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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성경 주석/사사기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사사기10:16)

1. 성경 (사사기 10:10 ~ 18)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들을 섬김으로 주께 범죄하였나이다 하니 (10)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르시되 내가 애굽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암몬 자손과 블레셋 사람에게서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였느냐 (11) 또 시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마온 사람이 너희를 압제할 때에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므로 내가 너희를 그들의 손에서 구원하였거늘 (12)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구원하지 아니하리라 (13) 가서 너희가 택한 신들에게 부르짖어 너희의 환난 때에 그들이 너희를 구원하게 하라 하신지라 (14)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께 여쭈되 우리가 범죄하였사오니 주께서 보시기에 좋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시려니와 오직 주께 구하옵나니 오늘 우리를 건져내옵소서 하고 (15) 자기 가운데에서 이방 신들을 제하여 버리고 여호와를 섬기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곤고로 말미암아 마음에 근심하시니라 (16) 그 때에 암몬 자손이 모여서 길르앗에 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자손도 모여서 미스바에 진을 치고 (17) 길르앗 백성과 방백들이 서로 이르되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하랴 그가 길르앗 모든 주민의 머리가 되리라 하니라 (18) 

 

2. 묵상 (박윤선 박사 주석)

 삿 10:10-13

  이스라엘이 하나님 앞에 회개하며 부르짖었으나, 하나님은 그들의 배은 망덕한  죄악을 지적하셨다. 즉 과거에 하나님께서 여러차례 이방 민족들의 손에서 그들을  구원하여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거듭 거듭 범죄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의 회개를 신용하실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그 대적의 손에서 구원해 주신 역사적 사건을 11-12절에 일곱 가지로 말씀하셨으니, 곧

(1)   "애굽 사람"들에게서(출 1장-14장),

(2)   "아모리 사람"들에게서(민 21:21-24),

(3)   "암몬 자손"들에게서(3:13-21),

(4)   "블레셋 사람"들에게서(3:31),

(5)   "시돈 사람"들에게서(가나안 왕 야빈이 이스라엘을 침략할  때에  시돈 사람들이 그와 합작했을 것임, 4:1-3),

(6)   "아말렉 사람"들에게서(7:12-23),

(7)   "마온 사람"들에게서(마온은 미디안을 가리킴,6장-7장)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이다. 어떤 학설에 "마온"은  페트라(Petra)에서 18 마일 떨어져 있는 곳이라고 하며, 그곳에 사는 족속이 이스라엘을 괴롭히기도 하였다고 한다(대상 4:41;  대하26:7).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구원하신 사건 일곱 가지를 말씀하신 것은 사실상 그가  일곱 번만 구원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여기서 7수는 많은 수효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가 이렇게 그들을 구원해 주신 사건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다시금    하나님을 배반하고 이방 우상을 따라갔으니 만큼 그들은 이 이상 더 그의 구원을 바라볼 자격이 없다는 것이다. 그들의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께 아첨하는 말 밖에 되지 못한 것으로 드러났다(시 78:36-37).


  삿 10:15,16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책망을 받으면서도 낙심하지 않고 , 물러가지도 않고  회개의 기도를 계속하며 행동으로 옮겨  "이방 신들을" 제거하였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또 다시 불쌍히 여기시는 의미에서 "근심" 하셨다(16절  끝).

 "근심하시니라"란 말의 히브리어는 견디지 못하심(impatient)을 의미한다. 곧, 이스라엘  민족의 곤고를 보시고 견디실 수 없는 하나님의 긍휼(矜恤)을 가리킨다.  하나님은  진심으로 회개하는 죄인을 일흔 번씩 일곱 번이라도 용서 하신다(마18:22). 그는 진노  중에도 긍휼을 기억하신다(합 3:2).


  삿 10:17,18

  "암몬" 족속이 "길르앗"에 침범해 왔는데 길르앗에는 암몬을 대항하여  앞서  나갈 만한 지휘자가 없었다.

누가 먼저 나가서 암몬 자손과 싸움을 시작할꼬 그가 길르앗 모든 거민의머리가 되리라 - (18절 하반)  이것은 암몬을 대항하기 위하여 미스바에진을 친 길르앗의 모든 백성과 방백들의 탄식하며 부르짖는 소리이다. 그리고 그들은,이 때에 암몬의 손에서 길르앗을 구원하는 자를 저희의 주권자로 추대하겠다고 한다.

 

[호크마주석 총론]

반복된 악순환(10:6-18)
   사사 돌라와 야일이 죽자 또다시 이스라엘의 범죄 - 하나님의 징벌 - 백성들의  회개라는 사사 시대의 전형적인 악순환의 역사가 반복되는 장면이다.  즉  야일의  죽음 이후 사사들의 공백기가 생기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열국의 신들을 섬겨 또다시 하나님의 진노를 격동시켰다(6, 7절).  저자가 본문에서 열국의 각종 신들의 이름을  열거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 숭배는 매우 심각했던 것 같다.   이스라엘 사회에서 이러한 우상 숭배는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난 증거이다.  사실  여호와의 종교와 이방 우상 종교와의 혼합주의는 참된 여호와 종교가 설 땅이 없도록 만든다.  이러한 우상 숭배가 사사들이 통치하는 기간 중에는 어느 정도 꼬리를 감춘 듯 했으나 영적 지도자이며 정치 지도자인 사사가 죽자마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우상 숭배에 빠져 영적인 침체기에 이른다.  


 이러한 때 하나님의 공의는 어김없이  징계의 도구로 남겨 둔 족속들을 통하여  나타나(7-9절) 이스라엘 백성을 회개에로 이끌게 된다(10-16절).  즉 대적들의 손에  빠진 이스라엘은 다시금 평화를 갈구하게 되고 그들이 당하고 있는 압제와  고통의  원인이 자신들의 범죄 때문임을 자각, 회개케 된 것이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특기할 만한 사실은 본문에서의 이스라엘의 이러한 회개가 사사나 선지자를 통하지 않고  자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회개 태도가 진실하고 매우  구체적이었던  점이다.  


이에 하나님께서는 이번에도 저들을 대적의 손에서 건져 내려 계획하시는데(17, 18절) 곧 지도자들을 갈구하는 백성들에게 사사 입다를 구원자로 보내셨다(11짱). 한편 이상과 같은 본문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징계가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의해서 발동된 것이긴 하나 결국에는 그의 백성에 대한 사랑으로 귀결됨을  알  수  있다.  또한 하나님께서 범죄한 당신의 백성을 징계하는 목적도 단순히 그들을  괴롭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는 데 있음을 알 수 있다(히 12:6).   따라서  이같은 사실에 비추어 우리는 인간이 진정 참 생명과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오직 사나 죽으나 하나님의 장중에 사로잡힌 바 되는 것임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고대 근동의 우상 숭배와 이스라엘의 종교 생활 - 고대 근동에서는 각 지방, 각 족속들마다제각기 섬기는 수많은 지역 신들이 있었다<6절 주석 ; 2:11-23 강해, 고대 근동의 신들>.  그러므로 그러한 신들과 각종 우상들이 당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백성의 종교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심지어 훨씬  이전의 이스라엘 족장들의 종교 생활에 있어서도 이러한 이방 종교의 흔적이 발견되곤  한다.  그 한 예로 아브라함을 들 수 있다.  그는 브엘세바에서 에셀 나무를 심고 거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창 21:33).  이것은 아브라함이 에셀 나무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연관지어 생각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즉 아브라함은 이방 종교, 그중에서도 나무를 숭배한 아세라 종교의 영향을 받아 여호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풍습을 나타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정착한 후부터는 끊임없이 이러한 우상 숭배에 빠지게 되었고, 여호와 종교는 이로 인하여 항상 위기에 처해 있었다. 

 

한편 가나안 땅에 정착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사명은 제사장 나라로서 모든 이방 국가들에게 여호와 종교를 전하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과는 구별된 백성 곧 거룩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사는  것이었다. (출 19:6).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한 후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들의 삶은 이방인과 구별되기는  커녕  닮아가고  있었으며,  더욱이  여호와를  버리고  우상을   섬기었다(2:10-13).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전역사 동안 우상 숭배가 항상 극성을  부린 것은 아니다. 사사들이 나타날 때에는 여호와 종교가 우세했으며(2:18).  다윗이나 솔로몬과 같은 유능한 왕정 치하에서 여호와 종교는 유례없이 부흥했다. 그러나  대체로 사사 시대 전반에 걸쳐 나타난 종교적 부패는 왕정 시대에도 계속되었고 특히 북쪽 이스라엘에서 더욱 극심했다.


 이상에서 우리는 한 가지 중대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즉 참된 신앙은 주변의  거짓된 신앙에 포위되어 항상 위협을 당한다는 점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날 한국 교회와 신학계에서 거론되어 오고 있는 기독교의 토착화 문제는 매우 신중하게  다뤄져야  한다. 왜냐하면 자칫 잘못하면 기독교가 토착 종교에 의해 변질되어 이상한 형태의 혼합 종교로 전락해 버릴 위험성이 크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는 끓임없이 정통 신앙에 맞서 도전해 오고 있는 각종 이단 사설(異端邪說)을 엄히 경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저들의 겉은 성경과 예수 그리스도로 꾸며져 있으나 실상은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자요 성도를 미혹하여 진리의 길에서 이탈시키려는 자들이기 때문이다(요일 4:1-6).  따라서  과거 이스라엘이 주변의 이교 풍습(異敎風習)과 사신 숭배(邪神崇拜)문화 가운데서  끓임없이 경성하며 여호와 신앙을 수호해야 했듯 오늘날 우리도 난무하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 가운데서 경성하여 진리와 믿음을 굳게 지켜야 할 것이다(요이 1:7-11).

 

   참된 회개의 본 - 본장에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암몬 자손의 압제로 인해  하나님께 회개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그들의 회개는 여느 때와 달리 매우 구체적인 동시에 실천이 동반된 것이었다. 즉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 앞에 무엇을 잘못했는가를  깨닫고(10, 15절) 그들의 잘못을 하나님께 낱낱이 고한 후 그 잘못된 길에서 떠났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올무가 될 소지가 있는 모든 요소를 철저히 근절시겼다(16절).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이 이방인들로부터 당하고 있는 압제가 하나님의  진노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 압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오직  자신들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길 밖에 업빠싸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예수님의 탕자 비유에서(눅 15:1-32) 탕자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탕자는 허랑  방탕하여 매우 궁핍한 생활을 하며 고생을 하게 되자 그러한 어려움의 근원이  아버지의 품을 떠난 사실에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잘못을  깊이  뉘우치고 모든 수치와 염치 없음을 무릎쓰고 아버지 품으로 되돌아갔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공통된 요소를 발견하게 된다.
 (1) 참된 회개에는 자신의 잘못이 무엇인가를 바르게 깨닫는 것이 제일 먼저  요구된다. 그렇지 아니할진대 그 누구도 진정한 회개를 할 수 없을 뿐 아니라 할 필요도  없게 된다.
 (2) 참된 회개는 회개의 대상이 누구인지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 요구된다. 즉 성도가 회개할 때 그 대상은 단순히 사람에게만이 아니다. 비록 그가 사람에게  잘못했을지라도 근본적으로는 하나님 앞에 법죄한 것이다. 따라서 성도가 회개해야 할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 모두가 포함된다(시 51:3, 4;눅 15:18).
 (3) 참된 회개에는 진실된 방향 전환이 뒤따라야 한다.

즉 누구든 회개할 때에는  말로써만 하나님께 잘못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갔듯이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이 모든 우상을 버리고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듯이 구체적으로 죄의 길에서 돌이켜 하나님께로 나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을 때엔 하나님께서도 역시  진정으로 그들의 죄를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마 18:23-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