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고전6:1 ~ 11)
너희 중에 누가 다른 이와 더불어 다툼이 있는데 구태여 불의한 자들 앞에서 고발하고 성도 앞에서 하지 아니하느냐 (1)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2)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3)그런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4)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이 말을 하노니 너희 가운데 그 형제간의 일을 판단할 만한 지혜 있는 자가 이같이 하나도 없느냐 (5)형제가 형제와 더불어 고발할 뿐더러 믿지 아니하는 자들 앞에서 하느냐 (6)너희가 피차 고발함으로 너희 가운데 이미 뚜렷한 허물이 있나니 차라리 불의를 당하는 것이 낫지 아니하며 차라리 속는 것이 낫지 아니하냐 (7)너희는 불의를 행하고 속이는구나 그는 너희 형제로다 (8)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행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9)도적이나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모욕하는 자나 속여 빼앗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10)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받았느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바울은 이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의 다른 잘못을 책망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과도하게 소송 사건을 잘 일으키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탐욕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나 이 책망은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그 첫째는 그들이 세상 법정에 그들의 사건 소송을 고소하며, 복음에 오명을 끼치고, 세상 사람들의 조롱거리로 만든 것이다. 둘째는, 그리스도인들이 손해를 보아야 하는 데도 그들은 어떤 종류의 고통을 참기보다는,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려고 하고 있는 점이다.
“1. 너희 중에 누가~~~~~ 구태여·… ...” ; 이것은 책망의 첫째 부분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형제로 더불어 논쟁이 생겼다면, 그 문제는 믿는 사람들의 재판에 맡길 것이요, 세상의 불신 법정에 내놓아서는 안된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알기 원한다면, 내가 이미 말한 대로 그 이유는 복음에 오명을 입히고, 그리스도의 이름에 손상을 끼치는 말하자면 불신자들의 조소를 받게 되기 때문이다. 사단의 사주를 받고 있는 불경건한 자들은 복음의 가르침 속에서 무엇인가 결점을 발견할 기회를 언제나 노리고 있다. 그런데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사건을 세상 법정에 내놓으면, 그들은 그것을 기독교를 조롱할 수 있는 황금 기회로 포착하고 그들의 목적을 달성 하려고 한다. 두번째 이유는, 우리가 불신자들의 세상 법정의 판결에 복종 할 때, 그것은 피고인 우리들의 형제를 멸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반대 의견이 제기될 수 있다. 즉 모든 사람들에게 법률 상의 결정을 내리고, 사건을 심의하는 것이 판사의 책임이며 그의 당연한 직책인데, 책임을 맡은 불신자들이 또한.권력을 가질 수 없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다면 왜 우리는 그들의 법정에서 우리의 권리를 보호 받기를 회피하여야 하는가?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바울은 여기서, 불가피한 경우에 믿지 않는 세상 법정에 소송을 하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법에 고소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책망하는 것은 그 방법이, 아닌 다른 해결책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의 손으로 믿는 형제들을 세상 법정에 고소하는 경우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형제들을 불신앙의 세상 법정에 먼저 고소하는 것이 잘못인 것이다. 그러나 만일 당신을· 상대로 한 고소 사건이 발생하였다면, 순서상 법정에 출두하여 당신의 사건을 해명하여야 한다.
“2.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 이것은 작은 사건에서 큰 사건으로 발전하는 논법이다. 바울은 세상 일을 논쟁함에 있어 서, 경건한 사람들 중에는 적절하게 판단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것처럼 사건을 불신자들에게 넘기는 것은 하나님의 교회가 해를 입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세상을 판단할 큰 영예를 주셨는데, 마치 그들이 아무런 능력도 없는 것처럼, 사소한 문제들을 처리하지 못한다는 것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일이다. 여기에서 우리는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그 큰 영예를 스스로 불신자들에 게 넘겨 주고 말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여기서 심판에 대하여 언급되고 있는 것은 세상이 그리스도의 말씀을 살펴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즉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좇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19 ,: 28)". 왜냐하면 모든 심판권은 인자가 친히 심판권의 영예를 가치고, 배심원들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성도들에게 연합하는 그런 방법으로 그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한편 그들은 이미 그들이 참으로 시작하고 있는 것처럼, 세상을 심판할 것인데 그 이유는 그들의 경건함과 믿음, 하나님 경외, 깨끗한 양심, 순결한 생활이 마치 노아에 대하여 말한 것처럼(히 11 :7), 불의 한 세상 사람들을 용서하지 않을 것인데 노아는 그의 믿음으로 당시의 모든 사람들을 정죄하였다. 그러나 첫째 설명은 사도 바울의 목적에 더 잘 부합된다. 왜냐하면 만일 당신이 여기서 설명한 심판을 적절한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 논증은 성립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을 받아들인다 해도 별로 중요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즉, ‘성도들은 모든 인간 지식을 초월하는 그런 무한한 하늘의 지혜를 부여 받았다. 그러므로 그들은 천문학자들보다도 더 별에 대하여 잘 알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런 견해를 긍정하지 않을 것인데, 그 이유는 경건과 영적교리가 우리에게 인간의 과학적 지식을 공급하여 주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판단에 있어서 다른 과학과 기술 사이에는 이런 구별이 있다. 전자가 권위있는 사람들로부터 배우고 공부함으로써 얻은 예리한 지식에 의하여 얻어진 것이라면, 후자는 옳고 그름에 관한 정당하고 건전한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법률가들은 무식한 믿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바르고 정확하게 판단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법률에 대한 지식이 필요 없을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그들의 충고는 절대로 무시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만일 어떤 애매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법률 지식에서 찾아야 한다면,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법률가와 상담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가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책망한 것은, 그들이 교회 안에 적절한 재판관이 없는 것처럼, 불신자들에게 그 판단을 맡겼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께서 그의 믿는 백성들에게 주신 판결이 얼마나 우월한 것인가를 그들에게 깨우쳐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in vobis라는 단어, 곧 ‘너희 안에'를 (개역 성경에는 너의 곁으로) inter vos, 즉 ‘너희 가운데' 를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신실한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주 모일수록 모임에는 세상 마지막 날 분명히 우리 눈 앞에 나타날 미래의 심판에 대하여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의 심판의 보좌가 세위지고 그곳에서 그리스도가 세상을 심판하실 교희 안에서 세상이 심판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3.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이 귀절은 다른 방법으로 플이된다. 크리소스톰(Chrysostom)은 어떤 사람들이 이것은 제사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참으로 대단한 억지이다. 또 다른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천사들을 의미하며, 이런 의미에서는, 그 천사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하여 심판을 맡으며, 또 만일 필요하다면, 그 말씀에 따라 우리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고 해석한다. 갈라디아서 1장 8절의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전할 복음 외에 다른 복음을 전하면 저주를 받을지어다” 라는 말씀을 이런 식으로 해석할 수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이 해석이 바울의 논증과 별로 상치되는 것같이 보이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조명하신 사람들이 그런 많은 권위를 소유하였다면, 그 말씀을 수단으로, 그들이 사람뿐만 아니라 천사들도 판단을 하는데, 더구나 사소하고 보잘것 없는 일들을 판단하는 것이 부적당하다는 말인가?
그러나 바울이, 마지막 날을 가리키면서 여기서 미래시제를 쓰고 있는 것처럼, 또 그 말들이 실제적인 심판 (더 살펴볼 것처럼)에 대한 암시를 하는 것처럼, 그것은 그가 말하는 타락한 천사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나에게는 더 좋은 것 같다. 만일 ‘우리가 그들의 높은 직위에서 타락한 이후 그런 탁월한 방법으로 시작하였고 현재도 불멸의 피조물이며, 타락한 이 세상에서 월등한 존재인 악마들을 판단할 것이다’ 라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그 논증은 결정적인 것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탐욕에 의존하는 그런 것들은 우리의 심판에서 제외될 것인가?
“4. 그런 즉 너희가 세상 사건이 있을 때에 교회에서 경히 여김을 받는 자들을 세우느냐.” ; 우리는 항상 그가 취급하고 있는 종류의 사건에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공적(公的)인 심문은 우리의 관할이 아니며 우리의 감독 아래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나 재판관의 심문이 없이 사적(私的)인 일이 되기 위하여서는 그것은 완전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 자신의 결정에 이르는 데 있어서 재판관의 권위를 끌어내리는 것은 아니므로,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일반적인 법정, 곧 불신자들의 법정에 사건을 제시하지 않아야 된다고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일반 법정에 고소하게 되는 경우 그들은 더 좋은 치유책을 박탈 당하는 것이며, 그는 그 소송을 평화스럽고 원만히 해결하기 위하여, 교회에서 재판을 하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그들에게 말하고 있다. 이 일을 위한 적당한 사람이 교회 안에 없다고 말할지도 모를 경우에 그는 아무리 수준이 낮은 사람일지라도 요청하는 일을 해낼 수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직무가 비천한 사람들에게 양도 되어야 한다고 그가 가르쳤을 때에도 재판의 권위는 여기서 손상되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이미 말한 대로) 예상의 방법으로 표현되고 있다. 즉 그가 '너희를 가장 비천하고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도 너희들이 좇아가고 있는 세상 제판관들 보다는 훨씬 더 잘_이 직무를 수행할 것이며, 너희들은 절대로 그렇게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말하고 있다. 크리소스톰은 여기에 무엇을 좀 첨가하기는 했으나, 이 해석에 아주 동의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무리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그들 가운데서 판단을 할 만한 지혜를 가진 사람을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였을지라도, 그들이 어떻든지 상관없이 그들 가운데서 어떤 사람을 선정하여야 하였다고 사도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는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암브로스(Ambrose)는 천국이나 땅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고 있다.
나는 사도 바울이 마음 속에 생각한 것을 나 자신 진실하게 설명하였다고 생각한다. 즉 판단의 능력에 대한 문제일 경우 그는 믿는 사람들 중의 가장 비천한 자가 불신자를 능가한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그들은 '카디제테'라는 동사를, 말하자면, '너희들은 그들이 판단하도록 하고 있다’ 라는 현재 시제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또 교회에서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그들은 불신자들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불신자들에 대한 빈약한 서술이기 때문에 건전하다기보다는 영리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일 너희들이 가진다면'이라는 구(句)는 견책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상태가 그것을 약화시키기 때문이다. 오히려 ‘너희들이 가지는 동안'이라는 말이 사용되어야 한다. 따라서 나는 악을 위한 치료가 여기서 처방되고 있다는 견해에 더 마음이 기울어진다.
아무리 그것이 확실한 인용절에서 나온 것으로 나타날지라도 어거스틴에게는 이 문장이 옛날 사람들 때문에 잘못 이해되고 있다. 그의 〈수도승의 직무에 대하여〉(On the Work of Monks)라는 책에서, 그는 그의 일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임무 중에서 가장 싫은 것은 하루 중의 일부분을 세상일에 바쳐야 하는 것인데, 그러나 그는 바울이 이 필요성을 그에게 부과하였기 때문에 그 일을 인내성 있게 참아간다고 확언하고 있다. 마치 사도 바울이 이 귀절에서 특별히 주교(主敎)들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처럼, 주교들이 논쟁을 해결하기 위하여 특별한 시간에 앉아 있는 습관이 든것 같은 것이 이 귀절과 또 어떤 서신에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사태가 악화되듯이, 그 오류가 나중에는 주교의 공직을, 돈에 관한 일에 자신을 적당히 이용시키는.그런 사법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고대 관습에는 허물을 잡는데 두가지 일이 있었다. (1) 주교들이 그들의 직무로서 관여할 것이 못 되는 일에 관여하는 것. (2) 그들이 하나님의 권위와 명령으로 인하여 그들 고유의 소명에서 떠난다고 속이면서 하나님을 불의한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악은 어느 정도까지는 아마 변명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교황권에서 널리 팽배하고 있는 이 세속적인 관습을 변명하고 방어하는 방약무인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5.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려 하여……” ;그 뜻은 다음과 같다;' 즉 만일 다른 생각들 때문에 당신이 냉담하여진다면, 그때 최소한 당신의 마음 속에 이것을 깊이 넣어두도록 하라. 형제들 사이에 일어나는 문제를 우애스런 방법으로 해결하여 줄 사람이 당신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없으며, 당신들은 이 명예를 불신자들에게 모두 넘겨주고 말았다는 사실을, 이제 이 귀절은 우리가 전에 생각하였던 주장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즉 바울은 그들을 부끄럽게 하려고 하여 그들의 잘못에 대하여 언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서, 그가 한 방법으로 그들을 책망함으로써 그는 그들의 치욕으로부터 그들을 다시 회복시켜 주고, 또 참으로 그가 얼마나,그들의 명예엔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를.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친교를 그렇게 초라한 것으로 생각하기를 그는 원치 않으며, 또 모든,그들의 형제들로부터 이 특권을 탈취하여 그것을 불신자들에게 양도하기를 원치않고 있다.
“7. 너희 가운데 이미 완연한 허물이 있나니~~~~~~” ; 우리는 이제 일반적인 교훈을 포함한, 두번째 질책을 살펴보게 되었다. 그는 지금 그들이 복음을 조롱거리가 되게 하고, 또 복음에 오명을 끼치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잘못을 꾸짖는 것이 아니라, 그들 서로가 상대를 대적하는 법적 사건을 제기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을 책망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이것이 허물이나 실수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그가 사용하고 있는 적절한 단어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헷테마' 는 '마음이 약한 것' , 예를 들면 해를 받는다는 압박감 때문에 마음이 혼란한 때를 말하며, 어떤 것에 대항하여 견딜만큼 충분히 강하지 못한 것을 가리킨다. 후에 이것은 연약하거나 결심의 부족한데서 야기되는 어떤 형태의 잘못을 나타내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므로 바울이 고린도교회 교인들을 정죄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그들이 서로 간에 일어난 문제를 세상 법정으로 끌고 갔다는 것이다. 그는 이것이 바로 그들이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손해를 인내하면서 감당하지 못한 이유라고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교훈에 비추어 보면 악을 대항하지 말고, 선으로 그 악을 이기라고 말씀하고 있으며 (마 5 : 44, 름12 : 21) 자신 스스로를 절제할 수 없어 악을 대항하는 사람은 인내심의 부족으로 범죄하고 있는 사람임이 틀림없다. 만일 이 인내력의 결핍이 믿는 사람들간에 법적 투쟁으로 나타난다면 그 결론은 이런 논쟁들이 악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방법으로 바울은 개개인의 유익을 위해서 모든 법적 재판을 폐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법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은 완전히 잘못되고 있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이.법관 앞에서 그의 권리를 보호 받으려 하는 것은 잘못일 것이다. 어떤 사람은 이 반대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즉 소송 사건이 발생하면 피고나 원고 중 어느 한편이 필연적으로 패하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볼 때에 악이라고.사도 바울이 선포하였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혔을 때 뿐만 아니라, 그들이 인내하지 못하였을 때에 그들이 악을 행하게 되는 것이라고 그가 말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이 궤변에서 탈피하지 못 한다. 나로서는 이렇게 간단히 대답하겠다. 그가 판단할 사람들을 허락하였으므로, 그리스도인들이 사랑하는 형제들에게 해를 입히지 않는 한 온건한 방법으로 자신들의 권리를 옹호하는 것은 질서를 파괴하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그것으로써 충분히 가르쳐주고 있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간 논쟁 중에 있는 상황들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매우 엄격하였다는 것을 쉽게 추리할 수 있다. 참으로 소송 사건의 자주 일어나는 곳에는, 또 서로 법에 대한 준엄한 논쟁으로 고집을 부르고 있는 사람들은 그들의 마음이 불의하여 탐욕의 불꽃으로 맹렬히 타고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따르는 마음의 평화도 없고, 또 손해를 참는 인내력도 없다. 더 분명하게 말한다면, 바울은 우리가 비록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일지라도 조용히 참아야 하기 때문에, 이 이유로 소송을 제기하는 것을 반대한다· 어떤 사람이 인내력 없이 법적 사건을 취할 수 있는지 이제 살펴보기로 하자. 만일 그럴 수 있다면, 모든 경우를 법적으로 다루는 것이 나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에 피 토 플루' 즉, 일반적으로 말하여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인간의 방법이 타락한 것처럼, 인내와 참을성의 부족은 (그들이 말한 것처럼) 거의 모든 소송 사건에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사건 자체와 그 사건에 따르는 악한 부수물을 구별하지 못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이 법적 소송을 비난한 이유가, 좋은 사건을 재판관에게 맡김으로써 그 자체가 악하게 된다는 그런 근거에서가 아니라, 그,들이 거의 언제나 자제력이 부족하고 복수심, 적의, 외고집, 등의 잘못된 마음 자세를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밝힌 것을 기억하도록 하자. 이 문제를 교회사가(敎會史家)들이 더 주의 깊게 관찰하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어거스틴은 다른 사람들보다 이 문제에 더 관심을 기울였으며, 그 표식에 더 가까이 접근하였다. 그러나 어거스틴일지라도 분명히 밝히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어떤 진리든지 그가 가르치는 내용 속에 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가르치는 것을 더욱 분명하게 하고 싶은 사람들은 공적인 것과 사적(私的)인 보복은 구별되어야 한다고 우리에게 권하고 있다. 보복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판사에게 속하였기 때문에 그 도움을 찾는 사람들은 무책임하게 그들의 손으로 복수하지는 않으며, 그 복수를 하나님께 일임한다.
만일 우리가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복수하여서는 안 된다고 금지를 받는다면, 같은 식으로 우리는 판사에게 징벌을 맡기는 것도 금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그리스도인은 모든 복수를 제외하여야 하며, 또 자신이 친히, 혹은 재판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복수를 하여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결코 그렇게 해서는 안 되며, 복수하려는 생각마저 가져서도 안 된다. 그러므로 만일 그리스도인이 하나님을 대적함이 없이, 그의 권리를 법정에서 행사하기를 원한다면, 그 사람은 복수심에 불타거나, 어떤 나쁜 감정, 혹은 유해한 악한 말을 법정에서 하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 최상의 해결책은 사랑이다. 어떤 사람이 비열한 마음의 자세에서 떠나 결백해지기 위하여 법정으로 나가는 것이 대단이 희귀한 일이라고 지적한다면, 나도 역시 그렇다고 인정 하며, 동시에 그것은 좋은 소송사건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고 나는 말한다. 참으로 많은 이유들 때문에 소송 사건 자체가 악한 것은 아닌데 사람들이 그것을 남용하여 그것을 해치게 되었다는 것을 보여줄 가치가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 법정을 설정하시는 데 시간을 낭비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어야 한다.
둘째 이유는 믿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여도 되나, 오직 양심에 가책 되는 일은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을 정확히 깨닫게 하기 위함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경멸하게 되는 이유인데, 일단 그들은 그들에게 부과된 한계를 초월하기 시작했다. 세번째 이유는 그들 자신의 나쁜 행실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맡겨주신 구제책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하여 그 제한이 항상 지켜져야 한다는 것을 그들이 경고 받게 된다. 마지막으로 악한 자들의 파림치는 더럽혀지지 않은 순수한 열정에 의하여 제지를 받아야 하며, 이것은 우리가 그들을 법적 형벌에 복종할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8. 너희는 블의를 행하고” ; 이 귀절에서 바울이 왜 그렇게 격렬하게 그들을 욕하였는지의 이유가 분명히 나타나는데, 그 이유는 부당한 탐욕이 다른 사람을 해치지 않을 수 없도록 그런 수렁 속으로 그들을 몰아넣은 것이다. 악(惡)의 범위를 밝히기 위하여 그는 자신들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견딜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이니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비교로부터 이끌어 내온 확충이 여기에 있다. 그 이유를 설명하면, ‘자기에게 다가오는 어려움을 끈기있게 견디지 못하는 것이 악이라면, 고통을 남에게 가하는 것은 얼마나 큰 악이라는 말인가’ 하는 것이다.
“저는 너의 형제로다.” ;이것은 그 악을 더욱 악화시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만일 모르는 사람을 속여 빼앗는 자들이 갑절로 악하다면, 형제를 속이거나 형제의 것을 빼앗는 일온 국악무도한 일이다. 이제 우리는 모두 하늘에 계신 같은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가 된 형제들이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불신으로 모르는 사람들을 대하였댜떤 바울은 그 죄를 가법게 다루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성별된 형제들을 별로 중요하지 않게 생각할 수 있었을 때, 그들은 전적으로 무모하였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9. 볼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틀 유업으로 받지 못할 즐을 알지 못하느냐” ; 불의라는 것을 우리는 엄격한 도덕에 반대되는 것으로 이해한다. 그러므로 형제들에게 해를 끼치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고 빼앗는 사람들, 한마디로 말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여 다른 사람들을 짓밟는 사람들로서, 이런 불의한 자들은 결코 하나님의 왕국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다. 바울이 불의한 사람들로서 음행자, 절도자, 탐욕자, 그리고 욕설꾼들을 실례로 들었을 때,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죄를 회개하지 않고 강팍스럽게도 사기를 고집하는 사람들임을 의미하고 있는데, 그것은 너무 분명한 사실이다. 그가 조금 뒷 부분에서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한때는 그러하였다고 말할 때, 그의 입으로 이 사실을 밝히고 있다. 악한 사람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받으면, 참회와 회개를 하고 하나님께 돌아온 이후라야 악에서 떠나게 된다. 회개가 용서를 받는 근거는 아니지만, 그러나 하나님과 화해된 사람만이 회개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있다. 질문법을 이용하는 것은 어떤 사실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져온다. 바울은 그들이 잘 알고 있는 어떤 사실과 모든 경건한 사람들에게 일상적인 어떤것에 대하여 말할 때 이 질문법을 사용화여 그사실을·강조하고있음이 분명하다.
“미혹을 받지 말라 •• ~ •..” : 한가지 죄를 다루면서 그는 많은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특별히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괴로움을 받고 있는 그런 악에 대하여 주목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는 성적 욕망을 책망하는데 있어서 세 가자 다른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모든 역사적 증거에 따르면 지배권을 잡았던 것이라고 한다. 고린도는 부요한 도시였다. 그곳은 유명한 상업 중심지로서 많은 의국 상인들의 출입이 빈번하였다. 부(富)가 사치를 가져왔고 또한 여러 형태의 음행과 방탕을 낳게 하였다. 이미 자연스럽게 육욕에 기울어진 백성은 다른 많은 타락에 자극 받고 있었다. 간음자와 간부(蔡夫)의 차이는 충분히 잘 알려져 있다. 나는 사내답지 뭇 하다는 말을, 실제로 공공연하게 매음적인 행위를 나타내지는 않으면서도, 음란한 말을 사용함으로 그들이 얼마나 정숙치 못한 사람들인가를 나타내고 또 여성적인 태도와 옷차림, 그리고 다른 매력적인 주의를 끌려는 방법을 취하고 있는 그런 사람들을 나타낸다고 생각한다.
이 범주 안에서의 네째번 용어는 모든 것 중에서 가장 심각하며 또 해괴하고 추악한 것으로써 헬라인들에게 일반화 되기에는 너무 거리가 먼 자연스럽지 뭇하고 추악한 것이었다. 그는 불법과 악에 대한 정죄를 세 가지 특별한 예로 실증하고 있다. 그는 절도들을 형제를 사기적인 수단으로 속이고 간사한 방법으로 위장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는 강탈자들은 다른 사람들의 재산을 강포하게 탈취하는 사람들이거나 혹은 남의 재물을 사방에서 끌어당겨서 그것을 탐욕스럽게 먹어치우는그런 비슷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의 생각이 더 광범위하게 뻗치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그 후에 탐욕스런 사람들을 또한 여기에 더 첨가하였다. "술고래" 란 엄청나게 먹는 데 몰두하는 사람들을 말한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는 욕설꾼들에 대하여 특별한 언급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이 도시가 헛된 소리와 험담으로 가득차 있기 때문이다.
간단히 요약하면, 바울은 이 도시에 그 수렁을 파고 있는, 그가 살펴 본 여러가지 악에 대하여 특별히 언급하고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경고가 더욱 신중하게 받아들여지기 위하여, 그는 “미혹을 받지 말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과 함께 그는 그들이 희망적인 전망을 잃지 말도록 권고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이 희망적인 전망 속에서 곧 잘 자신의 죄를 경시하는 경향이 있으며, 조건을 내세워 하나님을 경멸한다. 그러므로 독(毒)보다는 우리의 죄 가운데서 우리를 격려하는 그런 매력적인 일들이 더 위험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이어런(Sirens)의 노래 보다는 사단의 치명적인 가사, 곧 하나님의 심판과, 죄의 정죄에 대하여 농담을 지껄이는 불의한 자들의 말을 더 조심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동사 '클레 로노메인 ; 상속하다' 의 적절한 사용을 살펴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이 동사는 하나님의 나라가 아들들에계 상속되는 것을 보여주는데, 그러므로 양자 의 축복에 따라 우리에게 그것이 전해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
“11.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냐” ; 어떤 사람은 이것이 일부분만을 나타내는 것으로 만든다. 즉 ‘너희 중에 어떤 자들이 그렇게 하였는데' 라는 것인데 그 이유는 헬라어에 '티네스 ; 약간, 어떤' 라는 단어가 부가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사도 바울이 그들 모두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더 그럴듯 하다고 생각한다. 헬라 사람들의 일 반적인 관례에 비추어볼 때 그 단어는 그들이 장식용으로 쓴 것이지, 제한을 나타내는 그런 의미로 사용한 것이 아니므로 나는 그 단어가 참으로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바울이 이 모든 악을 그들 각사람 모두에게 돌리는 것처럼 모든 사람들을 동일한 집단으로 물아세우고 있음을 그가 의미한 것처럼 이해해서는 안 된다. 다만 바울은 그 누구도 성령으로 거듭나기 전까지는 이 악에서 자유로와질 사람이 없다는 것을 지적하려고 하였을 뿐이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우리는 모든 죄악의 씨앗을 가진 인간 본성을 지니고 있음에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육신의 타락한 본성이 그 결과로 나타나게 하였듯이, 어떤 악이 어떤 사람에게 있어서는 지배적으로 아주 뚜렷하게 나타나기도 한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하나님을 깨닫지 못하는데서 일어나는 악과, 또 하나님의 은혜를 잊어버리는데서 야기되는 많은 종류의 악과 범죄를 열거하고 있으며, 그는 모든 불신자들이 죄책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이 사실 속에서 보여주었다. 불신자둘 안에 이 모든 악으로 더럽혀진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악이 내재하기 때문에, 그 누구도 이 죄악에서 자 유로운 사람은 없는 것이다. 또한 제 3장에서도 바울은 이 본문을 아담의 후손들 모두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저희 목구멍은 열린 무덤이요, 그 입에는 저주와 악독이 가득하고, 그발은 피훌리는데 빠른지라. 이것은 모든 사람이 다 피에 굶주리고 잔인하여, 그들의 입에지는 불신과 욕설만이 쏟아져 나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 전에는, 어떤 사람은 잔인성을, 다른 사람은 배반의 기질을, 또 이 사람은 탐욕을, 저 사람은 사기성을 가치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로 모든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다 내재해 있는 어떤 타락의 증거를 갖지 않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나 참으로 인간인 우리 모두는 내적으로, 모든 죄악에 복종하려는 은밀한 마음의 비밀들을 가지고 있는데,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서 그 악한 욕망을 제어하여 주시어, 그 악이 세상에서 행동으 로 나타나지 않게 하여 주신다.
그러므로 그 뜻은 이렇게 간단하다. 중생의 은혜를 받기 전에는 고린도 교회 교인들이 탐욕자, 음행자, 절도, 의지가 약한 자, 욕설꾼 동이었으나 이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유를 얻어서 과거의 그들이 아니라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의 취지는 그들이 과거에 어떠한 사람들이었는가를 일깨위 줌으로써 그들을 겸손하게 하고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전의 우리의 상태가 얼마나 비참한 것이었던가를 우리가 깨달을수록, 그의 은혜가 얼마나 충만한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우리는 알게 된다. 이제 우리가 은혜를 격찬하는 것은 격려의 원천이 되는데, 왜냐하면 마땅히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하나님의 축복을 무용한 것으로 하지 않기 위해서 우리가 큰 고통을 감수하여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그것은 너희들이 과거에 빠져 있던 진흙 구덩이에서 하나님께서 그런 너희들을 끌어내시기에 충분한 것이다. 베드로도 이와 비슷한 말을 하고 있다. "너희가 이방인의 뜻을 좇아 행한 것이 지나간 때가 족하도다"(벨전 4 : 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 바울은 직분들 사이의 적절하고 현명한 구별을 짓고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를 정결케 하는 원인이 되며, 그의 죽음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는 칭의를 받으며 성화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루어 주시는 정결과 칭의는 거룩한 성령으로 말미암아 축복받은 자들에게 분배되는 이 축복의 대열에서 제외된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아니며, 바울이 성령을 ,그리스도와 함께 하시는 것으로 말한 것은 참으로 옳은 일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친히 모든 축복을 가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연합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영접하고, 이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의 은혜(gratiae)가 우리에게 적용된다. 믿음의 창시자는 성령이다.
“씻음과……하심을 얻었느니라.” ; 바울은 한가지 생각을 전달하기 위하여 세 가지 표현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들이 과거에 탈출해 나온 그런 상태로 다시 빠져들지 않게 더 효과적으로여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러므로 이 세 가지 귀절이 모두 갈은 것을 나타낼지라도 그러나 그 다양성아 그가 말하는 것에 대하여 많은 효력을 나타내고 있다. 씻음과 불결함, 성화와 오명, 칭의와 죄책 사이에는 대조가 내포되어 있다. 그가 말하는 요청은, 한번 그들이 칭의(稱義.; 의롭다 인정함一역자 주)를 받으면 그들은 다시 새로운 죄책의 상태로 빠져들어서는 안 되며, 성화된 후에 다시 불결한 상태로, 또 씻음 받은 후에 육신의 오염으로 자신을 더럽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성결을 위하여 노력하고 참으로 거룩하려고 애쓰며, 이전의 불결했던 생활을 증오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값없이 속량하여 주심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계 하신 그 목적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한 가지를 설명하기 위하여 그것이 암시되어 있지 않은 세 가지 용어들이 사용되었다고 내가 말하였지만, 그러나 내 생각에는 그 세 가지 사이에는 차이점이 없는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업격히 말해서 하나님은 그가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책임지우지 않으실 때 우리를 의롭게 하신다. 곧 하나님은 우리의 죄에 대한 기억을 모두 소멸하실 때 우리를 정결 케 하신다. 그러므로 이 둘 사이의 유일한 차이점온 하나가 직선적인데 비하여, 다른 하나는 은유적이라는 것이다. 온유는 씻는 것인데, 그리스도의 피를 물로 생각하는 것이다. 다른 한편 하나님은 그의 성령으로 우리의 타락한 본성을 개조하심으로써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며 그러므로 성화는 중생을 수반하여야 한다. 그러나 이 귀절에서 사도 바울의 유일한 목적은 하나님의 은혜를 더 증대하는그런 방법으로 설명하려는 것인데, 이 하나님의 은혜는 죄의 멍에로부터 우리를 구원하며, 여기서부터 우리는 우리를 대적하는 하나님의 노와 진노를 야기하는 모든 것으로부터 우리가 얼마나 위축되어야 하는가를 배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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