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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롬12:11)

1. 성경 (롬 12:6 ~ 11)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6)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7)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8)사랑에는 거짓이 없나니 악을 미워하고 선에 속하라 (9)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존경하기를 서로 먼저 하며 (10)부지런하여 게으르지 말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라 (11)

2. 묵상 (Calvin선생주석)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 바울은 :여기 서 우리들 사이에 통형제적인 사랑을 품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그 치지 않고 표겸손을 우리의 전인생을 규제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추천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을 만큼 충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자족하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빌릴 수 밖에 없게 될 경우 '교제가 시작되기 '마련이다:'그러므로 나는, 경건한 자 들 사이의 교제란 자자가 자신의 분량으로 지만족하며 자기가 받은은사를 형제들에게 나눠 주며 또 자신도 '남의: 은사의 도움을 '받으려: 할 때만 도가. 능한 것으로 본다.

 

바울은 특별히 그가 -인간들이타고 난 .것으로 알고 있던 교만을 억누르기를 바랐다. 아무도 자기에게-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은 사실 때문에›고민 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각자에게는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의 해서 배당된 책임의 '몫이: 있다는 i점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도 자기' 형제를 모독하고도 일본을 받지-않을 정도로 충분한 은 사를 부여받지 않는 것이 {몸의}공통적인 구원에 유익이|되기 때문이다.그러므로 이것이 사도가 모염두에 두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다. 모든: 인간들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각자에게 한정된 몫이 돌 아가도록 분배되고 있다. :각: 개인은 아무도는 자신의 후기능을 저버리고 타인 의 그것을 .침해하는 동일이: 없도록: 교회의 교화를 -위해서 자신의 은사를 사 용하는 데 집착해야 옳다. 각 개인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공 동의 유익을 위해 '나눠 쓰되 사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하지 않을때 교회의 안전은 .더없이 .탁월한 이 질서와 조화에 의해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이 질서를 뒤바꾸는, 그것은 :그것을 제정해 놓으신!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은사의 차이점은 인간의 뜻에서부터 :생기는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은혜를 분배하는 것을 기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혹 예언이면~~~~" ;  구체적인 본을 들어 가면서 각자가 자신의|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입장을 지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힘써야, .하는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모든 은사에는 거기에 정해진 한계가 있으며 ,여기서 이탈하는 그것은 .은사 그 자체를 망쳐놓는 짓이다.  본 '문단은 좀 뒤엉켜. 있지만 우리는 이것을 .정리해서 보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사람은 그것을 ,믿음의 유추에 비추어 시험하며, 섬기는 임무를` 가진 자는 섬기는 일에 그것을 사용하고, 가르침을받은 자는 가르치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라~~~~~~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은 스스로의 한계를 지킬 것이다. 

 

하지만 이 문맥의 여러가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흑자는 예언을 예고 하는 주님께서 모든 수단을 통해저, 당신의 나라의 위엄과 탁월성을 드러 내고자 하셨기에,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에 교회에 선행하던, 예고하는 능력 (thelpower: of 'predicting) 으로 이해 한다 . 그리고 그들은 우리의 믿음의 분량대로( secundum analogiam fidei [)라는 대목이 모든 귀절과 관련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 단어를 더 넓은 의미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유능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주석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계시에 대한 특수한 은사로 이해하는 자들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의 예언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것을 설명하는 특수한 은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모든 옛날 예언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oracles)이 그리스도와 당신의 복음 안에서 결론이 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회가 다 방언하기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를 원하노라 (고전 14 5)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고전 13 : 9)는 바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 도께서 처음에 당신의 교회를 장식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신 저 경이적인 은혜만을 생각하고자 한 것인가 하는 점은 명확치 않다. 그보다 우리는 그가 단순히 교회 안에 영속적으로 남아 있는 일상적인 은사를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를 저주받은 분으로 부를 수 없던 자들에게 사도가 이런 말을 한 것은 공연한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확고한 반론이 못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른 문맥에서(고전14: 32) 그는 예언자들의 운영이 예언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선언하면서 처음 연사에게, 만약에 동석하고 있는 누구에게 계시가 주어질 경우, 잠잠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러므로 그는 같은 이유에서 여기서 교회에서 예언하는 자들에게, 어느때든 그들이 올바른 선에서 방황하거나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신앙의 원칙에 자신들의 예언을 일치시킬 것을 권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신앙은 종교의 제1원리들을 뜻하며 여기에 일치하지 않는 것으로 발견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정죄받고 있다.

 

다른 귀절에 있어서는 별 어려움이 없다. "사역자로 임명받은 자는" 하고 그는 말한다.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위해서 그런 존귀를 받고 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바울은, 그는 올바르게 목회함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성취하고 그의 명칭에 일치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 따라서 가르침이라는 단어를 통해서 그는 교사들에게 건전한 교화를 주천하고 있으며, 그 의미는, "교의에 있어서 뛰어난 자는 교회가 조합으로 올바르게 가르침 받는 것이 자신의 목표라는 점을 깨닫고 교회가 자신의 교의를 더욱 더 배우는 것만 힘쓰도록 하라" 는 것이다. 교사(doctor)란 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훈계 하는 자'다. 권면에 있어서 뛰어난 은사를 가진 사람은 효율적으로 권면하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여러 임무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바로 이런 이유에서 더 이상 그것들이 서로 차이점을 갖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다. 아무도 교의가 없이는 권면할 수 없지만 가르치는 자에게 동시에 권면의 은사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아무도 사역과 무관하게 예언하거나, 가르치거나, 권면하지 않는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여러 은사에서 엿보며 교회 질서에 유익한 것으로 보는 독특성을 유지하기만 한다면 그것으로 족하다.

 

"8.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  우리는 이 뒷부분의 소절을 통해서 여기서 다뤄지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적합한 용법 이라는 점을 뚜렷하게 알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주는 자들(μeta8ιδοйνтаs ;메타디둔타스)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소유를 주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재물분배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에 대한 기 술적인 용어다. 그리고 그는 자비를 보여주는 자들( ёλеойναs )에 대해 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은 고대 교회 풍속에 따라서 병자 간호 책임을 맡 은 과부들과 다른 봉사자들을 뜻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 하는 것과 그들을 돌보며 보살피는 것은 1997년개의 문제다. 전자의 경우에 있 어서 그는 단순성을 강조함으로써 그들에게 기만이나 사람 차별없이 자기 들에게 맡겨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일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 는데 이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들이 그들의 침울한 자세 때문에 그 들의 봉사가 망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병든 자나 다른 면 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서는 조력 자들의 모습을 대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듯이, 돕는 자들에게서 우울 한 표정을 읽을 경우 그들은 그것을 모욕으로 여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다스리는 자들( πρоισтаμёνονs )이란 교회 통치를 위 임반은 자들이다. 이들은 곧 다른 회원들을 주도하고 다스리며 규율을 잡 던 장로들( seniores )이다. 하지만 그가 이들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는 내 용은 모든 종류의 지도자에 대해서 확대적용될 수도 있다. 모두의 보존을 책임맡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큰 관심이 요청되고 있으며 모두의 안전을 밤 낮으로 경계할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큰 근면이 요청되고: 있 다. 하지만 당시 상황은 바울이 전반적인 지도자를 두고"언급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당시에는 경건한위정자란아무도 없었다)7 윤리의: 재판관들 (morum censores) 인 장로들에 대해서 지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있다

 

"9. 사랑엔 거짓이 없나니~~~~~~" ; 이제 '구체적인 임무에 대해서 우리에게 말하면서 그는 완전의 '반(bond) 되는 사랑으로부터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적절한 일이다. 여기서 그는 모든 위선이 제거되고 사랑이 '순수한 마음의 성실성에서 우러나올 필요가 있다는 점을 권면하고 있다. 거 의 모 든 인간이 그들에게 실제로 있지도 않은 사랑을 얼마나 기발하게 위장하는 가 하는 점은 표현하기 어려운 문제다. 그들은 그들이 소홀히 다룰 뿐 아 니라 실제에 있어서 개척하고 있는 자들에 대해서 스스로 참 사랑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짐함으로써 남들 뿐 아니라 자신들까지도 기만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여기서 진정한 사랑은 모든 위장을 벗어버린'것것 뿐이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누구든지 자기 마음 구석에 사랑에 위배되는 무엇을 품 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판단할 수 있다. 다음에 이어지는 선과 악이라 는 단어에는 일반적인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 아니다. 악은' 인간들에게 해 를 입히는 심술궂은 '부당행위'를, '선'은 인간들을 돕는 친절 을 뜻한다. 먼저 악이 금지되고 '다음으로 덕이 추천되는 것은 성경에 자주 나오는 "대조법' 이다.

 

에라스무스나 벌게이트역은 dnoorvyoOvres(아포스튀군테스)를 증오하는 것1월 으로 번역하지만 나는 이것을 따르지 않는다. 내 생각에 바울은 그보다 더 깊은 의미를 강조하려 하고 있으며 돌아서는 것으로 보는' 의미가 '그가 우 리에게 선을 행할 관심을 가질 뿐 ,아니라 계속 그렇게 지속할 것을 당부 하는 대귀와 더 잘 일치하고 있다.

 

"10. 형제를 사랑하여 서로 '우애하고~~~~~~~" ;  바울에게 있어서는 우리가서 로를 포옹하는 데 있어서 품어야 마땅한 열렬한 애정을, 충분히 표현할 ¡단 어가 없었다. 그는 그것을 형제애로 부르면서 그것이 부드러운 정을 가져 오는 것으로 말하고 있다. 이 부드러운 정( :σторуη) 은 라틴어에 있어서 는 친척 간에 지니는 사랑스런 관심을 뜻한다. 이것이야말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베풀어야 마땅한 종류의 사랑이다. 이런 이유에서 그는 선의가 계속 유지되기 위해서 더없이 필요한  교훈을  덧붙이고 있는데, 각자는 자기 형제를 먼저 존귀하게 여겨야 한다는 것이 그것이다. 서로를 이간하는 데 있어서 한쪽이 무시받고 있다는 생각보다 .더 직효한 독약도 없다. 존귀를 온갖 종류의 친절로 이해하는쪽을 택하는 독자들이 있다해도 나는 크게  반대하지는 않겠지만 나는 전자를 택하고자 한다. 각자가 남을 보다 못하게 여기고 자기를  추어 올리는 교만에서 나오는 모독보다 형제적 일체감을 제공하는 것이  없듯이 각자가  남을 존귀하게 여기는 겸허한 마음 이야말로 사랑을 가꾸는 최상의 것이다.

 

"11. 부지런하여 게으르지,말고~~~~~" ; 이 교훈이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 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 적극적이어야 :마땅할 뿐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혜택을 무시하고 우리 형제들을 위해서 수고를 기울이되, 항상 선한 자들에 대해서만 아니라, 종종 더없이 배은망덕하고 무가치한 자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서 우리는 우리의 그 숱한 임무 속에서 자신을 망각해야 옳은 만큼 우리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우리의 모든 나태를 벗어 버리려고 꾸준히 노력하지 않을 경우, 우리는 제대로 그리스도를 순종할 자세를 갖추지 못한다는 말이다. '영혼에있어서는  열성을 보이며'  라는 표현을 .덧붙임으로써는그는 우리가 어떻게 이 목표를 달성해야 하는가 하는 직접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의 육신은 나귀처럼, 마냥 게으르며,  그러므로 계속 채찍질을 필요로 한다. 우리의 무감각을 교정하는 것은 성령의 열성(fervent in spirit)뿐이다. 그러므로 선행에 있어서의 근면은 하나님의 영이 우리 마음 속에 지펴 놓는 열성을 필요로 한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우리에게 이런 열성을 권면하고 있는가 ?  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이 열심이, 하나님의 선물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임무가  신자들에게, 부과되고 있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그들의 맥풀린 상태를 벗어버리고 하나님께서, 지퍼주시는 불길에 빠져들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실수로 성령을 질식시키거나나 .말살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다. 

 

시간을 아끼는 것(섬기는 것) 역시 동일한 내용이다. 우리 인생의  코오스는 짤막한 것인 만큼 우리의 선을 행할 기회도 순식간에 지나쳐버리고 만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있어서 더욱 더 진지하게 나와야 옳다. 마찬가지로 바울은 다른 곳에서 세월이 악하기 때문에 .시간을 아낄 것을 당부하고 있다(엡 5:16 ) 이것은 또한 우리가 우리 자신을 시간에 적용하는데 큰 의의가 있기 때문에 그것을 권하는 뜻으로 볼 수도 있다. 하지만 내 생각에 바울은 시간을 섬기라는 명령을 게으름과 대조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많은 옛 사본에는 **vplψ (퀴리오-:) 로 되어 있다. 얼핏 보기에는 이 독법이 문맥과 무관한 것으로 보이는 점도 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나는 이것을 반대하지는 않겠다.  하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으로 본다면 나는 바울이 하나님 예배를 우리가 우리 형제를 위해서 행하는 여러 임무 및 사랑을 보강하는 데 도움이 되는 것과 관련시킴으로써 신자들에게 더 큰 격려를 주려한 것으로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