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8:1 ~ 35)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 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은 어찌 됨이냐 하고 그와 크게 다투는지라 (1)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이제 행한 일이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2) 하나님이 미디안의 방백 오렙과 스엡을 너희 손에 넘겨 주셨으니 내가 한 일이 어찌 능히 너희가 한 것에 비교되겠느냐 하니라 기드온이 이 말을 하매 그 때에 그들의 노여움이 풀리니라 (3) 기드온과 그와 함께 한 자 삼백 명이 요단 강에 이르러 건너고 비록 피곤하나 추격하며 (4) 그가 숙곳 사람들에게 이르되 나를 따르는 백성이 피곤하니 청하건대 그들에게 떡덩이를 주라 나는 미디안의 왕들인 세바와 살문나의 뒤를 추격하고 있노라 하니 (5) 숙곳의 방백들이 이르되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거냐 어찌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하는지라 (6) 기드온이 이르되 그러면 여호와께서 세바와 살문나를 내 손에 넘겨 주신 후에 내가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하고 (7) 거기서 브누엘로 올라가서 그들에게도 그같이 구한즉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8) 기드온이 또 브누엘 사람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가 평안히 돌아올 때에 이 망대를 헐리라 하니라 (9) 이 때에 세바와 살문나가 갈골에 있는데 동방 사람의 모든 군대 중에 칼든 자 십이만 명이 죽었고 그 남은 만 오천 명 가량은 그들을 따라와서 거기에 있더라 (10) 적군이 안심하고 있는 중에 기드온이 노바와 욕브하 동쪽 장막에 거주하는 자의 길로 올라가서 그 적진을 치니 (11) 세바와 살문나가 도망하는지라 기드온이 그들의 뒤를 추격하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고 그 온 진영을 격파하니라 (12)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헤레스 비탈 전장에서 돌아오다가 (13) 숙곳 사람 중 한 소년을 잡아 그를 심문하매 그가 숙곳의 방백들과 장로들 칠십칠 명을 그에게 적어 준지라 (14) 기드온이 숙곳 사담들에게 이르러 말하되 너희가 전에 나를 희롱하여 이르기를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네 손 안에 있다는 거냐 어찌 우리가 네 피곤한 사람들에게 떡을 주겠느냐 한 그 세바와 살문나를 보라 하고 (15) 그 성읍의 장로들을 붙잡아 들가시와 찔레로 숙곳 사람들을 징벌하고 (16) 브누엘 망대를 헐며 그 성읍 사람들을 죽이니라 (17) 이에 그가 세바와 살문나에게 말하되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사람들이더냐 하니 대답하되 그들이 너와 같아서 하나 같이 왕자들의 모습과 같더라 하니라 (18) 그가 이르되 그들은 내 형제들이며 내 어머니의 아들들이니라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너희가 만일 그들을 살렸더라면 나도 너희를 죽이지 아니하였으리라 하고 (19) 그의 맏아들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그의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20) 세바와 살문나가 이르되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사람이 어떠하면 그의 힘도 그러하니라 하니 기드온이 일어나 세바와 살문나를 죽이고 그들의 낙타 목에 있던 초승달 장식들을 떼어서 가지니라 (21) 그 때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당신이 우리를 미디안의 손에서 구원하셨으니 당신과 당신의 아들과 당신의 손자가 우리를 다스리소서 하는 지라 (22) 기드온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하겠고 나의 아들도 너희를 다스리지 아니할 것이요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하니라 (23) 기드온이 또 그들에게 이르되 내가 너희에게 요청할 일이 있으니 너희는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내게 줄지니라 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이스마엘 사람들이므로 금 귀고리가 있었음이라 (24)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가 즐거이 드리리이다 하고 겉옷을 펴고 각기 탈취한 귀고리를 그 가운데에 던지니 (25) 기드온이 요청한 금 귀고리의 무게가 금 천칠백 세겔이요 그 외에 또 초승달 장식들과 패물과 미디안 왕들이 입었던 자색 의복과 또 그 외에 그들의 낙타 목에 둘렀던 사슬이 있었더라 (26) 기드온이 그 금으로 에봇 하나를 만들어 자기의 성읍 오브라에 두었더니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의 집에 올무가 되니라 (27) 미디안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복종하여 다시는 그 머리를 들지 못하였으므로 기드온이 사는 사십 년 동안 그 땅이 평온하였더라 (28) 요아스의 아들 여룹바알이 돌아가서 자기 집에 거주하였는데 (29) 기드온이 아내가 많으므로 그의 몸에서 낳은 아들이 칠십 명이었고 (30) 세겜에 있는 그의 첩도 아들을 낳았으므로 그 이름을 아비멜렉이라 하였더라 (31)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이 나이가 많아 죽으매 아비에셀 사람의 오브라에 있는 그의 아버지 요아스의 묘실에 장사되었더라 (32) 기드온이 이미 죽으매 이스라엘 자손이 돌아서서 바알들을 따라가 음행하였으며 또 바알브릿을 자기들의 신으로 삼고 (33) 이스라엘 자손이 주위의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자기들을 건져내신 여호와 자기들의 하나님을 기억하지 아니하며 (34) 또 여룹바알이라 하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에 베푼 모든 은혜를 따라 그의 집을 후대하지도 아니하였더라 (35)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8:1
에브라임 사람들이 기드온에게 이르되 네가 미디안과 싸우러 갈 때에 우리를 부르지 아니하였으니 우리를 이같이 대접함이 어찜이뇨 하고 크게 다투는지라 - "에브라임"은 므낫세(므낫세는 기드온의 소속 지파-6:15)와 함께 요셉의 자손들이다. 이 때에 에브라임이 기드온을 원망함은 정당하지 않다. (1) 기드온이 미디안 전쟁의 초기부터 그들의 원조를 청하지 않은것은, 결과적으로 볼 때 적어도 그들의 생명을 아껴준 것이니 그들의 불평 조건이 될 수 없으며, (2) 그가 그 전쟁의 승리 직전에 그들의 군사 원조를 청하였으니(7:24), 그 전쟁에 전연 가담시키지 않은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기드온의 이와 같은 처사는 에브라임 지파로 하여금 승리의 영광에 참여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같은 내막을 살펴 볼 때에 에브라임 지파의 불평은 옳지 못하다.
삿 8:2,3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의 불의한 태도에 대해 분노하지 않고 도리어 겸손으로 응답하였다.
에브라임의 끝물 포도가 아비에셀의 맏물 포도보다 낫지 아니하냐 - (2절 하반) 이문구의 히브리어는, "에브라임의 이삭 주어 얻은 포도가 아비에셀(기드온의 고향)의 포도수확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개역되어야 한다. 이것은, 악인들에게 대한 심판을 포도 수확으로 비유한 표현이다(계 14:18-20). 기드온은 에브라임 지파의 교만한 불평에 대하여 책망하지 않고 도리어 그 지파의 전과(戰果)를 높이 평가해 주었다. 그의 이와 같은 처사는 은유의 덕(德)을 나타낸 것이다. 이것이 많은 것을 차지하는 자의 덕이다. 마 5:5
에 예수님은 말씀하시기를, "은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하셨다. 에브라임 사람들이 미디안군의 "방백"(우두머리)인 "오렙"과 "스엡"을 죽인 것은 그 전쟁에 있어서 큰 수확이었다. 사 10:26 참조.
삿 8:4-9
이 부분에는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의 죄악에 대한 기드온의 징계 예고(懲戒豫告)가 기록외었다.
"숙곳"은 얍복강 남쪽에 있고(창 33:17), "브누엘"은 얍복강 북쪽에 있다.(창32:31). 이 지방 사람들은 미디안군을 더 크게 보고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기드온을멸시하였으며, 그들은 피곤하고 주린 이스라엘 군대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그것은 그들의 불신앙이었다. 그들은,
(1) 하나님이함께 하셔서 그 때까지 승리를 거두게 된 기드온편에 가담하지 않았음. 그것은 명백한 증거를 보면서도 하나님의 역사를 믿지않는 짐짓 짓는 죄악이다.
(2) 하나님의 군대에 대하여 반역한 것임. 그들은, 하나님 백성의 원수를 축출하는 일에 지금까지도 협력하지 않고 도리어 그 원수의 힘을 의뢰하여 살고자 하였다. 그들이 "세바와 살문나의 손이 지금 어찌 네 손에 있관대 우리가 네 군대에게 떡을 주겠느냐" - 라고 말하였으니(6절), 이것은 그들이 하나님도 모르고 어디까지나 기회주의로 처세함이다. 언제나 기회주의자들은 하나님과 의리(義理)에 대하여도 반역할 소질을 지니고 있다.
들가시와 찔레로 너희 살을 찢으리라 - (7절 하반) 곧, 그들의 옷을 벗긴후 그들의 나체(裸體)를 가시나무 위에 눕혀 놓고 구 위에 무거운 것으로 내리물러 죽이겠다는 뜻이다. 이것은 교만한 숙곳 사람들에게 대한 기드온의 심판 선언이다. 이와 같은 형벌은 죄악이 극심한 자에게 내리는 극형이다.
브누엘 사람들의 대답도 숙곳 사람들의 대답과 같은지라 - (8절 하반) "브누엘 사람" 역시 "숙곳 사람"과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군대를 푸대접하였다. 이것도 그들의 불신앙의 증거이다.
이 망대를 헐리라 - (9절 하반) 곧, 브누엘성을 파괴하겠다는 뜻인데, 이것 역시 교만한 브누엘 사람들에 대한 기드온의 심판 선언이다.
삿 8:10-12
기드온은 그의 정병 300명을 거느리고 "갈골"에 이르러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끝까지 추격하여 그들을 사로잡고 그 온 군대를 격파하였다. 하나님의 명령을 받들어 실행하는 기드온은 그 사명 완수를 위하여 끝까지 분투 노력하였다.
삿 8:13-16
기드온은, 그가 예고한 대로(7,9) 미디안군을 완전히 격파하고 돌아오던 길에 "숙곳" 사람들과 "브누엘" 사람들을 엄벌하였다. 그는 이렇게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실행 하는 이번 전쟁에 있어서 하나님의 권위와 그의 능력을 무시하는 교만한 무리를 기어이 소탕하고 말았다. 죄악을 징벌하는 심판 마당에서는 그 어떠한 죄악도 용납될 수없다.
삿 8:18-21
기드온은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죽였다.
너희가 다볼에서 죽인 자들은 어떠한 자이더뇨 - (18절 상반)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에게 이렇게 물은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다볼산 살인 사건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들이 너와 같아서 모두 왕자 같더라 - (18절 하반) 세바와 살문나의 이 말이 기드온에게 아첨한 것은 아니었다고 보인다. 그 이유는 기드온이 그들의 이 말을 인정하면서 "그들은 내 형제" - 라고 하였기 때문이다. 세바와 살문나는 이스라엘 왕과 같이 귀한 지도자들을 죽였으니 만큼 자기들도 죽임을 당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느낌이 그 마음 속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21절 참조. 하나님의 백성을 대적한 그들이 사형을 당함이 하나님의 공의에 합당하다.
그 장자 여델에게 이르되 일어나 그들을 죽이라 하였으나 그 소년이 칼을 빼지 못하였으니 이는 아직 어려서 두려워함이었더라 - (20절) 기드온의 이와 같은 처사를 선하지 못하다고 하는 주석가들도 있다. 곧, 소년을 시켜서 포로를 그렇게 죽이려 함이 잔인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때에 그 두 포로의 과거 죄상(罪狀)을 따라 행한 기드온의 이와 같은 처사를 평론하기 어렵다.
사람이 어떠하면 그 힘도 그러하니라 - (21절 중간) 곧, 사람에게는 그 된것 만큼 힘이 있다는 뜻이다. 기드온의 아들은 아직 소년이니 사형 집행을 할 만큼 성숙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에게는 그 집행 역량(執行力量)이 없었다. 그러므로 기드온에게 사형
집행을 요구하는 세바와 살문나가 "네가 일어나 우리를 치라" - 고 하였다(21절 상반).
그 약대 목에 꾸몄던 새달 형상의 장식을 취하니라 - (21절 하반) "새달 형상"은 미디안 사람들의 월신 숭배(月神崇拜)를 위해 만든 것이다. 기드온이 그것을 취한 목적은 그것을 정죄하고 달리 처치하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미디안 왕이 짐승에게까지 우상 숭배의 장식을 붙인 것을 보면, 그들이 극도로 우상주의에 빠졌던 사실이 알려진다. 그들이 이렇게 극도로 부패하였으니 만큼,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이 가져오는 아낌 없는 벌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하나님께서는 비록 이스라엘 백성이라도 우상 숭배자들과 합작하여 그 죄에 동참하는 때에는 심판을 아끼지 않으신다. 신 13:6-11 참조.
삿 8:22,23
이스라엘 민족이 기드온에게 그와 그 자손이 영구히 통치해 주기를 원할 때에 그는 그 청원을 거절하면서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 - 하였다(23절 끝). 그의 이와 같은 거절 행위는 신앙적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다만 그의 청렴한 덕(德)에 멎어지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인물은 언제든지 이 세상 욕심을 거절하고 하나님 편에 가담하는 용기와 담력을 가진다. 우리는 모세의 생활에서 그것을 볼 수 있고(히 11:24-26), 여호수아에게서도 볼 수 있다. 수 19:49-50에 대한 해석을 참조하라.
삿 8:24-27
기드온이 전쟁에서 탈취한 금품을 그 백성에게서 모아 가지고 "에봇"을 만들었다. "에봇"에 대하여는 출 28:4, 6-30을 참조하라. "에봇"은 대제사장의 소지품으로서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는 데 사용되었다(삼상 23:9-12, 30:7-8). 기드온이 에봇을 만든 목적은, 실로에 가서 대제사장을 만날 필요 없이 자기의 처소에서 하나님의 뜻을 편하게 알아보려는 데 있었다. 그러나 그가 이렇게 했으므로 정권(政權)만 아니라 교권(敎權)까지 주장하는 데 이르렀다. 그것은 그의 실수였다. 그가 전쟁에 승리하여 성공한 후 높아진 결과 어두워진 것이 분명하다. 하나님의 뜻은 내려가면서 깨닫는 법이다(Moody).
온 이스라엘이 그것을 음란하게 위하므로 그것이 기드온과 그집에 올무가 되니라 -(27절 하반) 곧, 기드온이 에봇을 만들어서 따로 그의 고향 오브라에 바치는 결과로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때 실로에 있는(18:31) 성막의 제사에만 집중하지 않고 다른 데서도 문란하게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거나 혹은 하나님의 뜻을 알아보기도 하였고(17:5), 점차 다른 신 (이방 신)을 위하는 데로 타락하게 되었다(왕하 1:2-3).
삿 8:28-31
기드온의 사는 날 동안 사십 년에 그 땅이 태평하였더라 - (28절 끝) 곧, 미디안의 침략과 같은 외국의 압제를 당하지 않았다는 뜻이다. 사람은 평안하면 종교적으로나 도덕적으로 타락하기 쉽다. 기드온은 이렇게 평안한 때에 가정 향락에 빠졌으며 첩을 많이 두었다. 따라서 아들도 많았지만 이것이 결국은 불행한 일이 되었다. 9:1-6 참조.
삿 8:33-35
기드온이 죽은 후에 이스라엘은 다시 타락 하였다.
"바일브릿"이란 말(* )은 언약(言約)의 바알이란 뜻이니, 이스라엘이 그들과 참으로 언약하신 여호와를 제외하고 그 대신 바알신과 언약 하였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들의 영적 배신(靈的背信)행위로서 다른 신을 섬기는 우상주의(偶像主義) 운동이다.
[호크마주석의 8장 대강]
7장에 이어 기드온이 미디안 족속을 계속 추격하여 요단 동편 헤레스 비탈 전쟁에서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아 돌아오는 기사이다(1-21절). 그리고 그 이후 여호수아의 마지막 행적에 관한 기사이다(22-35절). 일직이 소심하고 겁 많던 기드온(6:15)은 하나님의 능력에 사로잡혀(6:34) 자기를 따르는 자 300명으로 1천배가 넘을 만큼 많은 수의 적을 대적하여 섬멸시키는 놀라운 전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하나님의 능력이 충만했던 기드온도 이토록 엄청난 승리를 얻는 과정에서 다음과 같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1)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이 미디안과의 전투에서 자기들을 직접 부르지 않았다는 일로 기드온에게 트집은 잡았었다(1-3절). (2) 기드온과 그의 종자 300명이 세바와 살문나를 추격하다가 지치고 주렸을 때 자기 동족인 숙곳 사람들(5절)과 부누엘 사람들(8절)에게 양식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었기에 기드온은 이 모든 난관을 극복하고 마침내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다.
한편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만사 형통(萬事亨通)이라고 생각하여 인생길에 어떠한 난관도 없는 것처럼 착각한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친다는 진리(롬 5:20)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그 예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계실 때 그가 가는 곳에는 어디든지 그를 넘어뜨리기 위한 온갖 음모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한 사도들을 통해 교회가 점점 확장될 때에도 성도들에 대한 박해는 더욱 거세어졌다. 이런 점에서 믿음이라는 것은 성도들에게 몰아닥치는 시련을 피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시련과 부딪쳐 끝까지 싸울 수 있게 해주는 능력이라 하겠다. 만일 기드온이 세바와 살문나를 뒤쫓던 중 도중에서 만난 어려움으로 인해 그 쫓는 일을 포기했더라면 결코 그는 대적들을 섬멸시키는 전과를 거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40년 동안 광야 생활을 할 때에 자기들에게 시련이 찾아올 때마다 믿음으로 나아가기는커녕 지도자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었다. 그리하여 결국 그들 모두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하고 광야에서 죽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믿음으로 나아갔던 인물이었으므로(민 14:1-25) 약속의 땅에 들어갔다. 이러한 출애굽 역사에 대하여 히브리서 저자는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한 것은 분명 순종하는 믿음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가르치고 있다(히 3:16-19)
1. 에브라임 지파의 불만(8:1-3)
7장에서 있었던 미디안과 전투와 관련, 에브라임 지파가 기드온에게 불평하는 장면이다. 즉 저들은 기드온이 미디안군과 싸우러 나갈 때 처음부터 자신들을 동행시키지 않은 데 대하여 불만을 품고 이를 따져 들었던 것이다(1절). 이에 대하여 기드온은 노를 발하기보다는 겸손히 처음부터 전투에 참가했던 자들의 공적보다 뒤늦게 전투에 참가했던 에브라임 지파의 공적이 더 컸다고 치하를 아끼지 않는다(2절). 그러자 에브리암 지파는 노를 풀게 되고 자연히 이로써 분쟁은 종식된다(3절). 한편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이 속한 므낫세 지파와 더불어 요셉의 후손들이다(창41:50, 51). 그리고 에브라임 지파는 이스라엘 역사 가운데서 가장 불평 불만이 많았던 지파로 성경에 묘사되어 있다. 그래서 결국 그들은 왕정 시대에 이르러 이스라엘이 남쪽 유다와 북쪽 이스라엘로 분리될 때 북쪽 이스라엘 곧 여로보암 정권을 창출해 내었다(왕상 11:26 ; 12:20). 이러한 에브라임 지파는 기드온에게 불만을 나타내었던
것처럼 사사 입다 시대에도 그렇게 하여 입다가 이끄는 길르앗 사람과 전쟁을 하였으나 42,000명의 사상자를 내고 크게 패하고 말았다(12:1-6).
이처럼 에브라임 지파와 같이 불평 불만이 많은 자들이 계속해서 공동체 내에 존재한다는 것은 그 공동체의 단결력을 약화시키고 나아가서는 분열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그런데 교회 내에도 이 에브라임 지파와 같이 불평 불만이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그리고 그러한 사람이 많이 있으면 있을수록 그 교회는 침체의 늪을 빠져 나오기 힘들게 된다. 즉 그들로 인해 전체 교회의 힘은 분산 약화되고 좀처럼 단결이 되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급기야 그 교회는 분열되는 쓰라린 고통을 겪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에브라임 지파를 통해서 뿐만 아니라 과거 교회의 역사를 통해서도 입증되며, 여러 국가들의 흥망 성쇠를 통해서도 잘 나타나 있다. 따라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교회 내에 있는 불평 불만의 무리를 지도함에 있어서 더욱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기드온이 에브라임 지파 사람들의 불만을 지혜롭게 잠재운 방법도 잘 기억해서 사용할 수 있어야 한다.
역사는 교훈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이미 알고 있던 어떤 역사적 사건과 똑같은 일을 당했을 때 그 역사를 통해 바람직한 해결책을 얻을 수 있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교회 지도자들도 성경의 역사 속에서 그리고 교회의 역사 속에서 자신이 당면한 교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얻는 지혜를 가져야 할 것이다.
성경적 겸손 - 본문에는 기드온이 에브라임 사람 앞에서 겸손히 말함으로써 에브라임 사람들의 불만을 가라앉힌 장면이 언급되어 있다(2, 3절). 그런데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겸손과 성경에 언급되고 있는 겸손은 많은 차이가 있다. 즉 세상 사람들이 미덕(美德)으로 생각하는 겸손은 무조건 자신을 다른 사람 앞에서 낮추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언급된 겸손 곧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고 있는 겸손은 완전히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곧 진정한 겸손의 삶이다. 사람 앞에서 아무리 자신을 낮출지라도 범사에 하나님을 인정할 줄 모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모른다면 그 성도는 결코 겸손한 사람이 아니다. 성경에 언급된 겸손은 철저히 하나님과 관련된 겸손이며, 하나님을 떠나서는 결코 겸손이 존재할 수 없다(잠 22:4 ; 사 57:15). 따라서 하나님께서 성도에게 요구하시는 겸손은 인간의 유한성을 깨닫는 것이며(왕상 3:6-14)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무릎을 끓는 것이고(사
6:1-8), 자신의 육체를 신뢰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을 내세우는 신앙 자세를 일컬음이다(빌 3:3-7).
한편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 땅에 계시면서 철저히 겸손을 실천한 분이시라 하겠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모든 영광을 성부 하나님께 돌리심으로 겸손의 본이 되셨다(요 13:4, 5 ; 20:20, 27 ; 빌 2:8). 그런데 이와 달리 예수님께서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같은 자들에 대해서는 독사의 자식이라고 소리치시며 그들을 책망하심으로써(마 12:34 ; 23:33) 그들에게는 매우 교만한 자처럼 비춰지셨다. 이것은 성경적으로 겸손한자가 죄에 대해서는 얼마나 단호하게 대항하는가를 보여 주고 잇다. 이와 같이 죄에 대해서는 강력하게 저항하며, 하나님앞에서는 겸손한 것이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요구하시는 진정한 겸손이다(약 4:10). 이러한 겸손을 소유한 자가 성도들간의 관계에 있어서도 바른 겸손을 실천할 수 있는 것이다(벧전 5:5).
2. 숙곳과 브누엘인들의 패역(8:4-21)
미디안군을 일차 분쇄했던 기드온(7장)이 마지막 잔당까지 섬멸하고 두왕 세바와 살문나를 체험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세바와 살문나를 쫓다 지친 기드온과 300용사들은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요구하나 거절당한다(4-9절). 이에 격분한 기드온은 미디안군을 마저 섬멸하고 돌아오는 기리에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을 응징한다(10-17절). 그리고 미디안 두 왕 세바와 살문나에 대해서는 그들의 전과(戰過)를 들어 처형한다(18-21절). 이상과 같은 본문은 우리들에게 기드온의 신앙과 이와는 대조적인 숙곳, 브누엘 사람들의 불신앙을 보여 준다. 즉 기드온은 도망간 적들을 추격함에 있어서도 오직 300명의 용사만을 데리고 다녔다. 그러나 기드온이 추격하고 있는 그곳에는 살아남은 동방 사람이 15,000여명이나 있었다(10절). 즉 이 수효는 기드온을 따르는 자보다 50배 가량 많은 대적이다. 그렇지만 기드온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만으로 그들을 추격했던 것이다(7:7). 그런데 이와 반대로 숙곳 사람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의 무리가 아무리 용감할지라도 결코 15,000명의 군대를 쳐부수고 세바와 살문나를 사로잡을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그들은 기드온을 조롱하며(15절) 음식을 제공하지도 않았다. 이들은 세바와 살문나가 기드온을 이긴 후 자기들을 공격할 것을 두려워했던 것이다. 이러한 그들의 나약하고 불신앙적인 행위는 훗날 기드온에게 보복당할 수 밖에 없는 행위였다. 즉 자기 동족의 아픔과 고통을 외면한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은 기드온을 멸시했을 뿐 아니라 기드온 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무시한 관계로 징계를 받았다.
한편 이와 같이 교회에서도 하나님께서 들어 사용하는 사람이 어떤 일을 수행할 때 같은 성도로부터 조롱을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논리로 써는 도무지 설명될 수 없는 것이기에 인간의 논리를 좋아하는 자들의 눈에는 초논리적으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기 직전 모세는 12명의 정탐꾼을 선발하여 가나안 땅을 정탐케 했다. 그리하여 그들이 돌아온 후 각각이 본 바를 보고했는데 10명은 매우 합리적으로 대답하였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그들을 불신앙의 사람들이었다. 이와 반대로 여호수아와 갈렙은 오직 신앙의 눈으로 가나안 땅과 그 거민들을 바라보았
기에 그곳과 거민들이 이스라엘 백성의 밥이라 대답하였다(민 13:25-14:10). 또한 베드로는 물 위로 걸어오시는 예수님을 보고 물 위에 뛰어내려 걷던 중 바람에 이는 풍랑을 보고 두려워하였을 때 물 속으로 빠졌었다(마 14:29, 30). 이때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에게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마 14:31)고 책망하셨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볼 때 성도가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볼 때와 신앙이 없는 눈으로 바라볼 때와는 엄청난 차이가 생김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양자 중에서 진정 성도가 선택해야 할 쪽이 어떤 것인지도 분명히 알 수 있다.
극복되어야 할 이기주의 - 본문에는 숙곳과 브누엘 사람들이 자신들이 받을 피해를 염려해서 동족인 기드온과 그를 따르는 300명을 문전 박대(門前薄待)하는 장면이 나온다(4-9절). 그들은 자기 동족이 겪는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들만 편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기적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이와 마찬가지로 사사 드보라 때에도 가나안 왕 야빈의 압제로부터 벗어나기 위하여 벼락이 백성들을 소집했을 때 르우벤 지파와 므낫세 지파 그리고 단과 아셀 지파는 자신들의 생업에만 열중하며 그 소집에 응하지 않았다(5:15-17). 그들은 야빈 왕으로부터 직접적으로 압제를 받지 않고 있다는 가기적인 생각으로 형제들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과거 이스라엘 백성은 출애굽하여 광야 여행을 할 때 고기가 먹고 싶다고 아우성치면서 자기들이 종 되었던 애굽의 생활을 그리워했다(민 11:4, 5).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에게 주신 자유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며 먹던 고기를 더 좋아한 처사이다. 그리고 고기를 위해서는 하나님까지도 버릴 수 있는 행위이고, 심지어 자신의 욕구를 위해 하나님을 믿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는 이기적인 신앙 행위이다.
하지만 이상과 달리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신앙을 시험하시기 위해 성도로 하여금 희생을 요구하실 때가 종종 있다. 하나님께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에게 독자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셨던 것도 곧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신앙을 시험하신 것이다(창22:12). 이 시험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가장 소중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을 택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시험이었다. 즉 이는 인간적인 것을 의지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 만을 의지하도록 하기 위한 시험이었다. 이 시험을 통과할 때에라야 성도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을 위해 헌신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에게는 어떠한 형태의 이기주의도 용납될 수 없다. 하나님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는 헌신과 형제를 위해 희생 정신만이 성도들의 삶 속에서 나타나야 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눅 10:29-37) 예수님께서는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에 말씀하셨다. 그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있어서 참된 이웃은 명목상의 형제라 불리운 자가 아니라 직접 그를 도와 준 사람이었다. 이 비유에 언급된 사마리아 사람은 유대인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는 자이지만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위해 자기의 모든 것을 아끼지 않는 희생을 했다. 바로 이와 같이 어려움에 처한 형제를 돌아보는 성도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며,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이다(마 10:40-42).
3.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8:22-35)
기드온이 미디안의 두 왕 세바와 살문나를 처형함으로써(18-21) 이스라엘 땅에는 또다시 태평 성대(太平聖代)가 찾아왔다. 이러한 평화는 기드온이 이스라엘의 사사로 있는 40년 동안 계속되었다(28절). 본문은 이러한 때와 관련,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
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그의 행적은 크게 대조되는 두 사건으로 아루어져 있는데 곧 다음과 같다.
(1) 이스라엘 백성이 기드온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할 때, 기드온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심을 강조하면서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한 사건이다(22, 23절).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기드온의 신앙과, 하나님과 사람 앞에 겸손한 기드온의 인격을 보여 준다. 그는 여러 가지 표징과 체험을 통해(6:19-24, 36-40 ; 7:9-14, 19-23) 자기에게 능력을 주시고 이스라엘을 구원해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심을 알고 또한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돌려 드리기 위해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했던 것이다. 즉 기드온은 하나님께서는 자기와 함께 하시지 않았다면 자기도 다른 사람과 다름없다는 사실을 철저히 깨닫고 있었다.
(2) 기드온이 미디안 전투에서 탈취한 전리품 중 금으로 에봇을 만들었는바 백성들이 이것을 우상 섬기듯 섬기게 된 사건이다(22-28절). 즉 기드온이 만든 에봇은 자기와 자기 가정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에게 올무가 되고 말았다(27절). 또한 기드온은 많은 아내를 두어 70명이나 되는 아들을 가졌다(30절). 이러한 일부 다처(一夫多妻)는 그가 말년에 사사로서 누린 영광을 보여 줄 뿐만 아니라 그의 영적 신앙의 나태와 실책을 드러내는 실상이다. 왜냐하면 그는 많은 아내와 자식을 두므로 인해 훗날 형제간의 살육을 자초했고, 그의 첩에게서 낳은 아들 아비멜렉으로 인해 그의 이름이 욕을 당하게 되었기 때문이다(9:56).
이상에서처럼 본서 저자가 기드온의 일련의 행적에 있어서 잘된 행위와 잘못된 행위를 대조시킨 것은 인간의 한계성을 보여 줌과 동시에 후세의 사람들로 하여금 자만하지 못하도록 하는 교훈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성경은 다윗의 행적을 기록할 때에도 다윗의 선한 행적만을 기록하여 그를 영웅시한 것이 아니라 그의 범죄 장면도 자세히 언급하였다(삼하 11장). 그래서 사도 바울은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 10:12)고 가리고 있다. 아무리 위대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라도 경계를 게을리하면 넘어질 수 밖에 없다. 이러한 사실은 성도로 하여금 매일의 삶에 있어서 경계할 수 있는 신앙을 소유하도록 해준다(고전 10:11).
한편 40년간의 사사 생활을 끝으로 기드온은 그의 생애를 마감한다(32절).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시금 하나님을 저버리고 죄악의 길에 드는데 사사기에 반복되는 악순환의 연속임을 말해준다.
이스라엘의 왕이신 하나님 - 본문에는 기드온이 하나님만이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말하면서 자기를 왕으로 삼고자 하는 백성들의 요구를 거절하는 장면이 나온다(23절). 그리고 이외에도 성경에는 왕권을 가지시고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이 많이 나온다(출 15:18 ; 대하 20:6 ; 시 10:16 ; 24:10 ; 95:3 ; 단 2:47 ; 4:37 ;딤전 1:17 ; 계 15:3 ; 19:6). 이 하나님의 왕권은 곧 하나님의 주권과 관련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이 왕을 세워 왕정(王政) 국가가 된 때라도 실질적으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왕이시라는 사상에는 변함이 없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던 이유는 악의 권세를 깨뜨리고 하나님의 나라를 구현(具現)하기 위함이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세상 종말레 온전히 완성될 것이긴 하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 사단이 결박되고(마 12:29 ; 막 3:27) 쫓겨 남으로써 (마 12:28 ; 눅 11:20) 이미 이 세상에 도래(到來)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이 땅에서의 모든 이적들은 이같은 사실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툐이다(마 4:23 ; 9:35). 또한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 보혜사 성령께서 오심도 성도들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키기 위함이다(요 16:13). 결국 이 모든 사실에 비추어 볼 때 하나님께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적 이스라엘 백성인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악의 세력과 싸움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시켜 하나님께 영광돌려야 한다. 만일 그렇게 하지 아니한 채 성도가 하나님을 삶의 주인으로 그리고 왕으로 모시지 않는다면, 그는 이 땅에서 결코 하나님의 나라를 맛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성도가 범사에 하나님을 왕으로서 인정할 때에야만이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길을 지도하시며 또한 그 길을 완성하실 것이기 때문이다(시 37:4, 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