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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

1. 성경 (롬1:18 ~23)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 (18)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그들 속에 보임이라 하나님께서 이를 그들에게 보이셨느니라 (19)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핑계하지 못할지니라(20)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21)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22)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23)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8 하나님의 진노가……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 ; 의가 오직 복음으로 말미 암아서 만이 주어진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반대되는 것들을 비교하여 바울은 이제 논증한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없으면 모두가 정죄받는다는 것을 그가 논설(論說)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복음에서만 발전되는 것이다. 그가 예증으로 둘고 있는 첫번째 확증온 세계의 구조와 그 구성 요소들의 가장 찬란한 질서를 인하여 인간이 하나님께 영광 들릴 수 있도록 되어 있었음에 틀림없는 데도, 그들의 의무를 이행한 사람온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독하며, 그리고 비열하고 간악한 배온망덕의 죄가 있다는 증거인 것이다. 어떤 사람듐은 이것이 바울의 첫번째 명제(命題)라고 주장한다. 그리하여 그가 그의 강화(講話)를 회개로 시작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내 생각에는, 바울은 여기서 그의 논쟁상의 문제를 시작하고 있으며, 그리고 중심 주제는 앞의 문장에서 전술된 것으로 본다. 그의 목적온 구원을 어디서 찾아 구해야 할 것인가를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데 있다. 그는 우리가 그것을 복음으로 말미암아서만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우리의 육체가 구원에 대한 찬양을 하나님의 은혜에게만 돌리는 데 이르기까지 자세를 낮추기를 싫어할 것이기 때문에, 온 세계가 영원한 사망의 죄를 짓고 있음을 바울은 나타내 보여준다. 이것으로부터 우리가 결론지을 수 있 는 것은, 우리 모두가 길을 잃어버린 까닭에, 우리는 생명을 다른 방도에 의해서 회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각 단어를 세밀하게 겁토하게 되면 본절의 의미를 이해하는 대 크게 도움을 얻을 것이다. 어떤 주석가들은 경건치 못한 것은 하나님에 대한 예배를 더럽혀 모독하는 것을 가리키며, 불의는 인간들에 대한 정의(正義)의 결여를 가르키는것 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사도가 이 불의를 참된 종교를 경시하는 것이라고 곧 이어서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두 단어가 갈온 의미를 갖고 있는 것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은 변환법(~ 換法)에 의하여 “모든 사람들의 경전치 않음", 또는 “모든 사람들이 유죄 판결을 받는 원인이 되는 "경건치 않음"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한 가지 사실, 즉 하나님께 대한 배은망덕이 두 가지의 다른 표현에 의해서 표현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해서 두 가지 방법으로 범죄하기 때문이다. '아세 베이아 ; 불경건' 는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을 함의하고, '아디키아;불의'는 사람이 하나님께 속하는 것을 자기 것으로 삼음으로써 부당하게 하나님에게서 그의 합당한 존귀를 박탈한 것을 의미한다. ' 진노’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대로 인간적인 용어로 하나님을 가리켜 말한 것으로써, 하나님의 보복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심판하실 때, 인간적인 사고 방식에 의하면, 그가 분노의 모습을 나타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하나님의 감정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처벌 당하는 죄인의 느낌(감정)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말하기물, 하나님의 전노가 “하늘로 좇아"를 · 형용사로 해석하여 , 마치 바울이 "하늘의 하나님의 진노"를 말하기나 한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나 나의 견해로는, 사람이 이 세상 어디를 가서 두리번거려 보아도, 그는 아무 구원도 찾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온 세상에 쏟아 부어져 하늘에까지 가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는 것이 보다 정확한 해석이다. 하나님의 진리’는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의미한다. 그리고 '진리를 막는다’는 말은 그것을 삭제하거나 덮어 감추는 것을 뜻한다. 그런 까닭에 진리를 막는 자들은 절도 죄를 범한 것이 된다. '불의’로는 히브리어의 관용구로서 '부당하게' (injuste )를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까지 우리는 그 뜻을 분명하게 하려고 노력해 왔다.

“19. 이는 하나님을 알 만한 것이 저희 속에 보임이라……” ; 바울은 이갈이 하나님을 아는 데 바르고 편리한 것이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주님의 영광을 나타내 보여주는 것과 관련되어 있는 모든 것, 즉 우리가 하나님께 영광 돌릴 수 있도록 유도하며 자극해 주는 모든 것을 그는 의미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위대하신 하나님을 완전하게 충분히 이해할 수 없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에 대해 알리시는 모든 선포를 그가 우리의 제한된 능력에 적응시키시는 것처럼 ( ad modulum nostrum attemperat ), 인간들도 자신들을 한정시켜야 하는 어떤 한계들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바보들만이 하나님의 본체를 알려고 하는 것이다. 완전한 지혜의 교사이신 성령께서 까닭없이 '토그노스톤;알만한 것으로' 우리의 주의를 환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것이 어떻게 알만하게 되었는가를 섣명하게 되는 것이다. 본문의 효과는 전치사 "속에" (in;단순히 ‘저희’가 아니라 .저희 속에')에 의하여 증가되어 있다. 바울이 자주 사용하고 있는 히브리 문체에서 불변사 '베 ;속에' 는 흔히 군말에 지나지 않지만, 이 경우는 하나님의 속성의 현현을 그가 말하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하나님의 속성의 현현은 너무나 강렬한 것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피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린다. 이는 우리들 모두가 그것이 우리 자신의 심령 속에 새겨져 있음을 느끼고 있는 것에 틀림이 없기 때문이다. 바울이 "하나님께서 이를 보이셨느니라”고 말한 것은 인간이 창조된 세계의 구경군이 되도록 창조되었으며, 그리고 대단히 장엄한 형상(피조 세계)을 눈여겨 봄으로써 세계의 조물주이신 하나님 자신에게로 사람이 인도함을 받게 할 목적으로 눈이 부여되었다는 것을 뜻하고 있다.

“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이…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 하나님 자체는 우리가 볼 수 없다. 그러나 그의 위엄이 그의 모든 작품들과 그의 모든 피조물에서 빛을 발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것들로 하나님을 알아 볼 수가 있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분명하계 그들의 창조주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까닭에 사도는 그의 히브리서에서, 세계를 보이지 않는 것들의 거울 또는 "반영 ( specula seu spectacula ) 이라고 일컫는다 (히 11 : 3 ) . 그는 하나님께 속 하는 것으로 주장될 수 있는 모든 속성들을 상세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에 대한 지식에 이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만물의 조물주이신 그는 시작이 없으시고 스스로 존재 하시는 분이심에 틀림없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하여 이 점을 발견하게 되었을 때, 그의 신성 자체가 나타나게 되며, 이 신성은 하나님의 모든 속성들을 수반하여서만이 존재할 수가 있다. 왜냐하면 모든 속성들이 그 신성 앞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 ; 이 말씀이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존재를 피조 세계에 나타내 보이신 것으로부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 것을 얻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즉,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사람들은 정죄 받는 것을 면할 아무 구실도 찾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점을 분명하게 해 두어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자기의 영광을 그의 피조물 가운데 나타내 보이신 바 그의 현현(顯現}은 그 자체의 빛에 관한 한 너무나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인간들의 눈이 어두운 까닭으로 인하여 적합하지 못하고 불충분하다. 그러나 모른다고 핑계를 댈수 없을 만큼 우리가 눈이 어두운 것은 아니다. 그래서 사악하다는 유죄 판결을 우리는 받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신 개 념( a conception of divinity) 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그러한 존재를, 그의 속성이야 어떤 것이든지, 우리가 필연 적으로 경배하도록 되어 있다고 우리는 결론짓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본질, 또는 그의 속성을 발견하기 전에는 우리의 판단으로는 하나님을 경배하지 못한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히브리서 11장 3절에서, 창조의 사역에서 인간이 참 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빛으로 말미암아서라고 말하고, 그 빛을 믿음의 탓으로 돌리고 있다. 사도가 그렇게 하는 것은 그럴 만한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의 눈이 어두움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우리의 목표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가 핑계 댈 수 없을 만큼은 충분하게 본다. 우리의 눈멈과 봄에 대한 이 두 진리는 바울에 의해서 사도행전 14장 17철에 잘 진술되어 있다. 바울은 거기서 말하기를, 주께서 지나간 세대에 민족들을 그들의 무지 가운대 남겨두셨으나 그들을 전혀 중거들도 없이 (aµ,afY")po, .. ; 아마르뒤로이) 남겨두시지는 않았다고 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늘로서 비를 주시며 결실기를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핑계치 못하게 하는 데만 유용한 이 신지식은 구원을 얻게 해 주는 신 지식과는 크게 다르다. 후자의 이 지적온, 그리스도에 의해서 언급되어 있으며, 그리고 예레미야는 그 지식을 자랑하라고 우리에게 가르친다(요 17 : 3,렘 9: 2A ).

“21. 하나님을 알되. “ ; 바울은 여기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들의 마음 속에 그 자신에 대한 지식을 넣어 주셨다고 분명하계 선언한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존재하신다는 것-------하나님의 존재 문제는 인간들이 자기들 나름대로 알려고 해서는 안된다------을 인간들이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의 작품들인 만물들을 통해서 자신의 존재를 나타내셨던 것이다. 세계는 우연히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그 기원을 그 자체에 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인간들이 지금까지 계속해서 보유하고 있는 신 지식의 정도에 언제나 유의해야 한다. 여기에 대해 우리는 다음 귀절들에서 알 수가 있다.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 ; 아무 신 개념도 그의 영원한 능력, 지혜, 선하심, 진리, 의, 그리고 궁휼을 포함하지 않고서는 구성될 수가 없다. 그의 영원성은 그가 만물을 그의 장중에 붙들고 계시고 그리고 만물이 그 안에서 존재케 하신다는 사실로 말미암아 증명된다. 그의 지혜는 그가 만물을 완전히 질서있게 정돈하신 데서 찾아 볼 수 있다. 그의 선하심은, 그가 만물을 창조하신 데 대한 다른 아무 이유가 없고, 그의 선하심 자체외의 아무 다른 이유도 그로 하여금 만물을 보존케 하실 수 없는데서 찾아볼 수 있다. 그의 공의는 그가 세계를 통치하는데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왜냐하떤 그는 죄인을 벌하시고 무죄한 자를 변호하시기 때문이다. 그의 궁휼은 그가 인간들의 사악함을 대단한 인내심을 가지고 참으시는데서 드려난다. 그의 진리는 그가 불변하시다는 데서 드러난다.

그러므로 신 개념을 가진 자들은 그의 영원성, 지혜, 선하심, 그리고 공의에 합당한 찬양을 하나님께 돌려 드려야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이러한 속성들을 깨닫지 못하고, 그가 마치 비 실재하는 요정 (phantom)이나 되는 것처럼 그에 대한 환영(幻影)을 꾸며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사악하게 빼앗아버렸다고 말을 듣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이 "감사치도 아니하고" 라고 바울이 덧붙여 말한 것은 까닭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에 빛지고 있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이 자비 때문만으로도 그는 자신을 우리에게 계시 하시려고 낮아지심으로써 우리로 하여금 그에게 많이 빛지게 하신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 죽, 그들은 하나님이 진리를 버렸다. 그리고 완전히 무분별하고 조석변(朝 夕~)하는 그들 자신의 허망한 생각으로 빗나가 버렸다. 그들의 '미련한 마음이’ 이갈이 어두워졌기’ 때문에 그들은 아무것도 바르게 이해할 수 가 없었다. 다만 모든 면에서 오류와 거짓을 향하여 무모하게 들진하였다. 그들의 불의가 이러한 것이었기에, 참 지식의 씨는 그것이 자라서 성숙하기도 전에 그들의 사악함으로 말미암아 곧 바로 질식되어 버렸던 것이다. .

“22. 스스로 지혜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 ; 바울이 여기서 지혜에 대한 명성을 특별히 자랑하는 철학자들을 언급하고 있는 것으로 대개 본문을 해석한다. 그의 논증의 취지는, 위대한 철인의 우월성이 무(無)가 되는 때, 범인(凡人)들온 그들이 자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데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해석을 취하는 주석가들은 내가 보기에는 충분히 본문을 검토하여 깊게 생각함이 없이 결론을 내린 듯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 있어서 지혜롭다고 생각한 것은 특별히 철학자들에게만 국한되었던 것이 아니고, 모든 민족과 모든 계급의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일반이었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어떤 개념을 구상하여 그들의 이성이 상상해 낼 수 있었던 그러한 하나님으로 만들려고 했다. 하나님께 대한 이러한 무례한 태도는 철학 학파들의 교실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 라, 생득적 (生得的)인 것으로 나면서부터 가지고 나온 것임을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이 악이 모든 세대에 성행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들 멋대로 미신들을 조작해 냈던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정죄되는 교만은 인간들이 겸손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어야 하는 때에, 그들이 스스로 지혜롭기를 구하였고, 하나님을 그들 자신의 낮은 처지의 수준에로 끌어내리려고 하였던 점이다.
바울온 이 원리, 즉, 사람이 하나님을 예배하는 데서 멀어지면 그것은 그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는 것을 주장한다. 이는 마치 바울이, “그들은 교만하여져서 자신들을 높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보복에 의해서 그들이 우준하게 되었다” 고 말한 것과도 같다. 내가 반대하는 해석이 합당하지 못하는 분명한 이유가 또 있다. 하나님의 형상을 구상하는 과오는(de affingenda Deo imagine) 학자들에게서 비롯되 었던 것이 아니고,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받아다가 그들 자신이 시인 하여 도장을 찍은 것이다.

“23.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바꾸었느니라.” ; 그들은 그들의 정욕적이고 육감적인 감각에 의해서 그들이 이해할 수 있었던 그러한 하나님을 상상해냈기 때문에, 그들이 참 하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들은 하나님 대신에 가공적인 새 신, 아니 오히려 허깨비를 고안해 냈던 것이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 이 어린애와 저 어린애를 바꿔치기 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그들은 참 하나님에게서 떠났던 것이다. 그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이 하늘에 거하심을 믿는다는 것과 그들이 나무를 하나님으로서가 아니라 그의 형상(pro simu/acro)으로 간주 한다는 구실 때문에 그들이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감히 하나님의 형상을 만들 만큼그의 위엄에 대한 조잡한 개념을 만들어내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짓이기 때문이다. 그들 중에 아무도, 제사장들이나, 정치가들이나, 철학가들도 그처럼 주재넘는 신성 모독의 죄에서 면제될 수가 없다. 그들 중에 가장 건전한 정신의 소유자이었던 플라톤까지도 하나님에게서 어떤 형상을(forman in Deo) 추적하려고 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철저한 미련함은, 모든 사람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형상(形象; figure)을 만들어내고자 소원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온 그들의 하나님에 대한 개념이 조잡하고 비논리적이라는 확실한 중거이다.

첫째로 그들은 하나님을 썩어질 사람(에라스무스가 채택한 '죽을 사람'보다는 이 번역을 냐는 택하고 싶다)의 모양으로 바꿈으로써 하나님의 위엄을 더럽혔다. 왜냐하면 바울은 죽을 인생을 불멸하시는 하나님과 대조시키고 있을 뿐만 아니 라, 하나님의 썩지 않는 영광을 인간의 바로 그 비천한 상태와 대조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들은 그처럼 큰 과오로도 만족하지 않고서, 가장 비열한 야수의 수준에까지 내려가 그들의 우준함을 보다 더욱 분명하게 하였던 것이다. 독자는 이러한 가증스러운 미신들에 대한 굴을 락란티우스(Lactantius), 유세 비우스(Eu sebius), 그리고 어거스탄의 〈신의도성 〉에서 찾아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