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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로마서

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롬1:32)

1. 성경 (롬 1: 24 ~ 32)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24)이는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 (25)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 곧 그들의 여자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26)그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자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와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그들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들 자신이 받았느니라 (27)또한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28)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29)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30)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31)그들이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런 일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 하느니라 (32)

2. 묵상 (Calvin선생주석)
"24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내어 버려두사" ;  경건치 않음(不 敬度)은 하나의 숨은 악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보다 분명한 증거를 사용하여 그들이 정죄를 받지 않고서는 회피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왜냐하면 이 불경건에는 주님의 진노에 분명한 증거인 것으로 드러난 경과들이 뒤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일 주님의 진노가 항상 정당하다고 하면, 그들이 정죄받아 마땅하게 되도록 된 어떤 것이 있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제 이 드러난 중거들을 사용하여 사람들의 비교와 변절을 입증한다. 이는 주님께서 자신들을 갖는 파멸과 멸망 가운데로 무모하게 팽개침으로써 그의 선하심에서 멀어져 간 사람들을 벌하시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가 앞서 그들을 책망하였던 불경건과 그들이범한 죄악들을 비교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을 통하여 형벌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 자신의 명예가 우리에게는  더없이 소중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주저하지 않고 우리 자신에게 치욕을 안겨다 주는 것은 우리의 눈이 지극히 먼것 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하나님의 위업에 끼친 치욕에 대한 가장 적절한 벌인 것이다.  이것온 바울이 본 장의, 끝까지 추구하는 주제이다.그러나그는 이 주제를 여러 방면으로 다루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상당히 상세한 설명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요약하자면, 바울이.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배은망덕이 용서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 자신의 경우로 보아 하나님의 진노가 무자비하게 그들에게 발산되고 있다는것이 확실하다. 만일. 그들이 지존하신 하나님의 증오와 적개심을 불러 일으키지 않았었더라면, 그들은 결코 점승들처럼 정욕의 그러한 가증스런 행위에로 들입하지는 않았을것이다. 그러므로 가장 극악한 죄악이 어디에서나 자행(窓行)되고 있는 까닭에, 하나남의 보복의 분명한 증거들이 인류에게 나타나 있다고 그는 결론짓는다.

 

그런데 만일 하나님의 보복이 결코 까닭없이 부당하게 격발되지 않고, 언제나 장당한 것이 한계 내에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으로부터 인류의 파멸이 당연하고도 확실하게 온 인류들을 위협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 하다고 바울은 우라에게 가르친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들을. 사악함에 내어 버려두셨는가에 대해 길게 논하는 것은 전혀 필요치 않다. 하나님께서는 인간들이 죄에 빠지게 허락하심으로써 그는 인간들이 죄에 빠져 타락하는 것을 허용하실뿐만 아니라, 그의 공정한 판단에 의해 그것을 작정하시어 그들이 그들 자신의 악한 욕망에 의해서 뿐만 아니라 또한 마귀에 의해서 그러한 광적인 어리석음에로 꼼짝없이 휘말려 들게 하신 것이 참으로 확실하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의 일관된 어법과 일치하여 "내어 버 려두다”는 단어들 택하여사용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허용만으로 죄에 휘말려 들게 되었다고 생 각하는 사람들은 이 단어를 크게 곡해 하고 있는 것 이다. 왜 냐하면 사단 은 하나님의 전노와 하수인(下手人)이요, 하나님의 "집행인”이기에, 그가 외관상으로 뿐만 아니라, 심판자의 명령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적대하여 무 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만 이 이유 때문에 하나님 이 잔인하신 것은 아니며', 우리가 무죄한 것도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러한 형벌을 받 아 마땅할 경우에 한해서만, 우리가 그의 능력의 손에 넘겨져 처벌받는 다는 것 을 바울이 분명하게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여 기서 다음과 갈온 한 가지 예의만은 분명하게 해둘 필요가 있겠다. 즉, 죄인 자신 속에 항상존 재하고 있는 뿌리들인 죄의 원인은 하나님에게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아, 네가 패망하였나니, 이는 너를 도와주는 나를 대적함이니라"(호 13 : 9)는 말씀이 언제나 감되기 때문이다.

안간의 십령의 악한 정욕들을 더러움과 관련지움으로써, 우리의 마음이 일단 제 멋대로 하게 내어 버려두게 되는 때 그것이 초래하게 될 결과(열 매淸 바울은 .. 간접적으로 우리에게 깨닫게` 해준다• I서로’라는 표현은 강 세형(强勢形)이다• 왜냐하면 이 단어는 그들이 그들 자신위 몸에 세긴 -사 악한 행위의 표적들이 얼마나 깊고 지워버릴 수 없는 것인가를 의미십장 하게 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f ' .

 

"25.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  ; 바울은 .그 가 앞에서 말했던 것을 우리 마음속지에 더 깊이 새겨 두고자-여러 다른 말로 반복한다. 그들이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것으로 바꿀 때, 그의 영광이 말소되는 것이다.  하나님에게서 그의 영광을 박탈하려 할 뿐만 아니라,그 의 이름을 모독하려고 해 온 사람들이 온갖 수치스런 것들로 가득차 있다 는 것은 당연하다•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나는 한 구운 안에 두 단어를 포함시키기 위해서 이렇게 번역해 보았다. 바울이 여 기서 우상 숭배의 죄를 지적하는 것은 당연하고 적절하다 하겠다. 왜냐하 떤 종교적 영광은 그것을 부당하고 신성 모독적인 방법으로 하나님에게서 빼 앗아 내지 아니하고서는 피조물에게 주어질 수 없 기 때문이다. 하나님 을 위하는 것이라 하고서 여러 모양의 형상들(images;로마 가톨릭 교회에 서 만들어 사용하는 것들)을 예배하는 것은 구실을 붙이기 위한 허무맹랑 한 핑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예배들 인정하지 않으 실 뿐 아니라, 그것을 받으실 만한 것으로 여기시지도 않기 때문이다. 우 상 숭배는 갑 하나님 을 결코 예배한 것 이 아니며, 육적(肉的)인 인간이 독 자적으로고안해 낸 가짜 하나님을예배한 것이다•본 질의 후반에 덧붙여 전 말씀, 곧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 로다 아멘’을 우상 숭배를 크게 책 망할 목적으로 하신 말씀으로 나는 해석하고 싶다• 그래서 그 귀절은 다 음과 갈은 뜻이 있다고 볼 수 있다 ... 우리는 하나님 만을 존귀케 하며 찬 양해야 한다. 그리고 그에게서 어떤 것도, 비목 그것이 아무리 작은 것일 지 라도, 손상되게 해 서는 안된다." ‘4/ `.’,‘’ ,

 

"26 이틀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 버려두 셨으니……" ;바울은 삽입구를 소개한 후에, '주님의 보복’에 대한 앞의 주제에로 되돌아간다. 그리고 하나님의 보복의 첫번째 증거로 변태적인 정욕의 무서운 죄를 든다. 이것은 인간들이 스스로 짐승같은 천한 욕정에 빠졌을 뿐만 아니라, 짐승보다 더 악하게 되었다는 것을 증명한다. 왜냐하면 그들이 자연의 전체 질서를 뒤집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서 바울은 모든 세대에 존재했던 죄악들의 길다란 목록을 열거한다.  그런데 그당시에는 일반적으로 전혀 아무런 제약도 없이 그러한 죄악들이 성행하였던 것이다. 그들 모두가 그러한 사악한 부패에 연루된 것이 아니라고 말해 보았자 아무런 의미도 없다.  왜냐하면 모든 사람이 예외 없이 약간의 허물이 다 있기에 그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할 경우 사람들의 일반적인 부패 행위를 책망하는 것은 충분한 중거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바울이 모든 세대에 공통되었고 그리고 그 당시 일반적으로 만연 되었던 극악 무도한 행위들을 다루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사나운 야수들마저도 증오하는 이 가증한 행위를 그 당시 얼마나 자주 탐닉했는가 하는 것은 그저 놀라울 일이다. 또한 다른 죄악들도 일반적으로 보통 행해지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온 인류가 연루되어 있는 죄악의 목록을 열거한다. 모든 사람들이 도둑, 살인자, 또는 간음자들인 것은 아니지만, 한 두 가지의 죄악으로 오염되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는 것이다. 바울은  상사람들의 생각에도 부끄러운 것이며,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그러한 행실들을 부끄러운 욕심(부도덕한 욕정 )  이라고 칭하고 있다.

 

“27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 적개심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빛에 대하여 눈을 감음으로써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게 되었던 사람들은 눈이 멀게 된 것이 당연하다. 그럼으로써 그들은 자신들을 잊게 되며 그들에게 유익되는 것을 보지 못 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빛을 주시는 단 한 분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있는 힘을 다하여 소멸시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사람들은 정오에도 장님되는 것이 마땅하다. 

 

"28. 또한 저희가 마음(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 버려두사" ;  이 말씀에서 죄와 형벌의 당연한 관계를 멋지게 요약하여 말한 것에 유의해야 한다.  하나님을 아는 우리의 지식만이 우리의 마음을 참된 지혜로 항하게 하는 것인 데도. 저희가 마음(지식)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 까닭에.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비뚤어진 마음을 주셨던 것이다.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서는 아무 올바른 것도 선택 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싫어하매라는 말의 뜻은, 그들이 마땅히 수욕하여 하나님에 대한 의식을 추구했어야 했는데도 그렇게 하지않고 반대로, 고의적으로 그들의 생각을 하나님에게서 돌이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비뚤어지게 선택함으로써, 그들이 하나님보다 그들 자신의 허망한 것을 더 좋아했다는 것을 그는 뜻하고 있다. 이와 같이 해서, 그들을 속임 받게 한 그 오류는 스스로 선택한 것 이었다.

 

"합당치 못한 일을'하게 하셨으니."   ;  바울은 지금까지 단 하나의 저주스런 실례만을 언급하였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보통 행하였던 죄악이었다. 이제 그는 여기서 아무도 예외가 될 수 없는 죄악들을 열거하기 시작한다. 앞서 말했던 대로, 모든 죄악이 각 개인마다 나타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은 어떤 그릇된 행실을 의식하고 있다. 그래서 모든 사람은 자기 자신의 죄행(罪行)으로 인하여 타락했다는 바난을 받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첫째로, '합당치 못한’ 이라는 말은, 그들의 행동이 모든 이성의 결정에 반대되고 인간의 본분에도 어긋난다는 것을 뜻한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비뚤어진 마음의 증거는, 상식적으로도 마땅히 증오했어야 될 죄악들에 사람들이 경솔하게 자신들을 얽어맨 점이다.  그러나 이 죄악들을 서로 관련시키려는 것은 헛된 수고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바울의 의도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바울은 그 죄악들이 생각난 대로 적어 내려간 것 뿐이다. 아제 각각의 악행의 의미를 아주 간략하게 설명코자 한다. 

 

"29. 불의… ..." ;  이것은 인간적인 정의의 위반을 의미한다.불의가 행하여지는 때에는 각 사람은 자기가 받아야 할 공정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 나는 암모니우스(Ammonius)의 견해를 따라 '포네一리안'을 무악으로 번역했다. 그는 '포 네 -론' '라스티콘 카쿠'  '악한 사람'이, 악을 행하는 자라고 설명한다. 그러므로 그 단어는 사악하거나 무절제하게 방종한 행위들을 뜻한다.  그런데  그 사악성은 우리의 이웃을 해치려고 하는 부패하고 심술궂은 마음씨이다. 나는 합우 (lust)으로 번역했다. 그러나 나는 바울의 '포르네 이안'을 음"(fornication)으로 번여한 것에 대하여 반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바울은 외적 행위뿐만 아니라 내적 행위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칼빈의 번역에는 'ibidine'으로, 흠정역에는 'fornicatio'로 개정영역에는  그 단어가 빠뜨려져 있고, 우라말 성경에도 빠져 있다). 탐욕, 시기,  살인이라는 단어들의 키미는 아츠  분명하다.  분쟁이라는 단어는 다툼, 싸움, 그리고 선동을 함의한다. 우리는 '카코에一대이야' 를 악명 높고 눈에 띄는 사악함인 악독(惡毒)으로 번역했다.  사람은 그의 윤리 표준이 부패할 때에 라한답-관에1 의해서 무감각해지고 완악하게되어  독해지는 것이다. 

 

"30절"  ; . e;o<rr다,€is-(데오스위껴1이스)라는 단어는 분명히 ‘하나님을 미워하는자들’ 올 의미한다(개정영여i·--hateful to God,우리 말 성경-하나님의 미워하시는·_;가) 는 그 단어를 수동의 의미 '하나님에 의해 미응을 받는 자로 취해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l왜 냐하면 여 기서 뱌울이-인간들의 두드러 전 사악성에 의한 그들의 최책을 입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 님을 미워하는 자들이란 말의 뜻은, 하나남의 공의가 그들의 사악한행위 에 방해가 되는 것을-.목도하는 자들인 것이다. 수군수군하는_자와 비방하 는 자는 다음과 같이 구별되어야 한다. 수군수군하는i'자들이란, 응큼스럽 게 비난하여 착한 사람들의 우정을 파괴하고,`자기들의 가움에 불질러 화 를 돋구며, 무죄한 자들을 적대하여 말하며"• 불화의 씨를_ 심는 자들이다. 비방하는 자들이란, 타고난 악독을 가지고: 아무의 명예도:-아끼지 않고 해 치는 자들이요, 격 렬한 충동에’ 의하여 사람들을 험 담하도복 되어 있는 것 처럽, 무죄한 자들뿐만 아니라 며행 있는자들을 헐뜯는 사람들이다. 우 리는 vfJpia-rd.s(휘 브리 스타스璟 능욕하는 자(malebacos) 로 번 역 하였 다(R. V. 무례한자). 이논라탄어저술가들이·약탈,`절도,방화,요술과 갈 은 악행들을-maleficia라고 흔히 습관적으토 말했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 러한 행위들을 여기서 언급코자 했던 것이다. 나는 바울이 사용하고 있는 v'IT~쩌cf,a.vovs(휘페르에-파누스)라는 단어를 헬라어의 의미인 교만한 자 로 번역했다. 원문의 그 단어는 교만한 자가 "높아져 " 가지고, 자기 밑에 있는 모든 자들을 경멸하여 얕보며, 자기와 동등하게 되려는 모양을 감을 수 없는 것 을 의미한다 •• 자랑하는 자’는 지 나치게 자신하는 허 영 심으로 부 풀어 있는 사람이다.

 

"31. 배약(背f.:J)하는 자." ;  이는 악을 행하여 사회의 결속을 파괴하는 자들, 또는 신실치 옷하고 견고한 신앙을 갖지 못한 자로서, 휴전을 깨뜨 리는 자라고 불리울 수도 있겠다 •• 무정한 자’란 그들 자신의 동료들에 대한 타고난 애정을 포기해 버린 사람들이다• 바울이,궁휼이 메.마른것온인 간 본성 이 부패한 증거 라고 주장하기 때문에, 어거스턴온 스토아 ·학파를 반론하면서 궁휼울기독교인의 미덕이라고 결론했다 • .I •

 

"32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 본 귀절은 여러 가지로 해석되어 있으나, 내가 보기에 는 다음과 같은 해석이 가장 잘된 해석인 듯하다. 사람들은 죄를 범함으로써 완전히 무절제한 방종을 범하였으며, 선악 간의 모든 구분을 . 지워 버림으로써, 하나님께서 싫어하시는 것임을 알고, 또 그의 의로운 심판에 의해서 정죄받게 될 것들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짓들을 행하는 자들을 옳다고 인정하였던 것이다. 죄인이 수치심을 완전히 결여하여 그 자신의 악덕을 기뻐하며, 그 악덕들이 정죄 받는 것을 묵인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찬동하고 시인하여 다름 사람들이 그러한 악덕들을 범하도록 격려하는 경우 그것은 죄악의 절정이다.  이 극도의 사악함은 그들이 행악하기를 기뻐하며(잠 2 : 14), "모든 지나가는 자에게 다리를 벌려 심히 음행하고(겔 16 : 25)라는 말로 성경에 표현되어 있다.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은 아직 고침 받을 가망이 있다.  그러나 죄를 습관적으로 행하여 익힘으로써 수치심을 결여하게 되어, 미덕 대신에 악덕을 더 기뻐 하고 시인하게 되는 경우, 개전(改俊)의 소망은 더 이상 없는 것이다. 이상은 내가 제시하는 해석이다. 바울은 여기서 단순한 예비적인 악덕 이상의 보다 극악하고 악독한 어떤 것을 정죄하려고 한 듯하다. 가련한 인생 들이 모든 수치심을 내팽개쳐 버리고서 하나님의 의보다는 악덕을 장려하는 경우 그것이 사악함의 절정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