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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롬10:14)

1. 성경 (롬 10:11 ~ 15)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그를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니 (11)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 (12)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13)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14)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15)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1. 성경에 이르되 누구든지 저률 믿는 자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 하리라 하니." ; 바울은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을 버리신 것이 왜 정당한가 하는 이유들을 진술한 후에, 이제 이방인들을,부르신 것에 대하여 다시 언급하고 있다.  이 구절의 말씀은 그가 지금 다루고 있는 문제의 이면(裏面)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사람들이 구원을 얻는 길을 지적하여 언급했기 때문에, 즉, 유대인들뿐만 아니라 이방인들에게도 다같이 용이하게 통용되는 길을 진술했었기 때문에, 이제 그는 공공연하게 그 길을 이방인들에게까지 확대하여, 처음에는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표현을 사용하고 그 다음에는 이름을 호칭하여 그들을 그 길에로 초대하고 있다.  그가 이미 인용했었던 이사야서의 글을 다시 사용하고 있는 것은 그의 견해가 권위 있도록 하기 위함이며, 또한 그리스도에 관하여 말씀되어진 예언들이 율법과 얼마나 잘 일치하고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12.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 오직 확신만이 요구된다고 하면 하나님의 자비가 임하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그 자비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게 되는 역사가 나타날 것이다. 그러므로 이 같은 경우에는, 인종이나 민족의 차별이 전혀 없게 된다. 바울은 이유들 중에 가장 강력한 것을 첨부하고 있다. 만일 온 세계의 창조주이신 그 분이 모든 인류의 하나님이시라고 하면, 자기를 자기네들이 하나님으로 부르고 인정하는 모든 자들에게 그는 자기의 자비를 나타내 보일 것이다.  그의 긍휼은 무한하기 때문에, 그것을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분명히 베풀어질 것임에 틀림없다.

 

"부요하시도다." ;  이 단어가 여기에서는 능동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  '자비하다’ 와 '은혜롭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유의해 두어야 할 것은, 우리 하나님 아버지의 부요하심이 그가 너무나도 너그러우심으로 해서 감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많이 그가 그의 풍성하신 은혜로 다른 사람들을 부요하게 해주실지라도, 우리는 결코 조금도 빼앗기지를 않게 된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이 축복을 받게 되면 자기가 받을 몫을 잃기나 한 것처럼,  그들이 받은 축복을 하등에 부러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비록 이 논증이 충분히 강력한 것이기는 하였지만, 바울은 선지자 요엘의 증거를 들어서 그것을 확증하고 있다.  이 인용구는 요엘이 일반 명사 (general term)를 사용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균일하게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요엘이 그 구절에서 그리스도의 왕국에 대하여 예언하고 있기 때문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진노가 극열하게 타오른다는 것을 예언하고 나서, 하나님은 진노하시는 중에서도, 주의 이름을 부르게 되는 모든 자들에게 구원 베푸시기를 기뻐하신다는 것을 요엘이 약속하고 있기 때문에, 독자들은 문맥을 통해서 요엘의 선포가 본문의 구절과 일치한다는 것을 더 잘 알게 될 것이다. 이로 보건대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사람들이 그것을 사망의 음부에서라도 구하기만 하면, 바로 그 음부에까지 미치며, 그러기에 그 은혜는 결코 이방인들에게서 거두어지는 것이 아니다.

 

나는 여기서 다른 사람들의 견해들에 대해서 상술하거나 그것들을 반박하는 일을 하고 싶지가 않다. 다만 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진술하고자 한다.  그러나 독자 각 개인은 자기 자신의 견해를 세워야 할것이다.  이 수사학적인 점충법의 요점을 이해하기 위해서 먼저 우리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방인들의 부르심과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행한 사역 간에는 상호 연관성이 있었다는 점이다. 이방인들이 받은 부르심을 귀하게 여기게 된것은 바울이 행한 사역을 승인한 데 있었다. 이제 바울은 이방인들의 부르심을 의심할 여지가 없도록 입증하고  동시에 그  자신이 열심을 내는 이유를 제시할 필요가 있었다.  이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녀들에게 주시려고 준비해 둔 떡올 빼앗아다가 그것을 개들에게 주는 격으로 하나남의 은혜를그가 마구잡이식으로 낭비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 두 가지 요점들을 동에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각 요점의  순서대로 자세하게 진술되기까지는, 그의 강화(講話)의 맥락을 그가 어떻게 연결짓고 있는가를 우리로서는 충분하게 이해하기가 어렵다. 그의 점충적인 표현이 사실상 의미하는것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이 모두 하나님의 이름을 그들이 부르는 바로 그 사신에 의하여  하나님을 믿는 자신들의 신앙을 선언한다는 것이다.  하나남에 대한 정확한 지식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그 같은 부름에 선행하지 않고서는 하나님의 이름을 참되게 부를 수가 결코 없다.   

 

더우기나 믿음은 하나남의 말씀에서 생겨난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는 곳은 어디에서나 그것은 하나님의 특별 하신 섭리와 작정에 의해서만 되어지는 것아다. 그러므로 부르는 곳에는  하나님을 믿음이 있고 (즉,믿음이 있을때 하나님을 부를 수가 있는 것이다)  믿음이 있는 곳에는 그것은 말씀의 씨에 의하여 선행되었으며 (즉, 믿음은 말씀의  씨에서 생겨 난 것이다), 그리고 말씀이. 전파되는 곳에는 하나님의 부르심 (召命)이 있다 (즉, 하나님은 말씀 전파에 의하여 죄인들을 부르시는 것이다).  이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이 유효하게 열매를 맺는 경우 하나남의 자비가 분명하게 의심할 여지없이 나타나 있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께서 자기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도록 허락하신 이방인들이 하나남의 나라에서 배제될 수 없다고하는 결론이 나오게 된다.

 

왜냐하면 복음을,전하는 것이 이방인들 가운데서 믿음의 원인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선교 -----하나님은 이 선교에 의하여 이 같은 방식으로 그들의 구원을 마련해 주시기를 기뻐하셨다.----는 복음 전파의 원인이다.  이제 본문의 구절을 개별적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겠다..

 

"14.  그런즉 저희가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 ;  여기에서 바울의 목적은 하나님을 부르는 것(myocation)을 믿음과 연관사키는자데 있다.  이는 양자간에 아주 밀접한 연관성이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부르는자는 구원의 유일한 피난처에 들어가 가장 완전한 보호를 받는다. 이는 마치 이들이 완전하시고 가장 사랑 많으신 아버지의 품에 안겨 그의:보호를 받으며, 온화함과 자랑을 맛 보며 그의 자비와 능력으로 힘을 얻는 것과도 같다.  이같이 구원에 도달할 수 있으려면, 마음 속속으로 하나남의 부성애 (父性愛)를  이미 크게 확신했기 때문에 감히 어떤 종류의 축복이든지  그것올 바랄 수 있는 자이어야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자들은 그 안에서 그들들이 보호를 받는다는 것을 믿을 필요가 있다. 이는 바울이 여기서 하나님이 인정하고 계시는 부름에  대하여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위선자들 역시 하나님께 기도하지만  구원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전혀 신앙이 없이 하나님을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은 사실은 의심을 가지고,  그리고 아무런 확신도 갖지 못한채 하나님 앞에 서는 모든 중세 신학자들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여주고있다.  바울의 태도는 이들과는, 전혀 다르다.  왜냐하면 기도의 응답을 확신하지 못하고서는 정당하게 기도할 수가 없다는 것을 그가  공리(公理)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여기서 맹목적인 신앙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마음 속으로 하나님의  부성애를 깊이 느끼고  있는 확신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 확신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신과 화목케 해주시고 우리를 그의 자녀로 삼아주시는것이다.  또한 에베소서 3장 12절에서 알 수 있는대로, 이 확신에 의해서만이 우리는 하나님께로 갈 수가 있다.  한편으로, 참 신앙이란 하나님께 기도하게 해 주는 신양이다. 하니님의 자비를 맛 본 신자는 쉼없이 기도할 때마다 그 자비를 갈급하지 않을 수 가 없는 것이다.

 

"듣지도못한 이틀 어찌 믿으리요" ;  하나님의 약속으로 말미암아 우리의 입이 열려 기도하게 될 때까지는 우리가 벙어리나 다름없다는 뜻이다.  이것은 우리가 스가랴 선지자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 종류의 말씀이기도 하다. "나는 말하기를 이는 내 백성이라 할 것이요,그들은 말하기를 여호와는 내 하나님이시라 하리라·(슥 13 : 9)".  우리 구미에 맞는.하나님을 만들어 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져야 하는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지식은 그의 말씀에 진술되어 있는 지식인 것이다.  만일  어떤 사람이 그 자신이 고안해낸 신관념을 가지고 있다고 할 것 같으면, 그의 신앙은 확실하고 순수한 신양이 아니라; 변하기 쉽고 덧없는 상상에 불과할 것이다.  따라서 하나님에 대한 참 지식을 위해서는 말씀이 필요하다. 그러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다만 전파된 말씀이다.  말씀전파는 주께서 자기의 말씀을 전해 주기 위해서 정하신 전형적인 방식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전파(preaching)를 수단으로 해서만 사람들 가운대 자신에 대한 지식을 심어주실 수 있다고 할 것 같은, 이 같은 주장은 바울이.의미하는 것과는 다르다고 해야 할 것이다.  바울은  하나님의 통상적인 말씀 분배에 대해서 만 언급하였고, 그의 은혜에 대하여 어떤 법칙을 규정해 둘 마음은 없었다. 

 

"15.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  바울이 의미하는 것은. 어떤 민족이 복음 전파를 받는 은혜를 입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의 '결실'이요 '증거’라는것이다. 하나님의 특별하신 섭리 가운데서 하나님이 일으켜 세우지 않은 복음 전파자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복음이 전파되는 그 민족을 하나님께서 찾아 가신다는 것이. 확실하다. 그러나 바울이 개인의 소명에 대해서는 여기서 전혀 다루고 있지 않기 때문에, 그 문제를 상론할 필요는 없다. 여기서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염두에 두는 것만으로도 족하다. 즉, 복음은 구름에서 비가 떨어지듯 우연히 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곳에 사람들의 손을 빌어 전해지게 된다는 것이다.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 ; 우리는 이 구철의 말씀을 다음과 갈은 방식으로 우리가 지금 다루고 있는 주제에다 적용시켜야 한다.  주께서는 자기 백성에게 구원의 소망을 주시고자 할 때, 이 구원의 좋은 소식을 가지고 오는 자들의 발걸음을 크게 환호하여 맞이하신다. 그러므로 바로 이 진술에 의하여 바울은 영생의 메 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해 주는 사도적 직분( apostolicum ministerium )이 말씀(the Word)과 동등하게 소중하다는 것을 분명 하게 밝혔다.  이로 보건대 이 직분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은 것은 아무것도 바랄 만하거나 찬양할 만한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한,알 수 있는 것은, 복음 전파를 모든 선한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하게 갈망해야 하는 것과, 그들이 그것을 얼마나 크게 평가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이는 주께서 친히 자신의 입으로 그것을 이같이 칭송화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비길데 없이 가치가 있는 이 보화를 국구 칭송하고 계시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일깨워 그것을 친절하게 갈망하도록 하려는 것임에 틀림없다.  '발(feet)'은 환유법에 의하여 도착을 의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