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10:5 ~ 10)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5)믿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이같이 말하되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올라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모셔 내리려는 것이요 (6)혹은 누가 무저갱에 내려가겠느냐 하지 말라 하니 내려가겠느냐 함은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라 (7)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냐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8)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 (9)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10)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바울은 이제 믿음에서 나는 의와 행위에서 나는 의를` 비교하고 있는데, 이는 그것들이 얼마나 크게 상이(相異)한가를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함이다. 서로 상반되는 것들 간에 있는 차이점이란 그것들을 비교시킴으로 해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나는 법 이다. 바울은 선지자들의 글을 언급하지 않고, 모세의 증거를 언급하고 있는데, 그가 이같이 한 이유는, 율법이 모세에 의하여 주어진 것온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행위를 자랑하게 하려 함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이해시키고자 한 까닭이다. 바울은 그의 주장에 대한 증거로 선지자들의 글을 인용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어찌하여 율법이 다른 형태의 의를 규정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여전히 미 해결로 남아 있게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그가 믿음에서 나는 의를 율법 자체의 가르침에 의하여 세우는 때에 이 난제가 아주 만족스럽게 해결되는 것이다. 바울이 율법을 믿음과 일치하게 해놓고서도,율법에서 나는 의를 믿음에서 나는 의와 대립시켜 놓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이중의 개념으로 사용되어 있다. 때때로 울법은 모세가 가르친 교훈 전체를 의미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의 직분과 특별히 관련된 부분을 의미 하는가 하면, 명령, 상급, 그리고 형벌 가운데 포함되어 있다. 모세가 가지고 있었던 일반적인 직분은 경건을 위한 참된 규칙으로 백성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회개와 믿음을 전하는 것이 그의 의무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믿음에 대해서 가르칠 때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긍휼에 대한 약속을 제시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복음을 전하는 자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으며, 그가 이 직분을 충성스럽게 행 했다고 하는 사실은 많은 구절들에서 찾아 볼 수가 있다. 백성들에게 회개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합당한 생활방식을 그들에게 그가 가르치는 것이 필요했다. 그는 이갈은 생활방식을 율법의 명령들에 포함시켰다.
또한 백성들에게 의를 사랑하는 마음을 넣어 주고 죄를 미워하는 마음을 길어주기 위해서, 의로운 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상급과, 죄인들에게 임할 무서운 형벌을 선포하기 위하여 약속들과 위협적인 경고들을 첨가해야 했다. 이제 백성들이 행해야 할 의무는 그들이 얼마나 많은 방면에서 저주들 받을 만하였는가 하는 것과, 그들의 행위로는 하나님에게서 아무 것도 도무지 얻을 수 없다는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해서 그들 자신으로서는 아무런 의도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절망 가운데 빠질 때, 그들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있는 안식처인 그리스도 자신에게로 도피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것이 모세가 행하는 직분의 목적이었다.
그러나 복음의 약속들은 모세의 글들에서는 여기저기에서 산발적으로 나타나 있고, 또한 이 약속들이 다소 흐릿하다. 여기에 반해서, 율법을 지키는 자들을 위하여 정하여진 명령들과 상급에 관한 것들은 자주 나타나 있다. 그러므로 행위에서 나는 참된 의의 성격을 가르치는 직분이 모세에게 있는 것으로 보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다. 또한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상급의 성격과, 율법을 범하는 자들에게 어떤 형벌이 주어지는가를 보여주는 직분도 그에게 속하여 있는 것이다. 이갈은 이유로 해서 요한은 모세를 그리스도와 대조시켜 말하기를,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 1 : 17). 고 했다. 율법이라는 단어가 이같이 제한된 개념으로 사용되는 때에는 언제나, 모세가 그리스도와 은연중에 대조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율법이 복음과 분리되는 때 그 자체 안에 무엇을 포함하고 있는가를 알아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내가 여가서 율법에서 나는 의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모세의 전체 직분에 관한 것이 아니고, 그에게 특별히 위임된 부분과만 관계가 있다. 이제 바울이 실제로 말한 것에 대하여 살펴보겠다.]
"5. 모세가 기록하되……" ; 바울온 '그라페이 ; 기록하다' 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으나, '에피그라페이; 서술하다' 라는 뜻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본문의 말씀은 레위기 18장 5절에서 인용한 것인데 거기에 보면 '주께서 그의 율법을 지키는 자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겠다'고 약속하고 계신다. 바울 역시 이같은 개념으로.그 구절의 말씀을 인용하여 사용한 것이며,.어떤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금생에 대해서만 말한 것이 아니다. 바울이 레위기의 그 귀절에서 다음과 갈은 생각을 해 낸 것이다. 만일 율법의 모든 부분을 정확하게 성취하지 않는 한, 율법에 규정된 의에 아무도 오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모든 사람이 이같은 완전에 결코 미치지 못해 왔기 때문에 누구든지 이같은 방식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를 얻 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는 것은' 아주 그릇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가 이 의를 얻을 가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알아두어야 할 것은 율법이 불가능한 조건 때문에 우리에게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것을 그가 어떻게 약속 자체에서 논증하고 있는가하는 점이다. 행위에서 나는 의를 세우기 위하여 율법의 약속들을 인용하는 것은 헛된 일일 뿐이다. 우리가 그 약속들에서 구원을 결코 얻을 수가 없기 때문에 만일 그것들을 우리가 신뢰할 것 같으면 틀림없이 저주가 임할 것이다. 공로를 입증하기 위해서 헛된 약속들을 붙잡는 것을 좋게 여기는 교황주의자들의 우둔함은 더욱 더 가증스럽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를 경배하는 자들에게 생명을 헛되이 약속하지 않으셨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은 한편으로 생명의 약속이 주어진 것은 그들이 가지고 있는 범죄의식으로 말미암아 그들 모두가 사망의 공포에 사로잡히고, 그래서 그들 자신의 필요에 의하여 어쩔 수 없이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하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있다.
"6. 믿음으로 말미암는의는 이같이 말하되……" ; 이 구절의 말씀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이유로 인하여,독자에게 상당히 어려운 문재를 일으킬 수가 있다. 바울이 그 구절의 본래의 의미를 의곡시켰을 뿐만 아니라, 단어들은 다른 의마로 바꾸어 사용한 듯이 보인다. 뒤에 가서 단어들의 해석에 대해서는 생각하기로 하고, 우선 먼저 적용에 대해서 주목키로 하겠다.
본문의 말씀은 신명기 30 :12에서 인용해 온 것인데, 거기보면, 앞서의 인용구에서처럽, 모세가 율법의 교훈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바울은 이 율법의 교훈을 복음의 약속들에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말씀은 다음과갈이 생각하면 쉽게 이해될 수가 있다. 모세는 그 구절에서 유대인들이 얼마나·손 쉽게 생명에 이를 수 있는가를 보여주고 있는데, 이는 하나님의뜻이 더 이상 감추이거나 그들에게서 절연되어 있지 않고, 그들의 목전에 제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만일 바울이 율법에 대해서만 말했었다고 할것 같으면, 그의 논증은 비 논리적이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율법이 우리의 시야에서 멀리 벗어나 있을 때보다는 그것이 우리 앞에 있을 때에 그것을 지키기가 더 어렵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세는 율법만을 말하고 있지 않고, 복음을 포합하고 있는 일반적인 하나님의 교훈 전체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율법의 말씀은 그것이 복음에서 나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 속에 심어 넣어지기까지는, 저절로는 우리 심령 속에 단 한 마디도 거하지 않는다. 둘째로, 중생한 연후에도 율법의 말씀이 우리 속에 거하고 있는 것으로 말할 수가 없는 것은, 율법이 완전을 요구하고, 신자들 자신들마저도 이 완전에 이르려면 요원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복음의 말씀은 비록 그것이 우리 의 마음을 가득 채우지는 않을지라도 우리 마음 속에 거하는 것은 그것이 불완전하고 허물된 것을 사해 주는 용서를 제공해 주기 때문이다. 신명기 32장을 (또한 4장에서처럼) 통하여 모세는 자기 백성에게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크신 자비를 힘써 찬미하고 있는데, 이는 햐나님께서 그들을 친히 연단하시고 다스리셨기 때문이다.
모세의 이같은 찬미는 단자 율법에만 적용되었을리가 만무하다, 모세가 거기서 율법의 규칙과 일치하는 삶을 살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는 데에는 아무란 이의가 있을 수 없다. 왜냐화연 그가 중생케 하시는 영을 믿음으로 말미암는 값없는 의와 관련지어 놓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을'이라는 것에서 '갑'이라는 것을 추론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율법을 지키려면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 구절의 말씀이 모세가 같은 장에서 조금 앞서 진술했던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마음에 할례를 베푸실 것이로다(신 30 : 6)" 라는 진리에 근거하고 있음이 확실하다. 그러므로 모세가 이 장절의 말씀에서 선한 행위를 다루고 있는 것으로 말하는 자들을 쉽게 반박할 수가 있다. 모세가 그같이 선한 행위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려면 그것의 근원이 되는 믿음에서 나는 의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는 전혀 비 논리적인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주장하는 바이다.
"네 마음에 누가 하늘에 올라가겠느냐 하지 말라……" ; 모세가 `하늘'과 `음부’라는 단어를·사용한 것은, 인간들이 이르기에는 너무나 멀고 험한 처소들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바울은 이 단어들을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다 적용시키고 있는데, 이는 마치 어떤 영적 비밀이 그것들 아래 숨어있는 것처럼 말하고 있다. 만일 이같은 해석이 너무 억지가 있고, 기교를 부린 것 이라고 여겨진다면, 사도 바울의 목적한 바는 이 구절을 정확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고 그가 다루고 있는 현재의 주제에다 그 구절을 단지 적용하려고 한 것뿐인 것으로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모세가 말한 것을 한 마디 한 마디 그대로 반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간단하게 해설하여 인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모세의 증거를 자기 자신의 목적하는 것에다. 더욱 면밀하게 응용하고 있다. 모세는 도달할 수 없는 처소들에 대해서 말을 했으나, 바울은 우리의 육안 (肉眼)에는 감취어져 있어도 믿음의 눈으로는 볼 수가 있는 것들을 언급 하였다. 그러므로 만일 바울이 한 이 말씀들이 부연(敷衍)이나 해설할 목적으로 말씀되어진 것으로 우리가 생각할 것 같으면, 모세가 한 말씀을 그가 의곡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줄로 안다. 오히려 ‘하늘'과 `음부’라는 단어들에 대한 그의 언급은 의미를 전혀 의곡시킴이 없이 정확하게 되어진 것임을 인정해야 할것이다. 그러면 이제 바울이 한 말씀을 간단히 설명해 보기로 하겠다. 우리의 구원이 보장되는 것은 다음과 갈온 두 가지 사실에 근거한다.
즉, 생명이 우리를 위해 획득되어 있다는 것과 사망이 정복되었다는 것을 우리가 인식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앙이 복음이라는 말씀을 통하여 이 두 가지 사실들에 의하여 확증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해서 사망을 삼키셨고, 다시 살아나심으로 해서 그가 그의 권능으로 생명을 얻으셨기 때문이라는 것을 바울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는 유익이 이제 복음으로 말마암아 우리에게 전달된다. 그러므로 더 이상 어떤 것을 우리가 구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또한 믿음에서 나는 의만 있으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있어서 아주 충분하다는 것을 분명하게 드러내기 위해서, 이 두 가지 요소들-----이것들만이 우리가 구원을 얻는데 필요하다-----이 그것 안에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바울은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다. "누가 영원한 하늘의 생명의 기업이 우리를 위해 준비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 라고 말한 것과 갈다.
그리고 "누가 음부에 내려가겠느냐?" 라는 말씀은 "누가 영혼의 영원한 멸망이 육신의 죽음에 수반하는지의 여부를 알고 있는가?" 를 의미한다. 이 같은 의심들이 믿음에서 나는 의로 말미암아 제거된다고 바울은 가르친다. 그런데 첫번째 의심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리려는 것이 되고 또 하나의 다른 의심은 그를 다시 사망 가운데서 모셔 올리려는 것이 된다. 그리스도의 승천으로 알미암아 영생에 대한 우리의신양이 확립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늘의 기업이 신자들-----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의 이름으로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승천하셨다-------을 위하여 춘바되어 있는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하늘에서 모셔 내리려고 하는 것이나 거의 마찬가지이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지옥의공포에서 건져내 주시기 위하여 그것을 당하셨기 때문에, 신자들이 아직도 이같은 불행을 당하게 되는지의 여부를 의심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무효화시키는 것이요, 실로 그것을 부인하는 것이 된다.
"8.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 바울이 지금까지 사용해온 부정적인 진술들은 신양에 장애되는 것들을 제거하는 것에 관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의를 얻는 수단을 그가 자세히 말하는 일이 남아 있으며, 이 목적을 위해서 그는 긍정적인 진술을 덧붙이고 있다. 그의 모든 의견들을 단 한 마디로 요약하여 진술할 수 있었는데도 그가 의문문으로 시작한 것은 주의를 환기시킬 목적에서였다. 또한 동시에 율법으로 말미암은 의와 복음으로 말미암는 의사이에 있는 커다란 차이를 독자들에게 알려주고 싶어서였다. 그런데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는 거리를 두고 자체를 나타냄으로 해서 온 인류가 그것에 접근할 수 없도록하는 데 반해서· 복음으로 말미암는 의는 우리를 정면으로 접근하여 우리를 다정하게 초대해서 그것의 선물들을 향유하도독해 준다.
"말씀이 내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 우리가 먼저 유의해야 할 것은 사람들이 심리적으로 오리무중에 빠자거나 구원에서 떠나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바울이 사람들이 지켜야 할 말씀의 범위( verbi metas )를 정해 놓은 점이다. 이는 마치 그가 그들에게 명하여 말씀만으로 만족하라고 한 것과도 같고,· 그리고 천국의 비밀들----이 비밀 들은 그것들의 광채에 의하여 사람들의·눈을 부시게 하고, 그들의 귀를 깜짝 놀라게 하며, 그들의 마음은 몹시 놀란 나머지 얼이 빠지게 된다-------이 이 거울에 비추어 숙고되어야 한다는 것을 그들에게 알려주고 있는 것과도 같다. 그러므로, 신자들은 말씀의 확실성에 관하여 이 구절에서 현저한 위안을 얻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이 보기에 실제로 현존하는 것에서처럼 그들은 안정감을 가지고 말씀으로 쉼을 얻을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또한 알아두어야 할 것은 모세가 말씀------이 말씀에 우리의 구원의 확신이 근거 한다------을 선포하고 있다는 점이다.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 바울이 이 말씀을 "믿음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은 정당하다. 왜냐하면 율법의 교훈은 결코 양심을 고요하게 해주거나 평온하게 해 주지 못하며, 양심을 만족시켜 줄 만한 것으로 충족시켜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성경이라고 하는 말씀의 다른 부분들 특별히 율법의 명령들을 바울이 결코 배재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율법이 요구하는 정확한 순종과는 별도로 바울은 의를 사죄(敎罪)와 맞먹는 것으로 보려 하고 있다.
그래서 복음이라고 하는 말씀은 행위로:말미암아 의를 얻지 않게 하고, 값없이 재공되는 의를 믿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우리 에게 명령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마음에 평강을 주고 그들의 구원을 확증해 주기에 충분한 것이다. "믿음의 말씀"은 환유법에 의하여 "약속의 말씀", 즉 복음 자체를 대신하여 사용된 것인데, 이는 그것이 믿음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율법과 복음이 대조되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이같이 구별하여 이해할 때, 율법이 행위를 요구하는 것처럼, 복음은 하나님의 은혜를 받기 위하여 다만 사람들이 믿음을 소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추론할 수가 있다. "곧·우우리가 전파하는"이라는 구문이 첨가되어 있는 것은 바울이 모세와 질적으로 다르다는 의심을 받지 않기 위해서이다. 바울은 복음 사역에 있어서 그와 모세 사이에 완전한 일치가 있었다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 역시 신적 은혜에 대한 약속에서만 우리의 행복을 찾을 수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9.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 바울은 여기서도 역시 직역하여 인용하는 대신에, 넌지시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모세가 대유법을 써서 얼굴이나 시야(視野)의 뜻으로 '입'이라는 단어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가 이 같은 방식으로 '입’이라는 단어를 넌지시 언급한 것은 적절하였다. 주께서 자기의· 말씀을 우리의 면전(面前)에 재시 하신다고 하는 말은, 그 말씀을 우리로, 하여금 시인하도록 그가 우리를 부르고 계신다는 것을 뜻함에 틀림없다. 주의 말씀은 그것이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열매를 맺어야 하는것이다. 그런데 말씀을 우리가 시인(고백)하는 것은 입으로 말미암는 열매이다.
'믿음' 앞에 `시인’이 나와있는것은성경에 아주 흔히 있는도치법(倒 置法)이다. 마음에서 나오는 믿음이 순서상 먼저 나와 있고’ 입으로 말미 암는 시인----이 시인은 믿음에서 생겨난다―이 뒤따라 나왔더라면-어순(語 順)이 더 좋았을 뻔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가 권능이 충분한 주(主)이심을 우리의 입으로 참되게·시인하는 것이며, 그가 아버지로 말리암아 보내심을 받은 그 분이시요, 우리에게 복음이 되시는 그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는것이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명시하여 언급했다고 해서 그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전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가 그리스도의 부활만을 언급한 것은, 그리스도께서는 자기의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의 구원의 전체 사역을 완성하셨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케 되는 속죄(讀罪)와 속상(讀償)이 비록 그리스도의,‘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성취되기는 했지만, 죄와 사망과 사단을 이기는 이김은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획득된 것이다. 또한 이 부활에서 의와 새 생명과 영생불멸의 소망이 나왔다. 이런 이유로 해서 그리스도의 부활만이 우리의 구원의 보장을 확증할 목적으로 우리앞에 가끔 재시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을 그의 죽으심에서 딴 대로 들리기 위함이 아니다. 왜냐하연 부활은 그의 죽으심의 결과와 열매를 증거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약하자면 그리스도의 부활은 그의 죽으심을 포함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6장에서 어느 정도 언급한 바 있다. 더우기나, 바울은 역사적 신양을 요구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부활 자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신 의도를 포함시켜 놓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목적을 기여해야 한다. 아버지께서 그를 부활하게 하신 의도는 우리 모두를 구원하여 생명 얻도록 하게 하는 것이었다.. 비록 그리스도께서는 스스로 자기 생명을 되찾으실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이 부활 사역은 일반적으로 성경에 성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으로 되어져 있다.
"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 이 구절은 이신칭의(以信 稱義)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이 구절의 말씀은 복음으로 우리에게 제공된 하나님의 자비를 인식하여 받아들임으로 해서 우리가 의를 얻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 를 베푼신다는 것을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의롭다함을 받는 것 이다. 그러 나 우리가 유의해야'할 것은 믿음의 좌소(座所)가 머리에 있지 않고 마음에 있다는 점이다. 나는 여기서 믿음이 위치하고 있는 신체 의 부분에 대하여 논하려는 것 이 아니고', '마음’이라는 단어가 일반적으 로 진지하고 신실한 감정을 의미하기 때문에. 믿음이란 단순한 개념이 아 니고, 확고.한 확신이라는 것을 주장하려는 것 뿐이다.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 바울은 앞에서 기회 있을 때 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 얻는다는 것을 자주 선언하였다. 그렇게 해놓고서는 지금은 우리 의 구원의 일부가 입으로 하는 시인(고백) 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그가 말하고 있기 때문에 이상하게 생각된 수가 있 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입으로 하는 시인이 우리의 구원의 원인이라고 결론지어서는 안된다. 바울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구원을 성취하시는가를 다만 보여주려는 대 있었다. 죽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 속에 넣어주신 믿음을 입으로 고백함으로 해서 구원이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사실, 그는 다만 참된 믿음의 본질을 가르쳐 주고 싶었던 것이다. 이 참된 믿음에서 고백이라고 하는 열매가 맺혀지게 된다. 그가 그렇게 가르쳐 주고자 한 것은 아무도 내용 없는 빈 껍데기 믿음을 갖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감된 믿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열십 으로 마음이 불붙음으로 해 서 그 자체 의 화영 을 발해 야 하는 것 이 다.
그리고 의롭다합을 받은 자들은 이미 구원을 받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확실 하다• 그러므로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게 된다고 하는 말은 마음으 로 믿어 구원에 이른다고 하는 것과 갈은 말이다. 우리가 보는 대로·바울 온 분명하게 구분하여 칭의의 원인은 믿음이라는 것을 밝혔고· 그리고 구 원을 완성하는 데 무엇이 요구되는가를 또한 보여주었다. 아무도 입으로 고백(시인)함이 없이 마음으로 믿을 수가 없는 것 이다. 산양이 있는 곳 에는 연재나 그 질과로써 필연적으로 입으로 하는 고백이 있게 된다.그렇 다고 해서 구원이 고백해서 비롯된다는 말이 아니다. . 오늘날 어떤 사람둘은 마음의 내밀(內密)로 만족하는 까닭에, 입으로 하 는 고백온 쓸데없는 것으로 간주하여 소홀하게 생각한다. 그리고는 가상 적인 믿음을 크게 자랑한다. 그러 나 그러한 자들은 그들이 바울에게 무슨 대답을 해주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 두어야 할 것이다• 화영4도 없고 열 도 없는 대도' 불이 있다고·수장하는 것온 아주 바보스런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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