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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롬15:27)

1. 성경 (롬15:22 ~ 33)
그러므로 또한 내가 너희에게 가려 하던 것이 여러 번 막혔더니 (22)이제는 이 지방에 일할 곳이 없고 또 여러 해 전부터 언제든지 서바나로 갈 때에 너희에게 가기를 바라고 있었으니 (23)이는 지나가는 길에 너희를 보고 먼저 너희와 사귐으로 얼마간 기쁨을 가진 후에 너희가 그리로 보내주기를 바람이라 (24)그러나 이제는 내가 성도를 섬기는 일로 예루살렘에 가노니 (25)이는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연보하였음이라 (26)저희가 기뻐서 하였거니와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빚진 자니 만일 이방인들이 그들의 영적인 것을 나눠 가졌으면 육적인 것으로 그들을 섬기는 것이 마땅하니라 (27)그러므로 내가 이 일을 마치고 이 열매를 그들에게 확증한 후에 너희에게 들렀다가 서바나로 가리라 (28)내가 너희에게 나아갈 때에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가지고 갈 줄을 아노라 (29)형제들아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여 나를 위하여 하나님께 빌어 (30)나로 유대에서 순종하지 아니하는 자들로부터 건짐을 받게 하고 또 예루살렘에 대하여 내가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을 만하게 하고 (31)나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기쁨으로 너희에게 나아가 너희와 함께 편히 쉬게 하라 (32)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아멘 (33)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22. 그러므로 또한 내가.~~~~~ 여러번 막혔더니.” : 바울이 그가 자신의 사도직에 대해서 언급했던 점을 다른 주제에 적용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 남들 뿐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도임명되었지만, 그들에게 한번도 가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변명하려는.뜻에서이다.  그리므로 그는 그가 유대로부터 일루라곤에 이르기까지 복음을 전파함으로써 주께서 자신에게 부과해주신 길을 마쳤다는 점을 지나가는 말로 언급하고. 아제  이알이,끝나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소홀히 하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소홀히 하고 있다는 의심을 미연에_방지하는 뜻에서 그는 그 오랜 동안에 걸쳐서 자신의 편에서 욕구가 없던것이 결고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있다. 자신의 소양이 보다 일찍이 성취되지 못한 데는·그럴 만한 이유가 댜분히 있었다. 이제 그는 자신의  소명이 허용하는 한 자신의 도착을 기대 할 것을 당부하고 있다.  이 문단에서부터 바울이 스페인으로 갔다는논리를 펴는 사람들이 있는데 근거가 박약한  말이다. 그는 단지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는 소망을 피력화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다른 신자들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소망이 때때로 좌절되었을 수도 있다

“24. 이는 ~~~~· ~너희를 보고~~~~” ; 오랫동안에 걸쳐서 그들을 만나보고자 했을 뿐 아니라 지금 그런 계획을 가지고 있는 이유는 그의 말대로 그들을 만나는 것、곧  그들을 만나서 그들과 예기 하는 기회를 가지며, 자신의 공적인 신분을 통해서 그들에게  자신을 알려주는 것이었으니, 그 까닭은 어떤 사도가 도착하는 것은 복음이 온다는 것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그는 "너희의 그리로 보내줌"이라는 표현을 사용 하고 있는 데, 이것은 자기에게 그들로부터 큰 친절을 기대 할만한 명분이  있다는 말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이것이 그들의 호의를 확보하는 최선의 방법이었다.

 

 남들이 우라들 신뢰 하고 있다는점을 깨달을수록 우리가 그들에 대해서 느끼는 채무감은 그 만큼 더 강렬하기 마련이다· 우리에 대한 견해가 그릇되다는 점을 증거하는 것이야말로 불명예스럽고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는 먼저 "너희와 교재하여 약간 만족을 받은 후에" 라는 말을 덧불이고 있는데 여기서 그는 그간 그들에게서 느까고 있던 친절의 자세를 언급하고 있다. 그들에게 이것을  확신시겨 주는 것은 복음에게 큰 의의가 있었다.

"25. 그러나 이제는 내가·…·예루살렘에 가노니" ; 그들이 자신의 즉각적인 도착을 기대 하거나. 그의 도착이 그들이 예상했 던 것보다 오래 지체될 경우 속은 것으로 상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점에서는 그가 현재 관여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당장 로마 여행을 막고 있는 일을 그들에게 지적 하고 있다. 그는 아가야와 마게도냐에서 모금된 구제금을 가지고예루살램으로 여행하는 도중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가 이 기금을 적송하는 것은 그들로 하여금 이것을 모방하도록 자극하려는 뜻에서이다는 지 금 당장으로서는 그들에게 그렇개 할 것을 요구하지 않고! 있지만;:',아가야 와마게도냐 사람들이 그들에게서 요구되고‘있는 것을 수행했다는 (iS 속에 는 로마인들의 책임이 무엇인가 하는 내용이 암시되어 렀는 것으로-볼 수 있는 것은 그들의 상황이 동일했기 때문이다. 고린도인들에게 보내는서신 에서는 이것이 자신의 의도였다는 "……내가너희를:뷔하여· 마계도t냐인들 에게 아가야에서는 일년 전부터 예배하였다' 자랑하였는데 과연 너희 열십 이 픽 많은 사람들을 격동시켰느니라·c고후9 : 2)하는 대r목이 그것이다: 헬라인들이’ 예루살램 형제의 국심한 빈곤에 대한 소식을 듣=::ill 먼 거:박 를 생 각치 않고 믿음의 줄로 연합된 자들이 자신들로부터 그리 l 멀지入 않은 곳에 있는 것 으로 간주하며 자신들의 풍상합 가운데 서 그들의 L ji_통운 연 어 준 것은 비상한 경건의 표이다. 여기서 ·사용되고 있는 °'jll_통" (commun icatio)이라는 단어는 우리가 우리 형제들의 곤경을 돕는데 있어서 품어야 할 카음 자세를 가장 적합하게 표현하는 것으로써 특별히 수목-을 요한다. 몸의 연합은 다른 지체 상호간의 관십을 블러 일으키기 마련이다. 내가 대 명사 'TWO.불 번역하지 않고 있는 것은 헬라어에 있어서 그것이 중:.""¾) 덤으 로 나오며 본 문단의 의미들 약화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때문이다. 나 는 점 기 는 일 로' ( ministering ) 라는 분사떨 ‘섭 기 다' ( to .minister)로 번 역하고 있는대 후자가 바울의 의도에 더 잘 어울리는 것으로 보인다. 왜 냐 하면 바울은 로마로 당장 출발하지 옷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변명하고 있 기 때운이 다.

"27. 또한 저희는 그들에게 빛진 자니……" ; 여기서 아주 명백한 점은 여기에 언급되고 있는 채무가 고린도인들보다는 로마인들 자신을 위한 것이라는 사실이니 그 까닭은 고린도인들이나 마게도냐인들은 로마인들보다 유대인에게 더 크계 빛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바울은 또한 이 채무의 이유를 제공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들이 유대인들에게서부터 복음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보다 작은 것을 보다 큰 것과 비교하는 가운데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고린도전서 9장 11절에서 그들이 훨씬 가치가 떨어지는 육적인 것을 영적인 것과 교환하는 것을 부당하거나 가혹한 것으로 여기지 말 것을 지적하면서 이 논리를 사용하고 있다. 바울은 그들이 복음의 사역자들에게만 빚지고있는 것이 아니라 이 사역자들을 배출한  전체 유대민족에게도.마찬가지라는점을 선언함으로써 복음의 가치를 우리에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섬긴다' (to mini~ter)는 뜻의  '레이룰게사아' 라는 동사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국가가 정한 임무를 수행하며 자신의 소명의 짐을 짊어지는것을 뜻한다. 이것은 종종 거룩한 의식을 수행하는 것과 관련되기도 한다. 바울은  내가 확신하기로는 신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에서 형제들의 빈곤을 덜어 주기 위해 내는 일종의 희생제사(sacrifice)들 두고  언급하고 있다. 그들은 그들이 빛지고 있는 사랑의 임무를 그렇게 갚음으로써 그와 동시에 향긋한 냄새의 희생제사를 하나님께 바치고 있는 샘이다.  하지만 이 문단에서 바울은 우리가 앞에서 언급한 상호간의 보상을 두고 언급하고 있다

"28. 이 열매를 저희에게 확증한후에~~~" ; 나는 이것이 안전하게 보관 하고자 했던 것을 봉인을 통해서 확보하던 고대의 습관을 빗대어 말하는 것이라는 점을 쾌히.승낙하고자 한다. 이렇게 해서 바울은 자신의 신실성과 정직성을 추천하고 있다. 그가 자기에게 맡겨진 돈을 인봉한 채로 가지고 간다는 것은 그것을 정직하게 보관한다는 얘기가 된다. '열매’라는 단어를통해서 바울은 유대인들이 복음의 씨앗을 뿌린 다음에.그들에게 모아진 이자를 뜻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이것은 농부가 전답의 소출을 통해서 먹고 사는 것이나 갈은 원리다. 


"29.  내가 너희에세 갈 때에~~~~· " ; ·이 대목은 두 가지 중에 한 가지 방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첫째 의미는 복음의 축복이란 선한 행위라는 열메를 맺는 것인 만큼 복음이 로마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고 있음을 발견할 것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표현을 의연금으로 국한하는 자들의 견해에 찬동할 수 없다. 그 둘째 설명은 바울이 자신의 도착에 대한 그들의 욕망을 자극하는 뜻에서 그것이 열매를 맺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라는 소망을 표현하는것으로 보는 것 인데 그 까닭은 자신의 도착이 "그리스도의 축복의 충만함", 곧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으로 복음을 크게 증대할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성과와 성장에 대한 의미이다. 그러나 이 축복은 한편으로는 바울의 사역에 한편으로는 그들의 믿음에 의존하는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자신이 그가 받은 은혜를 그들 가운데서 야금 야금 탕진할 것이 아니라 그들이 복음을 받아들일 때 보여준 동일한 열심을 가지고 그것을 선한 목적에 사용할 것인 만큼 자신이 그들에게 가는 것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약속하고 있다.

 

전자의 설명이 보다 더 일반적으로 용인되고 있으며 내게도 둘 가운데 이것이 더 나은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자기가 도착할 때 그의 가장 간절한 소원이 성취될 것을, 곧 복음이 그들 가운데서 번창해서 뛰어난 성과를 가져오는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성결과 다른 모든 종류의 덕에 있어서 탁월했기 때문이다. 그가 이런 바람에 대해서 제시하는 이유는 그들이 복음의 영적 부요함에 있어서 풍성한 점을 보는 데서 특별한 기쁨을 맛보고자 하기 때문이다.

"30.  형제들아 내가……너희를 권하노니" ;  우리는 여러 문단을 통해서 얼마나 바울이 그가 유대인들에게 모세를 저버릴 것을 가르쳤다는  무고한 비난 때문에 자기 민족에게서 미움을 사고 있었는가 하는 점을 알고 있다.  바울은 잘못된 이야기가 특별히 맹목적인 열심에 이끌려 휩쓸리는 자들에게서는 무고한 자에게 크나 큰 영향을 끼친다는 점을 알고 있다. 그뿐 아니라 그도 알고 있었듯이 성령께서는 수 차에 걸쳐서 예루살렘에 결박과 환난이 그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을 경고한 바 있다'(행 20:2:f). 그러므로 그는 큰 위험을 볼 수록 그만큼 더 자극을 받았다. 이것으로 자기의 안전을 교회들에게 천거하는 그의 크나큰 불안이 설명된다.

 

우리는 그가 자신의 생명에 대해서 불안해 하는 것을 이상히 여길 필요가 없는데 그것의 생명의 상실은, 그도 알고 있었지만,  교회에 너무도 큰 위험을 내포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성도들이 서로를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져야 옳은 성령의 사랑과 주님을 연관시킴으로써 자신의 고통의 정도와 이 고통의 강도를 역력히 보여주고 있다. 하지만 그는 그런:공포 속에서도 자신의 길을 지속하는것을 중단하가나 위험에서 움츠러들지 않고 그것을 당할 만반의 준비태세들 갖추고 있다.  그는 하나님께서 제공하는 처방책을 자신의 도움으로 인정하면서 교회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가 교회의 기도의 도움을 받아 약간의 위로를 받으려는 뜻에서이다.

 

이것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마 '18 : 20 ) 하는 주님의 약속과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바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마18 : 19) 라는 말씀에 따른 것이다.  아무도 자신의 천거의 목적을 하찮은 것으로 생각하는 일이 없도록 하는 뜻에서  그는 그들에게 그리스도와 성령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간청하고 있다. 성령의 사랑이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함께 결합하면서 사용하는 사랑을 뜻하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육신이나 이 세상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연합의 기반(bond)이 되는 당신의 영으로부터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신자들의 기도의 조력을 받는다는 것이 어찌나 큰 하나님의 축복이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선택받은 바울마저도 그것을 소홀히 여기지 않고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우리같이 비천하고 쓸모없는 인간들이 그것 을 무시한다면 그것은 큰 오산일 것이다. 이와 갈은 문단을 죽은 성도들을 위한 중재의 기도를 지지하는데 사용하는 것은 너무 몰염치하다.

"나와 힘을 같이하여……‘‘ ; "내 수고하는 일에 나를 도와” 로 번역하는 에라스무스의 번역이 전반적으로 훌륭한 것은 사실이지만 나는 바울이 사용한 헬라어가 더 의미가 있으므로· 직역을 택하는 바이다. '힘쓰다’는 말에는 그가 처한 '난관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으며 이러한 투쟁에 있어서 그들의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그는 신자들이 자기 형제들을 위해서 드리는 기도를 불러 일으키는 마음씨를 우리에게 제시하고 있다. 그들은 그의 말대로 자신들이 마치 동일한 어려운 환경에 처한 것과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고통받는 형제들의 몫을 실제로 분담해야 옳다. 그는 또한 그러한 기도가 마땅히 가져올 효과를 보여주고 있다. 한 형재를 주님께 추천하는 신자는 그의 고통의 몫을 스스로 짊어짐으로써 그에게 상당한 도움을 베푸는 셈이다. 사실 말이지 우리의 입이 하나님에 대한 기도에 의존하는 것이라면, 우리가 우리의 형제들의 힘을 복돋아 주는 최선의 길은 그들을 위해서 하나님께 기도하는것이다.

"31.  또 예루살렙에 대한 나의 섬기는 일을 성도들이 받음직하게 하고" ; . 바울의 훼방군들이 그에게 무고한 비난을 퍼붓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성공적이었든지 그는 그가 가지고가는 선물 역시, 비록 그것이 그들의 큰 고통을 덜어주기에 아주 적절한 시기에 그들에게 제공되고 있지만 환영을 못받지 않을까 하고 두려워할 정도였다. 바울이 자기 생각에 자기를 환영할 준비를 갖추고 있지 않는 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것을 중단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그의 뛰어난 관용이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우리도 이 자세를 본받는 가운데 우리가 감사를 받을 것으로 확신하지 않는 자들에 대해서 계속 선율 베푸는 일울 중단하는 일이 없어야겠다걸 특별히 주목을 요하는 점은 그가 의심을 받고 환영받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예루살렘 교우들에게 성도들이라는 경칭을 사용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는 성도들이라도 경우에 따라서는 거짓된 비난에 이끌린 나머지 날들에 대해서 불리한 견해를 품을 수 있다는 점을 깨닫고 있었으며, 그들이 사신에 대해서 부당한 행위를 하고 있다는 점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는 계속 그들에 대해서 존칭을 사용하고 있다. “나도 너희에게 나아가" 라는 말을 덧붙임으로써 그는 이 기도가 그들에게 유익할 것이라는 점과 그.가 유대에서 죽임을 당하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중요하다는 점을 암시하고 있다.  "기쁨으로" 라는 귀절 역시 동일한 의미를 지 니고 있다. 그리고 로마인들에게 있어서는 그가 그들에게 열과 성의를 다 기울여 자신의 시간과 노력을 그들에게 바치기 위해서 아무런 근심이 없이 산뜻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오는 것이 중요했다.  '편히 쉰다' 또는 `만족한다’는 동사를 통해서 다시 그는 그가 그들의 형제적 사랑을 전적으로 확신하고 있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뜻을 좇아" 라는 귀절은 우리의 모든 길을 당신의 섭리로 안내하는 분은 하나님 뿐이므로 우리가 기도에 전념해야 한다는 팔요성을 지적해 주고 있다.

"33. 평강의 하나님께서……" ; "너희 모든 사람"이라는 전반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바울은 단지 하나님께서 로마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에게 복을 내려주실 뿐 아니라 당신께서는 인도해 주실것을 바란다는 점을 표현하고 있다.  '평강’이라는 단어는 내 생각에, 당시 그들의 상황과 관련된 것으로, 평화의 주인공되시는 하나님께서 그들 모두를 함께 붙들어 주실 것을 바라는 하나의 기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