 인간이 뛰어난다 할지라도,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요, 인간 스스로의 것은 이무것도 없음을 이미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참으로 바울이 여기서 취급하고 있는 것은 필멸(必滅)의 인간들이 자신에 관한 신뢰를 그들 자신의 덕(德)인 양 선언할 때에라도 하나님은 인간에게 속아서 하나님의 권리를 결코 빼앗기는 일이 없으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고린도교회 교인들은 극도의 어리석음에 빠져서 그럴 만한 ·근거가 조금도 없는데도 그들의 허영의 날개를 팔딱거리고 있다.

“퍼지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 그들이 그런 큰 악을 장려하는 것이 대단한 일도 아니며, 중요한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은 게으르고 부주의한 자세가 이 경우와 갈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전체 사회가 한 사람의 병으로 인하여 오염된다는 결과에 대한 속담을 인용하고 있다. 이러한 관계로 이 속담은 다음과 갈은 쥬베 날 (Juvenal, Sat.)의 말과 동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초장(草場) 에 있는 전체 돼지 때가 한 마리 돼지의 음(파부병)으로 말미암야 망쳐지며, 골라놓은 좋은 포도송이가 상한 다른 하나로 인하여 썩게 된다. , 나는 바울이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려고 하는 것처럼(갈 5 : 9), 다른 곳에서 그것을 다른 의미(이를테면 좋은 의미)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러한 관계로'라고 말하는 것이다.

“7. 너희는 내어버리라……” 누록의 비유를 적용하면서, 바울은 특수한 보기로부터 더 일반적인 교훈으로 변화를 하면서도 그는 그것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음행의 사건에 대하여서는 언급을 하고 있지 않지만, 그러나 무엇보다도 순결한 생활을 하도록 그들에게 호소하고 있다. 그 이유는 만일 우리가 계속 정결하지 않으면 우리가그리스도 안에 머물러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뭔가 특별한 경우에 대하여 말하였을 때에는, 그는 그 특수한 경우로부터 일반적인 용기를 북돋우어 주는 말을하는기회를 꼭 붙잡는 것이 그의 일반적인 관례이다. 그는, 우리가 이미 살펴본 대로, 다른 관계에서 누록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이 동일한 은유가 그가 말하려는 일만적인 교훈에 찰 부합하기 때문에, 그는 그것을 더 찰활용하고 있다.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  그 내용을 취급하기 전에 먼처 나는 그 말 자체에 대하여 조금 언급하고 지나가려고 한다. 묵온 누록은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나기 전의 타락한 본성을 지닌 옛 사람과 갈은 원리에 대한 설명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태내(胎內)로 부터의 우리에 관한 것을 취급하는 것은 '옛 것'을· 나타내며, 그것은 우리가 성령의 은혜로 거듭 났을 때 마땅히 죽어야 한다.  ‘희생이 되셨느니라'(에두데)라는 동사는 그리스도의 이름과 회생(파스카)에 대한 단어 사이에 있으므로 들 중 하나를 나타낸다고 할 수 있다. 그 뜻이 영향을 받지 않기 때문에 아무리 이것이 벌로 중요하지 않을지라도 나는 그것을 희생을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8. 이러므로 우리가 명절을 지키되……” ;이 귀절에서, 에라스무스(Eba smus) 가 ‘우리가 명절을 즐기자' (festum celebremus)라고 번역한 단어 (해오르타조벤)은 역시 희생제물이 드려진 후 엄숙한 의식을 나누는 것을 또한 의미한다. 이 뜻은 현재의 문맥에 더 적절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므로 나는 에라스무스의 번역보다는 벌게이트성경(epulemur)을 따르겠 다. 왜냐하면 이 번역이 바울이 다루고 있는 신비를 보전하는데 훨씬 더 낫기 때문이다.  다시 본문 내용으로 들아가자. 바울은 고린도교회 교인둘이 거룩하여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에, 그는 오렌 옛날 유월절에 이루어졌던 일들이 무엇인가를 그들에게 암시 하였는데, 그것은 오늘 우리에게도 실제로 이루어야 하며, 또 그는 형상과 실제 사이의 관계가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먼저 유월철온 두 분야를 가지고 있는데, 그 하나는 희생이며 다른 하나는 거룩한 명절이다. 그는 이 두 가지를 다 설명하고 있다. 비록 일부 사람들이 유월절 양이 희생 재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을지라도, 그렇지만 양이 적당한 회 생제물임을 이성이 계속 증명한다.

왜냐하면 이 의식에서 사람들은 피를 뿌림으로써 하나님께 화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 제물이 없이는 화해가 성립될 수 없다. 사도 바울은 이 사실을 즉시로 아주 분명하게 확증하였다. 왜냐하면 그는 희생에 아주 적절한 단어인 (뒤에스다이 ;희생하다)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며, 다른 용어를 사용하였다면 이 문맥에 적당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때 양은 매년 희생 재물로 드려졌으며, 명철은 이 회생재물이 드려진 칙후부터 시작되어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바울은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유월절'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한 번 희생재물로 드려졌으며, 이런 근거로 말미암아 그의 유일한 희생은 영원히 유효하게 되었다. 한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단 일년만 아니라, 계속적으로 그 희생제물을 먹는 것이다. 이 거록한 명철의 의식에서 우리논 하나님께서 우리 선조들에게 금하라고 명령 하셨던 것처럼 , 분명히 누륵을 금하여야 한다.  그러나 어떤 누록을 금할 것인가? 그 유월절 의식이 그들에게 참 유월절이었듯이, 그 요소들(accessi_ ones)은 역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여야 할 실재(實在)를 우리에게 예표(例 表)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살과 피를 먹기를 원 한다면, 이 명절을 신실하고 참되게 지켜서 누룩없는 떡이 되도록 하여야 한다. 하나님의 뜻을 거스리는 범죄와 악은 누록을 유월절에 끼워넣는 것이므로 이 모든 것을 제거하여야 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그는 우리가 모든 불의와 거짓을 버릴 때 비로소 우리가 그리스도의 회원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 귀절은 우리의 세심한 주의를 펄요로 한다. 왜냐하면, 옛날의 유월절은 (므네-모쉬논), 즉, 과거의 축복의 기념일뿐 아니라, 우리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는 수단으로써 오신 예수님의 성례(聖禮)인 것이다. 다른 방법으로는 선함을 얻을 수 없으니 그리스도만이 율법의 그립자(골 2 : 17)이기 때문이다.  이 귀절은 또한 가톨릭의 미사의 신성 모독이 잘못이라는 것을 나타내어 준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매일 희생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그 희생은 단 한번만으로 유효하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의 전 생애를 통해서 영적인 명절을 지키는 것이라고 가르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