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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

1. 성경 (롬1::14 ~17)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14)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15)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16)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7 )

2. 묵상 (Calvin 선생 주석)
“14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 ‘지혜 있는’ 과 ‘어리석온’ 두 형용사는 헬라인’과 `야만인’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 에라스무스(Erasmus)는 "학식있는”과 ·”무식한” 으로 번역했는대 이는 아주 좋은 번역이다. 그러나 나는 바울이 사용한 바로 그 말들을 그대로 살려두는 편을 택했다. 그러므로 바울은 로마사람들이 아무리 지식과 분별력과 재능에 뛰어난다고 하여도 그들을 가르칠 수 있다고 하는 그의 확신이 그의 교만에서.비롯된 것이 아니라는것을 나타내 보이기 위해서 그는 그의 직책에 대해 논증한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그를 지혜있는 자들에게도 빚진 자 되게 하시기를 기뻐하셨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고려해 보아야 할 것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주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지혜를 그 자신에게 복종시키고, 모든 재능과 모든 종류의 과학과 모든 정교한 예술들이 그의 단순한 성질을 가진 교훈에 자리를 양보하도록 하기 위해서 복음이 하나님의 명령에 의하여 지혜있는 자 들에게 약속되고 재공된 점이다. 지혜있는 자들이 어리석은 자들과 갈은 수준으로 격하되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들이 이전에는 그들의 선생들로서 결코 받아들일 수가 없었을 뻔하였던 자들을 그들의 선생(Master)이신 그리스도 아래서 그들의 동료 제자들도 용납할 수 있을 만큼 부드러워져 있다.

 

 둘째는, 무식한 자가 결코 이 학교에서 재외 되어서는 안되며, 또한 학식있는 자도 터무니없는 이해로 말미암아 이 학교를 피해서도 안된 다. 만일 바울이 그들에게 빚진 자이었고, 그리고 좋은 신앙을 가전 빚진 자이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가 빚졌던 것을 수행하였다고 하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 경우에 그들이 항유할 수 있게 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게 된 것이다. 또한 모든 교사들은 여기서 그들이 본받아 따라야 할 한 규칙, 즉 무식하고 배우지 못한 사람들에게 겸허하고 예의 바론 태도로 자신들을 적응시켜야 한다는 규칙을 발견케 될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 해서 그들은 자신들의 아주 우매한 행동과 수 많은 자만에 찬 짓들을 참을성 있게 보다 잘 이겨내게 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그러한 것들이 그를을 압도해 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리석은 자들에 대한 그들의 책임(obligations)은  어리 석은 자들의 우매를 지나치게 만족시켜 주지 않아야 하는 것임을 의미한다는 것을 그를이 기억해야 한다.

“15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 ;. 바울은 로마에 가고자 한 그 자신의 소원에 대해 지금까지 .:그가 말했던 것을 결론 짓고 있다.  주님을 위해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그들 중에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그의 의무의 일부로 생각되었기 때문에. 주께서 허락하는 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성취할 수 있기를 그는 간절하게 바랐다.

“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바울은 그가 경건치 못한 자들의 조롱을 개의치 않는다는 것을 미리 선언함으로써 반대를 예상하고 있다. 그러나 그렇게 선언함으로써 그는 복음의 좋은 점들을 천거하는 기회를 포착한다. 이는 로마 사람들이 복음을 일축하지 못하게 하기 위함 이다.  바울이 그 자신은 복음을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할 때,그것이 세 상 사람들의 눈에는 치욕적이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같이 하여 로마사람들이 경건치 못한 자들의 공포와 조롱을 복음이 당하는 것을 볼 때, 그 복음을 그들이 과소평가하지 않도독,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치욕을 그들이 견디도록 준비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바울은 신자들에게 복음의 최상의 가치를 증명한다. 

 

 첫째로, 만일 하나님의 능력이 아주 중하게 여김을 받아야 하는 것이라면, 그 능력온 복음에서 그 빛을 발산해 낸다. 만일 하나님의 선하심(goodness)이 우리가 찾아 구하며 사랑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복음은 그 선하심의 도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복음을 높이고 귀중하게 생각해야 한다. 왜냐하면 복음에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의 구원이 이같이 확보되는 것이므로 여기에 따라 우리는 복음을 사랑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그의 능력을 복음에서 발휘하신다고 바울이 선언할 때, 그가 말씀 전하는 직책을 얼마나 귀하계 여기고 있는가를 유의하라. 그는 여기서 어떤 온밀한 계시에 대해서가 아니라, 입으로 말하여 전하는 말씀 전파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이것으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말씀이 선포되고 있는 것을 듣는 데서 물러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고의적으로 거부하며 그의 구원의 손길을 물리치고 있는 것이 된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사람들 안에서 유효하게 역사하시지 않고, 오직 성령 께서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내적 교사(inwordteacher)로서 조명하실 때에만 효과적으로 일하시기 때문에, 그는 “모든 믿는 자에게"라는 말을 덧붙 인다.  복음은 참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들의 구원을 위하여 제공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의 능력은 보편적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복음이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사망의 맛을 내는 사실은 복음 자체의 성격 때문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사악함에 기인한다. 복음은 구원의 한 길을 제시함으로써, 다른 모든 길에 대한 신뢰를 끊어버란다. 사람들이 이 한 구원의 길에서 물러서는 때, 그들은 복음에서 그들 자신의 멸망이 확실한 증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 모든 사람들을 아무 차별없이 초대하여 구원에 참여케 할 때, 그것이 구원의 교리로 일컬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이는 거기 복음에 그의 고유한 직책이 잃어버린 자들을 구원하는 것인 그리스도께 나타나 있고, 그리고 그에 의해서 구원받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그는 그들의 심판자가 되실 것 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구원이라는 단어는 시종일관하여 죽음과 반대되어 있다. 그 단어가 나오는 때에는, 우리는 논의되고 있는 주제가 무엇인가를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복음은 멸망과 영원한 죽음의 저주로부터 건져내 주기 때문에, 그것이 확보 해주는 구원은 영생인 것이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 바울은 여기서 “헬라인” 이라는 단어 아래 문맥상에 나타나 있는 대로 모든 이방인들을 포함시키 고 있다. 이는 그가 모든 인류를 포함시키는데, 두 부류만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울이 다른 민족들을 지칭하는 데, 헬라인을 특별히 선택한 것은 아마 다음과 같은 이유 때문인 듯하다. 첫째로, 복음의 언약에 참 여하는데 있어서 그들이 유대인 다음으로 제일 먼저 허락받은 민족이기 때문이고, 둘째로는, 헬라인들이 유대인들보다 그들의 지리적 이점(利點)과 그들의 언어의 폭넓은 지식때문에 더 나온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인 돗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비사(比詳)를 사용하여, ·복음의 참여에 있어서 이방인들을 유대인들과 결합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는 유대인들에게서 그들의 우월성과 지위를 박탈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유대인들이 약속과 소명(召命)에 있어서 첫번째 민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에 대해 그들의 특권을 바울은 지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과 함께 복음에 동참하는 자들로서 비록 이방인들이 유대인들보다 다소 낮은 지위에 있지만 이방인들을 그는 곧 즉시 덧붙여 말한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을에 이르게 하나니……” ;이 말씀은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전술한 앞 귀절에 대한 설명이요 확정이다. 우리가 만일 구원, 즉 하나님과 합께 하는 삶(life with God)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먼저 의(義)를 구해야  한다. 이 의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께 화목될 수가 있으며, 그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호의를 베풀어 주심으로 나타나는 그의 자비로 인한 그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있으려면 우리는 먼저 의로와야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불의(不義)를 미워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절의 의미하는 바는, 우리가 복음외의 다른 곳에서는 구원을 얻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음외의 다른 곳에서는 하나님이 그의 의를 우리에게 계시하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이 의만이 우리를 사망에서 건져 내준다. 우리의 구원의 기초인 이 의가 복음에 나타나 있다. 그래서 복음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나님의 능력" 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식으로 원인으로부터 결과까지를 논증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또한, 하나님께서 그의 복음 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보화, 즉  그의 의의 전달(the communication of His righteousness)이 얼마나 희 귀하고 값진 것인가를 유의하라. 나는 ‘하나님의 의’라는 말을, 그의 법정에서 인정되는 것으로 이해하고 싶다. 이것은 한편으로 사람들의 생각에 의로 간주되는 것이, 비록 그것이 사소한 것 일지라도, 일반적으로 “사람의 의"로 일컬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나 바울이 많은 예언들을 언급하고 있음에 틀림없다. 이 예언들 가운데서 성령은 시종 일관하여 장차 있을 그리스도의 나라에서의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 보여 주고 있다. 어떤 주석가들은그 의미를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 으로 설명한다. 나는 본문의 말씀들이 이 뜻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정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의롭다고 칭하시고, 그리고서는 우리를 구원하시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의 개념이 내게는 더 적합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싶지 않다. 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어떤 학자들이 이 ’의’가 값없는 사죄 뿐만 아니라 부분적으로 또한 중생의 은혜에도 있다고 생각하는 점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신에게 값없이 화목시켜 주시기 때문에 우리가 생명을 되찾게 되는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적당한 장소에서 보다 상세하게 나중에 다루기로 하겠다.  앞서 그가 사용한 바 있었던  '모든 믿는 자에게' 라는 표현 대신에 이제  '그는 믿음으로'라고 말한다. 의는 복음으로 말미암아 주어지고, 믿음으로 받야들여진다. 그는 '믿음에’를 덧붙이고 있다. 이는 우리의 믿음이 진보하고 우리의 지식이 향상됨에 따라,'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서 증가되며, 그것을 우리가 소유한 것이 다소 확실해지기 때문이다. 우리가 처음 복음을 맛볼 때에는, 우리는 우리를 항하여 은혜스럽게 대하고 계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참으로 보게 된다. 그러나 멀리서 볼 뿐이다. 우리는 참 종교에 대한 지식이 더욱 많이 증가하면 할수록, 그가 우리를 향하여 더 가까이 오고 계시는 것 마냥, 보다 더 분명하고 친숙하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된다. 여기에 구약과 신약에 대한 대조가 암시되어 있다고 하는 주장은 근거가 별로 없고 난해하다. 왜냐하떤 바울이 여기서 율법아래 살았던 선조들을 우리와 비교시키지 않고, 모든 신자의 매일 매일의 진보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 바울은 선지자 하박국의 권위를 빌어서 믿음의 의를 입증하고 있다. 하박국은 교만한 자들의 멸망을 예언하면서 동시에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를 덧붙여 말했다.  우리는 의(義)로 말미암아서만 하나님의 존전에서 살 수가 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의는 믿음에 달려 있다고 결론할 수 있다. 미래 시제로 된 동사는 그가  말하고 있는 삶의 연속되는 영원성을 가리킨다. 이는 마치 "그것은 잠깐만 계속되는 것이 아니 라, 영원히 지속될 것이다”고 그가 말했던 것과도 같은 것이다.  경건치 못한 자들은 생명을 누리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서 우쭐대지만, 그러나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때에……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임하는 .. (살전 5 : 3)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생명은 잠간 동안만 지속하는 그림자인 반면에, 의인들의 믿음만이 영생을 가져다 준다. 우리를 하나님께로 인도해 주며, 우리의 생명을 그에게 의존케 하는 신앙외에 무엇이 그 생명의 근원이겠는가?  하박국 선지자가 한 예언의 말씀이,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신뢰하는 때에만 우리는 굳게서게 된다는 것을 뜻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이 귀 절을 하박국으로부터 바울이 인용한 것은 적절하지 못한 것이었을 것이다. 그는 경건치 못한 자들이 세상의 교만을 버리고 하나님의 보호하심만을 바라고 모여들 때에 한하여서만 그들의 생명을 믿음의 탓으로 돌렀다.  하박국이 이 문제를 명백하게 다루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기에 그는 값 없는 의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믿음의 본질로 미루어 보 아 이 귀절이 우리의 본 주제에 적용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하는 것은 아주 분명하다. 우리는 그의 논증으로부터 믿음과 복음간의 상호 관계를 또한 필연적으로 추론하게 된다. 이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하는 까닭에. 그는 그러한 생명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받는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제 본 서신의 첫 부분의 주요점을 보게 된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긍휼만을 통해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칭함을 받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까지 이 주요점을 바울 자신의 말씀들에서는 찾아보지 못하였으나, 믿음에 근거하고 있는 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궁휼에 딸려 있다는 문맥으로부터 나중에 아주 쉽게 찾아 볼 수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