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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고린도전서

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고전7:24)

1. 성경 (고전 7:18~24)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무할례자가 되지 말며 무할례자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할례를 받지 말라 (18)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19)각 사람은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20)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 그러나 네가 자유롭게 될 수 있거든 그것을 이용하라 (21)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주께 속한 자유인이요 또 그와 같이 자유인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은 자는 그리스도의 종이니라 (22)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 말라 (23)형제들아 너희는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24)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8. 할례자로서 부르심을 받은 자가 있느냐……" ; 그가 ‘소명'에 대하여 언급한 이후, 바울은 그가 가끔 그렇게 하는 것처럼, 특수 상황으로부터의 짧은 주재를 떠난 말에서, ‘소명'에 대한 일반적인 권고를 하고 있다. 동시에 그는 아주 다른 실례들을 들어서, 걸혼에 대하여 그가 말하였던 것을 확증하고 있다. 그 내용은 이렇다. 즉,  일단 당신이 하나님의 뜻을 따라 당신의 소명을 받았으면, 외적인 환경이 어렵다고 하여 그 상황에서 경솔히 물러나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할례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그것이 많은 논쟁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당신이 이방인이거나 유대인이거나 하나님께는 그것이 아무 상관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각 사람이 자기 자신의 운명에 만족하여야 한다고 권고하고 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제정하시고 다스리시는 합법적인 생활 방식만을 바울이 취급하고 있다는 사살을 항상 기억하여야 한다. 
 
"19.할례받는 것도 아무것도 아니요" ;  이 비교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주제에 적합한 것이라는 사실을 떠나서라도, 바울은 겸하여 유대인들의 그 할례로 인하여 갖는 면밀성(superstitionem)과 오만을 비판하기 위한 목적이 있는 것같이 보인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은 자기들이 할례를 받았다는 데 대하여 큰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할례를 받지 않은 것은 그들이 비천한 신분의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하면서, 할례를 받지 않은 사실에 대하여 불행을 느끼는 것은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두 상황을 다 동일한 것으로 보고, 그 중 하나를 멸시하는 것은 다른 하나를 갈망하는 블합리한 일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가 말하는 것은 할례가 이미 사라졌다는 그 시간에 대하여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한다.
 
 말하자면 만일 하나님의 언약과 계명이 그의 마음에 있었다면, 그는 틀림없이 할례에 더 큰 가치성을 부여하였을 것이다. 참으로 로마서 2장 27~29절 말씀에서 그는 의문(儀文)에 따르는 할례를 경시하고 있으며, 또 그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은 할례와 무할례를 단순히 대조하고 있을 뿐이며, 두 가지를 동일한 수준의 것으로 보고, 그것은 별로 관심도 없고 중요하지도 않은 것으로 그가 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할례의 철폐는 과거에 그것이 가져다 주었던 신비'(mj,s'terium)가 이제는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참으로 그렇다. 그보다 더한 것은 할례가 이제는 상징 이외의 아무 의미도 없으며, 어떤 유용성이 없음을 뜻 하고 있다.  이런 원리에서 볼 때 세례는, 우리의 선배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감사된 바 되고 있는때에,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할례를 받으면 충분하도록 하기 위하여 베풀어지는 법적안 상징인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  이것은 교회가 율법 의식의 하나로 굳게 묶여진 한 계명 중의 하나이므로, 우리는 할례가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철폐되었으며, 무지하고 연약한 자들이 할례를 계속하고 있을지라도, 그것은 그들에게  아무 유익도 가져다 주지 못하고 있음이 당연하다고 본다. 바울은 여기서 그것을 무의미한 것으로 말하고 있다.  그것은 마치 이렇게 말 하는 것과 같다. '이런 것들은 외형적인 일들이므로, 이런 일에 시간을 허비하지말라, 오히려 경건에 힘을 쓰고, 또 하나님께서 요구하시고, 그의 눈에 합당하게 보이는 일들에만 주의를 기울여라.  그러나 카톨릭 교도들이 이 귀절을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교리(以信稱義)를 무너뜨리는 근거로 삼는 것은 참 유치한 일이다. 왜냐하면 바울이 여기서 의롭게 되는 근거를 말하고 있거나, 혹은 어떻게 하면 우리가 칭의(稱義)를 받을 수 있는가의 방법을 논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한 그의 모든 관심은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수고를 정당한 방향으로 향하여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쓸데없는 일에 정력을 쏟지 말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봉사에만 전념하여야 한다”고 말하는 것과 갈다. 
 
"20.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 부르심 그대로 지내라." ; 이것은 다른 일들 곧 각 사람은 그의 소명에 만족하고, 그것을 계속하며, 다른 일을 꾀 하려는 변화에 마음을 쓰지 말라는 데서 이끌어 온 원리이다.  성경에서  ‘소명' 은 삶의 합법적인 방법이다. 왜냐하면 우리를 실제로 부르신 하나님과 관련된 일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귀절을 분명히 세상적이고 죄악스런 삶의 방법을 지지하려는 귀절로 오해하는 어떤 사람들을 제지하기 위하여 지적된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서 어떤 사람은 바울이 사람들에게 무엇을 부과하기를 원하였던 것이 아니라는 질문을 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한 것이, 각 사람은 그의 소명에 묶여 있어야 하며, 그것을 포기하여서는 안된다고 암시 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제단사가 다른 양복점으로 옮길 수 없다거나, 또 상인(商人)이 농업으로 직입을 바꿀 수 없다면,  그것은 너무 동떨어진 질문이 될 것이다. 나는 여기에 대해 그것은 사도 바울의 의도가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왜냐하면 그는 다만 어떤 정당한 이유없이 그들의 상태를 바꾸려고 하는 경솔한 사람들을 고쳐주려고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아마 잘못된 믿음 때문이거나, 혹은 다른 어떤 좋지 않은 영향을 받고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귀절에서 바울은 이 규율을 또한 모든 사람들에게 제시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 자신의 소명에 더 적절한 것을 마음에 품고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각 사람들이 한번 그가 어떤 일을 맡게 되면, 그 삶의 방법에 절대로 남아 있어야 한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한편, 현재 그들 자신에게, 계속 만족하고 있는 각 사람을 방해하는 경솔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며, 또 그의 충고는, '구두장이는 일생동안 그 일에.전념하라'는 옛 격언과 같은 것이다.
 
"21.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 우리는 여기서 바울이 그들의 마음을 안심시키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종들을 격려하고, 자신의 노예 신분이 하나님을 섬기는 데 방해가 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이 마음을 상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므로 그는 ‘염려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것을 다른 말로 바꾸면  "마치 너희들의 노예 신분이 그리스도인 되기에 적합하지 못한 것처럼, 어떻게 하여야 이 노예의 멍에를 벗어버릴까 하고-노심초사하지 말고, 너희 마음을 평안히 갖도록 하라”고 말하는 것과 갈다. 여기서부터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따라 사회에는 신분과 계급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그 신분과 계급을 무시하지 말라고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자유 할 수 있거든… .." ; 내 생각에는 ‘있거든’이라는 단어가 여기서 분명히 더 강조된 것 갈다.  즉  "종으로 있는 것 대신, 만일 네가 자유 할 수 있거든'  그것이 너희들에게 더 적절할 것이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바울이 종들에 대하여 계속 말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이제는 자유인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후자의 경우라면 여기서는 '되다' (to be)라는 동사가 단순히 ‘되다' (게네 스다이 ; become)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느 뜻이라도 다 옳으면, 둘 다 마찬가지이다. 바울은 자유가 좋을 뿐 아니라 또한 그것이 노예보다 더 좋은 기회를 재공할 것이라는 사실을 나타내려 하고 있는 것이다. 만일 그가 노예들에게 말을 하고 있다면, 그의 뜻은 이렇게 될 것이다. "너희들이 염려로부터 해방이 되었다고 말할 때, ‘나는 만일 그것이 너희들에게 온다면, 나는 너희들이 자유를 즐기는 것을 막지 않겠다. 만일 그가 자유자들에게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양보적인 방법으로 이런 말이 될 것이다. "종들에 대한 나의 충고는, 비록 자유가 더 좋고 더 바람직한 것일지라도 좋은 것으로써 사람이 그들 사이에서 선택을 하여야 할 것이다. 
 
"22.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자는 종이라도 .. …·" ; 종일 때 주 안에서 부르심을 받는 것은 노예 계급에서 선택을 받은 것이며, 또한 그리스도의 은혜에 참여자가 되는 것이다. 이제 이 문장은 종들을 격려하고, 동시에 자유자로 태어난 자들의 교만을 꺾는 것이다. 종들은 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무가치하고 경멸 받아 마땅한 존재들로 보여지기 때문에 그들의 신분에 대하여 굴욕을 느끼고 있으므로, 그들의 멍에의 비통함이 어떤 위로로 말미암아 경감되는 것이 중요하다. 한편 자유인은 그들의 명예로운 신분 때문에 자신들을 너무 과대평가하거나, 교만에 빠지지 않게 하기 위하여 자신을 항상 자제할 팔요가 있다. 바울은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나타내고 있다. 왜냐하면 영적인 자유는 육적인 자유보다 더 귀한 것 이므로, 만일 종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진 말로 다할 수 없는 은사를 생각하여 볼 수 있다면, 그들의 신분의 비통함을 완화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또한 자유인들은 우쭐대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그들이 가장 좋은 일에 있어서 노예들과 동일한 신분에 있기 때문이다. 참으로 우리는 여기서 자유인이 종들보다 낮아졌다거나, 혹은 사회적인 제도(Politicum ordin em)가 뒤엎어져도 좋다는 결론으로 비약 하여서는 안된다. 사도 바울은 이 두 계급이 모두 스스로의 신분을 망각하여서는 안되며, 또, 종들을 멸시하여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깨우치고 있는 것이다. 어떤 용기를 종들에게 불어넣어 주어서, 그들이 절망하지 않도록 해 주어야 한다. 육적으로 볼리한 점을 영적으로 보상 받을 수 있다는 바울 사도의 가르침에 대하여 이런 두 가지 일들은 사회 질서를 더 확고히 하여준다.
 
"23.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 우리는 이 말씀을 6장 마지막 절에서 다른 목적으로 기록되기는 하였지만 이미 살펴보았다.  그곳에서 ‘값이라는 단어를 이미 설명하였다. 이 귀절에서는 바울 사도가 종들이 그들의 상태에 대하여 걱정하는 문제를 다루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을 상전의 불경건하고 악한 욕망을 충족시켜 주기에 급급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나타내려고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셨으므로, 우리는 그에게 헌신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을 기쁘게 하려고 우리를 더럽히지 말자.  우리가 그들이 요구하는 악행을 할 때에 우리는 바로 자신을 더럽히고 있는 것이다.  경고는 종들이 위협과 채찍질, 심지어는 죽음의 공포 앞에서, 어떤 예외적인 선택도 없이 주민들의 모든 요구에 복종하여야 했던 그 당시 상황에 참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따라서 그때는 종들이 매춘부를 주선하는 일이나 그 외의 다론 치욕스런 일이라도 주인의 명령이기만 하면 정직한 일을 열심히 하는 것처럼 그렇게 해야 하는 것이 그들의 의무였다.
 
그러므로 바울은 치욕스럽고 사악한 일은 순종하지 말고 포기하도록 하는 예외를 만들 정당성을 발견한 것이다. 나는 모든 사람들이 이 점에 대하여 철저하고 완전한 결의를 마음 속에 굳히기를 원한다. 그렇게 되면, 사람들이 자신을 상품처럼 사람들 앞에 파는 그런 경향은 없어질 것이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우리를 값 주고 사신 하나님께 속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도록하자. 
 
"24. 형제들아 각각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 ;  나는 이미 이 귀절에서 인간은 영원히 자신에게 적용되는 어떤 원리에 묶여 있지 않다는 것, 그래서 그들이 결코 그들의 상태에서 어떤 변화도 시도할 수 없는 것이.아니라는 것을 밝혔으며, 따라서 인간은 어느 때에라도 변화를 할 수 있는 좋은 근거가 있다고 말하였다. 바울은 다만 많은 사람들이 그들의 끊임없는 경솔로 인하여 혼란을 겪고, 방황하게 되는 이성으로 자제되지 않은 그런 충동을 억제하기를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런 점에서 사람들의 다양한 생활 방법이 종교 생활의 조화를 깨뜨리지 않는 것이므로 그것이 하나님께는 아무 상관없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