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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롬12:2)

1. 성경 (롬 12:1 ~ 8)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1)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2)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바울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나라를 제우는 데 있어서 먼저 다루어야 할 문제들에 대하여 이야기해 왔다.  곧, 우리는 오직 、하나님으로부터만 의를 찾아야 하며 , 오직 당신의 자비로부터만 우리의 구원을 사모해야 하며, 우리의 모든 축복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서만 ---우리를 위해 쌓여지며 날마다 우리에게-----제공되고 있다.

 

이어서 그는아주 질서 정연한 이론(optimoordine)을 통해서 우리의 도덕적 행동의 규제 문제를 다루기 시작하고 있다. 영혼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구원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생활로 거듭나며 우리의 생명 그 자체는 거룩한 가르침과 교훈에 의해서 그 형태를 갖추며 규제를 받는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가 먼저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의의 원천은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제시하지 않온 채, 우리의 생활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고 열성을 부리는것은공연한 짓이다. 모든 의의 원천이 하나님과 그리스도 안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하는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로부터 사람을 일으킨다는 말의 의미이다.

 

이것이 복음과 철학의 주요 차이점이다.  철학자들이 모여 문제에 대해서  그처럽 휘황찬란하게 그리고 칭찬을 받아 마땅한 재치를 부려가며 이야기 하지만 그들의 가르침 속에서 비취는 모든 장식이 기초가 없는 아름다운 초대형 건축물에 불과한 것은 그들이· 원칙을 생략한 채, 머리가 없는 몸과 같은 변명된 교의를 가지고 큰 소리를 치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의 가 르치는 방법이 이와 흡사한 데가 많다. 그들은 내키지 않는 투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성령의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보다는 이방 철학자들에게 더 가깝다는 것은 아주 뚜렷한 사실이다.

철학자들이, 도덕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기 전에, 선의 목적에 대해서 논의하고 모든 임무의 근원이 되는 면에 대해서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바울은 여기서 성결의 모든 부분의 원천이 되는 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그 원칙이란 곧 우리가 우리 자신과 모든 지체를 당신에게 성별 하도록 하는 목적에서 주님으로부터 속량받는다는 것이다.  바울의 예기를 낱낱이 살펴 볼 필요가 있다]

“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 하노니“ ;. 다들 아는 대로 불순한 사람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무한한 선하심에 대해서 선언하는 모든 내용을, 오직 육신에 빠지려는 목적으로, 게걸스럽게 붙잡고 늘어진다. 그런가 하면 위선자들은, 마치 하나님의 은혜가 거룩한 생활에 대한 자신들의 열성을 말살이라도 한다는 듯이, 있는 힘을 다 기울여 당신의 선하심에 대한 자신들의 지식을 악의적으로 흐리게 하며 담대하게 죄를 짓는 쪽의 문을 활짝 열어 놓는다.

 

바울의 권면은 인간들이란, 그들이 먼저 얼마나 하나님의 자비의 덕을 보고 있는가 하는 점을 제대로 이해하기 전에는, 결코 진지한 마음으로 당신을 예배하지 않을 것이요, 충분한 열성을 다하면서 당신을 두려워 하거나 순종하도록 깨우쳐지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로마 가를릭에 서는 그들이 공포에 의해서 일종의 강요된 순종을 짜내는 것이면 충분한 것으로 여긴다. 하지만 바울온, 우리를 비굴한 공포가 아니라 위에 대한 자발적이요,· 기꺼운 사랑에 의해서 하나님과 동여매려는 뜻에서, 우리의 구원의 바탕이 되는 달콤한 은혜를 통해서 우리를 끌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만약에 우리가 그처럼 인자하고 관대한 아버지에 대한 체험욜 가지고도 우리 편에서 우리 자신을 전적으로 당신에게 헌신하려 들지 않는다면 배은망덕하게 된다는 점을.지적하고 있다.  이처럽 우리에게 권면하는 바울의 의미가 더욱 더 강력한 것은 그가 누구보다도 하나님의 은혜를 제시하는 데 있어서 앞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인자를 풍성하게 느끼면서도 앞에 나온 가르침을 듣고 당신에 대한 사랑의 불이 지퍼지지 않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은 목석보다 더 단단한 것임 에 틀림없다.

 

우리가 인간들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구원에만 달려 있는 것으로 말할 경우, 존귀한 생활에 대한 모든 권면이 무효하게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경건한 마음이 하나님을 순종할 마음을 갖는 것은 가르참이나 명령에 의해서라기보다는 그 마음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한 심사숙고에 의해서이다.  우리는 그와 동시에 여기서 이 사도의 온유한 정신을 엿볼 수가 있는데,  그것온 그가 신자들을 엄격한 명령이 아니라, 권면과 친밀한 간청으로 상대하는 편을 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함으로써 자신이, 가르침을 받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더 많은 것을 성취할 것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었다.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 ; 우리가 주님께 성별되어 있다는 점을 아는 것이야말로 선한 일을 달성하려는 참된 인생의 시작이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 인생의 모든 행동을 당신을 섬기는 데 바치려 할 경우 우리는 우리를 상대로 사는 것을 중지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결론이 따른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먼저 우리는 주님의 소유요,  둘째 우리가 바로 이런 이유에서 거룩해야 옳은 것은 무엇이든 성별되지 않은 것을 하나님께 바친다는 것은 당신의 거룩하심에 모욕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가정을 따를 경우 우리는 마땅히 우리의 전 인생에 걸쳐서 성결에 대해 묵상해야 하며 우리가 불결에 빠질 경우 그것이  일종의 신성모독이 되는 것은  그것이 일단 성화된 것을 속되게 하는것이나 다름 없기 때문이라는 결론이 따른다.

 

바울은 전반적으로 그의 말에 있어서 일관성을 잘 유지하고 있다. 그는 먼저, 우리의 `몸’이 일종의 제물로서 하나님께 바쳐져야 한다는 점을 밝히고 있다. 여기에는 우리가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신분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통째로 하나님의 능력에 넘겨져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그러나 이것은 먼저 우리가 우리 자신을 거절하고 부정하기 전에는 불가능한 일이다. 다음으로 그는 그가 덧붙이는 형용사를 통해서 이것이 어떤 종류의 제물이 되어야 옳은가를 밝혀 주고 있다. 그는 이것을 ·산 제물로 부르고 있는데 여기에는 우리의 이전 생활이 우리 속에서 파괴되고 우리가 새로운 생명으로 일으켜 세워지기 위해서 우리가 주님께 제물로 바쳐진다는 의미가 있다. 

 

'거룩한'이라는 단어에는, 앞에서 이미 언급했듯이, 제사를 드리는 행동의 참된 본질의 의미가 담겨 있다.  희생제물이 제물로 인정 받는 것은 오직 그것이 먼저 거룩하게 되었을 경우에만 가능한 일이다.  세번째 형용사는 우리가 우리 자신이라는 이 제물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해서 정돈할 때 우리의 생활이 바른 질서를 잡게 된다는 점을 우리에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결코 평범한 위로를 주는 데서 그치지 않는 것은 우리가 우리 자신을 정직과 성결에 몰두할 때 우리의 수고가 하나님께 기쁨이 되고 받아들여진다는 점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기 때문이다.

 

'몸’이란 표현 속에는 우리의 살갖과 뼈뿐 아니라 우리를 형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의 의미가 담겨 있다. 그가  우리의 모든 부분에 대한 대유법적인 표현으로 이 단어를 사용한 것은 몸의 각 부분이 우리의 행동을 수행하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는 또한, 데살로니가 전서 5장 23절에서처럼, 몸뿐 아니라 혼과 영의 결백성을 우리에게서 요구하고 있다. 우리들 ·'바치라’는 권면을 통해서 바울은 마치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것과 같은 자세로 제단에 바쳤던 모세 율법의 제물을 빗대어 알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우리가 명령을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지체없이 순종하도록, 취해야 할 준비태세를 잘 지적해 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을 예배하려 하지 않는 모든 사람들이 실수를 범하고 비참한 상태에서 방황할 뿐이라는 점을 짐작할 수 있다. 오늘날 우리 또한 바울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추천하는 제사를 엿볼 수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유일하고 참된 제사에 의해서 그를 통해 하나님께 화해되기 때문에 우리 모두는 그의 은혜로 말미암아 제사장들이 되며 그 결과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의 모든 소유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바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더 이상 속죄의 제사를 드릴 필요가 없게 되었으며. 그것을 바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크나 큰 욕이 돌아갈 것이다.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 내가 보기에 이 소절이 덧붙여지고 있는 것은 앞에 나온 권면을 더 잘 설명하고 확증하려는 뜻에서인 같다. 이것은,  "여러분들에게 하나님께 예배 할 마음이 있다면. 자신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치십시요, 왜냐하면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올바른 방법이요, 여기서 이탈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거짓 예배자들이기 때문이요" 하는 말이나 다름없다. 우리가 우리의 모든 행동을  하나님의 명령대로 규제할 때만 당신을 제대로 예배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당신께서 아주 가증스럽게 여기는 모든 날조된 예배 형식을 집어치우도록 하자· 당신께서는 제사보다 순종을 더 귀하게 여기는 분이시다. 인간들 혼자 신들의 고안으로 만족하며  (바울이 다른 곳에서 지적하듯이) 은혜가 있는 것처럼 허풍을 떨지만 우리는 하늘의 재판관께서 바울의 입을 통해서 여기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하시는 말씀을 귀담아 듣도록 하자. 그는 이것을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합당한' 예배로 부름으로써 당신의 말씀의 원칙에 위배되는 우리의 모든 시도를 어리석고, 얼빠지며, 무모한 시도로 따들리고 있다. 

 

"2. 너희는이 세대들 본받지 말고~" ; '세상' (world)이 라는 용어 에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인간적인 성격과 행동의 의미로 쓰이고 있다.  바울이 우리에게 본 받는 것을 금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것이요, 여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온 세상은 악한 자의 권세 밑에 놓여 있는 만큼, 우리가 참으로 그리스도를 입으려면 인간적인 것을 모두 벗어버리리지 않으면 안된다. 어떠한 의심이든 모조리 제거하는 뜻에서 그는 우리에게 새로운 마음으로 변화된 것을 당부하면서 그 반대의 것이 무엇인가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대조는 성경에 자주 나오는 것으로 아주 명료하게  주제를 설명하기 마련이다

 

 우리는 여기서 우리에게서 요구되고 있는 갱신을 주목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이것은, 솔로본느 학파들이 이 단어를 보다 낮은 부분, 곧, 혼(soul) 을 의미하는 것으로 설명하듯이, 육신만의 갱신이 아니라, 우리의 가장 탁월한 부분이요, 철학자들이 거기에 탁월성이 있는 것으로 인정하는, 정신 ( mind )의 갱신을 뜻한다.  그들은 이것을 가리켜  '토헤게 모니콘',  곧 규정하는 원리로 부르면서 이성을 최상의 지혜의 여왕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바울은 이성을 그 보좌에서 이끌어 내리고, 우리  정신에 있어서 갱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가르침으로써 이 이성을 필요 없이 만들고 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두고 제아무리 자화자찬을 늘어 놓더라도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고자 한다면 전인(thewholeman)이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진리인 것온, 우리는 정신과 마음 (heart)에 있어서 하나님의 의로부터 전적으로 소외되어 있기 때문이다.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 ;여기에 우리가 새로운 정신을 덧 입어야 할 목적이 제시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뜻과 욕망, 그리고 인간들의 그것들을 버리고 오로지 하나님의 뜻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참된 지혜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이 무엇안가를 분별하기 위해서 우리의 정신이 얼마나 하나님께 절대적인가 하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바울이 덧붙이고 있는 명칭들은· 하나님의 뜻을 추천하는 목적에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것은 우리가 더욱 더 진지하게 이 뜻을 알도록 노력하게 하려는 뜻에서이다. 물론 우리의 오만이 바로.잡아지려면 우리가 하나님의 뜻만이 의롭고 완전한 것으로.찬송하는것만이 참되다는 점은 사실이다.

 

세상온 그것이 고안해 낸 행위가 좋은 것으로 스스로 확신하고 있다. 바울은 선과 정의는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만 결정되는 것으로 강조하고 있다. 세상은 자신의 고안으로 만족하며 거기서 기뿜을 찾는다. 바울은 하나님을기쁘게 해드리는 단 한 가지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당신께서 명령하신 바로 그것이라는 점을 확증하고 있다. 세상은 완전을 찾는답시고 하나님 말씀에서 도피해서 이런저런 새로운 고안으로 달려간다. 바울은 완전이란 하나님의 뜻안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면서 어떤 사람이든 이 할례를 벗어 날 경우 거짓된 상상에 속고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