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요일 1:1 ~ 10)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1)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언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이시니라 (2)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 (3) 우리가 이것을 씀은 우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 (4)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5)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6)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8)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9)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주석)
"1. 태초부터 있는" ; 이 귀절은 문장 순서를 무시한 채 혼동되어 있다. 이 문장을 순서대로 바르게 기록하려면 "우리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을 여러분에게 선포하는데, 이 말씀은 참으로 여러가지 방법으로 이미 중명이 되었으며, 이 생명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나타내신바 되었다"라고 표현하든지, 혹은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대하여 우리가 여러분에게 선언하였으며, 공개적으로 우리에게 그 사실이 나타났는데, 이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내신 바 되었다"라고 되어야 할할 것이다. 그러나 , '태초부터 있는'이라는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분명히 나타내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태초에는 육체로 나타나지 않으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항상 생명이시며 영원한 말씀이었다. 그러다가 때가 차서 인간으로 성육신하신 것이다. 다시 "주목하고 손으로 만진 바라"라는 말씀의 뜻은 그리 스도의 인성을 나타내는 내용이다. 두가지 본질로 이루어졌을지라도 예수님의 위와 그리스도 되심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그에게 주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온 것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항상 동일하시며 눈에 보이지 않는 분 이었지만 인간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가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인간이 되신 것"이라고 일반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 사실은 잘못된 궤변가인 셀베투스를 논박하기에 충분한데, 이 사람은 신의 본질과 실체는 육체와 같으며, 생명의 수여자인 말씀이 육체로 나타났기 때문에 말씀이 육체로 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자신이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을 증명하시고 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항상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말씀으로 세상에 알리어졌다는 사실을 복음이 선포하고 있음을 기억하여야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여기서 세상의 태초에 대하여 말씀하신 것이 아니고 시간적으로 더 거슬러 올라가 그 이전을 말씀하고 계신다.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 여기서는 "생명의" 라는 유격이 '생명을 주는'이라는 형용사로 사용되고 있다. 요한복음 1장에서 그가 가르친 대로 "그 안에 생명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주제는 두 가지 점에서 하나님의 아들에게 접속한다.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피조물에게 생명을 주셨으며, 그리고 이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어 멸망받은 우리의 생명을 다시 회복시켜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은 두 가지로 설명될 수 있는데, 그리스도라고 할 수도 있고 또 복음의 가르침이라고도 할 수 있다. 어찌되었든 이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실체는 그리스도이시며, 다만 한 아버지와 함께 계신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에게 계시되었다는 것인데, 처음의 설명이 나에게는 더 간단하고 자연스럽게 보인다. 더구나 이 사실은 그의 복음으로부터 더욱 충분히 확증되므로 '하나님 안에 있는 지혜'를 '말씀'이라고 부르고 있다.
"우리가 들은 바요~~~~본 바요" ; 이것은 일반적으로 신빙성이 없이 떠도는 소문을 단순히 듣는다는 의미가 아니다.사도 필요한은-그가 자신의 선생님으 로부터 철저하게 배웠던 사실들을 그가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명확한 ,근거가 없는 것을 가르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래 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가르침을 최초로 받았던 제자들이 아니고는 당시 교회에서 적절한 교사가 될 수 없었으며, 사람들을 바르게 가르칠 수가없었다: 왜냐하면 주님의 권위가 절대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이 "우리가 보았고"라고 말할 때, 이것은 지나친 설명이 아니다. 그 뜻을 더 충분하게 증명하려는 표현이다. 단순하 본 것만으로 만족할 수가 없어서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 라고 덧붙이고 있는 것이다. 위의 말씀에서 사도 요한은 그 자신 여러 면으로 확신을 갖지 않은 사실에 대해선 결코 가르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적인 증거는 이 면에서 별로 사용되지 않고 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능력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지는 것으로, 충분히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복음1장에 기록한 말씀과 같은 내용 곧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라는 말씀을 여기서도 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외적인 '육체의 모습에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우리에게 보여주시지 않는다. 그러나 그의 신적인 능력에서 탁월한 증명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의 위엄이 살아있는 분명한 형상을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나고 있다. 이 말씀들은 복수로서 그 사건이 모든 사도들에게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는데, 나도 그렇게 생각하며 특 별히 이것은 중인들의 권위를 나타내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앞에서도 내가 말한 것처럼 셀베투스는 여기서 경박하고 잘못된 악을 범하고 있다. 그는 이 말씀들을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 눈으로 보이며 감각으로 느낄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질을 불손하게 파괴하거나 혹은 혼란시켜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는 어떤 허구를 날조하고, 그리스도의 인성을 신성시함으로써 그리스도 의 참 인성을 전적으로 배제하는 동시에,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그의 모친에게 잉태됨으로 하나님으로서의 그의 존재를 상실하였다는 이유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부인한다. 그의 이론을 따른다면 그리스도께서 인성과 신성으로 혼합이 되어버린 복합체로서 하나님도 인간도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우리에게 밝혀준 사실이 너무 뚜렷하므로, 우리는 이런 자들의 말을 하찮은 소리로 흘려버리자.
"2.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 여기 나타난 접속사가 잘 설명을 해 주고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 것처럼, 우리가 그 생명을 주시는 말씀을 증거한다"는 뜻과 같다. 그러나 그 뜻은 이중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할 수 있으니, 곧 생명이시며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나타내신 바 되었다는 것이요, 또 다른 일면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이 우 리에게 공개적으로 제시되었다는 것이다. 후자는 전자에 필연적으로 수반되어 나타난다. 그러나 그 말씀들의 의미에 관하여서는 두 가지가 각각 원인과 결과로서 서로 다르다. 그가 ."영원한 생명을 전하노니"라고 반복하여 말할 때, 나는 그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생명을 얻었음을 선언하는 결과를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의심하지 않는다. 이 사실로부터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하늘나라를 우리에게 나타내어 보이지 않고서는 그 복음을 전파하실 수 없다는 것과 그렇게 하심으로써 우리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하나님께서 주시는 생명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 이것은 사실이다. 태초부터 뿐만 아니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께서는 아버지와 함께 계셨다. 그는 항상 하나님이시며 생명의 근원이시다. 생명을 주시는 능력과 권능이 그의 영원한 지혜의 힘 안에 있다. 그러나 창세 전에는 이 능력을 나타내지 않으셨을 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나타내기 시작하셨을 때, 비로소 이제까지 감추어져 있던 이 능력이 모든 피조물에게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도 이미 부분적인 현현이 있었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여기서 의미하는 것은 그것이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으시고 인간의 사죄를 위한 모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시고 나타내신 생명을 말하는 것이다. 물론 율법 아래 있던 선조들이 우리와 동일한 생명에 관계되고 또 그 생명을 분양받았지만, 우리는 그들이 그 계시가 실제로 나타나기를 갈망하였을 뿐 실제로 목격하지 못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로부터 생명을 찾게 된 것은 필연적인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그들이 실제로 목격하지 못한 먼 훗날의 일이었으며,그들의 마음에 감추어진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 계시를 소망할 뿐이었으며, 훗날 때가 이르러서야 비로소 이 계시가 역사적 사건으로 나타난 것이다. 어느 면에서는 이 계시의 현현이 없이는 그들이 생명을 얻을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과 우리 사이에 이런 차이가 있는데, 말하자면 그들에게는 희미하게 상징으로 나타났던 그 계시를 우리는 직접 손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복음의 위엄을 약화시키는 잘못된 견해를 수정하려는 것이 그의 목적이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생명으로 우리 시야에 나타나신 것은 최근의 일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심이 지금 시작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설하는 이유이다. 왜냐하면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는 항상 아버지와 함께 계셨기 때문이다.
"3, 우리가 보고 그들은 바를~~~~~" ; 세번째로 사도 요한은 '보고 들은'이라는 말을 반복함으로써 그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인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할 점은 그리스도께서 복음의 선포자들을 택하실 때 모든 사건을 신실하고 정확하게 전파할 수 있는, 적절한 일군들을 선택하셨다는 사실이다. .사도 요한은 또한 그들의 동기에 대해서도 증언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가 말할 수 없는 축복을 받고 있는 공통적인 교제를 설명하면서 그들을 초청하는 유일한 이유에 대하여 기록하도록 감동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그가 얼마나 그들의 구원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셨는가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들을 믿도록 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믿는 사람들 자신이 누리고 있는 그 축복에 동참하도록 우리를 권고하는 그들의 복음 전파를 거절한다면 우리 자신은 아주 은혜를 모르는 무뢰한이 될 것이다.
그는 또한 복음의 열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는데 우리는 최고의 선이신 하나님과 그의 아들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 두번째 귀절을 덧붙이고 있는데 그것은 복음의 가르침이 귀중하고 참된것이라는 것과, 그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는 그들의 참 친구가 되어서 그들 모두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려는 목적 때문이다. 신앙이 없는 사람들도 상호 유대 관계를 갖는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밖에서의 일이며, 사실 그들은 점점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있는데, 이것은 세상에서 가장 큰 악이다. 이미 앞에서 말한대로 우리의 유일한 행복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참으로 하나님과 연합하는 일이다. 여기에 대해선 요한복음 17 장에 잘 나타나 있다.. 간단히 말해서 사도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사도들을 형제로 양자 삼아 주신 것처럼 그도 다른 제자들과 하나님 안에서 한 동일한 관계를 맺은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거룩하고 축복된 결합의 지체들이 된 것이다.
"4. 우리의 기쁨이~~~~~~" ; 사도 요한이 '충만한 기쁨'이라고 쓴 것은 우리가 복음으로부터 얻는 기쁨을 더 완전하고 정확하게 표현하려는 의도에서이다. 동시에 그는 성도들이 그들의 모든 열정을 이 복음으로 향하여야 한다는 사실을 아울러 나타내고 있다.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 느니라"(마 6 :21)는 말씀은 참으로 진리이다. 누구든지 하나님과 참 교제를 하는 사람은 충만한 은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세상의 다른 어떤 욕망에 사로잡히지 않는다. 그래서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잔의 소득이시니~~~~~ 내게 줄로 재어 준 구역은 아름다운 곳에 있음이여, 나의 기업이 실로 아름답도다"(시 16:5-6)라고 노래하였다. 또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이외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하고 있다(빌3:8). 그러므로 그는 하나님과 연합 함으로 복음 안에서 기쁨을 얻으며, 그 안에서만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그는 세상에서 이것을 취하고 이것을 위하여서 세상의 모든 것을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5. 우리가 저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이 이것이니" ; 나는 옛날 번역가의 '이것이 그 소식이니'라는 번역을 잘못된 것으로 보지 않는다. 왜냐하면 '에팡겔리아'는 ,'약속'이라는 의미로 자주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여기서, 앞에서 말씀한 증거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말하고 있으며, 그 문맥은 다른 의미를 요구하는 것으로 보인다. 즉 우리가 당신에게 나타내는 약속은 이것을 포함하거나 혹은 "이 상태가 그것과 결합된 것이다"라는 양자 중 하나가 될 것이다. 그렇게 하여야 사도 요한이 의미하는 뜻을 우리가 확신하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의 전체 교훈을 나타내려고 하지 않고,다만,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그의 축복을 받기 원한다면, 우리는 의와 거룩함으로 하나님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이 디도서 2장에서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에게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 경건치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근신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로 이 세상에 살고" 라고 말한 것처럼, 여기서 사도 요한이 은유적으로 우리가 빚 가운데서 행한다고 말하는 것은 하나님이 빛이시기 때문이다.
그가 하나님의 빛이시며 또 "빛가운데 계신다"고 말할 때, 그 표현들은 과장된 표현이 아니다. 사단이 어두움의 왕이라고 불리우는 이유도 아주 충분하다. 한편으로 하나님을 '빛의 아버지'와 "빛"이라고 부를 때, 우리는 무엇보다 먼저 하나님은 밝고 순결하시며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둘째로, 하나님은 그의 광명으로 만물을 비추시기 때문에 악이나 변절이 없으시며 허물도 홈도 없으시고, 또한 위선이나 부정, 거짓이 결코 숨기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요약하면, 빛과 어두움은 화합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어두움에 행하는 한, 우리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분리되어 있는 것이며,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말하는 친교란 오직 우리가 순결되고 충만한 빛 가운데 거할 때만이 있을 수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으시니라" ; 사도 요한은 그가 어떤 사실의 확증을 강조하고 싶을 때 그 반대되는 부정적인 표현을 함으로써 그의 확신을 강조하는 표현법을 곧 잘 쓴다. 그러므로 이 말의 뜻은 하나님께서 어두움을 전혀 용납지 않으신다는 그런 면에서 하나님이 빛 이상을 나타내고 있다. 이 사실에서 자연히 하나님은 악한 자와 타락하고 사악한 행실을 미워하시고, 또 어두움과 .짝하는 모든 것을 증오하신다는 것을 우리가 깨닫게 된다.
"6.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 :이것은 어두움 가운데 행하는 자들은 하나님과 불화하고 있다는 결론을 그가 내리고자 할 때, 반대적으로 표현하는 논법이다. 그러나 이 교리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을 성화시키시는 높은 교리이다. 이것은 그가 무조건적으로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생활이 거룩하기를 요구하면서, 그리스도의 은혜가 어두움을 물리치고 하나님의 빚을 우리에게 밝게 비추어 주신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마치 요한이 하나님은 우리 인간에게 공허한 거짓말을 하고 계시는 분이 아니시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왜냐하면 이 하나님과의 교제의 능력과 효과가 우리 생활에서 밝게 나타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복음에 대한 고백은 거짓이 되고 말 것이다. 사도 요한이 그 다음에 거짓말을 하고'라고 덧붙인 것은, 우리가 진실하게 행동하지 않는다. 또 진실과 정의를 갖지 못하였다"라는 말과 같은 뜻이다. 앞에서 이미 내가 말한 대로, 사도 요한은 이런 화법을 자주 사용하고 있다.
"7.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 사도 요한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따르면, 그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순결한 생활이 근거가 되어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순결성이 우리에게서 나타날 때, 우리의 하나님과의 연합을 그 순결성으로 인하여 확증되는 것이라고 사도 요한은 말 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곳에는 모든 것이 거룩함으로 충만하게 되며, 또 모든 불의가 다 사라지게 된다. 하나님을 떠나면 우리는 부정하고 흑암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께 결합되어 있지 않으면, 그 누구도 바르게 살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라는 말에서, 사도 요한은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 중에 누가 사도 요한이 요구하는 이런 유사성, 곧 하나님의 빚을 그의 생활에서 나타낼 수 있는가? 라는 질문이 대두될 수 있다. 이 점에 대해서는 그가 어두움으로부터 완전히 순결하고 자유로울 필요가 있다. 바로 이런 류의 표현이 사람들을 이해시킬 수 있다고 나는 대답한다. 비록 하나님과 같이 될 수는 없지만 하나님을 닮으려고 애쓰며 열망하는 사람을 우리는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라고 부른다. 이 귀절 이외의 더 이상 다른 예를 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그의 다스림을 받지 않는 사람은 어두움에 행하는 사람이며, 이런 사람은 순결한 양심으로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께 헌신하려고 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 드리려고 하지도 않는다. 다른 한편, 신실한 마음으로 그의 전 생애를 하나님 경외와 봉사로, 그리고 참되게 하나님을 예배하는 생활로 드리려는 사람은 빛 가운데 통행하는 사람이라고 불리워진다. 왜냐하면 "비록 여러 면에서 육신의 멍에 아래 잘못하여, 또 고통을 당할지라도, 이런 사람은 정도를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두움으로부터그빛을 구별하는 것만이 홈없는 양심인 것이다.
"그 아들 예수의 피가" ; 사도 요한은 하나님과 우리를 결합시키는 끈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칠 때에, 그는 또 그 결합으로부터 오는 열매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물론 우리의 죄가 값없이 용서함을 받는 것이지만, 이것은 다윗이 시편 32편에서 잘 묘사하고 있으며, 우리가 하 나님의 심령으로 거듭나서 순결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섬기기 전까지는 우리가 가장 비참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을 잘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며 하나님의 저주를 받아 하나님의 진노와 영원한 사망의 형벌을 받는 사람, 이 이상 더 비참한 사람이 세상에 달리 또 있을 수 있다고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놀라운 말씀이다. 이 말씀에서 우리는 첫째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은 그의 대속이 우리가 불의한 마음을 버리고 참 의롭게 되려고 애쓸 때 우리 자신에게 적용이 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의 불의에서 떠나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는 사람들에게만 그들의 구세주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용서 하시는 분으로 오시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용서해서는 안된다. 한마디로, 죄의 용서는 회개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으며, 하나님의 평화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임할 수 없는 것이다.
두번째로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값없이 죄를 용서하시는 일은 단 한번만 있는 사건이 아니라, 이 은헤는 교회와 성도들에게 매일 매일 영원히 계속되는 은혜이다. 사도 요한은 인간이 하나님 앞에 모두 범죄하였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하지 않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는 현재와 과거의 어떤 사람도, 그리고 미래의 그 어떤 인간도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릴 수 없다는 사실을 확고하게 밝히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바르게 살기를 갈망하지만, 우리는 항상 하나님 앞에서 동요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이다.우리가 전심을 기울이지 않고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릴 수가 없다. 또 한편 우리 인간은 할 수만 있으면 범죄함으로 말미암아 부단히 하나님을 떠나려고 한다. 그래서 모든 성도들이 날마다 하나님께 죄의 용서를 빌었으며 그렇게 하는 길만이 하나님의 가족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도 요한은 '모든 죄에서'라고 말함으로써 우리가 하나님 앞에 많은 범죄를 하였음을 밝히고 있으며, 또 허물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그는 또 이 죄가 경건한 사람들과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여 드리는 일을 방해하지는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아울러서 우리가 어떻게 용서를 받으며, 또 그리스도께서 그의 보혈로 우리 죄를 사하시어 우리를 정결하게 하시는 이유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이런 모든 가르침을 궤변가들은 사악하게 악용하고 있다. 그들은 인간이 값없이 죄를 용서받는 것은 세례를 받음으로 이루어진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가 세례에서만 유효하며, 세례를 받은 후에만 하나님께서 만족하심으로 인간과 화목하신다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보혈을 우리의 사죄에 필요한 전부로 믿지 않는다. 그들이 인간의 공로를 극히 적은 분량이라도 찬양할 때, 그들은 사도 요한이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속죄의 사역과 하나님의 화목을 전적으로 파괴하는 것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속죄를 받는 것과, 우리의 행위로 구원받는다는 것, 이 두가지는 도저히 일치될 수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보면,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희생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인간들과 화목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받으신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희생은 정결케 하심과 만족을 함께 내포하고 있다. 이 모든 능력과 효력은 오직 그리스도의 보혈에 속한다.
이런 근거로 면죄부에 대한 저주받을 만한 창안을 한 가톨릭교도들은 논박을 받아 마땅하다. 마치 그리스도의 보혈이 부족한 것처럼, 그들은 그 보혈에 순교자들의 어떤 공로를 첨가한다. '아직도 이런 큰 모독이 우리 가운데 널리 횡행하고 있다. 그들은 사죄의 관건이 되는 그들의 열쇠는 부분적으로 '그리스도의 피와 순교자들의 공로로 이루어지고, 또 일부는 죄인들이 선행을 쌓음으로 자신의 속죄를 이루는 인간의 공로로 이루어진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들은 그리스도의 피로서 사죄를 받기는 하지만, 그 보혈로 모두 사죄를 받는 것이 아니라는 일부 용서받지 못할 죄를 남겨놓는 결과를 만들고 있다. 만일 그들의 이런 교리가 옳은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전적으로 정결케하는 것이 아니라. 일부 도움을 줄 뿐이라는 결론을 낳고 만다. 이렇게 되면 사도 요한이 여기 서 발하는 믿음만을 의지하여야 한다는 말씀에 우리는 불만을 느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8. 만일 우리가 죄없다. 하면~~~~~" ; 사도 '요한은 은혜의 필요성으로부 터 은혜를 권고하고 있다. 무죄한 사람이 .아무도 없듯이, 만일 하나님께서 용서의 치료제로서 .우리를 도와주시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두가 버려진 자식들이요 희망이 없는 자들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아무도 죄없는 사람이 없으므로 모든 사람은 멸망으로부터 구원받는 자비를 필요로 하며, 그러므로 필요한 축복을 받도록 깨우침을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사도 요한은 강조 하고 있다.
여기서 죄라는 말이 의미하는 바는 .부패하고 .타락한 ,성품을 나타낼 뿐 아니라, 실제로 우리를 하나님앞에서 정죄반도록 하는 죄를 함께 의미한다. 더구나 이 사실은 보편적인 현상이므로 오늘날의 신자들이나, 과거의, 성도들, 또 장차 을 모든 믿는 자들 중 그 누구도 예외일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 성경 귀절로 펠라기안파들의 궤변을 신랄하게 공격하였다. 그리고 그는 죄의 고백은 겸손을 위해서도 물론 필요하지만, 우리가 거짓말을 하지 않고 우리 자신을 속이지 않기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는 현명한 생각을 하였다.
사도 요한은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다"라고 덧붙일 때 그가 흔히 쓰는 방법으로 반복하여 그 앞의 문장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것은 단순한 빈복이 아니라, 거짓으로 사랑하는 자들은 스스로 속고 있는 자들이라는 사실을 사도 요한이 나타낸 것이다.
"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 그는 그들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실을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실 것이라고 신실하게 약속하고 있다.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화목시켜 주시는 분이 우리를 위하여 이미 계신다는 것을 확신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다.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우리의 죄로 지옥에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음의 안정을 얻지 못하고 동요하는 것이 얼마나 비참하고 불행한 일인가를 깊이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하는 그 곳이 바로 지옥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이 약속, 곧 우리가 우리의 죄를 고백하면 하나님께서 그 모든 .죄를 다 용서하여 주신다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야 한다. 더구나 사도 요한은 이것은 약속을 하신 하나님께서 신실하시고 의로우시기 때문에 바로 하나님의 신실 하심과 의로우심에 기초하고 있다고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의로우신 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내 생각에는 지나치게 합리적인 사람들이라고 보여진다. 왜냐하면 여기 나타난 의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에 따른 것이며, 이 두 요소가 모두 약속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님께서는 의로우신 분이시지만 또 우리를 준엄하게 대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나 말씀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친히 자신을 나타내실 때에, 용서가 없으신 의로 나타내시기를 원치 않으신다.
우리가 죄를 고백하는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일이므로 온 마음을 다 기울인 진실한 고백이어야 한다. 그러나 새로운 생활이 없이는 참 마음으로 하나님께 죄의 고백을 드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죄의 고백은 회개를 포함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값없이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런 무상의 사죄, 곧 하나님의 자비가 범죄에 대한 유혹으로 악이용 당 해서는 안된다.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 깨끗하게 한다'는 단어는 앞에 나타난 의미 와는 다르게 사용된 것 같다. 사도 요한은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우리의 죄가 용서받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보혈로 우리가 정결케 됨을 받는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의에서 정결케 하셨다는 말씀을 추가하면서 용서에 대한 말을 하고 있다. 이렇게 둘째 귀절은 첫째 귀절과 다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두가지 결과를 우리에게 설명하여 주고 있는데, 그리스도의 회생 제물로 말미암아 화목을 이루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시고 또 우리를 고치시며 새롭게 하신다는 말씀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우리 인간이 이 세상에 머물러 있는 한, 아무리 우리의 자신의 개혁이 끊임없이 계속될지라도 결코 우리가 모든 불의에서 정결함을 받을 수 없다고 반기를 든다면,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께서 지금 우리를 완전히 정결케 하신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정결케 하신다는 것은 신실한 말씀이지만, 당장 오늘이나 내일 우리가 이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 우리는 계속적인 향상을 이루어 가야 한다. 우리의 성결을 완성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일단 시작하셨으니 그것을 완전히 성취하실 때까지 매일 매일 끊임없이 이 과정을이루어 나가신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 책망받을 것이 없는 자로 나타나기 위하여 우리가 선택 받았 다"(골 1 : 22)고 말하고 있다. 또 다른 곳에서, 교회가 하나님 앞에 티나 허물될 것이 없게 세우시기 위하여 정결하게 하였다"(입 5:27)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 귀절을 두번 다 같은 뜻으로 해설하려고 하면; 나는 그것도 잘못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10.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 사도 요한은 자신을 스스로 정결하다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에 대한 말을 계속 이어 가고 있다. 그는 성경 곳곳에서 전 인류의 죄에 대하여 논하고 있으므로, 이런 그의 비난을 회피하는 자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들이다. 왜냐하면 만일 인간이 죄가 없다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이유없이 질책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확신하기 위하여 요한은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는 말씀을 덧붙이고 있다. 그는 '우리가 모든 죄'를 감추고 이 진리를 대적하는 것처럼 모든 죄를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참으로 겸손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만 참된 발전을 이루어 나갈 수 있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또 죄의 멍에 아래서 고통 당하며 신음하다가,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 앞에 나아가 그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만 안식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Calvin선생주석 > 요한일서'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요일2:18) (1) | 2023.12.27 |
---|---|
너희가 그가 의로우신 줄을 알면 의를 행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줄을 알리라 (요일2:29) (0) | 2023.12.26 |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7) (0) | 2023.12.25 |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5) (1) | 2023.12.24 |
서론 (0) | 2023.12.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