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Calvin선생주석/로마서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롬2:2)

1. 성경 (롬2:1 ~ 16)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1)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2)이런 일을 행하는 자를 판단하고도 같은 일을 행하는 사람아, 네가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줄로 생각하느냐 (3)혹 네가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 (4)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5)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6)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에게는 영생으로 하시고 (7)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에게는 진노와 분노로 하시리라 (8)악을 행하는 각 사람의 영에는 환난과 곤고가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며 (9)선을 행하는 각 사람에게는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니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라 (10)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심이라 (11)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12)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 (13)(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14)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15)곧 나의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사람들의 은밀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16)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무른 누구든지 네가 핑계치 못할 것은” ; . 이 책망은 외적으로 거룩한 체하여 주의를 끌고, 자기네들이 하나님께 완전한 만족을 드렸기나 한 듯이, 그들이 하나님께 열납되었다고 생각하는 위선자들을 겨냥하고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않다는 증거로서 지독한 악덕들을 보여준 다음에, 이제는 그의 첫 죄악의 목록에 포함될 수 없었을 뻔하였던 경건한 체하는 이 부류를 공격한다. 그런데 본질은 아주 분명하고 단순하기 때문에 사도가 어떻게 그의 논증을 전개시켰는가를 금방 누구나 알아 볼 수가 있다. 그러므로 그가 그들에게 `핑계치 못할 것은’ 이라고 말한 것온,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율법을 범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바울이 다음과 갈이 말한 것과도 같다. 비록 네가 다른 사람들의 악덕들에 찬동하지 않으면, 참으로, 그것들을 공공연하게 원수 시하고 책망하는 자라는 인상을 주고 있다 할지라도, 네가 자신을 실제로 검토해 보면, 너도 그러한 악행들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까닭에, 너는 네 행위에 대한 아무런 변명도 제시 할 수가 없다.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 함이니…… “ ; '크리네인' 과 '카타크리네인; 심판하다, 정죄하다' 이라는 이 두 헬라어 동사에 대한 품위 있는 재담 말고도, 바울이 그들을 정죄 할 때 사용하는 과장된 표현법에 유의해야 한다. 그것은 마치 그가 다음과 같이 말한 것과도 흡사하다 하겠다. '너는 이중으로 정죄를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네가 다른 사람들을 정죄하고 책망하는 바로 그 죄악들이 네게도 있는까닭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생활의 규범을 요구하는 사람들은 자기 네들이 무죄하고, 온건하고, 그리고 다른 모든 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주장하되, 그들이 다른 사람들에게서 교정하려고 했던 바로 그 죄책들을 그들이 행한다고 하면 그들은 아무런 용서도 받을 자격이 없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속담이다.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 ; 이것온 문자적으로 한 번역이고, 뜻은, "네가 판단하지만, 그러나 너도 같은 짓을 행한다”이다. 바울은 말하기를, 그들이 올바른 마음 상태에 있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이렇게 행하였던 것 이라고 한다. 이는 죄가 본래적으로 마음에 속하는 까닭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점에서 자신들을 정죄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도적한 자와 간음한 자와 비방하는 자를 책망할 때에, 그것들을 행하는 사람들을 판단했을 뿐만 아니라, 그 행한 사람들과 불가분한 관계에 있는 그 죄악들까지를 판단했기 때문이다.

“2. 이런 일을 행하는 자에게 하나님의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줄 우리가 아노라” ; 바울의 의도는 위선자들을 그들의 자기 도취에서 일깨워 주려는데 있다. 그리하여 그들이 만일 세상에서 칭찬을 받거나, 또는 자신들은 아무런 죄책도 없는 것으로 하는 경우에 그들에게 사실은 아무것도 얻어진 것이 없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와는 아주 다른 성질의 판단이 하늘에서 그들울 기다리고 있다. '더우기나, 그는 내면적인 부정(不淨)을 들어. 그들을 고발한다. 그런데 이 부정은 인간의 눈에는 볼 수 없게 감추어져 있기 때문에, 인간의 증거로는 입증되거나 유죄로 판결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판단에 상소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판단으로부터는 어두움 자체가 감추일 수 없고, 또한 죄인들은·원하든 원치 아니하든 간에 반드시 이 판단을 느끼도록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판단이 ‘진리대로’ 되는 것은 다음 두 가지 사실에 있다.

첫째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죄를 찾아 발견케 되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사람의 신분 여하를 고려하지 않고 죄를 벌하실 것이다.
둘째로 하나님은 외모를 중요시 하지 않으시며, 만일 어떤 행위가 참되고 신실한 마음에서 나오지 않은 경우에는 하나님은 어떠한 행위로도 만족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가장된 경건의 가면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감추인 사악한 죄악들을 그의 심판으로 처벌하시지 못하게 될리 없다는 결론을 얻게 된다. '진리대로’라는 문구는 히브리적인 표현이다. 이는 히브리어로 '진리’가 흔히 마음의 내면의 순결성을 뜻하며, 그래서 명백한 거짓에 뿐만 아니라 외관 상으로 선하게 보이는 행위에도 반대되기 때문이다. 위선자들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걸치례의 의뿐만 아니라 그들의 은밀한 감정들까지를 참작하실 것으로 생각할 때에만 자극 받는다.

“3. 사람아 …--~생각하느냐.” ; 범죄 사실이 입증되기까지는 맹렬한 책망을 삼가하는 것이 수사학의 규칙이다. 그러므로 어떤 사람에게는 바울이 그가 의도한 비난을 완결 짓기도 전에 그처럼 심하게 질책함으로써 여기서 지혜롭지 못하게 행동한 것으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은 그런 경우와는 다르다. 그들이 범죄한 사실이 있다고 하는 그의 입증은 아주 결정적인 것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그들을 사람들 앞에서 비난한 것이 아니요, 그들을 양심의 판단에 의하여 유죄로 증명하였기 때문이다. 바울은 그가 의도한. 바를 입증하였다고 분명하게 생각했다. 즉, 만일 그들이 자신들을 살피고 그리고 하나님의 긴밀한 판단에 순복한다고 할 것 같으면, 그둘은 그들의 부정(不淨)함을 부인할 수가 없으리라는 점을 입증한 것으로 바울은 생각했던 것이다. 바울이 그들의 가장된 성결을 아주 심각하고 통렬하게 책망하는 것은 긴급하게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왜냐하연 이러한 종류의 사람들은 그들이 그들의 헛된 자만심에서 깨어나지 않는 한 비틀거리는 자신감(staggering .~elf-assurance)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을 극복하는 최상책은 그 위선을 그것으로 중독된 상태에서 일깨워 하나님의 판단의 빛에로 그것을 끌어다가 세우는 것임을 기억해 두자. 네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줄로……바울의 논증은 적은 것에서 큰 것에로 진행되어 있다. 만일 우리들의 죄가 사람들의 판단에 순복하여 따라야 할 것 갈으면, 만유의 유일한 참 심판자이신 하나님의 판단에는 그것들이 더욱 더 순복하여 따라야 할 것 이다. 사실, 인간들은 신적 본능에 이끌려 악한 행실들을 정죄하게 된다. 그러나 이것은 다만 하나님의 판단을 가낱프고 희미하게 닳온 것에 지나지 않는다. 자기네들은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 자신들의 판단을 피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면서도, 자기네둘은 하나님의 판단을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온 극히 어리석다. 바울은 사람을 하나님에게 비교할 목적으로 '사람’이라는 단어를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 이다. -lL---_- ._.._-』

"4. 흑 네가……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의 풍성함을 멸시하느뇨" ;. 어떤 학자들이 주장하는 대로 여기에 어떤 문제점이 있는 것으로 나는 생각하지 않으며, 오히려 바울이 있을 수 있는 반대를 예상하고 있는 듯하게 보인다. 위선자들은 그들의 선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궁홀을 덧입었기라도 한 듯이, 일반적으로 그들이 형통하여 우쭐대고 이로써 그들의 마음은 더욱 완악하여져 하나님을 경멸하게 되는 까닭에, 사도는 그들의 교만을 예상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반대 논증에 의하여, 위선자들이 겉으로 보기에 형통하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에게 호의를 베푸시는 것으로 생각할 만한 아무런 근거도 그들이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선을 베푸시는데 있어서 전혀 다른 계획, 즉 죄인들을 자신에게로 회심시키는 계획을 갖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이 돈독하지 못한 경우에는, 외적 형통에서 오는 자신감온 하나님의 측량할 수 없는 선하심을 경멸하고 조롱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로부터 우리가 얻게 되는 결론은, 하나님께서 금생에서 목숨을 살려준 사람들은 그들에게 더 큰 형벌을 임하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는 그들이 그들의 다른 사악한 짓에다 하나님의 부성적(父性的) 초청을 거절한 죄를 더한 까닭이다. 하나님의 모든 은총은 그의 부성적 자애(父性的 慈愛)에 대한 많은 증거가 되지만, 하나님께서는 혼히 다른 목적을 의중(意中)에 두고 계시는 까닭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친절하고 너그럽게 부양하여 주신다고 해서, 하나님이 그들을 귀중하게 여기시는 줄로 오해하고서, 불경건한 자들의 경우 그들이 외적으로 형통할 때 자축(自祝)하는 것은 잘못인 것 이다.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케 하심을 알지 못하여… .. 주님께서는 만일 우리가 우리 자신의 형통을 열망하는 경우 우리가 마땅히 향해야 할 대상이심을 그의 자비하심에 의하여 보여 주시며, 동시에 우리로 하여금 그의 긍홀을 기대할 수 있는 자신감을 불러 일으켜 주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풍성하심을 덧 입고서도 그에게로 향하지 못한다고 한다면, 우리가 항상 그 풍성함을 누리는 것은 아니지만, 그것을 우리가 남용하는 것이 된다. 주님께서는 그 자신의 종들을 온혜롭게 대하시며 세상적인 축복들도 그들에게 주시지만, 한편으로 그는 이런 종류의 표적들에 의하여 그의 은덕을 그들에게 알리시며, 동시에 그들이 그 자신에게서만(in himself alone) .모든 선한 것들의 전부를 구하는 것을 익히게 하신다. 그가 그의 율법을 범하는 자들을 동일한 관대하심을 가지고 대하실 때, 그의 목적은 그 자신의 자비하심에 의하여’ 그들의 완악 함을 완화시키는 데 있다. 그렇지만 그가 그들을 기뻐하신다고는 말씀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그들에게 회개를 촉구하신다· 만일 어떤 사람들이 반대하여 말하기를, 주님께서 인간의,마음을 내면적으로 감동시켜 주지 않는 한 그의 변론은 소 귀에다 경을 읽는 것(牛耳讀~)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이런 경우에 우리 자신의 사악한 성품이 비난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고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촉구하여’로 번역하기보다는 ’인도하여'라는 번역을 취한다. 이는 후자의 단어가 더 의미가 깊기、때문이다. 그러나 물아 넣다(drive) 보다는 손을 잡아 인도한다는 의 미 르 본다.

"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진노를 네게 쌓는 도다." ; 회개치 않음온 우리가 주님의 권고의 말씀에 대해서 마음을 강퍅하게 가졌을 때 결과 된다. 왜냐하면 회개할 마음이 전혀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공공연하게 격발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주목할 만한 귀절에서 내가 이미 언급한 바 있는 것, 죽 불경건한 자들은 그들이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매일 하나님의 더 무서운 심판을 스스로 쌓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계속적으로 누리고 있는 하나님의 은사들도 결국은 회계(余it)해야 될 성질의 것이기 때문에 그둘의 정죄를 증가시키게 될 것이라는 점을 배울 수가 있겠다. 그렇게 되면 그들은 그들이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더욱 악화되어 버린 극단의 사악함 때문에 고소받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하나님의 선하심에 의하여 바르게 고침을 받았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축복을 불법하게 남용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이 불행의 보화를 쌓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진노의 날'을 문자적으로는 '진노의 날까지t'.(헬라어 -전노의 날을 위하여 ) 불경건한 자들은 지금 그들의 주위에 하나님의 진노를 쌓고 있는 바, 그 진노의 위력이 그날에 그들의 머리 위에 쏟아 부어질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 감추인 파멸을 쌓고 있는데 , 그 파멸온 하나님의 창고로부터 쏟아져 나올 것이다.  마지막 심판의 날이 불경건한 자들의 경우에는 '진노의 날’로 일컬어지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속의 날이 된 것이다. 이와같이 주님께서 행하시는 여타(餘他)의 모든 재앙들온 불경건한 자들에게는 언제나 두렵고 무서운 것으로 묘사되어 있으나, 경건한 자들에게 는 유쾌하고 줄거운 것으로 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성경은 주께서 가까이 계심을 언급할 때마다 경건한 자들에게 크게 기뻐할 것을 명령한다. 그러나 유기된 자의 경우에는, 성경은 그들이 오직 공포와 두려움을 강하게 느끼게 한다.  스바냐는 말하기를, “그 날은 분노의 날이요, 환난과 고통의 날이요, 황무와 패괴의 날이요 캄캄하고 어두운 날이요, 구름과 혹암의 날이요(스바냐 1 : 15)라고 했다.  이와 비숫한 표현의 `말 씀이 요엘서 2장 2절에도 있으며, 그리고 아모스는 선언하기를, "화 있울진져,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는 자여!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날을 사모하느뇨? 그 날은 어두움이요 빛이 아니라(암 5 : 18)고.했다. '계시’라는 단어를 덧 붙임으로써 바울은 이 '진노의 날'이 어떠한 날일 것인가를 암시하고 있다•

 

즉, 주께서 그 때에 그의 심판을 나타내실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주님께서는 그의 심판에 대한 암시를 매일 주고 계시기는 하지만, 책들이 개봉되고, 양들이 염소들로부터 분리되고 알곡을 쭉정이에서 골라내는 그날까지 심판을 분명하고 충분하게 나타내시는 것을 연기하며 보류하고 계신다.

"6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 . 바울온 성결한 체하는 소경같은 자들을 여기서 다룬다. 그들은 생각하기를, 그들의 심령의 사악한 것들이 겉으로 나타난 알맹이 없는 몇가지 행위들로 가리위지기만 하면, 그 사악한 것이 잘 감추어질 것으로 여긴다.  그러므로 바울은 빈 말과 하찮은 행위들로도 하나님을 충분히 기쁘게 할 수 있다고 그들이 여측할 경우를 대비하여,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게 된 행위들의 참된 의를 지적하였다.  그러나 이 문장은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것처럼 난해하지는 않다.  버림받은 자의 사악함을 정당하게 보복하여 벌하심으로써, 주님께서는 그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그들에게 되갚으실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가 이전에 영화롭게 하기로 결심하셨던 사람들을 다시금 성별시키기 때문에, 그들의 선행을 빛나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로를 보고 그렇게 하시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이 점온 본 문맥에서는 입증된 수가 없다. 본 절의 문맥은 선행에게 어떤 보상이 주어질 것인가에 대해서는 선언하고 있지만  그것들의 전가, 또는 그것들에 합당한 값어치를 말하고 있지는 않다.  어떤 행위가 보상을 받기 때문에 그것이 공로가 있는 것으로 가정하는 것은 어리석다.

"7. 참고 선을 행하여……자에게는… .." ; 라탄역 성경은 perseverantia_로 되어 있으나 , patientia 로 번역하여 읽는 것 이 더 뜻이 깊다• 참율성(perseverantia, 영 어 ; perseveranee) 은 어떤 사람이 선행을 계속하여 지치지 않고 행하는 것을 뜻한다. 그러나 인내(patientia, 영어 ; patience 또 는 endurance·) 또한 성도들에게 요구된다. 이 인내로 말미암아 성도들온 그들이 당하는 여러 가지 시련둘에도 불구하고 견고할 수가 있는 것이다. 사단은 성도들이 주님께 쉽게 접근해 갈 수 있도록 하지 않으며, 많은 장애물들을 가지고 그들을 방해하여 어떻게 해서든지 바른 길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애쓴다.  신자들이 선행을 계속하여 행함으로써 “영광과 존귀를 구한다”고 바울이 말한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 외에 다론 어떤 야심을 품고 있다거나, 다른 어떤 더 크고 값있는 목적을 얻으려고 노력하고 있다는 것 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그를 구할 때에는 반드시 동시에 그의 나라의 지복(至福)을 얻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으면 얻을 수 없다는 뜻으로 한것이다. 이 점이 본 귀절에서 이러한 말씀들로 의역되어 표현된 것이다. 그러므로, 본 귀절의 의미는, 선행을 행하기를 힘씀으로써 썩지 아니함(不滅)을 얻고자 노력하는 자들에게 주님께서 영생을 주실 것이라는 것이다.

"8. 오직 당을 지어……자에게는" ; 본절의 문맥은 다소 혼란되어 있다. 첫째로 본 문맥은 일반 개념이 중단되어 있다. 논증의 실마리로 보아서 후 반 부분이 전반 부분에 다음과 갈이 연결되어야 한다. 주님께서 참고 선을 행하여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생을 주시 고, 논쟁을 좋아하고 불순종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죽음을 주시리라: 그 러므로 다음과 같은 결론을 더하여서, “영광과 존귀와 썩지 아니함이 전자 의 경우 확보되어 있는 반면에, 후자의 경우는 진노와 고통이 축적되어 있다”고 해야 할 것 이다 .. 그리고 둘째로, '노', '분', '환난', '곤고' 등의 단어들은 본 문맥에 있는 두 개의 다른 문구들에 모두 적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로 인하여 본문의 의미가 혼란되지는 않는다. 우리는 사도의 글들에서 이처럽 다소 문법적으로 무리한 것이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수사법에 대해서는 다른 제자들에게서 배우기로 하고, 여기서 세련미와 논리적인 정교성을 결여하고 있는 불충분한 문제에서는 영적 지혜를 구해야 하는 것 이다.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당을 짓는다는 말온 반동적이고 완고한 것을 -의 미한다• 왜냐하면 바울이, 야비하고도 태연자약하게 방종을 일삼아 하나 님을 경멸하는 위선자들과 논쟁하고 있기 때문이다 ••

 

"진리’는 하나님의 의지의 법칙을 단지 의미한다.  그 하나님의 의지는 진리의 유일한 빛이다. 모든 불신자들의 공동된 특징은 그들이 하나님의 멍에를 걸머지는 대신에 부정(不淨)에 복종하는 편을 언제나 택한다는 것과 그리고 그들이 순종하 는 체하기는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반대하여 완악하게 대적하는 것을 업 추지 않는다는 대 있다.  뚜렷하게 사악한 사람들이 이 전리를비웃는 것처럼, 위선자들도 그 전리에 반대하여 인위적인 경배 형식을 재정하는대 주저하지 않는다. 사도 바울은 또한 덧붙여 말하기를, 이러한 불순종하는 사람들온 "불의를 좇아" 행한다고 하고 있 다. 주님 의 율법 에 복송하기를 거부한 사람들에게는 그들을 죄의 굴레에 빠지지 않도록 해 줄 중간 지대란 없다. 성급하고 무례하기 짝이 없는 것에 대한 정당한 보상온, 하나님 께 순종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자들이 죄의 굴레 아래 붙잡히는 것이다.

"노와 분……" ; 그 단어의 기본적인 의미로 보아 이렇게 번역할 필요가 있다. 헬 라어 06µ,os (뒤 모 스 沖라 탄 어 의 e츠candescentia ( 분 노 ;V._Ccero, . Tusc, IV) 가 의미 하는 것 , 죽 갑작스럽게 발하는 화를 뜻한다• 나머 지에 대해 서는 에라스무스를 나는 뜻한다. 그러나 여기에 언급되어 있는 녜 단어들 중에서 마지 막 둘이 전자의 결과들인 점 에 유의 하라. 하나님 의 분노와 화 를 체험하는 사람들온 즉시로 당황케 된다• 바울이 갑된 신자들이 누리는 축복과 유기된 자들이 당하는 파멸을 한 데 묶어 간략하게 묘사하였을 수도 있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전노에 대한 두려움으로 사람들이 보다 효과적으로 떨게 하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혜 를 얻으려는 그들의 소원을 자국시키기 위해서 이 두 주제들을 보다 자세 하게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심판이 우리 목전에 생생하게 묘사 되어 보여지지 않는 한, 우리는 그 심판을 마땅히 두려워해야 하는데도 결코 두려워하지 않는다. 또한 많은 자극들을 받아 일깨움을 받지 않는 한, 내세에 대한 소원으로 전혀 불붙지 않는다.

"9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며" ; 여기서 `유대인’이 헬라인과 단순하게 대조되어 있음이 거의 분명하다• 나중에 가서 바울온 여기서 그가 헬라인들로 호칭하는 사람들을 이방인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나 유대 인들은 이 경우에 보다 우위에 있다. 왜냐하면 그들온 다른 사 람들에 우선하여 율법의 약속들과 경고의 말씀들을 받아 소유하고 있기 때 문이다. 이는 마치 바울이, ”이것이 하나님의 심판의 보편적인 법칙인 바, 그것온 유대인들로부터 시작하여 전체 세계에 미치게 된다”고 말했던 것 과도 같다.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이니라 “무돗 율법 없이 법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법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십판을 받으리라 “하나님 앞에서는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 요 오직 율법을 행하는 자라야 의롭다 하심을 얻으리니(11-13).

"11. 이는 하나님께서 외모로 사람을 취하지 아니하십이니라." ; 지금 까지 바울은 온 인류가 죄가 있다는 것을 전체적으로 비난했다. 그러나 이제는 유대인들과 헬라인들을 따로 나누어서 비난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 는 그들에게 그들 간의 어떤 차별도 그들이 차별 없이 영원한 죽음을 당 하지 않을 수 없도록 하지는 못하였다는 것을 알려 준다. 이방인들은 무지 를 그들의 구실로 삼았고, 유대인들은 율법을 소유하고 있는 것에 대한 영 예를 자랑했다. 바울은 전자에게서 그들이 구실을 붙여 회피하려고 한 그 들의 기도를 제거하고, 후자에게서는 거짓되고 헛된 자랑을 제거 하였다. 그러므로 온 인류는 두 계급으로 분류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유대인 들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로부터 구분시켰었기 때문이다. 그러 나 이방인들 온 모두 갈온 취급을 받았다• 그런대 사도는 우리에게 가르치기릎, 이 차 별로 인하여 이 두 계급이 동일한 죄를 지온 것으로 보지 않아야 할 하등 의 이유가 없다고 한다 •• 사람'(person)이라는 단어는 성경에서, 일반적 으로 어떤 가치 나 영예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 주장되는 모든 의모에 대해 사용되어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모로 취하지 않으신다고 할 때, 그가 중히 여기시는 것온 마음의 순결, 즉 내적 순수성이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하게 생각하는 것들인 가문, 국적, 계급, 재산 둥이 아니 라 는 점을 우리는 이해해야 한다. 그러기에 여기서 “사람을 외모로 취한다" 는 말은 다른 -민족들 간에 차별을 두어 취급한다는 것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자유로운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밭대론이 재기되는 경우에는, 하나님에게는 사람들이 이중으로 받아들여진다고 대답 해야 하는 것이다. 첫째로, 우리의 성품에는·_하나님의 칭찬을 받을 만한 아우 것이 없는데도 하나님께서 조건 없이 자비를 베푸셔서 우리를 무( 無)에서 부르시고 택하여 받아주시는 경우와, 그리고 둘째로, 하나님께서 우 리를 거듭나게 하시어 우리에게 그의 온사들을 부어 주시고’ 그가 우리 안 에서 발견하시는 그의 아들의 형상을 인하여 은총을 베푸시어 받아주시는 경우를 들어서 대답해야 하는 것이다•

"12 무릇 율법없이 범죄한 자는." ; 본 절의 앞 부분에서 바울은 이방인들을 공격한다. 이방인들의 경우 그들에게는 주님께로부터 율법을 받아 그들에게 공포해주고 확인시켜 줄 모세같은 사람이 없었지만, 이로인하여 그들의 죄로 말미암은 정당한 사형언도를 그들이 면제받지는 못하였다고 그는 주장한다. 기록된 율법에 대한 지식이 죄인을 정당하게 정죄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복음의 빛을 받지 못한 이방인들을 그릇되게 긍휼을 베풀어 무지를 이유로 하나님의 심판에서 면제시키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의 항변은 무의미할 뿐이다.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 이방인들이 그들의 이성의 오류로 말미암아 그릇 인도되었기 때문에 파멸을 향해 저들적으로 줄달음하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그들을 정죄하는 율법을 소유하고 있다. 이는 오래 선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실행치 아니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라~~~(신 ~ : 21) 판결이 선고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의 정죄는 이미 그들의 율법에 선고되어 있기 때문에, 유대인 죄인들에게는 보다 더 가혹한 상태가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13. 율법을 듣는 자가 의인이 아니요~~~~~" ; 바울온 유대인들이 내세울 수도 있었던 반대를 예상하고 있다. 그들은 율법에 대한 그들의 특출한 지식을 자랑하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율법을 의의 법칙(the·,rule of righteousness)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신명기 4 :·1 ). 이 잘못된 생각을 반박하기 위해서, 바울은 율법을 듣는 것이나 아는 것이 의를 얻게 해줄만큼 의미를 갖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이를 (하나님의 규례와 법도) 행하면 그로 인하여 살리라(레 18 : 5)는 말씀에 따라서 행함이 열매로 결실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름 10 : 5, 갈·3 : 12). 그러므로 이 귀절의 의미는 만일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얻어지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율법이 성취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율법의 의가 행실이 완전한 데 있기 때문이다. '행함으로 말미암은 칭의를 주장 할 목적으로 본 귀절을 그릇된 해석하는 사람들은 만인의 경멸을 받아 마땅하다. 그러므로 그러한 허무맹랑한 논증을 해결짓기 위해서 칭의에 관한 장황한 논의를 여기서 그가 언급한 바 있었던 율법의 심판을 유대인들에게 역설(力說)하고 있다.

 

즉, 그들은 그들이 율법을 성취하지 않는 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없으며,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범하면 저주가 그들에게 당장 선언된다는 것을 역설한 것이다. 완전한 절대 의(absolute righteousness)가 율법에 규정되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여 유죄 판결을 받은 까닭에 , 다른 의(another righteousness)를 구해야 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이다. 참으로 본 귀절에서 아무도 행위로는 의롭다 칭함을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입증할 수가 있다. 만일 율법을 성취하는 사람들만이 율법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는다고 하면, 아무도 의롭다 칭함을 받지 못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는 아무도 율법을 성취했다고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기 때문이다.

"14.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는``````" ; 그는 이제 그 선언의 첫 부분(2 : 12)의 중거를 반복한다. 이는 그가 단순히 말만으로 주장하여 우리를 정죄하는 것과, 하나님의 정당한 심판을 우리에게 선언하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우리를 일깨워 더욱 더 그리스도를 갈망하고 사랑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그는 여러 논증들을 통해 그것을 우리가 확신하도록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방인들이 핑계로 내세우는 무지가 아무런 소용도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어떤 의의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것을 선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법률의 한계 내에서 존속되지 않을 만큼 인간적인 모든 것을 반대하는 민족은 아무도 없다. 그러므로 모든 민족들이 자발적으로 스스로 법률을 제정하고, 그리고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을 받지 않고서도、그렇게 하고 있기 때문에, 그들이 어떤 공의와 정의에 대한 개념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런데 헬라인들은 그것들을 '프롤레 -프세이스' 라고 일컬으며, 본성적으로 그것들은 사람들의,마음 속에 심기워져 있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도 법이 있으며, 법이 없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비록 모세의 기록된 율법울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그들의 정의와 공의에 대한 지식을.결코 전적으로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그들은 악과 덕을 구별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전자에 대해서는 그것을 벌하여 억제하고, 후자에 대해서는 권장하고, 그것을 좋게 여겨 상을 주어서 높인다. 바울은 본성을 기록된 율법과 대조시켜, 이방인들이 의에 대한 본성적인 빛을 갖고 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그 본성적인 빛이 유대인들이 가르침을 받는 율법을 대신하여 주어진 것이기에, 그들은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었던" 것이다.

'15. 그 마음에 새깁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 죽, 이방인들은 그들의 마음에 분별력과 판단력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입증해 주고 있는 것이 바로 이 분별력과 판단력에 의해서 그들은 정의와 불의, 정직과 부정직을 분간한다. 바울은 그것이 그들의 의지에 새겨져 있어서 그들이 그것을 구하며 열심으로 추구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그들이 그것을 부인할 수 없도록 진리의 힘에 의하여 지배되어 있다는 뜻으로 말하고 있다. 만일 하나님께서 마땅히 경배를 받으셔야 한다는 데 대한 확신이 그들에게 서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들은 종교의식들을 제정하지 않았을 것이며, 그들이 절도와 간음을 악으로 간주하지 않았더라면 그것들을 부끄러워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마치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우리의 능력 범위 안에 있는 것으로 말 하기나한 것처럼 본문에서 의지의 능력을 추론해 내려고 하는 것은 전혀 근거 없는 짓이다.

 

왜냐하면 그는 율법을 성취하는 우리의 능력에 대해서가 아니라, 율법에 대한 우리의 지식을 말하고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마음이라는 단어는 감정의 좌소(座所)로서가 아니라  단지 이해력으로 해석되어져야 한다. 이는 신명기   장 4절, "여호와께서 깨닫는 마음을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는 말씀에서와, 그리고 누가복음 24장 25절,“미련하고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라는 말씀에서와 같다. 우리는 본문의 귀절에서 율법에 대한 "충분한 지식"이 사람들에게 있다고 결론 할 수는 없고, 다만 그들의 본성에 심어진 정의에 대한 약간의 씨가 있다고 결론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다음과 갈은 사실들로 말미암아 증명된다.

 

즉, 모든 이방인들은 한결같이 종교의식들을 제정하며, 간음, 절도,살인을 처벌하는 율법을 제정하고, 상거래와 계약에 있어서 성실을 높이 평가하는 것 등으로 보아 증명된다.  이런 식으로 해서, 하나님을 경배해야 하며, 간음, 절도,살인이 죄악이며, 정직이 존중시되어야 한다는 것에 대한 지식이 그들에게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입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하나님을 어떤 종류의 하나님으로 받아들이고 있으며, 얼마나 많온 신들을 그들이 만들어 냈는가를 규명하는 것은 우리의 목적하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 같은 분이 계시다는 것과 존귀와 경배가 그에게 돌려지는 것이 합당하다고 그들이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하다. 다른 사람의 아내와 소유물과 그의 것인 어떤 것을 탐하는 탐욕을 그들이 허용하는 지의 여부나, 분노와 증오를 묵인하는 지의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탐하는 것이 나쁘다는 것을 그들이 알면서도 탐하는 것은 옳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 일천명의 증인에 상당하는 그들 자신의 양심의 증거는 그가 그들에게 영향을 줄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압력 이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선한 행실울 한 줄로 생각할 때에는 내심(內心) 으로 괴로와하고 고통을 당한다.  그런 까닭에 선한 양심은 최대의 극장이지만, 악한 양심은 가장 악질적인 처형자들이요, 어떤 원령(怨炅)들이 할 수 있는 것보다 더 가혹하게 경건한 사람들을 괴롭힌다고 하는 이방 격언이 있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한 확실한 본성적 지식이 있는 것이다. 그 율법온 어떤 행동은 선하여 따를 만한 가치가 있으나. 다른 어떤 것은 증오하여 피해야 한다는 것을 전술해 준다. 양심에 대한 바울의 학자 다운 정의에 주목하라. 바울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우리가 취한 행위의 바른 경로를 옹호해 주는 어떤 논증들이 있는가 하면, 반면에 우리의 악한 행실들로 인하여 우리를 비난하고 유죄 선고하는 다른 논증들이 있다. 바울이 이들 비난 또는 옹호의 논증들을 주의 날에 관련시키는 것은, 그것들이 그 때에야 나타나게 될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이는 그것들이 금생에서 그것들의 기능을 성취 함에 있어 항상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들이 그 때에도 또한 효력을 나타내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바울의 논증의 목적은 아무도 그 논증들을 중요하지 않다거나 지속적인 의미가 없는 것으로 멸시하지 못하도록 하는 데 있다. 전과 같이, 바울은 '그 날까지’ 라는 말보다. “그 날에"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16. 하나님이~~~~ 사람들의 은밑한 것을 심판하시는 그 날이라." ;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이 길다란 묘사는 본문에 가장 적합하다. 바울은 자기네들의 도덕적 무감각의 은신처에 사신을 고의적으로 숨기고 있는 자들에게, 그들의 마음의 깊은 곳에 지금은 전적으로 숨기워진 은밀한 생각들이 그 때에는 백일하에 드러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바울은 다른 귀절에서 외모를 보는데서 그치는 인간의 판단이 얼마나 하찮은 것인가를 고린도 교인들에게 보여주려 하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명령하여,“어두음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실,,(고전 4 : 5 )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것을 들을 때에, 만일 우리가 우리의 심판주의 참된 싸인을 얻고자 소원한다면. 우리는 마음이 신실하기 위해 애써야 한다는 권면의 말씀을 회상할 것이다.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 " ; 바울은 인류의 생득적 판단과 일치하는 교리를 그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내 복음에 이른 바와 같이”라는 표현을 덧 붙인다. 그리고 그는 그의 직분 때문에 복음을  자기의 복음이라고 부르고 있다. 참 하나님만이 복음을 사람들에게 줄 권세를 가지고 있다. 사도는 다만 그것을 분여(分與)할 뿐이었다. 우리는 복음이 얼마간 장래 심판의 전달자요 선포라는 말을 듣고 놀랄 필요가 없다. 만일 복음의 ·약속들의 성취와 완성이 하늘 나라에 대한 충분한 계시가 있기까지 지연된다고 하면. 그것은 마지막 심판과 반드시 관련되어 있음에 틀림 없다. 더우기· 그리스도께서 전파되는 경우에는 반드시 어떤 사람은 부활로, 다른 어떤 사람은 멸망으로 임한다는 것이 드러난다. 이 부활과 멸망은 둘 다 심판의 날과 관련이 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라는 단어들을 심판의 날에 적용한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론 해석들도 있지만. 주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의 심판을 수행하실 것이라는 뜻을 가진 것으로 냐는 본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부 하나님에 의하여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주가 되시도록 임명되셨다. 그리스도로 알미암은 이 심판을 사도들온 복음의 주요한 내용들 중에 하나로 늘 간주했던 것이다. 만일 우리가 이 해석을 받아들인다고 하면 본문의 문장은 달리 해석하면 부 적합하겠지만 크게 설득력을 갖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