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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고전7:4)

1. 성경 (고전7:1 ~7)
너희가 쓴 문제에 대하여 말하면 남자가 여자를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1)음행을 피하기 위하여 남자마다 자기 아내를 두고 여자마다 자기 남편을 두라 (2)남편은 그 아내에 대한 의무를 다하고 아내도 그 남편에게 그렇게 할지라 (3)아내는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남편이 하며 남편도 그와 같이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고 오직 그 아내가 하나니 (4)서로 분방하지 말라 다만 기도할 틈을 얻기 위하여 합의상 얼마 동안은 하되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가 절제 못함으로 말미암아 사탄이 너희를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5)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허락이요 명령은 아니니라 (6)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그러나 각각 하나님께 받은 자기의 은사가 있으니 이 사람은 이러하고 저 사람은 저러하니라 (7)

2. 묵상 (Calvin선생주석)
바울이 음행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므로, 음행을 피하는 치유책이 되고 있는 결혼의 주제에 대한 적절한 변화를 취급하고 있다. 고린도에 있는 교회 안에서의 큰 분열에도 불구하고 바울이 결코 남아 있지 않은 것처럼 어떤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들이 그의 충고를 청하였던 어떤 문제에 대하여 그들이 의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대답에서 우리가 추측할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질문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지 못한다. 그러나 교회가 세워지자마자, 사단 의 간계로 악한 마음이 교회 안으로 침투하여 온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그것이 의미하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결혼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리석은 동경을 가지고, 결혼의 거룩한 상태를 멸시하였다. 참으로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부정한 것으로 여겼던 어떤 것을 하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 이 악영향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역시 감염되었던 모양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극도로 게으른 자들이 있어서, 지나치게  독신주의를 강조하여, 믿는 사람들의 마음을 결혼하지 못하도록 하여 괴롭히는 일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실상 사도 바울이 많은 다른 문제들에 대하여 교훈하는 데 있어서 그가 그 많은 사람들에 대한 의견을 들었다고 나타내고 있다. 우리가 그들 각자에게 준 그의 교훈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1. 남자가 여자틀 가까이 아니함이 좋으나." ; 바울의 대답은 두 가지 요소를 내포하고 있다.

 

먼저 그는 만일 남자가 그럴 수만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가르치고 있다. 

 

둘째로 이것을 다음과 같이 수정하고 있다. 즉 육신의 연약함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할 수 없으므로,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제시하여 주신 치유책, 또 그들이 실제로 소유하고 있는그 치유책에  무관심하여서는 안된다.

 

더구나, 그가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말하였을 때, 우리는 그가 의미하는 바에 반대되는, 결혼의 결속이 나쁘다는 뜻의 결혼에 이르자 않도록 그가 의미하는 '좋다' 는 단어의 의미를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이것이 제롬(Jerome)의 경우에 일어났던 일인데, 내 생각에는 그가 이런 잘못을 범한 것은 무지 때문이 아니라, 지나치게 논쟁을 좋아하였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 유명한 사람이 특출한 덕은 갖추었지만, 과도한 논쟁 속에 그의 발을 잘못 디뎌서 중대한 결점을 드러냈고, 또한 그는 항상 진리에 집착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여기에서 그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다. 즉,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는 것이 좋다. 그러므로 여자를 가까이 하는 것은 나쁘다' 

 

그러나 바울은 ‘좋다’는 말을 이런 의미로 사용한 것은 아니며, 그렇게 하는 것이 악하거나, 혹은 악으로 가득찬 것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다만 결혼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모든 고통, 괴로움, 책임들을 생각하여 볼 때 무엇이 그 사람에게 유익한 것인가를 보여주는것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그가 덧붙이고 있는 수정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바울의 말은 사람이 결혼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다면, 아내에게 얽매이지 않는 것이 참으로 유익하고 적절하다는 의미 이상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그것을 유추법(Similitu_ dine)으로 설명하자.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사람이 먹지 않고, 마시지 말고, 잠도 자지 않는 것이 좋다' 고 하지만 인간은 먹고 마시고 잠자는 일을 악으로 여겨 제거할 수는 없다. 오히려 이런 일들을 위해 시간을 많이 빼앗기는 것이 영적인 일에 별로 유익이 못되므로, 그는 만일 우리가 이런 일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면, 그리고 우리 자신을 완전히 하나님의 일에 대한 생각으로 헌신할 수 있다면, 우리가 더욱 축복 받은 사람들일 것이라는 의미이다. 결혼생활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는 많은 장애물이 될 것이므로, 그런 이유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또 다른 문제가 대두 된다. 즉 바울의 이 말은, 창세기 2장 18절의 “사람의 독처 (獨處)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라는 말씀에 저촉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은 창세기에 나타난 상태는 악하고, 바울이 여기서 말하는 것은 좋다는 의미가 된다. 그러나 여기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아내가 남편을 도와주면 그의 생활은 행복하여지고, 이것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일이다. 하나님은 남자에게 아내가 없는 것은, 말하자면 반쪽 인간(quasi dimidius homo)으로 태초에 정하셨으며, 또한 그가 특별히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도움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아내는 말하자면 남편의 완성 (quasi viri complementum)이 되게 하셨다. 후에 죄가 하나님의 이 거룩한 결혼 제도를 공격하고 그것을 해쳤을 때, 그 큰 축복 속에 쓰라린 고통(poena)이 들어왔으며, 그래서 결혼이 많은 고통의 근원과 수단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결혼 속에 있는 어떤 악이나 고통은 하나님의 제도가 부패한 데서 오게 된 것이다.  비록 걸혼에 어떤 근원적인 축복이 남아 있어서, 독신 생활이 결혼한 사람의 생활 보다 때로는 조금 더 비참할지라도, 그러나 결혼한 사람들이 많은 불행을 안고 있다는 점에서,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좋다고 한 바울의 권고는 정당한 것이다.

 

이런 방법으로도 결혼에 따르는 어려움은 충분히 잘 설명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일반적으로 결혼을 불신하기 위하여 쓰는 ‘아내는 필요 악이야', '여자는 가장 악한 악마 중의 하나야'라는 것들의 야비한 농담은 결코 허용될 수 없다. 이와 같이 말하는 것은 사단의 시험에서 온 것이며, 그들의 목적은 수치스럽게도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더럽히려는 의도 이외의 아무것도 아니며 , 결과적으로 사람들을 교수대 (紋首臺)나 천벌로부터 도망치려는 것처럼 결혼을 회피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을 전체적으로 요약하여 보면, 우리가 무오(無誤)한 하나님의 말씀과 다음 장면에 나타날 죄의 형벌 사이의 차이점을 기억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구별에 따르면, 처음에는 남자가 아무런 손상도 없이 아내와 결합하는 것이 좋았지만, 그러나 하나님의 저주로 인하여 달콤한 결혼 생활에 쓰라림이 혼합되는 까닭에 어느 정도로 좋은 것 뿐이다.  그러나 계속적인 결혼생활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우리가 뒤에서 살펴보려는 것처럼 필요하고 또 건강에도 도움이 되는 치유책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2. 음행의 연고로……" ;이제 바울은 음란의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은 이 치유책을 의뢰하도록 요구하고 있다. 비록 이 문장이 일반적인 적용인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절실한 팔요성을 느끼는 사람들에게 제한되어야 한다. 사람들은 이것을 자신에게 적용할 것인가 아닌가를 스스로 각자가 결정할 일이다. 그러므로 결혼이 아무리 어떤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육신의 정욕을 이길 수 있는 사람들은 이 율법을 하나님께서 세우셨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이렇게 질문할지 모른다.  '불일치의 치유만이 결혼의 유일한 이유가 되는 것인가?'  나의 대답은,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혼을 하지 않고도 지낼 수 있는 은사를 가진 사람들에게 그는 결혼을 하거나 혹은 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를 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결혼을 함으로써 자신의 연약함을 돌보도록 명령하고 있다. 그는 이런 결론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즉,  여기서 문제되고 있는 것은 걸혼을 제정한 이유가 아니라, 결혼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만일 우리가 먼저 결혼에 대하여 살펴본다면, 우리는 결혼이 악에 대한 치료제가 될 수 없었으며, 그 치료제는 있지도 .않았고, 오히려 어린 아이들의 출산 때문에 있게 되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인간이 타락한 이후 이것은 다른 목적이 첨가된 것이다. 이 귀절은 또한 일부다처제에도 위배가 된다. 사도 바울은 여자들마다 한 남편을 두어야 하고, 남편도 부부간에 서로 의무를 지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남편이 일단 아내에게 그의 신실함을 서약하였다면, 그는 결코 아내를 떠나서는 안 되며, 이것은 분명히 재결합되어져야 한다.

 

"3.  남편은 그 아내에게 대한 의무를 다하고……" ; 바울은 이제 결혼생활을 위한 법칙을 제시하고 있으며, 또, 남편과 아내의 의무의 본질에 대하여 가르치고 있다. 참으로 먼저 그는 상호 복리에 대한 일반적인 원리, 곧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 또한 남편을 사랑하는 그 일반적인 원리를 제시 하고 있다.  다른 사람들은  ‘당연한 자비심' (debitam 'benevolentiam)을 .'결혼의 의무', 즉 부부의 권리라고 해석을 한다. 아마 이것은 옳을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이런 견해를 갖게 한 것은 ‘남편도 자기 몸을 주장하지 못하며……'라는 곧 뒤에 나타나는 귀절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앞의 문장에서 부터 온 결론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위하며, 여기서부터 남편이나 이내 어느 한 사람도 자기 자신을 마음대로 주관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왜 사도 바울이 남편이나 이내를 동등한 입장에 두었으며,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하고 종속되기를 요구하지 않았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된다. 여기에 대한 나의 대답은 바울이 모든 그들의 의무에 대하여 논하려고 하였던것이 아니고, 다만 상호 교통에 관계되는 서로의 의무에 대하여 말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각각 다른 권리와 또 그들이 맡은 분야에서 그 책임이 각자 다르지만, 결혼의 신실성을 보존함에 있어서는 부부가 다같이 동일한 지위를 갖는 것이다. 동일한 이유로 일부다처·一夫多 妻)는 다시 정죄를 받게 되는데, 왜냐하면 만일 남자가 자기의 몸을 주장하는 힘을 포기하고, 그것을 그의 아내에게 양도하는 것이 결혼의 계속적인 상태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가 후에 자신이 자유스런 것처럼, 또 자신을 다른 사람에게 연합할 수 있을 것인가?

 

"5. 서로 분방하지 말라" ; 세속적인 사람들은 바울이 남편과 아내의 친밀성을 이렇게 취급하였으므로 그는 충분히 신중하지 못하였으며, 참으로 사도의 권위에도 적합하지 않다 고 생각할는지 모른다. 그러나 만일 그가 그렇게 말하계 된 이유를 잘 생각하여 보면, 우리는 그가 이런 일들에 대하여 말하지 않을 수없었던 이유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첫째로 그는 우리가 경험을 통하여 알고 있는 것처럼, 순결한 것같이 가장하여 경건한 사람들을 속이는 가짜가 얼마나 그 세력이 강하다는 것을 잘 깨닫고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하는 것이 옳은 일처럼 보이게 매혹시켜서, 무리가 아내와의 교제를 불결한 것으로 생각하게 하여,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소명을 포기하고, 다른 생활상태를 갖게 한다. 다시 바울은 얼마나 사람들이 자애(自愛)에 빠지게 되고 자기 자신의 기쁨 속에 도취되기를 열망하고 있는가를 알았다. 이것이 바로 남편이 자신의 열정에 만족하면서, 아내에게 무관심할 뿐 아니라, 그를 경멸하게까지 되는 이유이다. 그리고 때때로 아내가 싫어지는 느낌을 갖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 없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바울은 결혼에 있어서 서로간의 의무에 대하여 이렇게 염려스럽계 취급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하는 것과 같다. '만일 결혼을 하지 않는 것이 더 거룩하기 때문에, 혹은 한 사람에게 매이지 않는 방종스런 생활을 갈망하기 때문에 독신생활을 갈망하면서도 결혼을 한 사람들에게 이런 사상이 들어 간다면, 그런 사람들에게 부부의 긴밀한 결합을 기여하도록 해 주어야 한다. 남자는 혼자로서는 반신(半身)일 뿐이며, 여자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선택의 자유를 가지고있지 않다. 그러나 반대로 그들은 이런 생각으로 자신들을 제어하여야 한다. 즉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결합시키셨으므로, 우리는 서로를 도와야 한다. 다른 한 사람이 필요로 할 때, 우라는 그를 도와야 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해서는 안 된다.

 

"다만 기도할 틀을 얻기 위하여" ;  바울이 여기서 일반적으로 또‘ 분별없는 금식과 기도에 대하여 말하고있는 것은 아니다. 끊임없이 이루어져야 하는절제와 그리스도인의 매일의 생활 모습이 일종의 금식인 것이다,  또 기도는  매일 그리고 계속적으루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바울은 참된 회개의 증거로써 금식의 형태에 대하여 말하고 있으며,'하나님의 진노를 막도록 노력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믿는 사람들이 어떤 심각한 문건를 받아들이기 전에 기도로 자신을 준비하여야 한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더 크고 집중적인 정신 노력이 요구되는 기도의 형태를 의미하고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금식하고 기도하기 위하여 다른 모든것을 생각하지 말하야 할 경우가 있다.  예를들면 어떤 재난이 우리를 엄습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전노로보일 때, 혹은 어 떤 어려움과 우리가 투쟁할 때, 또 목사를 임명하는 것과 갈은 대단히 중요한 문제가 우리 앞에 대두되었·을 경우 등이다. 이제 사도 바울은 이 두 가지를 함께 연결시키는데 있어서 아주 정당하다. 왜냐하면 금식은 기도의 준비이며, 또  그리스도께서도 금식과 기도를 함께 연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기도와 금식이 아니면 이런 유가 나가지 아니하느니라"(마 17.:21)―한 굳게역 성경엔 난 외에 있음. 

 

그러므로 바울이 너희가 틈을 얻기 위하여'라고 말할 때, 그는 너희들이 자신의 모든 착잡한 정신 상태에서 벗어나,`오직 너희들의 주의력을 이 한 가지 일에만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그런데 만일 어떤 사람이 부부간의 교제가 기도를 방해하기 때문에 나쁜것이라고 반대한다면, 그 대답은 간단하다.  즉 그것은 금식을 방해하는 음식물과 음료수보다도 더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때와 또 금식을 할 때를 결정하는 데 분별력이 있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부부가 서로 교제할 수 있는 적절한 때를 아는 것도 같은 분별력의 문제이며, 더 중요하게 관심을 기울여야 할일이 생겼을 때는, 그 일을 위하여 부부가 삼가하여야 한다.

 

"합의 상" ;  바울은 ‘합의 상’ 이라는 조건을 요구하고 있는데,

첫째로 그 이유는 이것이 단순한 부부 한 사람만의 절제 문제가 아니라, 두 사람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곧 두 가지 다른 예의를 첨가하고 있다. 첫째는 그 분방(分房)이 일시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하였으며 그 이유는 계속적인 분방은 그들의 힘으로 자제될 수 없기 때문이다. 한편,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들에게 적합하지 않는 다른 방법을 모색하게 될 것이고, 또 사단의 간계에 빠지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로 예의는 절제 그 자체가 선이고, 또 거룩한 행위인 것처럼, 혹은 그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수단이나' 되는 것처럼 부부 생활을 절제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다만 더 중요한 일을 하는 동안 그 일을 위하여서 시간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이 문장에서 그렇게 주의 깊은 설명을 하였는데도, 사단은 더 우세한 힘으로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지 않은 생활에 대한 부적절한 갈망의 수단으로서 불법적인 이혼을 자행하도록 유혹하고 있다.

 

남자들은 아내를 버리고, 수도승처럼 살아감으로써 하나님을 더 기쁘시게 해드리려는고독한 생활을 택한다. 아내들은 남편의 뜻을 거역하고, 독신의 배지(badge) 를 휘장처럼 달고 다닌다. 그들은 상대방에게 서약한 그 선의를 배신함으로 써 하나님의 언약을 깨뜨렸으며, 또 그들이 결혼의 멍에률 깨뜨림으로 하나님 의 멍에를 벗어버리려고하고있다는 생각을 잠시도 떠날 수는 없는 것이다. 참으로 이 악은 어느 정도는 옛 법규(old Canons)에 의하여 고쳐졌었다. 그 옛 법규는 절제를 구실로 아내의 뜻을 반대하고 아내를 떠날 수 없도록 금하고 있으며, 마찬가지로 아내도 남편에게 자신의 몸을 거절하지 못하도록 금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에 반대되는 어떤 것을 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가진 것처럼, 그들은 둘 다 계속적인 독신생활을 하도록 허용하는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  바울은, 결혼한 사람들은 일시적으로만 서로 분방을 하여야 한다고 분명히 가르치고 있다. 이것이 갈등하고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이 어떻게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분명히 나타내시는 말씀을 확실히 배반하고 있는 옛 사람들의 사건에 대하여 우리가 공개적으로 반대하는 사실에 대하여 아무도 놀라서는 안 된다.

 

"다시 합하라 이는 너희의 절제 못함을 인하여 사단으로 너희틀 시험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 . 바울은 이제 옛 사람들의  무지 때문에 과오를 범하고 잘못된 생각과 일생을 극기하겠다는 맹세를 경솔하게 한 그 이유를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이렇게 생각하였다. 즉 ‘만일 결혼한 사람이 때때로 일정 기간동안 부부의 친교를 하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면, 그들이 영원히 절재하는 것은 더욱 좋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생각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의 연약한 힘이 그 한계를 넘어서 어떤 것을 시도하게 될 때, 사단은 우리를 넘어뜨릴 수 있는 기회를 제시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단을 격퇴할 수 있어’ 라고 어떤 사람은 말할 것이다.  만일 무기와 방어물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켜 주시도록 기도해야지’라고 그들은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무모한 우리의 싸움에 하나님께서 헛되이 우리의 방어자가 되시라고 기도하게 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너희의 절제하지 못함을 인하여'라는 귀절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할 이유이다. 왜냐하면 우리 육신의 연약함을 사단의 유혹에 누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사단의 유혹을 추방하고, 우리의 단정한 행실이 적절한 치유책이 되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가 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부부간의 친교를 포기하는 사람들은 무모하게 행동하는 사람들이며, 참으로 그들은 저항에 대한 영원한 힘을 하나님과 의논하는 사람들과 같다.

 

"6.  권도요~~~~" ; 그들은 그가 주장한 것과 갈은 그런 법칙에 대한 우월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또 그들에게 고뇌에 대한 견재를 가하기 위해서, 바울은 제재의 주의를 가하고 있다. 그는 그들의 연약함을 고려하여 이 런 문제들을 기록하였으며, 따라서 결혼은 성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치유책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하여, 이런 문제를 언급하고 있는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그는 또한 그들이 잘못되는 것을 막고 또 그들이 참으로 어떤 제한이나 부끄러움도 없이 어떻게든 그들의 욕망을 만족 시키기 위하여, 성적인 문제가 가져오는 모든 방법을 무절제하게 다 사용하는 것을 방지하기를 원하고 있다. 동시에 바울은. 불신자들의 비난에 대항할 것을 찾고 있으며, 그렇게 함으로써 아무도 '다음과 갈은 반론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다.

 

즉, ‘그렇다 ! 내가 그들을 격려할 때, 그 남편들과 아내들이 스스로 정열적인 탐닉에 대한 충분한 성향(性向)을 갖지 못하고 있음을 너는 두려워하고 있다. '그 적은 성도들인 가톨릭 교도들은 이 교훈에 또한 압도당하고 있으며, 또 바울에 대하여 칼을 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바 울이 걸혼한 사람들이 합께 살아야 한다고 하였으며, 독신생활로 빨리 바꾸지 말라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가 그렇게 한 것처럼 교훈에 대한 이유를 제시하고 있으며, 또 그가 결혼한 사람들에게 그들이 즐거음을 발견하도록 유혹하기 위하여 부부의 친교를 권장하고 있거나 혹은 바울 자신이 그것을 권고하는데 기쁨을 느껴서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장하고, 오히려 그가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연약함으로 인하여 불리어지는 어떤 것에 대하여 그가 관심을 가지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

 

독신생활에 대하여 분별력이 없는 열광적인 지지자들은 이 귀절의 두 부분을 잘못 악용하고 있다. 그 이유는 바울이 "이 말을 하는 것은 권도(權道)요"(secundum veniam)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은 여기서 결혼에 있어서의 친교는 죄라고 추론하고 있다. 왜냐하면 용서를 팔요로 하고 있는 죄가 현재 있기 때문이다.  한편  ‘명령은 아니요’라는 바울의 말에서 그들은 결혼의 상태를 포기하고 독신생활로 돌아가는 것이 위대한 거룩함의 상징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첫째 문제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모두 인간의 애정이 즉시 얻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나는 이 관계에 있어서 내가주장 하려는 훈련(ci,a~la: 아락시아)의 부족이 또한 죄일 수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한 것은, 내가 여러분에게 시인하려는 이 느낌은 다른 것보다 더 강포하며 거의 금수와 같은 것이다.

 

그러나 이것에 반대하여 내가 또한 주장하는 것은 현존하고 있는 어떤 악이나 불명예도 결혼의 영광으로 인하여 덮여지기 때문에 그것은 악이 될 수 없거나 혹은 최소한 하나님에게 그렇게 악으로 인정을 받지 않게 된다. 이것이 어거스탄이 이 문제를 취급한 방법이며, 그의 〈결혼의 유익에 대하여〉(On the Advantage of Marriage)라는 책에서 아주 잘 나타나 있고, 그 이외의 다른 곳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이것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이런 내용이다. 남편과 아내의 친교는 순결한 행위이며, 그것은 적절하고 거룩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제도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억제하지 못하는 타오르는 정열은 타락한 인간의 본성에서 일어나는 죄악이다. 그러나 믿는 사람들의 결혼은 그 허물을 덮어주는 베일이어서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죄로 보시지 않는다.

 

 이 귀절의 두번째 오해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명령’이라는 이름이 정의 (正義)의 의무에 영향력을 미치는 일들에 적절하게 부과되었고, 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사물들에게 주어졌다.  따라서 바울은 그가 ‘명령’으로 말함이 아님을 나타내고 있다. 참으로그는그 팔요성 때문에 그가 말한 그 치유책을 우리가 아용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이미 아주 분명하게 나타내고 있다. 

 

"7.  나는 모든 사람이 나와 같기를 원하노라·~~~~" ; 이것은 앞의 문장의 설명의 일부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그리스도인에게 더 적절한 것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비밀을 지키지 않았고, 오히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이 어떻게 되기를 원하시는가에 대하여 신중하게 생각하여 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면 왜  바울은 앞의 귀절에서 ‘명령으로 말하지 않았는가?  그 대답은 그들이 강제로 모두 결혼하기를 그가 원치 않았으며, 오히려 그들이 결혼의 필요성을 갖기를 원치 않았다는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모든 사람들에게 다 가능한 것이 아니므로, 그는 그들의 무력(無力)을 고려하고 있다. 더구나, 만일 이 귀절이 높은 평가를 받는다면, 무서운 악의 뿌리와 원인이 되고 있는 독신생활을 추구하는 잘못된 미신이 세상에서 그 위력을 과시하지 못할 것이다.

 

바울은 모든 사람들이 이 관계에 있어서는 자유 선택권을 가지지 못하였다고 여기서 아주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그 이유는 독신 생활을 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무분별하게 다 주어지지 않은 특별 은사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사람마다 이 말을 받지 못하고"(마 19: 11)라고 말씀하신 주님의 말씀에 위배되는 어떤 다른 말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 다. 그러므로 바울은 결혼을 하지 않고 살아가는 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진 것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여기서 해설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었는가? 사람들이 자신의 능력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영원한 극기(克己)의 생활을 맹세하고 있다.  이것은 평범한 사람들이나 교육을 받지 못한 무식한 사람들만이 이런 관계에 잘못 빠져 들어가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우수한 교사들이 독신생활을 하겠다고 온 마음으로 서원을 하였으나, 동시에 인간 본성의 연약함을 잊고, 참으로 바울의 경고, 아니 그리스도 자신의 경고를 무시하여 버린 것이다· 사실상 말씀을 무시하고 열심으로 인하여 저 눈이 멀었던 제롬Oerome)은 단순히 빠져든 것이 아니라 잘못된 견해로  무모하게  곤두박질하여  돌진해 들어간 것이다.  독신생활은 놀라운 은사이며, 그것이  ‘은사’라는 사실을 결코,잊어서는 안 된다고 나는 강조한다.  또한 그리스도와 바울이 말씀한 모든 사람이 이 은사를 받지 못하고, 오직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된다는 사실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제어할 수 없는 어떤 것에 대하여 무모한 서원을 하여서는 안 되며, 만일 당신이 당신의 소명을 살펴 보지 않고, 또한 당신에게 주어전 한계를 넘어설 수 없다면, 당신은 그것을 은사로 받을 수 없을 것이다. .

 

그런데도 옛 사람들이 독신생활에 중대한 의미를 분여하는 잘못에 빠져들어갔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신생활이 모든 미덕(美德)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인 양 그것을 찬양하고, 또 그것을 하나님을 섬기는 수단으로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늘날도 위함스런 오류는 계속되고 있으며,  사실은 거의 1% 정도밖에 이 은사를 받은 사람이 없는데, 독신생활이 아주 높게 평가를 받는 것처럼 생각된 이후, 많은 사람들이 무모하게 영원한 독신생활을 서원하면서 다른 사람들보다 뛰어나려는 그런 현상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나온 세번째 오류는, 교회 성직자들의 결혼을 금하고 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결혼이 그들의 성적 생활의 거룩함을 지키기에 적절한 생활 방식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결혼을 멸시하고 영원한 독신 생활을 무모하게 서원하는 자들의 오만을 벌하셨다. 

 

첫째는 그들의 은밀한 번뇌스런 정열의 불길 때문이요,

 

둘째는 가증스럽고 불의한 행위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 성직자들의 결혼이 법적으로 금지되었기 때혼에 이 전횡적인 독단의 결과로 교회는 많은 유능하고  성실한 성직자들을 빼앗기고 있다.  왜냐하면 정직하고  현명한 사람들이 그 함정에 빠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그때까지 그들을 억압하고 있던 번뇌가 그 악취를 발할 것이다. 이런 사람들----그들의 경우 아내를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공격 거리가 되는 것이다-----이 여자를 갖거나, 아니면 다른 방법으로 아무 후환의 염려 없이 창녀를 취하는 것으로 충족하지 못한다. 그러나 가정도 사재들의 충만한 음욕 때문에 안전하지 못하다.  그것이 비록 그늘 속에 묻혀 있을지라도, 부자연스럽고 포악한 일은 드러나기 마련이므로,  영원히 망각 속에 묻어두기보다는 본보기로서 나타내는 것이 더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