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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

1. 성경 (고전7:8~17)
내가 결혼하지 아니한 자들과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나와 같이 그냥 지내는 것이 좋으니라 (8)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결혼하라 정욕이 불 같이 타는 것보다 결혼하는 것이 나으니라 (9)결혼한 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라) 여자는 남편에게서 갈라서지 말고 (10)(만일 갈라섰으면 그대로 지내든지 다시 그 남편과 화합하든지 하라) 남편도 아내를 버리지 말라 (11)그 나머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이는 주의 명령이 아니라) 만일 어떤 형제에게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있어 남편과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를 버리지 말며 (12)어떤 여자에게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있어 아내와 함께 살기를 좋아하거든 그 남편을 버리지 말라 (13)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말미암아 거룩하게 되나니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하지 못하니라 그러나 이제 거룩하니라 (14)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갈리게 하라 형제나 자매나 이런 일에 구애될 것이 없느니라 그러나 하나님은 화평 중에서 너희를 부르셨느니라 (15)아내 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남편 된 자여 네가 네 아내를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리요 (16)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신 그대로 행하라 내가 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1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8. 내가 혼인하지 아니한 자들과 및 과부들에게 이르노니……" ; 이것은 앞에서 나온 내용에 관계되는 것 이며, 그리고 어느 의미에서는 그것운 축소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은사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사람들에게 주어졌으며, 모든 사람들이 다 독신생활의 온사를 받은 것은 아니어서,  이 은사를 받지 못한 사람들은 결혼의 치유책을 가져야 한다고 그가 말했기 때문아다. 이제 그는 다시 처녀를, 결혼하지 않은 사람들, 그리고 과부들의 문제로 들아가고 있다.  그리고 그는 만일 할수만 있다면, 그들이 독신생활을 하여야 한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각각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이렇게 요약할수 있다.  즉 혼자 사는것은 많은 유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만일 각 사람이 그 자신의 상태에 만족한다면 이 유익이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만일 처녀가 제3의 천국에 오르게 될지라도, 그것은 계속 진리로 남는다. 그러나 이것은 결코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합한 일이 아니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은사를 받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카톨릭 교도들은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순결한 생활을 하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하는데 이 약속은 우리가 지킬 힘이 없는 것이라고 반대를 한다. 여기에 대한 대답온 간단하다. 즉 이 경우 우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백성에게 요구하시는 것 이상의 약속을 드리는 것은 아니며, 극기생활은 참으로 특덜한 은사여서, 하나님은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은사를 주시지  않으셨다. 그런데도 극기의 서원을 드리는 사람들은 마치 어떤 교육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나, 예언자가 되겠다, 혹은 교사, 혹은 말씀의  해석자가 되겠다고 공언하는 무지한 친구들처럼 행동한다.  우리는 또한  ‘그냥 지내다' (abide)라는 단어에 주의를 기울여 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이 얼마동안은 결백한 독신생활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런 생활이 영원히 계속되리라고 생각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삭은 30세까지, 독신으로 살았으며 , 정열 속에서도 그동안 순결을 유지하고 살다가, 나중에 결혼을 하도록 소명을 받았다. 야곱은 더 유명한 본브기가 되는 인물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지금 순결을 지키고 있는 사람들이 계속 그것을 지켜나 가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끝까지 계속될 온사인지 그들이 확신을 갖지 못하는 까닭에, 그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사가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리라고 말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 귀절은 사도 바울이 그때 결혼을 하지 않았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가 결혼한 사람과 갈이 말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결혼한 사람이라는 에라스무스(Erasmus)의 추리는 변덕스럽고도 무의미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와 동일한 논법으로 생각한다면, 만일 그가 과부와 함께 이야기를 한다면 그가 홀아비라는 추리가 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말의 전체적인 대의는 그때 그가 결혼을 하지 않았다는 취지이며, 나는 그가 그의 아내를 어단가로 쫓아버라고, 결혼의 가능성을 자의로 포기하여 버렸다는 억측을 받아들 일 수 없기 때문이다.

 

무슨 권리로 그때 그가 결혼한 사람들에게 말할 수 있었겠는가? 한때 함께 하였다고? 그가 자신의 지칭서에 따르지 않고 또 다론 사람들에게 부과한 법을 지키지 않은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바울은 놀랄만한 겸손의 표본이다. 왜냐하던 그 자신은 극기 생활의 은사를 받았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처럼 극기생활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고, 오히려 다른 사람의 연약함을 위하여 그 치료제를」허락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경고의 사람이 되고 있다.  즉 만일 우리가 남다른 특별한 은사를 받았다면,  우리는 우리의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다른 사람들 에게 지나치게 가혹한 요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9.  만일 절제할 수 없거든" ;  바울이 그들에게 결혼에 대한 절제를 권고하고 있지만, 이것온 어디까지나 ‘만일 할 수 있다면''  "만일 가능 하다면’ 이라는 전제 조건이 항상 달려 있다. 그러나 육신의 연약함이 그 자유 선택에 장애물이 된다면, 그런 경우 의심할 여지 없이 결혼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들에게 분명히 지시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은 ‘명령’으로서, 아무도 이것을 권고라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내적인 정열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간음을 하는 행위를 제지할 뿐만 아니라, 또 완전히 자신을 더럽히는 그런 일을 방어하도록 한 것이다. 결혼의 치유책을 무시하면서 극기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자임에 틀림없다.

 

"혼인하는 것이 나으니라" ;  이 말은 참된 비교가 아니다. 왜냐하면 정욕이 불갈이 타는 것보다는 합법적으로 결혼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에게 더 명예 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확한비교는못될지라도 사도 바 울은일반적인 화법(話法)을사용하고 있다. 즉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천국을 기업으로 받기 위하여서 육체의 향락 속에 빠져 비참하계 멸망하기보다는, 이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더 낫다.'  나는 제롬(Jerome)이 이 귀절로 부터 유치한 오류를 범하였기 때문에 이 말을 한 것이다. 즉 결혼은 정욕이 불타는 것보다 덜 악하기 때문에 좋은 것이다. 만일 이것이 웃을 일이라면, 그가 대단히 좋은 농담을 하지 않았을 것이 라고 말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이기 때문에 그것은 비열한 조롱인 것이며, 건전한 판단력을 가진 사람에게서 기대할 것이 못 된다. 그러므로 결혼의 치유책은 좋은것이며, 또 복리라고 이해되야야 한다. 

 

왜냐하면 정욕이 불타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증오스럽고 가증한 것이기 떼문이다. 그러나 '정욕이 불갈이 탄다’는 말은 분명히 그 뜻이 정의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많은 사람들이 육체의 욕망으로 고민하고 있는데, 그둘은 곧 결혼의 치유책의 필요성을 갖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라고 바울의 은유를 유지하기 위하여서 불태우는 것과, 열을 느끼는 것은·각각 다론일이다: 따라서, 여기서 바울이 블타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단순히 가벼운 감각이 아니라 그것을 견덜 수 없을 만큼, 강렬하계 타오르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만일 그들이 욕망에 빠쳐들지 않으면 모든 질책에서 방면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무익하게 자신을 속이는 사람들이 약간 있으므로 우리는 세 가지 유혹의 정도에 대하여 살퍼 보아야 한다.

 

(1) 때때로 욕망이 너무 강하가 때문에 의지가 굴복당하고 만다. 왜냐하면 가장 악한 정욕의 블은 마음이 열정으로 볼탈 때이다.  (2) 때때로 우리가 ’육체의 던지는 창으로 말미암아 괴롭힘을 받을 때 우리는 맹렬하계 싸워, 참사랑의 순결성을 잃지 않도록 애쓰고 있으며, 오히려 모든 부당하고 더러운 욕망울 증오한다.  그러므로 모든사람들 특별히 젊은 사람들이 경고를 받아야 한다.  그들이 성적인 욕정으로 유혹을 받을 때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그 유혹을 물리치고, 그런 정숙하지 못한 생각을 하게 될 기회를 갖지않도록 조심하고 또 그들이 그 유혹을 담대하게 뿌리칠 수 있는 용기를 주시도록 하나님께 기도하고 이 정욕의 불길을 제거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만일 그들이 이 투쟁에서 승리한다면, 그들이 하나님께 감사드리도록 하여야 한다. 

 

당신은 어느 정도까지 육신이 고통의 요인이 되고 있지 않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읍니까? 그러나 만일 그육신의 정욕의 공격이 우리를 이기기 전에 그 공격을 우리가 미리 꺾을 수만 있다면, 우리는 잘 되어갈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정욕의 공격올 받을지라도, 그때 우리는 그 정욕에 블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정욕을 느끼는 데 찰못이 없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참회하는 마음으로 우리의 안약함을 인정할 때, 우리는 또한 그 시간을 이길 수 있는 졸은 용기를 갖게 되는 것이다. 간단하계 요약하여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그 투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고, 사단의 창이 우리 속에 침투하지 못하게 되며. 오히려 용감하게 그 공격을 격퇴하게 된다.  그려므로 우리는 그 투쟁에서  지치는 일이 없도록 하자.

 

(3)이 두 가지 사이에 유혹의 매개가 있다. 즉 어떤 사람이 정욕의 침입을 아주 잘 막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을 때에도, 맹목적인 정욕의 불길이 타올라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는 양심으로 설 수가 없게 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마음대로 기도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양심의 평화를 방해하는 그런 유혹은 결혼으로써만 끌 수 있는 불길이다.  이제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살펴 봄으로써, 인간이 그의 육신을  순결하께 지킬 수 있는가의 여부는 간단한 문제가 아나라는 것을 깨달았고 우리가 조금 뒤에 살펴보려는 것처럼, 마음의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알았다

 

"10. 혼인한자들에게 내가 명하노니…… " ; 바운은 이제 결혼의 다른 원리를 취급하고 있다. 즉 그것은 분리할 수 없는 결속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항 세계에서)'거의 매일 일어나고 있는 모든 이혼에 대하여 정죄하고 있으며, 유대인들에 관해서는 모세의 율법으로 정죄하고 있지 않다.  그는 말하기를, "남편은 아내를 내어 보내지 말며 , 아내도 남편으로부터 떠나지 않도록 하라. 왜! 그 이유는 그둘이 결코 분리될 수 없는 결속(individuo nexb~ti)으로 묶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간음의 경우를 대처하여 그가 예외를 두지 않은 것은 이상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가 어떤 방법으로든 그리스도의 교훈에 단단하게 묶인 것을 그가 의미한 것은 사실같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가 이점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은 것을 아주 확신한다.  왜냐하면, 그는 이런 문제들을 겸하여 언급하고 있는 것이며, 모든 문재 하나 하나를 일일이 다 열거하기보다는 주님께서 허락하신 일 혹은 금지하산 일을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가르쳐주기를 원하였기 때문이다.  교사들이 어떤 문제들을 간단히 처리하기를 원할 때, 그들은 일반적인 방법으로 가르 친다. 그리고 예외적인 문제는, 더 포괄적이면서도 정확한 토론을 거쳐  더 세밀하게 취급한다. 그러나, "명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주시다"고 삽입한 것은, 자신을 수정하고, 그가 여기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주님의 법에서 이끌어온 것이라는 사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가르치고 있는 것은  또한 성령의 계시로 받은 것임은 의심할 여지가 없으며, 또한 그것이  하나님의 법에서 유래 되었다는 사실로 비추어 볼때, 하나님이 바로 이것의 근원이 되신다는 것" 을 그.는 설명하고 있다 •..

 

만일 당신이 특별한 귀절을 원한다면, 당신은 그것을 그렇게 많은 다른 말 속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처음에 남편과 아내의 결합은 매우 거룩하며, 그 거룩성 때문에 인간은 그의 아바지와 어머니를 떠나야 한다(창 2 : 24)고 선포 하였으므로, 우리는 이 사실로 부터 부부간의 결합이 장난거리(inviolaqi/i$)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쉽게 추리하여 낼 수 있는 것이다.  자식은 부모와 밀접한 관계에 있으며, 그 결속에서 결코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결혼의 결속은 지식의 결속보다 더 긴밀한 것이므로 다른 어떤 것이 그 결속을 제거할 수 있는 정당성을 결코 가질 수 없는 것이다. 

 

"11. 만일 갈릴지라도·…" ;  ••• 이것은 음행으로 인하여 내쫓김을 받은 그런 사람들을 말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이것은 당시에 그것이 초래 하였던 형벌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로마법에서서는 그것이 으뜸가는 범죄였으며, 일반적인 ‘국제법'(ius gent ium)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남편이 아내의 생활 태도가 자기에게 맞지 않다거나, 혹은 아내의 용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거나, 어떤 범죄 사실이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서 아내와 이혼하는 일이 있으며, 또 때로는 부인들이 그 남편이 너무 잔인하고 폭력적이며, 아내를 소홀히 한다는 이유를 들어 이혼을 하는 경우가 있으므로, 사도 바울은  결혼은 이혼이나 혹은 다른 어떤 이유로도 결코 깨어질 수 없다고 강조하고 있다.

 

왜냐하면 결혼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룩하게 이루어진 계약이므로 그것은 인간의 마음대로 지속하거나  혹은 인간의 뜻대로 깨뜨려지는 그런 무력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것을 요약한다면, 다른 계약들은 단순히 인간의 동의에 의하여 이루루어진 것이므로, 그 당사자들의 합의만 이루어지면 파기될 수도 있다. 그러나 만일 결혼으로 맺어진 사람들이라면 그들이 결혼을 후회할지라도 그들은 그 '유대를 끊는다'는 일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처럼)은 이미 있을 수 없는 일이며, 새로운 그들 자신의 조정 방법을 모색하여야 하는 것이다. 만일 자연권(自然權)이 파훼(破穀)될 수 없다면, 우리가 이미 말한대로, 이것은 더구나 중요한 현세의 자연적 결속에 대하여 보다 상위(J:位)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남편과 헤어진 아내에게 결혼하지 말고 그대로.있으라는 명령에 있어서 그는 별거가 용납한다는 것을 암시 하는 것 도 아니고 또 아내가 남편을 떠나 살아도 된다고 허락 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만일 여자가 그 남편 집에서 쫓겨났거나, 버림을 받았다면, 그 여자는 그런 상황에서 그 남편의 지배력에서 해방 되었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남편이 그 결혼을 무효시킬 야무런 권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부인들이 자기 마음대로 남편과 갈라서도 된다거나, 혹은 마치 그들이 과부이기라도 한 것처럼, 남편과의 공동생활에서 벗어나도 좋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는 그 혼인이 비록 남편과 다시 결합하지 못할지라도 그 결속은 그대로 남아 있으므로 그들이 다른 남편에게로 갈 수가 없다고 선포한 것이다.

 

 그러나 만일 그 아내가 음란하거나 어떤 방법으로든 자신을 금기할 수 없을 때는 어떻게 할 것인가? 그 여자가 계속 정욕에 불타고 있는데 결혼의 치유책을 그에게 거절하는 것은 가혹한 일이 아닌가?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우리가 육신의 연약함으로 고통을 받을 때에는 그 치유책을 찾아야 한다.  만일 우리가 원하는 대로 사태가 잘 진전되어 가지 않을지라도 우리를 제어 하시고 주장하실 분은 하나님으로서 성령으로 그렇게 하신다.  만일 아내가 오랫동안 병석에 누위있을지라도, 그것이 남편으로 하여금 다른 아내를 구할 명분은 못된다. 마찬가지로 만일 결혼 후에 남편이 어떤 병으로 고통을 받기 시작한다면,  이런 근거로 아내는 재빠른 어떤 다른 상황 변화를 일으킬 수 없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의 자제하지 못함을 인하여 그 치유책으로써 합법적인 결혼을 제정하여 주셨으므로, 우리는 그것을 잘 이용하여, 우리가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도록 하며 우리의 잘못에 대한 고통을 감수하도록 하자 결혼을 하였으면, 만일 사태가 우리의 기대 이하로 악화되어 갈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신다는 소망을 갖도록 하자. 

 

"12. 그 남은 사람들에게 내가 말하노니.~~~~~" ;  바울이 말하는 ‘남은 사람들’이란 일반적인 원리에서 벗어난 예외적인 사람들을 말한다. 결혼한 두 사람이 서로 종교가 같지 않을 때에, 그 모순되는 결혼은 각자가 다른 생각을 하기 마련이다. 그는 이 문제를 두 가자 부분으로 취급하고 있다·

 

첫째는 믿는 사람이 불신자인 상대방에게서 헤어져서는 안되며, 그 상대방이 버리기 전에는 결코 이혼을 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둘째로, 만일 부부 중 불신자가 종교적인 문제로 상대방을 버린다면 그때는 그 버림으로 인하여 결혼의 결속에서 자유로와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이미 앞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으로 그들에게 제시한 것 때문에 그들이 어느 정도 고통을 받는 것처럼 보일 때, 바울이 그 자신을 이 법칙들의 근원으로 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아무것도 하시지 않은 그런 법칙들이 순전히 바울 자신에게서 나온 것임을 뜻하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율법이나 선지서의 어느 부분에도 이 문제에 대한 분명하고 확실한 설명이 없으므로, 그는 이런 방법으로 그가 말하는 것에 개인적인 책임을 지면서 불경건한 자들이 그를 버리는 것을 막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인간 두뇌의 산물인 것처럼 모든 것이 경솔하게 처리되자 않도록 하기 위하여 그는 후에 그의 설명이 단순히 그의 주관적인 공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것이다. 그러나 앞에서 쓴 것과 일치하지 않는 것은 하나도 없다.  왜냐하면 결혼 서약의 존엄성은 하나님께 의지 하는 것이므로, 하나님을 증오하고 믿지 않는 남편이 믿는 아내를 쫓아냈다면, 그 아내가 불신자인 남편과 함께 있어야 할 필요가 있겠는가? 

 

"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록하게 되고" ;  바울은 믿는 사람들은 불안하게 하는 어려운 문제에 부딪치게 되었다. 결혼의 친밀성은 유일한 것이다.  왜냐하면 아내는 남편의 반신(半身)이며, 두 사람이 한 몸이 되어, 남편은 아내의 머리가 되고, 아내는 여러가지로 남편의 동반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믿는 남편이 믿지 아니하는 아내와 사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보인다. 그러나 반대로 그런 친밀한 관계를 통해서 더럽혀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마치 아내가 남편을 더럽히기나 하는것 같은 모독에 대한 두려움은 없으며, 오히려 그런 결혼이 더 거룩하고 순결하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가 결혼의 계약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그런 결혼을 한 사람들에 대한 문제를 논하고 있는 것이다.

 

남자가 안 믿는여자와 결혼을 해야하는가의 문제가 있는 곳에, 혹은 믿는 여자가 안 믿는 남자와 결혼을 해야 하느냐의 문제가 대두 되었을 때에 이 충고가 적절하게 해당되는 것이다.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갈이 하지 말라.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고후6:14, 15). 그러나 이미 그렇게 결혼한 사람은 선택의 자유가 없다. 그런 이유 때문에, 이미 앞에서 주어진 충고는 다르다. 사람들이 여기서 ‘성결'을 여러가지 방법으로 해석하는데, 나는 그것을 다만 결혼에 적용시킨다.  나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모든 외형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서 믿는 아내가 안 믿는 남편과 결합 함으로 부정하게 되는 것  같고, 그래서 그런 결합이 불법적인 것 같아 보인다. 그러나 상황은 아주 다르게 나타난다. 그 결혼에 있어서 부부 중 믿지 않는 사람의 불 경건성으로 인하여 두 사람이 부정하게 되는 것보다 믿는 사람의 경건성이 더 영향력을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따라서 믿는 사람은 깨끗한 양심으로 안 믿는 사람과 살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성적인 관계와, 매일의 일상적인 관계에 있어서, 안 믿는사람은 성화되며, 따라서 부부중 믿지 않는 사람은 믿는 상대방을 그의 불결로써 더럽히지 않기 때문이다. 한편 이 성화는 안 믿는 사람에게만 일방적으로 유익한 것은 아니다. 그 유일한 가치는 믿는 사람이 믿지 않는 상대방과의 친교로 인하여 더럽혀지지 않고, 또 그 결혼 자체도 세속화되지 않는다. 그러나 여기서 한 가지 문제가 대두 된다. 만일 그리스도인 남편이나 아내의 믿음이 결혼을 성화시킨다고 한다면,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든 결혼은 부정한 것이며, 또 간음하는 것과 같은 입장이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여기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즉 불신자들의 결혼은 그들이 아무리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하나님의 피조물일지라도 그들의 불길로 인하여 이미 더럽혀졌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순결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을 순결의 근원으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그들이 또한 결혼을 부정하게 하고 있으며, 그런 이유 때문에 그들은 조금도 순결하게 성화될 수 없고, 그들의 법죄한 양심 때문에 그들은 결혼을 욕되게 하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그들의 결혼이 부정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 하신 것이므로 결혼 그 자체는 순결한 것인 까닭에, 여기에서 결혼이 그들에게 간음과  마찬가지라고 추리하는 것은 경박한 일일 것이다. 그것은 사회에서 지켜야 할 자세에 대한 임무를 이행하는 것이며, 또 방종스란 욕망을 제지하는 것이다.  그리고 또 이런 목적들 때문에 사회 예법의 다른 부분들처럼 하나님께서 허 락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물의 본질과 그 남용 사이의 구별은 언재나 이루어져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너희 자녀도 깨끗치 롯하니라~~~~~" ;  이것은 결과에 기초를 둔 논증이다. 즉 ‘만일 너희 결혼이 깨끗치 못하면 그때는 그 결혼에서,' 출 생하는 자녀들도 깨끗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거룩하다. 그러므로 너희 1결혼 역시 거룩하다; 그러므로 부모 중 어느 한 사람의 불신앙(不롬仰) 이 그 자녀의 거룩한길f~~을 방해하지 못하는 것과-마찬가지로 그것이 결혼 그 자체를 순결한 것으로 만들지 뭇한다’라는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니아 귀 철을 땅 위 의 법 (de sanctitate -civili), 즉 자녀 들은 합법 적 이 라고 생 각 되고 있다는 관접으로부터 적철한 현상의 용어로설명하고 있다 .. 그러나 정 확하게 갈은 일이 불신자의 지녀들에게 대해서도,,말하여질 수 있다. 크터 므로 그 설명은 성립될 수 없다. 더구나, 바울이 여기서 고뇌하는 양십의 고통을 덜기 원하였댜는것은 분명하며, 따라서 내가 이미 설명한 대로,아 무도 그가 부정(不淨)을 갑축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e

 

그러므 론이저절은 주목할 만한 귀철이며, 또 가장 십오한 신학이다.' 그것은 믿 는 자의 자녀들이 어떤 륙별한 특권에 의하여 다론 자둘로부터 구별되었다 는 것과 따라서 그둘이 교회에서 거륙하게 인정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 고있다• 그러나 이 문장이 바울 사도의 가르침, 곧 에베소서 2장3철의 우리가 다t 질상 전노의 자\녀이었더니”와-다윗의 부르짖음인 "내가 ,최악 중에 출생하 였음이여 모찬이 최 중에 나를 잉태하였나이다"(시 51 : 5)라는 성구와 어떻 게 조화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여기에 대해서는 아담의 후손 가운데 최 와 형털을 밭온 일반저인 번식이 있다고 나는 대답한다 •. 그러므로, 인간온 그들이 믿는 자의 자녀이든 블신자의 자녀이돈 간에 모두가 다이 저주 속 에,포합된다. 왜냐하면 불신자 일지라도 육신을 따라 자녀를 낳으며 그를은 십령으로 거듭나게 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두가 다 똑 갈온 본태의 상태 에 있으므로, 그들온 최에 종속되었을 분 아니라, 또한 영원한 죽음을 면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도 바울이 믿는자들의 특별한 권리에 대하여 묘사하고 있는 것은 그 근원을 언약의 축복에 두고 있는데, 그리스 도의 중재로 말미암아 본래의 처주가 소멸되고 또한 '그의 은혜로 말미압아 본래 깨끗치 못한 자들이 하나님께 드림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 마서 11장 16철에서 모든 아브라함의 후손들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 신 생명의 언약 속에 그들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에 거룩하다고 주장하고 있 다. 죽 "뿌리가 거룩한죽 가지도 거룩하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 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의 후손들을 모두 하나님의 자녀들이라고 부르신 다. 이제 막혔던 담이 무너지고, 아브라함의 후손에게 그 기원을 두었던 동 일한 구원의 언약이 우리에게까지 베풀어전 것이다. 믿는도사람둘의 자녀둘 이 하나님을 위하여 분리되기 위해서, 일반적인 인류의 상태에서 면제되었 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왜`우리는 그 표식(언약)을 숨겨두어야 하겠는 가? 만일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으로 그둘을 그의 교회로 인도하셨다면, 왜 우리는 그 표식을 그들에게 부인하여야 하겠는가? 그러나 업밀히 믿는 자 의 자녀들이 어떻게 거룩하며, 또 그런데도 어떻게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타락을 하는지, 여러분온 로마서 10장과 11장에서 그것을 분명히-발견하게 될 것이며·, 나는이 문제를 그곳에서 취급하겠다. IIII'1 I ,I

 

"15. 혹 믿지 아니하는 자가 갈리거든" ; 이제 우리논 믿지 않는 자와 결 혼한 문제를 취급하는 바울의 두번째 부분을 살펴보게 된다. 이 귀철에서 바 울은, 믿지 않는 부인과 이미 결혼한 남편이 그 아내에게서 배척을 받았을 때,“ 그 믿는 남편은 자유이며, 마찬가지로 부인 편에 아무런 찰못이 없는데 도 믿지 않는 남편에게 거철을 받았을 경우, 믿는 아내 또한 자유타고 밝히 고 있다. 왜냐하면 이런 상황 속에서 불신자는 그의 아내나 혹은 남편에게 불법을 행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불법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는 특 별한 이유가 있는데, 왜냐하면 기본적이고 주요한 유대(vinculum)가 단순 히 풀려버린 것만이 아니라, 난폭하게 찢겨져버린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가 가톨릭 교도들과 이와 거의 비슷한 관계에 있다고 일부 사람들이 생 각할지라도 그러나 우리는 이 두 상황 사이에 어떤 차이접이 있는가에 신중 하여야 하며 따라서 어떤 경솔한 행동을 취해서는 안 된다•

 

"화평 중에서……" ;주석가들은 또한 여기서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왜냐하면 어떤 사람들온 이 귀철을 이렇게 해석한다. 즉 ‘우리는 화평 중에 부름을 받 았으므로, 분쟁하게 되는 모든 일을피하도록 하자.' 그러나 나는 이것을 더 간단하게 ‘가능한 한 우리 는 화평 을 추구하도록 하자. 왜 냐하면 우리 가 이 일을 위하여 부르십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일방적인 방 법으로 불신자와 헤어지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불신자인 상대방이 만일 주 도권을 취고 먼저 단철을할때는그렇게 할 수 있다• 우리가 각자의 복리를 위해서, 평화로운 관계를 증진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화평 중에 부르신 것이다’라고 나는 해석한다. 그러므로 이것은 그가 취급한 첫째 부 분의 문제-믿는 자들은 만일. 불신자인 상대방이 결합되어 있기를 원한다면 그대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이혼을 원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고백 과 위배되기 때문이다-에 속한다. -

 

"16. 아내된 자여 네가 남편을 구원할는지 어찌 알 수 있으며~~~~"  이 문 장을 둘째 부분으로 확증하는 사람들은 그것 을 이 렇게 섣명 한다. 즉 ‘소망에 대한불확실성이 당신을 눌러두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당신이 그 이외의 방법을 알기 때문아다. 그러나 내게는 받은 은혜가 이 져려의 말 속에 담겨져 있다고 생각된다. 그 이유는 만일 아내가 남편을 자기의 믿음으로 인도할 수 있다면, 그것온 아주 크고 놀라운 축복이기 .때문이다. 참으로 불신자들은 그렇게 철망적인 곤경 에 있지 않으므로, 그들은 믿도록 갑동을 받을 수가 없다. 그들은 분명 히 죽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 죽은 자를 살리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 므로 믿는 부인이 어떤 유력한 소망을 가졌을 때, 그러나 그녀가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말할 수는 없을 때, 그 아내는 생활을 통한 선한 행실로써 남편 을 그길로 인도하며, 남편 앞에서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여야 한다. 남편의 구원에 대한 의십이 남아있는 한, 우리논 그 소망에 대한 모든 최선율 기울 여야 한다.

 

그러나 ‘남편은·그의 아내로 말미암아 구원받을 수 있다'논 그의 전술은 실제로 엄밀하게 정확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오로지 하나님께서 하실수 있는 것만을 인간이 할 수 있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에 대 하여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선한 목적으로 그의 도구로 사용하실 때에 하나님은 어느 정도까지 그의 능력을 인간들에게 나 누어 주시며, 또는 최소한그가 말씀하신 것, 그가행하시는 것이 그들을통 하여 성취되는 그런 방법으로 그들의 봉사와 연결되게 하신다• 그리고 하나 님께서는 마땅히 홀로 하나님만이 받으처야 할 영광을사람들에게 그렇게 둘 리시기도 한다. 그러나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가없 고, 오로지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이 인도하십을 받을 때라야만 비로소 가능하다는 사실을 기여하도록 하자.

 

"17. 오직 주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대로 하나님이 각 사람을 부르 신 그대로 행하라" ;  이것은 원문을 그대로 마른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격(각 사람)을 사용합으로써 그:·의미가 더 부드럽게되게 하였다. 그뜻은 "유일한 해결책은 각사람이 자신에게 주어전 은혜를따라서 살아가는 것이며, 또자 신의 소명을 충실하게 갑당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이것에 대하 여 고통을 갑수하고, 이웃을 봉사하기에 모든 자신의 힘을 기울여야 하며, 특별히 자신이 받은 소명이 특별한 칙능에 따라그렇게 해야할 경우에는 머 욱 그렇게 하여야 한다.n 바울은 두 가지를의미하고 있다. 즉 ‘소명'과 ‘온 혜의 방편'이며, 또그들이 이 일을 생각하도록 하기 위해 특별한 관십을 우 리가 기울여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형제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은혜의 종들로 지명받을 가치 가 우리에게 있음을 인정하신 그 봉사에 격려를 받은 우리에겐 큰 자극이 되 어야 하기 때문이다 •..

 

또 한편 우리의 소명은, 십지어 어떤 사람이 역경에 치 하여 있을지라도, 하나님의 멍에 아태 우리는 있어야 한다. 도모든 교회에서 이와 같이 명하노라. 나는 바울이 다른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하기보다는 바울 자신이 고린도 교회 교인들에게 더 권위를 세운 것 이라고 주장하는 일부 사람들의 오해를 해명하기 위하여 이것을 추가하였다 고 생각한다. 그러나그는 또한다른 목적도 가질 수 있었으나, 이를테면고 린도 교회 교인들이 이미 모든 교회 안에 유포되어 있는 그것을 이해하였을 때에 이 교훈은 더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모든 믿는 자들과 함께 다 들어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더 쉽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그것은고린도교회 교인들에게 있 어서 다른 어떤 것보다도 더 곽 조인 고삐로 받아들이기가 고롱스러웠을 것 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