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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마태복음

팔복 (Calvin선생주석)

마 5:3.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그리스도께서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부풀어 오르게 하시거나, 스토아

학파의 철학자들처럼 냉혹한 완고함(ferrea contumacia)으로 자기 백성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지 않고, 이런 식으로

할 때에야 그들이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그들을 이끄셔서, 그들로 하여금 영생에 대한 소망을 품고서 인내

할 힘을 얻게 하신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자기 자신 속에는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만을

의지하는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낙심하거나 절망에 압도된자들은 하나님을 향하여 불평하고, 이것

은 그들의 심령이 교만하고 오만하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 5:4.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말씀은 바로 앞에 나온 말씀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일종의 부록() 또는 확증()이

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의 통상적인 생각은 고생은 사람을 불행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고생은 끊임

없이 슬픔과 애통함을 불러온다는 생각에서 생겨난다. 사람들은 애통하는 것만큼 복이나 행복과 거리가 먼 것은 없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은 불행하지 않다고 단언하실 뿐만 아니라, 애통하는 것 자체가 영원

한 기쁨을 받을 수 있도록 그들의 심령을 준비시키고, 그들에게 오직 하나님 안에서 참된 위로를 구하고자 하는 강한 동기

를 부여함으로써, 복이 있는 삶을 사는데에 기여한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따라서 바울은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

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한다(롬

5:3-5)고 말한다.


마 5:5.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온유한 자는 온화하고 점잖은 성품을 지닌자들로서 남들로부터 해()를 받아도 쉽게 화

내지 않고, 악인들에게 동일한 행동으로 갚아주기보다는 무엇이든지 참고 견딜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을 가리킨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그런 자들에게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라고 약속하신 것을 말도 되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약속이라

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도리어, 남들로부터 그 어떤 공격을 받으면 불 같이 화를 내어 격퇴하고, 남들이 자기에게 해()

를 끼치면 반드시 복수할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야말로 땅에 대한 '지배권을 지닌 자들이 아닌가. 남들로부터 당하는 악

행에 대하여 온화하게 반응하고 참고 견디면 견딜수록, 그 악행은 점점 더 대담해지고 오만방자해진다는 것을 우리는 경

험상으로 확실히 알고 있지 않은가. 그런 까닭에, 그대들은 양처럼 온순하게 구는 자들은 즉시 닥치는 대로 삼켜 버리는 법이

기 때문에, 우리는 늑대를 만나거든 악을 쓰고 덤벼야 한다"는 마귀적인 속담이 생겨나지 않았던가. 그러나 그리스도께

서는 그의 보호하심 및 아버지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악인들의 분노 및 폭력과 대비시키시면서, 타당한 근거들에 의거해

서 온유한 자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자 땅의 주인들이 될 것이라고 분명하게 선언하신다.

 

이 세상의 자녀들은 남들이 그들에게 해악을 끼칠 띠에는 잔인하게 복수해 주고, 무기"(겔 32:27)를 가지고 자신의 생명을 지키지 않으면, 결코  그들 자신이 안전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그러나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생명을 지키시는 분이심을 믿기 때문에 우리가 해야 할 모든 것은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숨는 것뿐이다(시 17:8). 그의 양 무리에 속한 자로 인정 받고자 한다면, 우리는 양이 되지 않으면안 된다. 내가 지금까지 말한 것이 사람들의 경험과 모순된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나는 먼저 사납고 흉포한 사람들이 그들 자신이 느끼는 불안감 때문에 얼마나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들이 그렇게 사납게 날뛰는 삶을 영위하는 동안에는 비록 골백번이라도 땅의 주인이 되어서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고 할지라도, 사실 그들은 아무것도 소유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반면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비록 이 땅에서 그들 자신의 확실한 소유를 지니고서 확고한 발판을 굳히고서 살지 못한다고 할지라도, 이 땅에서 걱정 없고 평안한 안연한 삶을 누릴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은 허구적인 소유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이 거주하는 이 땅이 하나님이 그들에게 하사하신 곳임을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하나님은 그의 손을 뻗으셔서, 악인들의 폭력과 분노로부터 그들을 지키신다. 그들은 온갖 종류의 공격에 노출되고, 악인들의 악의에 시달리며, 온갖 종류의 위험에 둘러싸일지라도, 하나님의 보호하심 아래에서 안전하다. 그들은 적어도 이미 하나님의 이 은혜를 맛본 자들이다. 그리고 그들이 마지막 날에 세계를 유업으로 받게 되기 전까지 그들에게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6. 주리고 목마른 자는 도 전북 있다니." ;  주리고 목마르다는 것은 여기에서 비유적인 표현으로 사용되어서, 삶에 꼭 필요

한 것들조차도 없을 정도로 가난을 겪고, 심지어 속임을 당해서 자신의 권리를 빼앗기기까지 한 것을 의미한다. 마태는

에 주리고 목마른 자라고 말함으로써, 한 부류의 사람들을 통해서 그 밖의 다른 모든 사람들을 나타내는 표현을 사용한다.

마태는 그들이 걱정하고 신음하면서도 오직 그들에게 합당한 것만을 원한다고 말함으로써, 그들이 지금까지 부당한 대우

를 받아 왔다는 것을 좀 더 강력하게 부각시킨다. "아주 소박한 바람들만을 가지고 있어서 그들에게 합당한것 외에는 아무것도 그들에게 주어지기를 바라지 않는데도, 굶주림으로 죽어가는 자들처럼 신음하며 고통당하는 처지에 있는 자들은도 복이 있다." 그들은 그들이 겪는 괴로움과 걱정 때문에 남들로부터 조소를 당하지만, 그것은 "복"을 받기 위한 확실한 준비 과정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마침내 배부를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언젠가는 그들의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정당한 바람들을 만족시켜 주실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동정녀 마리아의 찬송을 통해서 알고 있듯이, 주리는 자를 좋은것

으로 배불리시는(눅 '1:53) 것은 하나님의 몫이기 때문이다.


"7.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  이 역설도 사람들의 통념과 모순되고, 일반적인 정서와 배치()된다. 세상은 남들의

고통에는 관심을 갖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편안함과 안일함만을 추구하는 자들이 행복한 자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

께서는 자신의 환난을 기꺼이 참고 견딜 준비가 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남들의 환난에 동참하는 자들, 즉 불쌍한 자들을 돕

고, 곤경에 처해 있는 자들과 자원하여 함께 하며, 그들을 좀 더 수월하게 돕기 위해서 그들과 동일한 정서를 '덧입는 자들

은 복이 있다고 말씀한다. 그는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을 덧붙이신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만

이 아니라 사람들 가운데서도 긍휼히 여김을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셔서 그들을

인도적으로 대해 주고자 하는 마음이 이 생기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온 세상은 종종 배은망덕해서, 그들에게 자비를 베푼 자들에게 가장 악한 것으로 되돌려줄 수 있지만, 긍휼히 여기고 자비를 베푸는 자들에게는 하늘에 은혜가 쌓여서, 그들

은 언젠가는 하나님이 그들에 대하여 은혜로우시고 긍휼이 많으신(시 103:8;145:8)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8. 마음이 청결한 지는 복이 있나니." ;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 모든 사람의 통념과 일치한다

고 생각하기 쉽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마음의 청결이 모든 미덕의 어머니라는 것을 인정한다. 그렇지만 영리함을 가장 큰

미덕의 자리에 두지 않는 자는 백 명 중의 한 사람도 없다. 그런 까닭에, 머리를 잘 굴려서 교묘하게 성공적으로 속임수를

행하고, 여러가지 간접적인 수단들을 이용해서 자기와 거래하는 자들로부터 솜씨 좋게 이득을 챙기는 자들은 보통 복이 

있는 자들로 여겨진다. 영악하게 행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마음에 없는 말이나 표정을 겉으로 나타내는 법이 없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심으로써, '그리스도께서는 자기가 육신적인 이성에 전혀 동의하

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신다.


단순한 사람들은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거나 그들 자신을 빈틈없이 돌아보지 않는다는 이유로 비웃음을 당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이 세상에서 남들을 속일 수 있는 영리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면, 그들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 그들을 이끌어 더 높은 곳을 보게 하시고 더 깊이 생각하게 하신다.

"9.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 화평하게 하는 자는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화평을 구하고 싸움이나 시비를 피할 뿐만 아니라, 사람들 간의 이해관계를 해결해서 모든 사람에게 화평하게 살라고 조언하고, 미움이나 싸움이 일어날 소지를 없애는 자들을 가리킨다. 이 말씀에는 타당한 근거들이 있다.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을 화해시키는 일은 힘들고 진저리나는 일이기 때문에, 화평을 이루고자 애쓰는 온유한 성품을 지닌 자들은 모든 당사자들로부터 욕을 먹고 불평과 항의를 들어야 하는 모욕적인 대우를 감수할 각오를 하지 않으면 안 된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다 자신의 주장을 편들어 줄 자들을 갖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들 가운데서 화평을 이루어 내고자 할 때, 비록 우리의 노력이 사람들에게 먹혀 들어가지
않을지라도, 우리가 사람들의 호의에 의지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하여,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우리를 자신의 자녀로 여기시는 화평의 하나님(롬15:33)을 바라보라고 명하신다. 왜냐하면, 여기에서 하나님의 자녀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여김을 받는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10.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  그리스도의 제자들은 이 가르침을 아주 절실하게 필요로 한다. 우리의 육신이 받아들이기가 어렵고 싫어하는 것일수록, 우리는 그것을 더욱더 진지하게 우리의 묵상의 주제로 도 심아야 한다. 우리가 진정
으로 그리스도의 군사라면, 세상 사람들의 대다수가 우리를 미워하여 일어나서, 우리를 죽이려고 추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실상()이다. 세상의 임금인 사탄은 그의 추종자들을 분노로 충만하게 해서, 그리스도의 지체들을 끊임없
이 적대하게 하기를 결코 그치는 법이 없다. 의로운 삶을 살고자 애쓰는 자들이 그들에게 합당하지 않은 방식으로 공격을 당하고 괴로움을 겪어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기괴하고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의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벤전 3:13)라고 말한다. 그렇지만, 세상의 고삐 풀린 악으로 인하여서, 선한 자들이 의()에 대한
열심 때문에 불경건한 자들의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난다.


무엇보다도,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의 통상적인 운명이라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왜냐하면, 육()은 복음의 가르침을 견딜 수 없고, 자신의 악덕에 대하여 책망을 받고 참을 수 있는 자도 없기 때문이다.

 

"10.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 ;  이것은 선하고 옳은 일을 행하고자 하는 진지한 바람 때문에 자기가 할 수 있는 한 악한 일들을 반대하고 선한 일들을 옹호 하다가 악인들의 미움과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자들에 대한 묘사이다. 하나님의 진
리를 최고의 자리에 두는 것은 지극히 옳은 일이다. 따라서 그리스도께서는 이 표지()를 통해서 순교자들을 범죄자들 및 행악자들로부터 구별하신다. 나는 이제 내가 조금 전에 말했던 것, 즉 무릇 그리스도 에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 3:12)고 바울이 말한 대로, 이 말씀이 모든 경건한 자들에게 해당된다는 것으로 되돌아가고자 한다. 하나님이 우리의 연약함을 생각하셔서, 불경건한 자들이 그들이 원하는 대로 우리를 괴롭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우리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그 휴식 기간 동안에 이 가르침을 묵상하여, 필요할 때가 되면 언제라도 이 싸움을 다시 할 준비를 갖추어서, 우리가 잘 준비되지 않은 채로 싸움에 임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현세의 삶을 살아가는 전 기간 동안에 경건한 자의 처지는 아주 비참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천국의 삶에 대한 소망을 지니라고 하시는 것은 합당하다. 여기에 그리스도의 역설()과 스토아 학파의 헛소리 간의 주된 차이점이 있다.


즉, 스토아 학파에서는 각 사람은 자신의 마음과 생각에 만족하여 자기 자신이 복을 만들어 내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이 망상이 아니라 장래의 확실한 상()에 대한 소망이라는 토대 위에 우리의 복을 세우신다는 것이다.


"11. 너희를 욕하고" ; . 눅 6:22.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회 이름을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그리스도께서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를 믿는자들을 위로하고자 하셨는데, 이것은 그들이 세상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당하는 것
을 볼지라도, 그들로 하여금 담대함을 잃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었다. 왜냐하면, 불경건하고 불경스러운 자로 낙인이 찍혀서 교회로부터 내쳐지는 것은 결코 가벼운 시험()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외식()하는 자들,즉 위선자들만큼 독기를 품은 자들은 없다는 것을 아셨고, 이 복음의 원수들이 어떤 식으로 광분하여 미친 듯이 그의 작고 초라한 양 무

리를 공격하게 될지를 미리 아셨다. 그러므로 자기 백성이 이 원수들로부터 아무리 많은 욕을 먹어도 압도당 하거나 믿음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해서, 확실한 방비()를 자기 백성에게 공급해 주시고자 하시는 것이 그의 뜻이었다. 그런 까닭에, 우리가 그리스도를 부인하고자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가톨릭의 폭군들이 우리를 그들의 회당에서 출교시키고 쫓아내고자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그 출교를 두려워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  이 말씀의 의미는 우리가 부당하게 욕을 먹을 때에 압도당하지 않기 위한 비결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마음을 들어서 하늘을 바라보자마자, 우리는 거기에서 슬픔을 쫓아내어 줄 수 있는 기뻐해야 할 무수한 이유들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사용되고 있는 상이라는 단어에 관한 교황주의자들의 어이없는 추론들을 반박하는 것은 수 일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꿈꾸는 것과는 달리, 주님이 여기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값없이 거저 주시는 상에 관한 약속이어서, 상과 공로 간에는 상호적인 관계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게다가, 사람들 가운데서 가장 선한 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행한 그 어떤 선행도 불완전하고 결점이 있다는 것을 고려하면, 하나님이 상을 줄 만하다고 판단하실 수 있는 그런 선행이나 공로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나로 말미암아 또는 인자로 말미암아(눅 6:22)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의 악한 ,말을 할 때에는"이라는 구절에 다시 한 번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러므로 에 예적 방백들이 자신들을 박해한다는 단 한 가지 이유를 들어

서 기뻐하였던 도나투스파(Donatista)처럼, 자신의 잘못 때문에 박해를 받는 자(벤전 2:20)는 자기가 마치 그리스도의 순교자라도 된 듯이 자랑해서는 안 된다. 오늘날에도 재세례파는 자신의 헛소리들로 교회를 어지럽히고 복음을 비방하면서도,
정작 단죄를 당하면, 그것이 정당한 것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그들이 그리스도의 기치를 들고 나아가다가 박해를 당하는 것처럼 자랑한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의를 위하다가 박해를 받는 자들만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신다.


"12.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  그리스도께서 이 같은 말씀을 더하신 것은 사도들이 이 힘을 다하여 고군분투하지도 않은 채로 승리하는 것을 기대하지 않게 하시고, 또한 박해를 당할 때에도 실망하지 않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다. 성경에는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에서 모든 것이 회복되리라는 약속이 도처에 나오기 때문에, 사도들이 싸울
생각은 하지 않고, 헛되고 교만한 자만에 빠질 위험성이 있었다. 성경의 다른 구절들을 보면, 실제로 그들이 어리석게도 그리스도의 나라는 부()와 사치스러운 것들로 차고 넘칠 것이라는 망상을 하였다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렇게,'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선지자들의 자리를 이어 받자마자 선지자들이 전에 수행하였던 것과 동일한 싸움들을 해나가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그들에게 경고할 타당한 이유가 있으셨다.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 이라는 구절은 단지 선지자들이 시간 순서상으로 그들보다 전에 있었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선지자들은 그들과 동일한 부류에 속한 자들이기 때문
에, 그들이 '선지자들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사람들은 혼히 이 축복문들을 이홉 개로 분류하는데, 그런시도는 너무나 하찮아서 길게 반박할 필요조차 없다.


"눅 6:24. 화 있을진저 너희 부요한 자여." ;  누가는 앞에서 네 가지 복을 얘기하였기 때문에, '여기에서는 네 가지 저주를 그 복들과 대비시켜서 말하면서, 각각의 복과 저주를 서로 대웅시킨다. 이러한 대비는 불경건한 자들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킬
뿐만 아니라, 믿는 자들에게도 세상의 헛되고 기만적인 유혹들에 취해서 잠을 자서는 안 되겠구나 하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우리는 사람들이 형통함에 취하거나 감언이설이라는 몇에 걸리기가 얼마나 쉬운지를 안다. 이런 이유로, 타락한 자
들이 행하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잘 되고 형통하는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자녀들은 종종 그 타락한 자들을 부러워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부요한 자 대하여 저주를 선언하신다. 여기에서 부요한 자는 모든 부자들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에서 위로를 찾는 자들, 즉 세상의 소유나 재물에 완전히 사로잡혀서 내세의 이 삶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 자들을 의미한
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런 것이다. 즉, 재물은 사람을 복이 있고 행복하게 만들어 주기는커녕 흔히 그 사람을 멸망시키는 화근이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아서, 재물 그들에게 이 덫이 되지 않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소망
을 땅에만 두게 하지 않아서, 천국이 그들에게 닫혀지게 만들지만 않는다면, 부자들이라고 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는 재물이나 부() 자체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데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서, 가난한 도 거지 나사로가 부자 아브라함의 에 품 안겨(계속 작성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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