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롬 12: 3 ~ 8)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3)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4)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5)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혹 예언이면 믿음의 분수대로, (6)혹 섬기는 일이면 섬기는 일로, 혹 가르치는 자면 가르치는 일로, (7)혹 위로하는 자면 위로하는 일로,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 다스리는 자는 부지런함으로, 긍휼을 베푸는 자는 즐거움으로 할 것이니라 (8)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 말하노니." ; 원입 접속사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라면 이 귀절은,전자와 일치한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 탐구에 전력을 기울일 것을 원하고 있었던만큼 그의 다음 임무는 우리들을 헛된 호기심으로부터 이끌어내는 데 있었다. 하지만 원인 접속사는 바울의 문장에 자주 반복되는 것인 만큼 본 귀절은 단순한 확증의 의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다. 이렇게 되어야 그 의미가 일관성이 있게 된다. ·그는 어떠한 명령을 내리기 전에, 그들에게 그가 받은 권위를 상기시켜 줌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의 목소리를 마치 하나님 자신의 목소리처럼 받아들이게 하고 있다. 그의 의미는, “나는 내 스스로 얘기하는 것이 아 니라 하나님의 사신으로서 그가 나에게 맡기신 명령을 여러분들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라는 것이다.
그가 앞에서처럼 자신의 사도직을 은혜와 관련 시키는 것은 그 속에 있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칭송하려는 뜻에서이다. 그와 동시에 여기에는 자기가 자신의 만용에 이끌려 억지로 사도직을 차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소명에 의해서 그리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이 암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는 이 서론을 통해서 자신의 권위를 확증함으로써 로마교인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의 사자를 통해서 당신을 멸시하지 않고자 한다면, 순종할 수 밖에 없도록 만들고 있다. 다음으로 우리에게 아무런 덕도 끼치지 못하고 오로지 정신적 고통만 가져 올 뿐인 문제들에 대한 연구를 피할 것을 명령하고 있다. 바울은 누구든 자신의 능력과 소명이 감당할 수 있는 이상의 것을 스스로 짊어지는 것을 금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그는 우리에게 우리로 하여금 건전한 마음을 갖고 잘난 체하지 않게 하는 문제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묵상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나는 이 해석이 “아무도 자신에 대해서 교만하게 생각하지 말라”는 에라스무스의 번역보다 더 나은 것으로 생각한다. 전자의 의미는 문맥과 더 일치하지만 후자의 의미는 이 대목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이라는 소절은 '휘페르프로네이' 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곧, 만약에 우리가 간절하게 생각하지 말아야 할 문제에 관여할 경우, 우리는 지혜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라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지혜롭게 생각하는 것" 은 우리 생각에 우리가 온당하게 배우고 가르침을 받는 것으로 생각하는 연구에 집착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 주신……" ; 그는 여기서 그가 언급하고 있는 온건한 지혜에 대한 이유를 표현하고 있다. 은혜는 여러가지 방법으로 분배되는 만큼 각자가 주님께로부터 받은·신양의 은혜의 한계를 지킬 경우 지혜롭게 되는 데 있어서 최선의 방법을 택하는 샘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에게 주어진 것에 대해서 관심을 갖지 않고 경솔하고 오만하게 우리 의 지식의 한계를 벗어날 경우 우리는 알 필요가 없으며 알아도 우리에게 아무 혜택이 없는 문재뿐 아니라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가 알아서 유익한 문제에까지 쓸데없이 지혜로운 체하는 샘이 되고 만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오만불손이 처벌을 받지 않고 그냥 지나치는 것을 허용치 않는다. 우리는 어리석은 야심 때문에 그들에게 정해진 한계를 벗어났다가 자신들의 우매에 끌려 곁길로 가는 사람들을 종종 보고 있다. 여기서의 핵심은 온유하고 가르침을 받으려는 정신으로 우리 자신을 바 쳐서 하나님께 인도와 지도를 받는 것이 우리 모두에게 있어서 합당한 제사라는 것이다.
신앙과 인간적인 판단에 대한 대조를 통해서 바울은 신자들에게 한계를 설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결점의 한계를 또한 겸손하게 지키게 하고 있다.
"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 바울은 이제 그가 신앙의 분량에 따른 ( secundum fidei . mensuram) 각 신자의 지혜의 한계에 대한 주장을 모든 신자들의 소명과 관련시켜 .확증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믿는 모든 자들 사회에 인간의 몸의 각 부분 사이에 있는 관련과 유기적 연합을 확립시켜 놓으신 점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가 한 몸 안에서 서로 연합하라는 조건으로 부름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들은 스스로 그러한 연합을 가질 수 없었기에 당신께서 손수 이 연합의 기반(bond) 이 되셨다. 그러므로 인간의 몸에 있는 관계가 신자들의 교제에 있어서도 있어야 마땅하기 때문에 바울은 이 비유를 적용함으로써 각자가 자신의 성격, 능력 및 소명에 맞게 합당하재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필수적인 것인가 하는 점을 입증해 주고 있다.
그리고 이 비유는 여러가지 면에서 적용될 수 있지만 무엇보다도 다음과 같은 방법으로 우리의 당면 문제에 적용할 팔요가 있다. 한 몸의 각 부분에 서로 독특한 기능이 있으며 그 어떤 부분도 동시에 모든 기능을 가지거나 다른 부분들의 기능을 차지하지 않을 정도로 모든 부분이 다 다르듯이,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다양한 은사를 분배해 주시고 있다. 이러한 독특성에 의해서 당신께서는 우리를 지탱하고자 하는 질서를 정하셨으며 그 결과 각자는 자신의 능력의 정도에 따라서 스스로를 조절하며 타인에게 속한 임무에 주제 넘게 뛰어들지 않게 하신 것이다. 어느 누구도 모든 것을 동시에 가지려고 추구해서는 안되며 자신의 처지로써 만족하고 타인의 임무들 횡령하는 일이 없도록 자발적으로 자제해야 옳다.
하지만 우리들 사이에 있는 교제를 뚜렷이 지적하는 바울의 표현속에는 우리들이 각자 개인의 능력을 몸의 공동 유익에 적용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열성을 보여야 마땅한가 하는 점이 암시되어 있다.
"6.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받은 은사가 각각 다르니." ; 바울은 여기서 우리들 사이에 형제적인 사랑을 품는 문제에 대해서 말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겸손을 우리의 전 인생을 규제하는 최선의 수단으로 추천하고 있다. 모든 인간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도움을 바랄 필요가 없을 만큼 충족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아무도 자족하지 못하고 타인으로부터 빌릴 수 밖에 없게 될 경우 교제가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므로 나는· 경건한 자들 사이의 교제란 각자가 자신의 분량으로 만족하며 자기가 받은 은사를 형제들에게 나눠 주며 또 자신도 남의 은사의 도움을 받으려 할 때만 가능한 것으로 본다.
바울은 특별히 그가 인간들이 타고난 것으로 알고 있던 교만을 억누르기를 바랐다. 아무도 자기에게 모든 것이 허용되지 않은 사실 때문에 고민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각자에게는 하나님의 선한 목적에 의해서 배당된 책임의 몫이 있다는 점을 우리들에게 상기시켜 주고 있는데 이것은 아무도 자기 형제를 모독하고도 벌을 받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은사를 부여받지 않는 것이 몸의 공통적인 구원에‘유익이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이 사도가 염두에 두고 있는 핵심인 것이다. 모든 것이 모든 인간들에게 적합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사는 각자에게 한정된 몫이 돌아가도록 분배되고 있다.
각 개인은 아무도 자신의 기능을 저버리고 타인의 그것을 침해하는 일이 없도록 교회의 교화를 위해서 자신의 은사를 사용하는 데 집착해야 옳다. 각 개인이 자신이 주님으로부터 받은 것을 공동의 유익을 위해 ’나눠 쓰되 남들도. 그렇게 하는 것을 방해하지 않을 때 교회의 안전은 더없이 탁월한 이 질서와 조화에 의해서 유지되기 마련이다. 이 질서들 뒤바꾸는 것은 그것율 제정해 놓으신 하나님을 상대로 싸우는 것이다. 은사의 차이점은 인간의 뜻에서부터 생기는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이런 방식으로 당신의 은혜를 분배하는 것을 기뻐하셨기 때문이다.
"흑 예언이면·… ." ;그는 구체적인 본을 들어 가면서 각자가 자신의 능력을 행사하고 자신의 입장을 지탱하는 데 있어서 얼마나 힘써야 하는가 하는 점을'보여주고 있다. 모든 은사에는 거기에 정해전 한계가 있으며 여기서 이탈하는 것은 은사 그 자체들 망쳐놓는 짓이다. 본 문단온 좀 뒤엉켜 있 지만 우리는 이것을 정리해서 여기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예언하는 사람온 그것을 믿봄의 유추에 비추어 시험하며,섭기는 임무를 가전 자는 섭거는 일에 그것을,사용하고. 가르침을 받온 자는 가 르치는 일에 사용하도록 하라……이러한 목적을 염두에 두고 있는 자들온 스스로의 한계들 지킬 것이다. 하지만 이 문맥의 여러가지 의미로 이해되고 있다. 혹자는 예언’을 예고 하는 수님께서 모든 수단을 동해서 당신의 나라의 위엄과 탁월성을 드러 내고자하셨기에, 교회가 시작되던 당시에 교회에 성행하던, 예고하는 능 력 (the· power of predic'ting) 으로 이 해 한다. 그 리고 그들은 우리 의 믿음의 분 량대 로 ( secundum analogiam fidei )라는 대목이 모든 귀 결과 관련 되는 것으로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이 단어를 더 넓온 의미에서, 어떤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뜻을 유능하고 정확하게 설명하는 주석가의 임무를 수행하게 하는 계시에 대한 특수한 은사로 이해하는 자들의 견해를 따르고자 한다. 그러므로 오늘날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의 예언이 단순히 성경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그것을 설명하는 특수한 은사에 지나지 않는 것은 모든 옛날 예언과 하나님의 모든 말씀(oracles)이 그리스도와 당신의 복음 안에서 결론이 나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다 방언하기 를 원하나 특별히 예언하기들 원하노라" (고전 14 : 5).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한다 (고전 13 : 9)는 바울의 말에서 엿볼 수 있듯이 그는 이 단어를 이런 의미로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처음에 당신의 교회를 장식하는 데 있어서 사용하신 저 경이적인 은혜만을 생각하고자한 것인가 하는 점은 명확치 않다. 그보다 우리는 그가 단순히 교회 안에 영속적으로 남아 있는 일상적인 은사를 두고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영이 있었기 때문에 그리스도을 저주받온 분으로 부들 수없던 자들에게 사도가 이런'말을 한 것온 공연한 것이라는 주장은 충분히 확고 한 반론이 못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다론 문맥에서(고전14:32) 그는 예언자들의 영이 예언자들에게 주어지고 있는 것으로 선언하면서 처음 연사 에게. 만약에 동석(同席)하고 있는 누구에게 계시가 주어질 경우, 잠참알 것을 명령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같온 이유에서 여기서 교회에서 예언 하는 자들에게,어느때든 그들이 올바른· 선에서 방황하거 나 이탈하는 일이 없도록. 신앙의 원칙 에 자신들의 예 언을 일치시 킬 것 을 권면하고 있는지 도 모론다• 신앙은 종교의 제 1원리들을 뜻하며 여기에 일치하지 않는 것 으로 발견되는 가르침은 모두 거짓된 것으로 정죄받고 있다. 다든 귀절에 있어서는 별 어려움이 없다 ... 사역자로 임명받은 자는·하고 그는 말한다. 사역을 통해서 자신의 임무을 수행하고, 자신을 위해서가 아 니 라 타인 을 위 해 서 그 런 촌귀 를 받고 있 다는 점 을 명 심 해 야 한 다 • 바울 온. 그는 올바르게 목회합으로써 자신의 임무를 성취하고 그의 명칭에 일 치하도록 하라는 식으로 얘기하고 있다.따라서 가르침이라는단어를 통해 서 그는 교사들에게 건전한 교화를 주천하고있으며, 그 의미는, "교의에 있어서 뛰어 난 자는 교회가 갑으로 올바르게 가르침 받는 것 이 자신의 목 표라는 점을 깨닫고 교회가 자신의 교의들 더욱더 배우는 것만 힘쓰도록하라” 는 것이다.
교사(dodor)란 전리의 말씀으로 교회를 형성하고 훈계 하는 자다. 권면에 있어서 뛰어난은사불 가전 사람은 효율석으로 권면하 는 것을 자신의 목표로 삼도록 해야 한다. .; ' . ~ . -J -, 이러한 여러 임무들은 상호 밀접한 관계를 맺고.있다. 하지만 바로 이 런 이유에서 더 이상 그것들이 서로 차이점을 갖지 않는다는、것온 아니다. 아무도 교의가 없이는 권면할 수 없지만 가르치는 자에게 동시에 권면의 온사가 부여되지는 않는다• 아무도 사역과 무관하게 예언하거 나, 가르치거 나. 권면하지 않는다. 하지안 우리가 하나님위-여러 온사에서` 엿보며 교회 질서에 유익한 것으로 보는 독특성을유지하기만한다면그것으로 속하다.
"8. 구제하는 자는 성실함으로(証 3) ……" ;우리는 이 뒷부분의 소절을 통해서 여기서 다루고 있는 문제가 하나님의 은사에 ·대한 적합한 용법이라는 점을 뚜렷하재 알게 된다. 바울은 여기서 주는 자들(메타디둔타스)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자신들의 소유를 주는 자들이 아니라 교회의 공적 재물 분배 책임을 맡고 있는 집사들에 대한 기술적인 용어다. 그리고 그는 자비를 보여주는 자들( J..\eowras )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는데 이것온 고대 교회 풍속에 따라서 병자 간호 책임을 맡은 과부들과 다른 봉사자들을 뜻한다.
가난한 자들에게 필요한 것을 공급 하는 것과 그들을 돌보며 보살피는 것은 별개의 문재다. 전자의 경우에 있어서 그는 단순성을 강조합으로써 그들에게 기만이나 사람 차별없이 자기들에게 맡겨전 임무를 충실하게 수행할 것을 권하고 있다. 후자의 경우에 있어서는 그들이 기꺼운 마음으로 일한다는 점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있 는데 이것온,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들이 .그들의 침울한 자세 때문에 그 들의 봉사가 망쳐지는 일이 없도록 하려는 뜻에서다. 병든 자나 다른 면 으로 고통을 받고 있는 자들에게 있어서 적극적으로 발벗고 나서는 조력 자들의 모순을 대하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없듯이, 돕는 자들에게서 우울 한 표정을 읽을 경우 그들온 그것을 모욕으로-여길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다스리는 자들이란 교회 통치를 위 임받은 자들이다. 이들온 곧 다론 회원들을 수도하고 다스리며 규율을 잡 던 장고들(1seniores)이다. 하지만그가 이들에 대해서 얘기하고'있는 내 용온 모든 종류의 지도자에 대해서 확대적용될 수도 있다. 모두의 보존을 책임말고 있는 자들에제서는 큰 관십아요청되고있으며 모두의 안전을 밥 낮으로 경계할 임무를 부여받고 있는 자들에게서.는 큰 근면이 요청되고 있 다. 하지만 당시 상황온 바울이 전반적인·지도자을 두고 언급하고 있는 것 이 아니라(당시에 경건한 위정자란 아무도 없었다) 윤리의 재판관들 (morumcensores)이장로들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는 점을 입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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