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계 6: 7 ~ 11)
넷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넷째 생물의 음성을 들으니 말하되 오라 하기로 (7) 내가 보매 청황색 말이 나오는데 그 탄 자의 이름은 사망이니 음부가 그 뒤를 따르더라 그들이 땅 사분의 일의 권세를 얻어 검과 흉년과 사망과 땅의 짐승들로써 죽이더라 (8) 다섯째 인을 떼실 때에 내가 보니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가진 증거로 말미암아 죽임을 당한 영혼들이 제단 아래에 있어 (9) 큰 소리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 하니 (10) 각각 그들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며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도 자기처럼 죽임을 당하여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11)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7 ~ 8 절" ; 청황색 말.- 청황색은 공포(恐怖)와 시체(屍體)의 빛이다. 이 단계의 환난은 그 절정(絶頂)에 이른 것이다. 그러므로 그 상징은 청황색이며,
"검과 흉년과 사망과...짐승" : - 의 모든 재앙의 총 출동으로 나온다. "검"은 천시(戰時)의 살륙(殺戮)을 상징한다. 이방 각지에 복음이 선포될 때에 전쟁과 정변(政變)이 유조(有助)하게 된 일은, 역사상에 얼마든지 있다. 7장 주석 끝의 설교를 참조하여라. 고대 로마에는 내란이 심하여 살륙이 쉬지 않고 계속된 시기가 있었다. 곧, 콤모더스 황제가 살해된 뒤에(주후 193년) 90년 간 소요(騷擾)가 쉬지않아, 그 동안에 32 황제가 폐립(廢立)된 중, 22황제가 위군(僞君)이었다(Gibbon pp.50-197). 이렇게 땅 위의 질서가 혼란하여 안전성이 없으므로, 사람들이 복음으로 돌아왔다. "흉년"은 정치가 어지러워지고 전화(戰禍)가 편만(遍滿)한 때에 기근(饑饉)이 동반하는 것이 역사의 경험이다. "사망"은, 헬라 원어로 다나토스(* )인데, 70인역(LXX)은 온역(히브리어로 떼베르 * )의 의미로 이 다나토스를 사용한 것이 적지 않다(30/50). 그러므로 헬라어 다나토스는 온역의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도 "사망(다나토스)"이 온역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재앙들은, 예수님의 예언하신 그것(눅 21:10, 11, 전쟁, 기근, 온역)과 근사(近似)하고, 에스겔서에 예언한 그것(겔 14:21)과도 잘 합한다. 온역으로 인하여 인명이 상한 일은 역사상에 많다. 로마에는 하루에 10만명이 죽은 일이 있었으므로, 이 계시는 그것을 가리킨다는 학자도 있다.
"땅 사분 일" ; .- 이것은, 8:7-12에 있는 3분의 1보다 적은 수량인 듯하다. 그러나 이것이 단순한 상징적 의미만 가지는지, 혹은 여자적(如字的) 의미를 가지는지 알기 어렵다.
"땅의 짐승으로써 죽이더라" ; .- 고대의 로마에도 이런 수해(獸害)가 많았다. 그 때 사람들이 말하기를, 이런 수해가 있는 이유는, 기독교인들 때문에 신의 진노가 임한 까닭이라고 하였다. 그 말에 혹이 대답하기를, "기독교인들이 우리 나라에 있기 전에는 이런 재난(災難)이 없었는가?" (Non ante nos?) 하면서 비웃었다고 한다. 어떤 설에, 이 수해(獸害)는 적그리스도들의 핍박 행위를 상징한다고 한다.
"9-11절 . 죽임을 당한 영혼들" ; .-이 엇구는 헬라 원어(*)의 바른 번역이 아니다. 그 바른 번역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이라고 한다. 이것은, 역사상에 있는 순교 사건들을 일반적으로 가리킨 듯하다. 혹설에 이것은, 주후 270-304년의 로마 디오클레시안황제의 기독교 박해를 예언한 것이라고 한다.
"제단 아래 있어" ; .- 모세가 설립한 성소의 제단은, 하늘에 있는 것에 대한 모형이라고 성경이 말한다(히 9:23). 주님 예수께서 승천하시고, 헌신하신 제단도 그것인 듯하다(히 9:24). 순교자들은, 하늘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이 성단 아래서 겸손히 애걸한다. 그 기도는 이러하니 말하기를, "거룩하고 참되신 대주재여 땅에 거하는 자들을 심판하여 우리 피를 신원하여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 라고 한다. 혹자는 말하기를, 이것은, 신약적(新約的)이 아니고 구약적(舊約的)인 복수(復舊)사상이라고 하며, 구약 시대의 순교자들의 기도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구약 시대의 성도들도 함부로 복수해 주시기를 기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우리가 시편을 읽어보면, 성도는 오직, "하나님의 원수"에게 한하여서만 저주를 발설하였고, 자기 개인의 원수에 대해서는 그리하지 않았다. 그것은 신약시대에도 일반이다. 신약시대의 신자도, 하나님의 원수를 위하여는 복을 빌지 않고 저주를 빌었다(갈 1:8).
누가 그런 원수인지 알기 어려우니 만큼, 그는 그런 기원(祈願)을 함부로 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천계(天界)에 가서는 그 원수를 분명히 알수 있으니, 그런 기원을 발할 수 있겠다. 그러므로 이 기도는, 신약시대 순교자들의 것일 수 있다. 모팟트(Moffatt)는, 이 순교자의 기도에 대한 말이, 에녹 가경(假經)에서 섭취된 사상이라고 한다. 에녹 가경의 귀절은 다음과 같다. 곧, "심판을 위하여 부르짖기를 계속하라. 그것(심판)이 반드시 오리라. 너희가 받은 고난이 너희를 괴롭게 한 자들에게 돌아가리라"(En. 104:3)고 한다. 그러나 모팟트(Moffatt)의 이 견해는 억측이고 신임할 수 없는 말이다. 에녹 가경의 것은 부르짖기를 "계속하라"고 한 반면에, 요한 계시록 문구는 "아직 잠시 동안 쉬"라(11절)고 하지 않았는가? 순교자의 피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과(창 4:10), 또 그것이 갚음을 받는 다 함은, 주님께서 친히 가르치신 바니(마 23:35), 이 귀절은 정경에 근거한 것이다. "거룩함"은 죄에 반대하는 성질이니 성도를 신원(伸寃)하실 성품이고, "참되신 대주재"란 말은 진정하신 대주재란 의미이니, 그가 과연 상선 벌악(賞善罰惡)하실 권세를 가지셨다는 말이다.
"대주재"란 말은, 헬라 원어로 데스포테스(* )니, 전재자(이는 타락한 인간의 불의한 專恣가 아님)란 의미이다. 이 전재란 것은 누구나 그의 뜻을 항거할 수 없다는 의미의 주권자이다. 그가 그 성도를 신원하려 할 때에 아무나 그의 행위를 방해할 수 없다. "땅에 거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의 대적인데 땅에 속한 자들이다(3:10, 8:13, 11:10). 요 8:23 참조. "어느 때까지 하시려나이까"란 말을 보니, 하나님은 오래 참으시는 신으로서 사람들의 죄악이 관영하기 전에는 함부로 벌하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그 기산 동안 고대하며 신음한다.
"흰 두루마기" ; .- 이것은, 촬스(Charles)의 견해와 같이 혹종의 영체(靈體)가 아니고, 그리스도의 보혈로 죄 사함 받아서 얻은 완전한 칭의(稱義)와 구원(救援)의 영광을 가리킨다. 모팟트(Moffatt)는 이것을 가경(Ascension of Isaiah 9:6)의 유사구(類似句)와 관련 있게 보았다. 그 귀절에 말하기를, "칠층천에서 아벧, 에녹, 기타 유대의 성도들이 윗세계의 옷을 입었는데 그것은 부활체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가경의 사상은 계시록의 것과 판이하다. 계시록의 흰 옷은 결코 부활체를 가리키지 않는다(14:13). 그 수가 차기까지 하라. 히 11:39, 4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