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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일서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2:5)

1. 성경 (요일 2:1 ~ 11)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여도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1) 그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 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2)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그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3) 그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4)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하게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그의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5)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6)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 (7)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그에게와 너희에게도 참된 것이라 이는 어둠이 지나가고 참빛이 벌써 비침이니라 (8)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9) 그의 형제를 사랑하는 자는 빛 가운데 거하여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으나 (10) 그의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어둠에 있고 또 어둠에 행하며 갈 곳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그 어둠이 그의 눈을 멀게 하였음이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나의 자녀들아~~~~~~" ;  우리가 죄로부터 떠나는 것은 앞에서, 나타난 가르침의 '아나케팔라이오구시스'일 뿐 아니라, 거의 모든 복음의 전체적인 내용이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의 심판에 복종하여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의 희생으로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확신하여야 한다. 사도 요한은 그가 하나님의 자비에 대하 여 말하고 또 이 자비하심이 모든 사람들에게 다 주어진 것이라고 가르쳤을 때, 어떤 사람들은 "그렇다면 이것은 범죄하여도 된다는 범죄의 허락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미리 예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사악한 사람들과, 눈물 흘리며 악을 과감하게 절단하고 회개하는 사람들을 분리함으로, 복음의 두 요소를 함께 연결하여 말하고 있다. 한편 이 은혜의 교훈은 항상 불경한 자들의 비난거리가 되고 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의 죄가 사하심을 받는다고 할 때에 그들은 그것이야말로 죄를 허용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 비방을 미리 봉쇄하려고 사도 요한은 먼저 인간이 죄를 끊어버려야 한다는 것이 그의 교훈의 목적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가 "너희로 죄를 범치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할 때, 그는 인간의 결점에 따르는 죄로부터 절단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과 친교를 갖고, 하나님과 화목해야 한다는 동일한 목적에 대해서는 나도 이미 말한 바 있다. 그러나 그는 죄의 용서에 대해서 결코 침묵을 지키지 않는다. 왜냐하면 천국이 무너지고, 모든 것이 혼란 속에 빠지고 말 것이기 때문에 이 진리는 결코 생략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임무를 우리는 분명하고 뚜렷하게 밝히 드러내야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우리의 육체는 방종하려는 경향이 있으므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의 거룩한 소유가 되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하여서 의와 구원을 얻게 .된다는 사실을 항상 명심하여야 한다. 누군가 하나님의 자비를 불경스럽게도 비난하는 사건이 일어날 때 마다, 거기에는 마치 우리가 악에 대한 고삐를 풀어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많은 개들이 우리를 간악하게 대적하였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 특별히 그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이 밝게 빛나고, 인간의 모든 구원이 포함되어 있는 그런 그리스도의 은혜를 계속 선포하여야 한다. 불경한 자들의 짖어대는 소리를 우리는 무시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사도들도 그들에게 역시 비난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범죄하였을 때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다는 것이 두번째 귀절을 첨가한 이유이다. 이 .말씀에서 그는 우리가 이미 들어서 알고 있는 사실을 확신시키고 있는데, 우리는 완전한 의에 도저히 이를 수 없는 사람들이며, 사실상 :매일 해로운 죄를 짓고 있다. 그런데도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달려가기만 한다면, 하나님과 화목할 수 있는 치유책이 아주 가까이 있는 것이다. :이 속에서만이 인간이 안식을 누릴 수 있는데, 그것은 그 속에서만 인간이 의롭다 인정함을 :받을 수 있고, 그 기초 위에서만 구원의 소망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누가"라는 조건 불변화사는 우리가 범죄할 수밖에 없는 인과율로 보아야 한다. 간단하게 말해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복음, 곧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그에게로 부르시고, 우리에게 회개의 영을 주시는 바로 그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죄에서 떠나도록 우리를 부르실 뿐 아니라, 사악한 죄인들을 위하여 미리 예비하여  두신 중보자를 통하여 그가 하나님께 우리 죄인들을 대언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은 항상 죄인인 우리들의 죄를 사하여 주시고, 또 죄가 우리의 의를 성취하는 길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하신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의 자비를 회복 할 수 있는가를 나타내기를 원하고 있으며, 따라서 그는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언자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의 희생의 능력과 효력을 우리에게 나타내시려는 목적으로 하나님 앞에 서시는 것이다. 이것을 더욱 쉽게 이해하도록 하기 위하여 나는 더 솔직한 표현을 하겠다. 그리스도의 중재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그의 죽으심이 계속 적용됨으로 효력을 발생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우리에게 전가하시지 않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중보자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나중에 "그리 스도를 지적한 두 가지 칭호는 이 귀절의 주제에 아주 적절하게 해당된다. 그는 그리스도를 의로우신 분과  대언자 라고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는 중보자로서의 그의 임무와 인격을 감당하는 데에 이 두 요소가 필요하였던 것이다.  어떻게 죄인으로서우리를 하나님과 화목케 하실 수 있었겠는가? 세상에는 순결하고 죄없는 사람이 하나도 없기 때문에 우리 자신으로서는 도저히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가 없다. 히브리서 7 장에 나타난 대로 대제사장은 죄가 없으며 죄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신 분이 어야 하기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아무도 이런 대제사장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회생이 없이는 아무도 대제사장이 없으므로  중보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율법 아래에서는 피흘림의 희생 제물이 없이는 제사장이 지성소에 들 어갈 수 없었고,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하나님께 기도하려는 사람은 반드시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하는 것이 관례가 사용되었다. 이 상징에 의하여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께 우리가 희생 제물을 드려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시기를 원하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침해를 받게 되었을 때, 그 하나님의 침해받으신 거룩한 속성들을 만족하게 보상하여 드리는 대가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 사실로 미루어 보아 과거와 또 장차 올 모든 성도들에게 중보자가 필요하며, :그리스도와 같이 이 중보자의 사역을 감당하실 분이 아무도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사 도 요한은 그리스도에게 해당하는 이 두 가지 칭호가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유일한 중보자되심을 분명하게 나타낸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와 우리를 화목케 하시려고 죽으셨을 뿐 아니라, 계속적으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께 중재의 사역을 하시어 그의 이름으로 우리를 하나님 앞에 나아가게 하시고,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게 하여 주신다는 복음을 들을 때 우리는 큰 위로와 기쁨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우리는 특별히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이 영예가 어떤 다른 것으로 대치되지 않도록 경계하여야 한다. 그런데도 이 귀한 그리스도의 임무가 교황권 아래에서는 무분별하게도 성자들에게 돌려지고 있는 사실을 우리는 목격하게 된다. 30년 전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중보자라는 것을 믿는 우리의 믿음의 이 탁월한 항목이 거의 매장당하게 되었었다. 오늘날 그들은 그리스도를 참으로 많은 성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간주할 뿐, 유일하신 우리의 중보자로 여기지 않는다. 좀 파렴치한 가톨릭 교도들 중 어떤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다른 사람보다 좀 우월한 사람으로 생각하기는 하나, 결국 많은 동료들중의 한 사람 정도로 그리스도를 격하시키고 있다.  그러나 여기 성경 말씀은 제사장이 아니고서는 중보자가 될 수 없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를 중보하는 제사장직은 오직 그리스도에게만 속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도들이 서로 사랑을 나누는 상호 성도로서의 교제를 부정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이미 서로 교제를 나눌 수 없는 죽은 자들에게 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다. 또 이것은 그들이 그리스도에게만 종속된 것이 아니라고 스스로 날조하는 가톨릭 교도들을 옹호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아무리 형제가 형제를 위하여 기도할지라도 그들은 누구나 예외없이 모두가 한 중보자를 찾아야 한다. 그러므로 가톨릭교도들이 스스로 날조한 것과 같은 그런 많은 중보자들은 의심할 여지도 없이클 그리스도를 대적하는 많은 우상들임이 틀림없다:

 

겸하여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하나님앞에 무릎을 기도하셨다는 것을 아주 심하게 잘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경계하여야 한다. 그런 생각은 제거되어야 하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하늘의 영광을 끌어내리는 것이며 :그의. 죽음의 열매로 말미암아 :우리를 새롭게 하시고 영원히 지켜주시며, 또 그의 중재로 우리를 하나님께 중보하여 주시고 그의 희생의  향기로 우리의 기도를 성화시켜 주시며, 그의 대언하시는 호의로 우리를 도와주시는 이 모든 그리스도의 사역을 깎아 내리기 때문이다.

 

"2. 우리만 위할 뿐 아니라" ; 요한은 이것을 넓게 확대시키고 있다. 즉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속죄사역을 확신하는 모든 믿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이 복음을 받아들이게 된다고 그 범위를 넓히고 있는 것이다. 그려나 여기서 바로 문제가 제기될 있으니 곧, 모든 세상의 죄가 다 용서함을 받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을 모든 유기자들과 심지어는 사단까지라도 구원받을 있다고 구원 가능성을 확대하는 이유로 삼는 환상적인 우리들의 허황한 꿈에 대해서는 아예  언급을 하지 않겠다. 그런 무도한 자들의 망발은 논의할 가치조차 없다. 이런 불합리성을 피하려는 사람들은 그리스도께서 온 세상을 위한 충분한 고난을 받으셨지만, 그러나 오직 선택받은 자들에게만 그것이 유효하다고 말한다. 이 해석은 일반적으로 학파들 사이에 보급되고 있다. 나는 이것에 관한 진리를 인정할지라도, 그것이 이 귀절에 적합하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왜냐하면 요한의 목적은 이 축복을 전 교회에서 공통적인 것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두'라는 단어를 사도 요한이 사용하였다해서 곧 그것 자체가 유기자까지 모두 포함시키는 것은 아니며. 다만 모든 믿는 사람들과 지구 위의 여러 곳에 산재해 있는 그런 선택받은 사람들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여러번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의 은혜는 그것이 온 세상의 구원자들에게만 선포될 때 비로소 참으로 분명하게 나타나는 것이다.

 

"3.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 그러나 아무도 계명을 그 세목에 이르기까지 완전하게 지키지 못한다. 그러므로 세상에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없다. 그러나 나는 답변한다. 사도 요한이 이 점에서 전혀 모순된 것이 아니라고, 왜냐하면 앞에서 이미 그는 세상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하다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그는 율법을 전적으로 이행하는 사람이 하나님의 계명을 다 지키는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며 (이런 사람이 세상에 있을 수 없다) 다만 인간적인 많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최선을 기울여 노력하며, 전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께 순종하려고 애쓰는 사람들을 의미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에서 믿는 사람들의 의에 대하여 말할 때마다, 죄의 용서가 함께 나타나지 않음이 없으며, 오히려 이 죄의 용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믿음이 행함에 좌우된다고 결론짓지 않는다. 그러면서 믿음은 행함에 근거함으로 오는 것은 아니고, 행함은 믿음의 표징으로 멋 붙여 따라오는 부수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의 확신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있다. 그러나 생활의 경건성과 거룩함은 하나님에 대한 가식적이고 죽은 지식으로부터 참 믿음을 구별하게 한다.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참으로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옛사람을 벗어버려야 한다(골 3 9).

 

요한은 그가 값없는 사죄에 대하여 설명한 후, 그 사죄를 우리가 받고 또 의지하도록 우리를 권고하고 있다. 첫째로 그는 복음으로부터 깨닫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근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복음으로부터 나오는 순종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것---- 우리의 생애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을 사랑하여야 하는 일이다------- 에 대하여 그는 가르쳐 주고 있다.  성경은 우리가 여기서 읽는 하나님에 대한 산 지식에 대하여 곳곳에서 거듭하여 충분한 근거를 제시하여 주고 있다. 거룩한 가르치심을 냉랭한 사색의 산물로 묘사하여 버리는 것 이상 더 평범한 일은 세상에 없다. 이것은 솔본느 사회학파의 궤변가들이 신학을 비하시키는 방법이며, 그래서 그들의 모든 지식에서는 경건한 빛이란 조금도 나타나지 않는다. 어디서든지 .알고 싶어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충분히 배우게 된다. 요컨대 모든 세대의 공통적인 악은 하나님의 이름을 공허하게 고백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효력을 나타내는 .이 원리를 채택하고 있다. 이 사실에서부터 그는 그들이 하나님을 그의 계명을 지키시는 분으로 결코 알지도 않는다는 결론은 내리고 있다. 플라톤은 암중 모색가로 인정받고 있다. 그러나 그는 미를 부인하고 있는데, 상상하는 미란 어떤 고혹적인 요소없이도 사람이 감탄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야 한다고 한다. 이것은 '파이두루스(Phaedrus; 1) 속에 있으며 또 어디든지 있다. 그러면 어떻게 당신이 하나님을 알수 있으며, 또 생각하지 않고서 깨달을 수가 있는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는 곧 하 나님을 사랑하게 되는데 이것은 참으로 그의 속성 때문이 아니겠는가?  우리의 마음을 밝게 비추어 주시는 동일한 성령께서, 우리의 지식에 '따라  애정어린 마음을 갖도록 영감하여 주실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경외하고 사랑하도록 인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입장에서 자녀로서의 우리들의 의무와, 순종하는 종으로서의 우리 자신의 자세를 보여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또 그를 아버지로 깨달을 수도 없다. 간단히 말하면 복음의 가르침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후서 3장18절에서  우리에게 가르친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생각하고 그 형상을 닮으려는 살아있는 거울이다. 양심이맑지 않은 곳에는 지식의 공허한 허상만이 있을 뿐이다.

 

요한이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라고 말할 때, 우리는 그 어순을 주의깊게 살펴보아야 한다. 그는 순종을 지식과 관련시키고 있는 데, 사실상 원인이 결과 앞에: 나타나야  하는 .것처럼 그 후자가 순서상 먼저 온다.

 

"4. 그를 아노라 하고~~~~" ; 민음이 있노라고 자랑하면서도 경건함이 없는 자들을 어떻게 거짓말장이라고 요한이 증명하고 있는가?  그 반대적인 상황을 제시함으로써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그 효력을 가지고 있다고 이미 밝힌 바 있다. 하나님께서는 아무 근거도 없는 상상적인 존재로 우리에게 알려진 것이 아니라, 성령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 속에 깊숙이 친히 자신을 계시하여 주신다. 많은 위선자들이 그들 자신이 믿음을 가졌노라고 자랑하기 때문에, 사도 요한은 이런 자들의 허위를 비난하고 있다. 만일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대한 거짓과 헛된 고백을 하지 않았다면, 사도 요한의 이런 말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5.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율법을 참으로 지키는 것이 어떤 것인가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있다. :곧,그것은 하나님을 사랑하는 일이다. 내 생각에는이 귀절을 사람들이 이렇게 잘못 오해할까 싶은 염려가 생긴다. 즉 신실하게 그의 약속을 지키시는 하나님을 그들이 기뻐한다는 뜻으로, 차라리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곧, 신실한 마음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내가 앞에서도 말한 것처럼, 요한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원하시며, 믿는 자들의 거북함이 어떤 것인가를 간단하게 나타내 보이려고 하였다. 모세가 율법을 요약할 때에도 동일한 표현을 하고 있다.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참 여호와께서 네게 요구하시는 것이 무엇이냐: 곧 네 하나님 여호와를 경외하여 그 모든 도를 행하는 것이 아니냐?"(신 10 12). 그리고 또 신명기 30장 19절-20 절에서 계속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참여호와를 사랑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며, 그에게 부종하라, ~~~~~~~ " 등등의 말씀을 하고 있다. 영적인 율법은 우리의 외적인 행위를 요구할 뿐 아니라, 특별히 우리의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나님 사랑하기를 명령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에 대한 언급이 일체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불합리하다고 생각하여서는 안된다. 형제다운 인간적인 사랑은 바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데서부터 나온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뒷 부분에서 살펴보겠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생애를 살고 싶은 사람은, 자신의 모든 행위를 이 목적에 귀결되도록 하여야 한다. 만일 여기에 대하여 하 나님을 그렇게 완전하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반론을 제기한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겠다.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은혜를 따라서 이 완전을 이루려는 간절한 열망을 갖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한편 사도 요한은 하나님에 대한 완전한 사랑의 정의는 하나님의 말씀을 신실하게 지키는 것이라고 결론 짓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지식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이 면에서도 발전하여야 한다.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 ; .사도 요한은 그가 이미 언급한 복음의 그 열매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열매는 하나님 아버지와 또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교제하는 일이며 이렇게 함으로써 앞의 문장을 그것의 속편으로 확인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이 복음의 종결이고 사랑의 교제가 없다면, 오직 그는 마음을 다하여 하나님께 집착하는 믿음의 향상만을 결과하는 것으로 끝나고 말 것이다.

 

"6,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 일찌기 사도 요한은 한 실예로써 하나님을 빛으로 우리에게 제시한 바가 있다.  이제 그는 우리를 역시 그리스도에게로 부르고, 그를 닮으라고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단순히, 그리스도를 모방하라고 권고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우리가 그 리스도의 형상을 닮은 사실을 나타내도록 권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우리의 생활이나 행위에서 그리스도의 .형상을 갖는다는 것이 곧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들로부터 요한은 그 다음 귀절 곧 형제 사랑에 대한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7,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  이 말씀은 앞에 나타난 교훈을 설명하는 말씀으로써,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그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는 내용이다. 요한은 이 점에 대하여 신중하게 강조하고 있다. 첫째로, 우리는 진귀한 것은 미움을 받거나 의혹의 대상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둘째로, 우리는 우리에게 의숙하지 않은 멍에를 감당 하기가 어렵다는 사실도 안다. 여기에 추가하여, 우리가 어떤 종류의 교훈을 확신으로 받아들일 때, 그 안에서 어떤 변화나 새로운 형태의 요소들을 우리 것으로 소화하기에 괴로움을 당한다는 사실도 아울러 알고 있다. 이런 이유로 요한은 그가 가르치는 사랑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믿는 사람들이 처음부터 들어왔고 또 그렇게 하려고 애써왔던 사랑에 대하여 전하는 것이라고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율법 아래서 섭리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께서는 같은 생명의 법을 복음 아래서 지시하였다는 것으로, 옛 계명을 다르게 해석한다. 이것은 거의 사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그가 후에 복음의 말씀을 계명'이라고 부르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가 지금은 이것들을 복음의 최초의 요소들이라 부르고 있으며, 그들이 처음부터 가르침을 받았고, 복음의 요소들이 오래 전에 그들에게 침투되어야 했을 때, 믿는 사람들이 비정상적인 것처럼 이 복음의 요소들로부터 탈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는 판단하다. 그 관계대 명사가 원인을 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조사도 요한은 그것을 옛 계명이라고 부른 것은 그것이 옛 시대의 선조들에게 가르쳐진 것이어서가 아니라, 여기 나타난 당시의 믿는 자들이 처음 신앙 생활을 할 때 가르친 것이라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독자들이 그들이 복음을 갖게 된 그리스도 자신에게서 친히 이것이 흘러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그들이 믿음을 선포하 는 데 있어서 이것은 큰 역활을 하였다.

 

"옛 계명이니~~~~~~" ;  여기 나타난 '옛 계명'이란 말은 광범위한 영역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사도 요한이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라는 문장을 추가하였을 때 더 충분하게 설명이 되었다. 내 생각에는 사도 요한이 복음을 최근에 나타날 가르침으로 생각하여서는 안되고, 하나님으로부터 흘러나와 그의 영원한 진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고 여겨진다. 이것은 마치 그가, "여러분은 복음의 태고성을 그것이 여러분에게 나타난 그 날자로써 척도하지 말라. 왜냐하면 이 복음은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영원한 뜻으로서 계시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이 거룩한 생명의 법칙을 먼저 여러분이 그리스도를 믿도록 부름 받았을 때 여러 분에게 주셨고, 또 이 복음은 하나님께서 항상 결정하시며 .명령하시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그리고 조금도 의심할 것 없이 이이 복음이 하나님께로부터 기원되었다는 사실로 그 태고성을 인정 받으며, 또 믿고 신뢰할 충분한 가치성을 지니는 것이다. 왜냐하면 인간의 허구란 그것이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흘러간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진리를 .압도하는 그런 권위를 요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8. 다시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쓰노니" ;  내 생각에는 이 말씀을 해석하는 사람들이 사도 요한의 의미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그렇게 암시 하심으로써 날마다 새롭게 하시기 때문에 믿는 사람들이 그들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들 자신이 매일 그 속에서 훈련을 하는 것이다. 그들은 그 이상의 더 탁월한 것을 그들의 생활에서 달리 찾아볼 수 가 없다. 자녀들이 배울 요소에 대해선 무엇이 더 위하고 더 실제적인가 하는 문제는 뒷 부분에서 설명된다. 그러나 요한은 시간이 감에 따라 형제의 사랑에 대한 교훈이 너와  같다는 것을 부여하고 있으며, 그것이 가장 완전 이것을 말 한 요소가 되기 위하여 영원히 번창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을 말해 줄 필요는 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항상 그들이 알아야 할 정도 이상으로 알고 싶어하는 호기심을 가지고 있으며, 좋은 의미에서 또 항상 새로운 것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수한 오류 투성이의 악만이 나타나는 단순한 교훈에 권태를 느끼게 되면 사람들은 계속 새로운 신비만을 추구하게 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배우는 생애를 사는 데 있어서 우리를  철저히 지켜 주시기 위하여 이런 과정에서 나오셨다는 것을 알게 되면, 이 런 유의 갈망에 대한 멍에는 풀어지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르게 사는 올바른 지혜의 목표에 이르고자 하는 사람을 사랑으로 나아가도록 하여야 한다. 

 

"참된 것이라" ;  이 이유로서 요한은 그가 말한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의 생애의 방법에 관계되는 한, 사랑이라는 이 한 계명 속에 그리스도의 전 진리가 포함되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어떤 더 큰 계시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는 참으로 만물의 마지막이며, 완성이다. '진리'라는 말은 만물이 말하자면 그 목표에 바르게 서있다는 것을 나타낸다. 즉 완성된 단계나 충만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교사도 요한은 그리스도를 머리로서 그들에게 연합시키고 있다.  마치 교회의 몸이 다른 방법으로는 완성됨이 없거나, 혹은 거룩한 사랑이 그들 가운데서 상호 번창할 때에 그들이 실질적으로 그리스도에게 연합하는 것이라고 .말한 것과 같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다르게 해석한다.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진리가 너희에게도 있다" 라고. 그러나 나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는 어두움이 지나가고~~~~~~" ; 여기 나타난 현재형은 그것이 현재형이기는 하지만 사실상 여기서는 과거를 나타낸다. 그리스도께서 비추시자 우리가 이 해의 광명을 갖게 된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믿는 사람들이 마땅히 지혜로 와야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심지어 사도 바울이 빌립보서 3장 12절부터 13절에서 그가 깨닫지 못하는 것을 함께 달으려고 애쓴다고 말한 것처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만이 어두움을 충분히 물리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매일 매일의 진보가 필요한 것이다. 모든 사람의 믿음은 밝은 정오에 이르기 전에 새벽의 과정을 거치게 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에 게 전진하라고 명령하신 동일한 교훈을 지금도 계속하고 관계시므로, 복음에 대한 지식은 의의 태양이신 :그리스도께서 빛나는 이곳에서는 참 빛이 되신다. 이렇게 하여 인간 자신의 허구로서 복음의 순수성을 타락시키려는 자들의 방약무도한 태도를 분쇄할 수 있으며, 또 우리는 로마 교황의 전 신학에 대항하여 그들의 이단성을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톨릭이야 말로 참 빛을 완전히 가리우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9. 빛 가운데 있다 하며~~~~~~" ; 사도 요한은 같은 은유법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사랑이야 말로 우리의 생애가 증명되는 유일하고 참된 법칙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 단련받은 법칙이 복음서에 기록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우리가 계속 밝게볼 수 있는 정오의 태양과 같은 것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다. 다른 한 편으로 그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모르고 어두움 속에서 방황하는 맹인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사도 요한이 앞에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설명하였고, 이제는 형제들의 사랑에 대하여 말하고 있는데 결과와 원인 사이이므로 모순이 없다. 더구나 이 두 가지는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으므로, 서로 분리될 수가 없다.

 

요한은 뒤에 나오는 3장에서 우리가 형제를 사랑하지 않으면서도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사람에게 밝혔는데, 이것은 참으로 사실이다.  이제 그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은 이웃에 대한 우리의 사랑으로써 증명이 된다고 밝히고 있다. 간단히 표현하면,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하나님 안에 있는 그런 사랑이며, 동시에  그것은 사람을 사랑하는 일이므로 사도 요한이 사랑을 논하면서 하나님께 대한 사랑과 '형제 사랑을 함께 취급하고 있다고 하여 조금도 이상할 것은 없다. 또한 성경에 흔히 나타나고 있는 일이다. 전 인생의 완성을 때로는 하나님 사랑에 두고 있다. 다른 한편 사도 바울은 자기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다 이루었다(롬 13: 8)고 말하고 있으며, 그리스도께서는 율법의 요점은 의와 인과 믿음(마 23? 23)이라고 선포하시고 있다. 이 모두가 다 진리이며, 잘 조화된 말씀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면 자연히 형제를 사랑할 수 밖에 없으며, 사실상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의무는 십계명에 나타난 말씀대로 이웃을 사랑하 는 것으로 증명된다. 이렇게 사랑은 우리의 생애가 나아가야 할 목표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이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보다 다른 것을 더 즐겨 택한다. 사랑에 대한 관심으로 자기 속에 거리낌이 없어야 한다. 이렇게 사는 사람은 결코 흔들임이 없을 것이다.

 

"11.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  '사도 요한은 다시 한번 우리에게 경고하고 있다. 아무리 우리가 눈부신 덕을 나타내 보일지라도 우리에게 사랑이 없으면 그것은 죄악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라고. 이 성경 귀절은 고린도전서 13장과 비교가 될 수 있으며,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 교훈은 세상 사람들에게는 애매한 점이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런 면에 마비되어 있는데ʼ 나는 무엇이 그들을 그렇게 가리우는지 잘 모르겠다. 허위적인 위엄이 '그들 모두의 눈을 현혹시키어 형 제 사랑을 잊었거나, 최소한 구석으로 밀어 버렸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