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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요일2:17)

1. 성경 (요일 2:12 ~ 17)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 (12)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3)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 (14)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5)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6)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17)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2 자녀들아" : 이것은 일반적인 표현법이다. '사도 요한은 이 말에서 젊 은이들 뿐만 아니라, 모든 세대의 사람들을 '총망라하여 지칭하고 있다. 2장 1절에서 뿐 아니라, 뒷부분에서도 그런 표현을 계속 쓰고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자녀들만을 지칭하는 말로 잘못 이해하고 있다. 요한이 자녀들에게 대한 표현을 쓸 때는 παιδια(파이디아)라는 말을 쓰고 있다. 그 러나 여기서는 영적 아버지로서 젊은이나 나이 많은 사람을 동시에 지칭하는 것으로 τεκνια(테크니아)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는 각각 다른 여러 세대를 특별히 이런 표현으로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여기서 그렇게 시작하였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로 종전에 그가 말한 것이 값없는 사죄를 모호하게 만들지 않기 위하여 특별히 믿음에 대한 교리를 다시 납득시키고 있으며, 이 토대는 항상 존속할 것이다. 구원은 그리스도의 은혜로서만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거룩한 생활은 꼭 필요 한 것이며, 하나님 경외는 신중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인간은 회개하도록 자극을 받아야 하며, 새로운 생활이 그 열매와 함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믿음의 교리를, 그리스도께서 구원과 축복의 유일한 저자라고 가르침으로써 질식시켜 버리는 일이 있어서는 안되겠다. 우리는 참으로 믿음이 항상 구원에 있어서 수위를 차지한다는 중용을 견지하여야 한다. 이것이 바로 요한이 우리에게 나타내는 법이다. 그가 선행에 대하여 조심스럽게 말 할 때, 그는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은혜를 매우 신중하게 상기시키고 있다. 만약의 경우를 대비하여 그는 좀 지나칠 정도로 신중을 기하고 있다.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얻음이요" ; 이 보증이 없다면 일시적이고 미완성의 종교가 되고 말 것이다. 사실 값없는 사죄를 인정하지 않고, 다른 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기초없는 건물을 짓는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하나님을 경외하도록 자극을 받는 적절한 일은, 사도 바울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의 은혜를 받도록 사람들을 권면한 것처럼(빌 22 : 1) ,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축복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다. 여기에서 우리가 정의를 행하려는 갈망을 동결시켜버렸다고 꾸며대는 가톨릭 교도들의 비방이 너무나도 사악한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하게 나타난다. 반면에 사실상 우리는 그것만이 우리를 하나님께 순종하는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다는 것을 격찬한다. 요한은 하나님게서 우리를 매우 사랑하셔서 우리를 정죄하시지 않는다는 우리의 지식을 그의 격려의 기초로 삼고 있다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  사도 요한은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는 다른 방법을 찾지 않기 위해서 그 구체적인 근거를 우리에게 제시하여 주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바로 알지 못하고 또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십자가 위에서 지불하신 그 대가를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시는 그 은혜를 충분히 깨닫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단이 간교와 사악한 자들의 허구로 이 길이 차단당하는 것을 보기 때문에 더욱 주의할 필요가 있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여러가지 만족을 통해서 하나님과 화목을 이루려 하고 무수한 속죄의 방법으로 그들 자신의 구속을 성취하려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용서를 받을 만한 많은 방법들을 하나님 앞에 제시하지만, 이런 것들은 너무 많은 장애물이 되어, 우리를 하나님께 접근시키지 못하고 있다. 요한은 단순히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용서하여 주신다고 가르치는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못해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용서하여 주신다는 것을 분명히 덧붙이고 있으며, 그 외의 다른 모든 이유들을 다 제거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이 축복을 받게 된다면, 우리는 다른 모든 이름을 지나쳐 버릴 것이며 기억하지 않고 , 오직 그리스도의 이름만을 깊이 명심하게 될것이다.

 

"13.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 이제 그는 각각 다른 세대들을 일일이 열거하여, 그가 그들에게 가르치는 것이 무엇인가를 적절하게  보이고 있다. 일반적인 표현법이 때로는 사람들의 호응을 받지 못할 수도 있다. 자신들을 인도하는 방향 제시에 대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무관심하는 것은 참으로 악한 일이다. 대체로 노인들은 그들 자신은 이미 배울 단계를 지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가 쉽다. 어린 사람들은 그들이 아직 충분히 성장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청종하기를 거절한다.  중년층의 사람들은 그들이 전념해야 할 다른 일들이 많다고 주의를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어떤 계층의 사람들이라도 가르침 듣기를 거절하지 못하도록 사도 요한은 이 복음은 일일이 자기 다른 세대의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유명한 라케다이모니안(Lacedaimonian) 합창단은 세 가지 상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노래하고 있다. 먼저, "현재의 당신은 미래의 우리들이요", 마지막으로 "현재의 당신은 과거의 우리들이요", 그 중간에는 "현재의  우리의 일부는 과거의 당신들이요, 나머지는 장차 그렇게 될 것입니다." 이런 세등급의 사람들을 사도 요한은 인간 생애의 세 과정으로 분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먼저 노인들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으로부터 그들이 영원한 하나님의 누구인가를 배우기 때문에 복음은 노인들에게 적절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투정을 부리는 것이 노인들의 공통점이다. 그들은 오랜 연륜을 쌓아오면서 얻은 지혜로 평가하기 때문에 특별히 가르치기가 힘들다. 더구나 호레이스(Horace)는 그의 저서 〈Ars' 'Poetica〉에서 노인들은 그들의 젊은 시절의 잘못까지라도 칭송하면서 현재의 것은 무엇이나 비난하고 또 다르다고 말한다고 아주 잘 지적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복음이 고대의 지식을 우리에게 줄뿐 아니라, 우리를 영원한 하나님께로 인도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줄 때에 이 악을 지혜롭게 치유하여 주고 있다. 그러므로 복음은 그들이 싫어할 어떤 요소도 없다는 결론이 뒤따른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태초부터 계셨다고 말한다. 나는 이것을 그의 능력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와 함께 하신 그의 거룩한 실존이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히브리서 13장 8 절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고 말하였는데 이것은 마치 당신이 만일 태고의 것을 즐겨하신다면, 당신은 태고 이전부터 계신 그리스도를 소유하십시요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은 자신 안에 모든 세대를 다 소유하신 그리스도에 대하여 조금도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동시에 우리는 참으로 고대에 기원하는 종교에 대하여 주의를 기울여야 하는데, 그 종교는 바로 그리스도에 기초한 종교이다. 만일 종교가 오류에 기원하고 있다면 그것이 아무리 오랫동안 널리 보급되어 온 것이라도 그 종 교는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  그가 '네아니스코이' 라는 축소형을 쓰고 있지만, 그는 한창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대하여 말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우리는 이 연령층의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것에 도취되기 쉽고,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서는 거의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들의 정력과 육체의 힘이 그들을 술취하게도 한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그들이 그 정력과 힘을 육체적 향락을 즐기는 것으로 소모하지 말고, 참으로 그 힘을 어디다 써야 하는지에 대하여 가르쳐 주고 있다. 그는 그것을 "너희가 악한자를 이기었음이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 나타난 연결 접속사는 원인을 나타내는 접속사와 동등하다. 우리는 분명히 그 힘을 영적인 것으로 추구하여야 한다. 동시에 그는 그 통합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으로 가르치고 있다. 왜냐하면 그는 복음에서 온 그 축복을 찬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싸우고 있는 사람들을 이미 정복한 자들로 부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이 상황은 인간의 군기 아래 싸우는 그런, 것과는 매우 다르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전쟁이 어떻게 끝나려는지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가 맞이하여 싸우는 전쟁에서는 우리가 정복자라는 확신이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머리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이미 세상을 이기셨기 때문이다.

 

"14.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그들은 다른 규칙이 필요하였다: 사도 요한은 복음이 아이들에게 잘 적용된다고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 들에게 한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렇게 간절히 모든 세대를 초대하시는 그 복음의 가르침을 멀리하도록 위협하고 내몰아버렸던 가톨릭의 횡포가 얼마나 악한 것인가를 다시 깨닫게 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이 각각 다른 계층의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권면하였던 것은 역시 일반적인 것이다. 만일 우리의 허물이 하나님의 영원한 진리로 보완이 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허 속으로 아주 빠져들고 말것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지 않는다면 우리에게는 악하고 약연한 것밖에는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가 복음으로 하나님의 양자가 되기 전까지는 우리는 고아와 같았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젊은 사람들에게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역시 노인들에게도 공통적으로 해당되는 것이다. 그가 특별히 필요한 어떤 사람들에게 적용하기를 원하였을지라도 복음의 가르침을 예외 없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적용시키려고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관계대명사 Brc(호티)는 두가지 방법으로 설명될 수 있다. 러나 내가 설명한 뜻이 그 문맥에 더 적절하고 알맞는 것이다.

 

"아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  내 생각에는 이 반복이 불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아마 무식한 독자들은 사도 요한이 두번씩이나 아이들을 언급하였다고 잘못 생각할 때에 그들은 다른 하나를 두 절에 생각없이 끌어 넣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요한 자신은 그들이 강하다는 것을 덧붙이기 위하여 물론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진 않았지만 두 젊은 사람들에게 이 문장을 확대하여 삽입하였는데는 필경사(서기관)들이 생각없이 그 수를 채우려고 그렇게 하였을지도 모른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 . 사도 요한은 이미 앞에서 경건한 생활을 위한 유일한 법칙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우리가 세상의 쓸데 없는 사랑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모든 감성이 다른 ,방향으로 빗나가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헛된 것들을 우리 자신에게서 다 떨쳐버리고, 하나님에 대한 사랑으로 우리의 모든 것이 가득차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마음이 정결하여지기까지는 이 사도 요한의 말이 수 백번 되풀이될지라도 우리에게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다. 그것은 마치 공(ball)위에 물을 쏟아 붓는 것 같을 것이다. 공에는 구 멍이 없기 때문에, 아무리 쏟아 부어도 물이 모이지 않을 것이다.

 

'세상'이란 말은 하나님의 왕국과 분리되었으며, 또 영원한 생명의 소망과 관계가 없는, 현세적인 것에 관계되는 것들로 이해하면 된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이 세상 속에는 모든 종류의 부패가 깃들어 있으며, 또 악의 심연으로 보고 있다. 또 그 곳은 하나님을 떠난 모든 사람들이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환락과 기쁨과 유혹이 가득찬 곳이다. 더구나 우리가 세상을 바라 볼 때에 만일 우리가 이 세상을 대한 사랑에 도취하게 되면, 하나님과 우리 자신을 모두 잊을 수 밖에 없는데, 이 세상적인 사랑이야말로 무서운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런 사악한 욕망이 사람을 지배하는 곳에는 극도의 혼란이 있게 되며, 따라서 이런 사람은 천국의 생활이란 생각도 할 수 없고, 짐승과 같은 우맹에 빠져들고 만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  반대적인 표현법을 사용하여 사도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세상의 사랑을 버려야 한다는 필요성을 증명하고 있다. 후에 그는 불일치로부터의 논법에 (an argument   from inconsistents)의해서 이 사실을 확증하고 있다. 즉 세상에 속한 것은 완전히 하나님과 적대 관계에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내가 이미 말한 바 있는 불경건한 생활 태도는 하나님의 나라와 완전히 분리된다는 이 사실을 우리는 명심하여야 한다. 인간은 매우 타락하였기 때문에 현세적 생활에 만족 하면서 짐승들과도 다를 바 없이 불멸의 삶에 대하여는 생각조차 하지 않고 있다. 그러므로 누구 든지 이 땅위의 것을 갈망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될 수 없다.

 

"16. 육신의 정욕과" ;  옛 번역자는 다르게 번역하고 있다. 그는 문장 에서 두가지를 만들고 있다. 그것을 이렇게 연관시켜서 읽는 헬라어 여본이 더 좋다. 즉 "세상에 속한 것은 무엇이나 하나님의 것은 아니다" 그래서 에서 가지 정욕은 삽입구로 들어 있는 것이다.그것은 일종의 표현 방법으로써 요한이 이것들을 세가지 예로서 삽입하였는데, 세상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관심과 생각이 무엇인가를 요약하여 보여준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 살면서 사람들이 이런 욕망을 갖지 않고 산다든지, 이혹은 어쨌든 그런 사람을 한 사 람도 발견하지 못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완전하고 충분한 분리인지 아닌지 별 차이가 없다. 그것은 사도 요한이 그들 각 사람에 대하여 이해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 뿐이다.

 

첫번째 적은 보통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모든 죄악된 성품에 대해 설 명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육신은 인간의 전적인 타락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나는 논쟁하기를 원하지 않지만, 다른 의미를 취 할 수가 없다는 사실을 숨길 수가 없다. 로마서 13장 14절에서 사도 바울 은 우리가 우리가 육체의 정욕에 사로 잡히지 말도록 권면하고 있는데 내 생각에는 이 귀절에 대한 최선의 해설이라고 보인다: '육체란 무엇인가? 몸 육체에 속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이 편안하고 안이하게 살 과 모든 것이 이 , 그러면 교육체의 운정욕 세계가지 '구별은 키 려고 할 때, 그들 자신 편리한 생활만 하려고 하는데, 이란 무엇인가 ? 에피큐러스(Epicurus)의 욕망에 대한 키케로(Cicero)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잘 알려져 있다. 그는 일부는 자연적이 면서 필요한 것이고, 다른 일부는 자연적이지만 불필요한 것으로, 나머지는 자연적이지도 않고 또 필요하지도 않은 것의 세가지로 분류하고 있다.

 

그러나 인간 마음의 &raela(아탁시아;혼돈함)를 아는 요한은 망서림없이 육체적 욕망을 정죄하고 있다. 왜냐하면, 교육체의 욕망은 무절제하고, '그 중 용을 지킬 줄 모르기 :때문이다. 이 후에 요한은 점점 악을 더 신랄하게 바 난하고 있다.

 

"안목의 정욕과" ;  이 말씀은 허영과 공허한 영화만을 추구하는 허영심과 함 께 음란한 욕심을 말한다고 생각한다. 결국 허식과 교만이 자만심과 거만, 치욕 등과 결합하여, 맹목적인 이가 주의와 완고한 자신감으로 나타난다.

요약하여 말하면, 세상적인 것이 나타날 때에 우리는 멍에가 어플린 짐승들 처럼; 그것에 넋을 잃고 말게 된다. 왜냐하면 본래 우리의 마음이 사악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대적하는 이 모든 욕망들이다. 우리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 다. '생명'이라는 말에 해당하는 이후헬라어는 βios(비오스)인데, 이것은 생활 의 자세나 방법등을 의미하는 말이다.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사라지는 순간적인 것들이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세상에 그들의 행복을 두는 사람들은 스스로 잘못되고 비참한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며, 특히 하나님께서 영원한 생명의 축복된 영광으로 인간들을 초대하신 이후 더욱 그렇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의 자녀들에게 베풀어 주신  참 행복은 영생이다 그러므로 세상적인 모든 것이 결국 곧 사라져 없어지고 말 것인데, 이런 세상에 도취되는 것은 참으로 무가치한 일이다"라고 .말씀하는 것과 같다. 나는 여기서 정욕이라는 말을 인간이 갈망하고, 또 그 인간을 사로잡는 것이라고 환유적으로 해석한다. 그 뜻은 이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특별히 :갈망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것은 오직 실체도 없는 그림자와 같은 환상일 뿐이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이런 사람들은 영원히 살 것이라고 말하면서 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갈망하는 사람들만이 영원히 행복한 사람들이라는 뜻을 나타내고 있다. 만일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들이 없다고 누가 반론을 제기한다면, 그 해답은 분명하다. 사도 요한이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율법을 완전히 지킨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불완전하기는 하지만 믿음으로 순종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인정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먼저 율법에서 우리에게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아무도 이 율법을 완전히 지킬 수 있는사람은 없다. 이 점에서 보면 율법으로는 우리에게 소망이: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구원이 되셨다. 그는 그의 성령을 통하여 우리에게 새 생명을 주셨고,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께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역시 우리는 어떤, 형태이든지 우리도 노력함으로 완전한 의를 이루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