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성경 (사사기9:26 ~ 57)
에벳의 아들 가알이 그의 형제와 더불어 세겜에 이르니 세겜 사람들이 그를 신뢰하니라 (26) 그들이 밭에 가서 포도를 거두어다가 밟아 짜서 연회를 베풀고 그들의 신당에 들어가서 먹고 마시며 아비멜렉을 저주하니 (27) 에벳의 아들 가알이 이르되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우리가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그의 신복은 스불이 아니냐 차라리 세겜의 아버지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우리가 어찌 아비멜렉을 섬기리요 (28) 이 백성이 내 수하에 있었더라면 내가 아비멜렉을 제거하였으리라 하고 아비멜렉에게 이르되 네 군대를 증원해서 나오라 하니라 (29) 그 성읍의 방백 스불이 에벳의 아들 가알의 말을 듣고 노하여 (30) 사자들을 아비엘렉에게 가만히 보내어 이르되 보소서 에벳의 아들 가알과 그의 형제들이 세겜에 이르러 그 성읍이 당신을 대적하게 하니 (31) 당신은 당신과 함께 있는 백성과 더불어 밤에 일어나 밭에 매복하였다가 (32) 아침 해 뜰 때에 당신이 일찍 일어나 이 성읍을 엄습하면 가알 및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나와서 당신을 대적하리니 당신은 기회를 보아 그에게 행하소서 하니 (33)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밤에 일어나 네 떼로 나누어 세겜에 맞서 매복하였더니 (34) 에벳의 아들 가알이 나와서 성읍 문 입구에 설 때에 아비멜렉과 그와 함께 있는 백성이 매복하였던 곳에서 일어난지라 (35) 가알이 그 백성을 보고 스불에게 이르되 보라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하니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산 그림자를 사람으로 보았느니라 하는지라 (36) 가알이 다시 말하여 이르되 보라 백성이 밭 가운데를 따라 내려오고 또 한 떼는 므오느님 상수리나무 길을 따라 오는도다 하니 (37) 스불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전에 말하기를 아비멜렉이 누구이기에 우리가 그를 섬기리요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이들이 네가 업신여기던 그 백성이 아니냐 청하노니 이제 나가 서 그들과 싸우라 하니 (38) 가알이 세겜 사람들보다 앞에 서서 나가 아비멜렉과 싸우다가 (39) 아비멜렉이 그를 추격하니 그 앞에서 도망하였고 부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40)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주하고 스불은 가알과 그의 형제들을 쫓아내어 세겜에 거주하지 못하게 하더니 (41) 이튿날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사람들이 그것을 아비멜렉에게 알리니라 (42) 아비멜렉이 자기 백성을 세 무리로 나누어 밭에 매복시켰더니 백성이 성에서 나오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들을 치되 (43) 아비멜렉과 그 떼는 돌격하여 성문 입구에 서고 두 무리는 밭에 있는 자들에게 돌격하여 그들을 죽이니 (44) 아비멜렉이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마침내는 점령하고 거기 있는 백성을 죽이며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45)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이를 듣고 엘브릿 신전의 보루로 들어갔더니 (46) 세겜 망대의 모든 사람들이 모인 것이 아비멜렉에게 알려지매 (47) 아비멜렉 및 그와 함께 있는 모든 백성이 살몬 산에 오르고 아비멜렉이 손에 도끼를 들고 나뭇가지를 찍어 그것을 들어올려 자기 어깨에 메고 그와 함께 있는 백성에게 이르되 너희는 내가 행하는 것을 보나니 빨리 나와 같이 행하라 하니 (48) 모든 백성들도 각각 나뭇가지를 찍어서 아비멜렉을 따라 보루 위에 놓고 그것들이 업혀 있는 보루에 불을 놓으매 세겜 망대에 있는 사람들이 다 죽었으니 남녀가 약 천 명이었더라 (49) 아비멜렉이 데베스에 가서 데베스에 맞서 진 치고 그것을 점령하였더니 (50) 성읍 중에 견고한 망대가 있으므로 그 성읍 백성의 남녀가 모두 그리로 도망하여 들어가서 문을 잠그고 망대 꼭대기로 올라간지라 (51) 아비멜렉이 망대 앞에 이르러 공격하며 망대의 문에 가까이 나아가서 그것을 불사르려 하더니 (52) 한 여인이 맷돌 위짝을 아비멜렉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 그의 두개골을 깨뜨리니 (53) 아비멜렉이 자기의 무기를 든 청년을 급히 불러 그에게 이르되 너는 칼을 빼어 나를 죽이라 사람들이 나를 가리켜 이르기를 여자가 그를 죽였다 할까 하노라 하니 그 청년이 그를 찌르매 그가 죽은지라 (54)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비멜렉이 죽은 것을 보고 각각 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55) 아비멜렉이 그의 형제 칠십 명을 죽여 자기 아버지에게 행한 악행을 하나님이 이같이 갚으셨고 (56) 또 세겜 사람들의 모든 악행을 하나님이 그들의 머리에 갚으셨으니 여룹바알의 아들 요담의 저주가 그들에게 응하니라 (57)
2. 묵상 (박윤선박사 주석)
삿 9:26-29
아비멜렉을 반대하기 위하여
"세겜 사람들"과 "가알"이 합작하였다.
"가알"은 그 반대 운동의 지도자격이었다. 이들의 움직임도 바르게 된 것은 아니었으니 만큼 이들도 그 자신에게 화(禍)를 초래한 것이다.
가알과 세겜 사람들의 반란은, (1) 바알신을 믿고 움직였고(27절), (2) 가나안 족속으로 하여금 주권을 잡도록 하려는 것이었다.
"세겜의 아들 하몰" - 은 가나안족에 속한다(28절).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 고 주장한 가알과 그를 좇은 세겜 사람들은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바이다. 그러므로 아비멜렉도 망하겠지만 이들의 멸망도 확실하다.
네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 (29절 하반) 가알은 아비멜렉에게 군대를 강화해 가지고 나오라고 하면서 도전(挑戰)하였다.
삿 9:30-45
아비멜렉이 스불의 밀고에 의하여 가알과 세겜 사람들을 칠때에 가알과 세겜 사람들은 패전하였다(40-41). 아비멜렉이 세겜성을 헐고 거기에 소금을 뿌렸다(45절). 그가 그곳에 소금을 뿌린 것은 그곳을 광야 같은 폐허로 만들겠다는 상징적 행동이다.유 39:6; 시 107:4; 렘 17:6 참조.
삿 9:46-49
세겜 사람들이
"엘브릿 신당의 보장" - 에 모여 거기 들어가서 구원 받고자 하였다. "보장"으로 번역된 히브리어는 삼상 13:6에서 "은밀한 곳"이라고 번역되었다. 그 때에 "엘브릿"(언약의 神, 곧 바알신을 그렇게 부름) 신당에 그런 피신처(避身處)가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이 때에 바알신의 도움을 받기 원하였으니, 그들의 종교적 타락이 어느 정도였음을 알 수 있다. 아비멜렉과 그의 군사들이 "보장"에 불을 놓았으므로 약 1 천명의 남녀가 타 죽었다(49절). 이것이야말로 요담의 예언의 성취이다. 9:15 참조.
삿 9:50-53
세겜 가까이에 있는
"데베스"성에서는 그곳 사람들이 "아비멜렉"의 군대를 피하여 "견고한 망대"로 들어갔다(51절).그러므로 아비멜렉이 그망대의 문에 가까이나아가서 불을 지르려고 할 때에(52절) 한 여인이 맷돌 윗짝을 그의 머리 위에 내려 던져서 그의 두골을 깨뜨렸다(53절). 아비멜렉이 이와 같이 죽임이 된 것은 그의 행한 죄악대로 보응을 받은 것이다(56절). 이것은 요담의 예언 성취이다. 9:20 참조.
3. 호크마주석 (참고)
26 .에벳의 아들 가알 - 본장에서 분열되어 가는 세겜 성의 상황을 이용하여 자신의정권욕을 채워 보려한 인물로만 언급되어 있을 뿐 그 외에 그에 대해서는 성경상에 아무것도 알려져 있지 않다. 단지 그의 아비 이름인 '에벳'(* )이 '종' 또는 '노예'라는 뜻인 점에 비추어 볼 때 그가 천민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세겜 사람들이 그를 의뢰하니라 - 다시 말해 세겜 사람들이 가알을 아비멜렉에 대항하기 위한 대표로 생각했다는 의미이다.
27. 그 신당 - '바알브릿'(4절) 또는 '엘브릿'(46절) 신당을 의미한다. 고대 제사 의식에서는 신당에서 제사를 지낸 후 그곳에서 먹고 마시며 춤추고 노래하는 것이 보편적인 일이었다. 특히 포도 수확기는 가장 즐거운 계절 중 하나였으므로(사 16:9; 렘25:30) 신당에서 배설(排說)된 연회는 축제 분위기였음에 틀림없다.
28. 아비멜렉은 누구며 세겜은 누구기에 - 이 표현은 아비멜렉과 세겜 성이 아무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다. 그가 여룹바알의 아들이 아니냐 - 가알은 기드온의 이름을 '여룹바알'로 부름으로써 우상 숭배에 빠진 세겜 사람들로 하여금 기드온의 아들 아비멜렉을 더욱 적대시하도록 유도했다. 즉 '여룹바알'은 기드온이 바알단을 훼파한 데서 비롯된 이름이니(6:25-32) 이 사실을 기억한 세겜인들은 기드온의 아들인 아비멜렉에 대하여 더욱 반감을 가졌을 것이다.
세겜의 아비 하몰의 후손을 섬길 것이라 - '하몰'은 히위 족속의 사람으로 그의아들 세겜은 아브라함 당시 세겜 성의 추장이었다(창 34:2). 따라서 본절의 표현은 이방인의 후손을 섬기는 것이 차라리 아비멜렉을 섬기는 것보다 낫다는 의미이다. 즉 가알이 한 이 말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몰락하여 타족속들 사이에 흡수되어 버린 하몰의후예와 아비멜렉을 비교하여 아비멜렉의 지위를 실추시키고 있는 말이다. 한편 공동번역과 RSV는 본절을 '그 여룹바알의 아들과 그의 심복 스불이 도리어 세겜의 조상인하몰 집안 사람들을 섬겨야 할 것 아닙니까'로 번역하고 있다. 이는 곧 세겜 성 거민들을 히위족 하몰의 후예들로서 당시까지도 그곳에 잔존하고 있던 무리로 본 데서 비롯된 번역이다. 1절 주석 참조. 그렇다면 이는 곧 세겜 성은 어디까지나 세겜 원주민이 다스려야 한다는 정통성(正統性)을 강조한 말로 볼 수 있다.
29. 군대를 더하고 나오라 - 가알이 아비멜렉에게 선전 포고(宣戰布告)하는 장면이다(Keil & Delitzsch). 이 말은 가알의 추종자가 아비멜렉의 추종자보다 강하다는 사실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가알은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이 아비멜렉을 반역하는 일에 용기를 가지도록 했다(Goslinga).
30. 그 성읍 장관 - '장관'에 해당하는 원어 '사르'(* )는 일반적으로 '방백' 또는 '통치자'로 번역되는 말이다. 그런데 28절에서 '장관'으로 번역된 원어는 '파키드'(* )로서 '대리인'(deputy) 또는 '감독자'란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두 단어가 아비멜렉을 추종하는 스불에게 적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스불'은 아비멜렉을 대신해서 세겜 성을 다스린 관리였던 것 같다. 만일 그가 군대 장관이었다면 아비멜렉의도움없이 자기의 힘만으로도 아직 완전히 규합되지 않은 가알을 칠 수 있었을 것이다.
31. 사자들을~~; 사자들을 가만히 보내어. 스불은 아비멜렉 휘하에서 그 성읍의 장관이었기 때문에세겜의 정황을 그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스불의 세력이 가알의 영향력을꺾기에는 다소 부족하였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행동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는은밀하게 밀사를 보내어 아비멜렉에게 세겜의 상황을 알렸던 것이다.
성읍 무리를 충동하여 당신을 대적하게 하나니 - 가알이 세겜 사람이 베푼 연회석에 참석하여(26,27절) 반역을 도모했지만 아직 그들의 세력이 완전히 규합되지 않은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스불은 그들의 세력이 더 커지기 전에 아비멜렉에게 가알과 그의 형제들에 의한 반역의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32. 밭에 매복하였다가 - 본래 매복(埋伏)은 적의 공격을 기습적으로 반격하기 위한전술이다(수 8:10-17). 그러나 여기서는 아침 일찍 세겜 성을 공격하기 위해 밤에 미리 세겜성 앞에 있는 밭에 숨어 있는 것을 가리킨다(33절). 이러한 매복 작전은 구약에 자주 등장하는 전술 중의 하나이다. 일찍이 이스라엘은 가나안 정복 당시, 아이성전투에서 이 전술로 크게 성공을 거둔 바 있다(수 8:1-23). 한편 '밭'은 세겜 성읍 백성들이 농사짓는 곳으로, 그 성 밖에 있었다(42절).
33. 아침 해 뜰 때에...엄습하면 - '엄습하다'에 해당하는 '파솨트'(* )는 본래'돌진하다', '가죽을 벗기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순간적으로 기습하여 닥치는대로 살육하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데 스불이 아비멜렉에게 이른 아침 동틀 무렵에이러한 기습 작전을 펴도록 충고한 것은 그때가 잠에 취했던 적들이 이제 막 깨어날무렵인 바 미처 아무런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한 적들을 쉽게 공략할 수 있기 때문이다(40절).
34. 밤에 일어나 - 아비멜렉은 스불의 말에 따라 군대를 비밀리 이동하기 위해 밤을이용했다. 밤에 이동함으로써 아비멜렉과 그의 추종자들은 손쉽게 세겜 성과 인접한곳에 이를 수 있었다.
네 떼로 나눠 - 이처럼 많은 수의 군대를 여러 부분으로 나누면 다음과 같은 전술상의 이점이 있다. (1) 지휘하는 자가 그 대원을 통솔하기 쉽다. (2) 각각의 소단위부대는 전투시 기동력을 살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3) 적에게 포위당할 위험이적다. (4) 그리고 매복 공격도 쉽게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아비멜렉은 기동력을 살려 군사의 이동을 신속하게 하고자 자기 부대를 네 떼로 나눈 것 같다.
35. 가알이 나와서 성읍문 입구에 설 때에 - 본문에는 가알이 무슨 이유로 아침 일찍부터 성읍 문 앞으로 나아갔는지에 대하여 전혀 언급이 없다. 그러나 그 행차(行次)에는 스불 뿐 아니라 일부 병사들도 동행하였을 것이다(36,39절). 추정컨대 아마도 앞서아비멜렉에게 선전 포고를 하였던 가알(29절)은 적정(敵情)을 살펴보려고 성읍 문 앞으로 나아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으니 도리어 아비멜렉이 가알을 치려고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36. 가알이...스불에게 이르되 - 가알은 세겜 성읍의 장관인 스불을 따라 성읍 문 앞으로 나간 것 같다. 이로 보아 가알은 스불이 아비멜렉 편인 것을 눈치채지 못했음에분명하다. 만일 스불이 아비멜렉의 대리권을 행사하는 사람인 줄 알았다면 가알은 그와 함께 아침부터 행동을 같이 하지 않았을 것이다.
백성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내려오는도다 - 산꼭대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은 아비멜렉을 따른 무리 중 한 떼에 불과하다(34절). 이 무리들은 세겜 성에서 볼 때 가장 눈에 잘 띄는 산꼭대기에서 내려왔으므로 가장 먼저 언급되었다.
37. 밭 가운데로 - 이 말에 대해서는 학자들마다 달리 해석하고 있다. (1) '그 땅 가운데로' 또는 '그 땅의 중앙에'란 의미로 해석하는 견해이다(KJV, RSV, NIV). 그 이유는 '가운데'애 해당하는 원어 '타부르'(* )가 '중앙으로'란 뜻이기 때문이다(겔 38:12). (2)'밭 가운데로'에 해당하는 '타부르 하아레츠'(* )를'그 땅의 중심'(Navel of the Land)이라는 의미를 지닌 지명으로 보는 견해이다(Goslinga, Hervey, Cundall). 그래서 혹자는 이곳을 '그리심 산'으로 주장하며(Goslinga), 또 어떤 사람은 세겜 앞의 특별한 언덕 지대의 지명으로 주장한다(Hervey, Cundall). 그러나 이 두번째 견해는 첫번째 견해에 비해 그리 타당하지 못하다. 왜냐하면 '타부르 하아레츠'란 말은 가알이 세겜 성문 입구에서 보았을 때 한 떼가 산꼭대기에서 내려오고 있었으머(36절), 그 산 중앙으로 또 한 떼가 내려왔던 것과연관되어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므오느님 상수리 나무 - 문자적으로 '점장이의 상수리 나무'란 뜻이다. 아마 이곳은 점장이가 그 상수리 나무에 앉아 점을 쳤기 대문에 이런 식의 이름으로 특별히 알려진 장소인 듯하다. 그러나 '므오느님'(Meonenim)은 세겜 성 인접지였다는 것 외에는달리 알 수 있는 사항이 없다.
38. 그 입이 이제 어디 있느냐 - 다시 말해 아비멜렉을 이길 수 있다고 장담했던 그용기(29절)가 어디 있느냐란 의미이다. 스불은 가알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가알의 자존심을 자극시켰다.
이제 나가서 그들과 싸우라 - 만일 가알이 성문을 굳게 잠근 채 수비에만 전력을기울였다면, 아비멜렉의 세겜 성 공략은 몇 배나 힘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이를 잘 알았던 스불은 의도적으로 가알의 자존심을 부추겨 정면 대결로 유도하였다.
39. 세겜 사람들의 앞서 나가서 - 공동번역은 이를 '세겜의 어른들을 거느리고 앞장서 나가'로 번역하였다. 이는 곧 가알이 진퇴양난(進退兩難)의 사태에 빠진 세겜 사람들을 추스리며 몸소 그들의 선두에 서서 싸움을 지휘하는 것을 가리킨다(PulpitCommentary).
40. 상하여 엎드러진 자가 많아서 성문 입구까지 이르렀더라 - 가알은 아비멜렉군과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의 많은 추종자들을 거느리고 나아갔을 것이다(39절). 그러나이른 아침에 불시(不時)의 습격을 받은 그들은 전투를 위해 사전에 아무것도 준비하지못한 상태에서 갑자기 출전했으므로 아비멜렉이 이끄는 네 떼의 사람들을 당해 낼 수없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그들은 많은 인명 손실을 내고 세겜 성문 입구까지 아비멜렉군에 의해 쫓겨왔던 것이다.
41. 아비멜렉은 아루마에 거하고 - 아비멜렉이 이번 기회에 세겜 성 내부에까지 공격해들어가지 않고 자기가 거하던 곳으로 되돌아간 것은 잘 이해되지 않는 점이다. 왜냐하면 그는 돌아간 후 다시금 세겜 성을 칠 기회를 엿보고 있었기 때문이다(42-45절). 아마 이번에는 성내로 들어가서 싸우게 되면 자신의 군대가 승리할 가능성이 희박할 것으로 판단했기에 되돌아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아루마'(Arumah)는 '높이', '높다'란 뜻이다. 이 역시 세겜 부근인 것으로 추정될 뿐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어쩌면 여호야김의 모친의 출신지인 '루마'(Rumah)와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왕하 23:26).
42. 백성이 밭으로 나오매 -세겜 성에 살고 있는 백성들이 이처럼 밭으로 나온 것은아비멜렉과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곳에서 일하기 위해서였다(Keil). 이것은 아비멜렉이 더 이상 그 성을 치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세겜 성 사람들이 갖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그들의 성읍 방어는 허술했을 것이다.
43. 아비멜렉이...그 들을 치되 - 아비멜렉은 일단 반역의 주동자를 제거함으로써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아루마로 퇴각하였다(41절). 그런데 이튿날 세겜의 백성들이 밭으로 나왔다는 소식을 듣자(42절) 그들 모두를 제거하여 후한을 없애버리기로 결의한듯하다. 아비멜렉은 이번에는 전술을 달리하여 군사를 세 떼로 나누어 매복시켰다. 그리고 세겜 사람들이 모두 성에서 나온 후 한 떼는 성문을 차단하고 나머지 두 떼는 성밖의 세겜 사람들을 무참하게 도륙(屠戮)하게 하였다(4절).
44. 아비멜렉과 그를 좇는 떼는...성문 입구에 서고 - 아비멜렉이 이와 같은 행동을취한 목적은 그 성에서 나오는 자들을 칠 태세를 취한것 뿐 아니라 밖에서 그의 군대에게 쫓긴 자들이 성으로 되돌아갈 수 없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사실상 밖으로 나온성읍 백성들을 제외하고 성내에 있는 자들은 성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인원이었을것이다. 따라서 밖에 있는 자들만 치면 성을 점령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비멜렉은 바로 이 점을 이용했던 것이다.
45. 그 날 종일토록 그 성을 쳐서 - 아비멜렉이 이렇게 힘든 싸움을 함에도 블구하고그의 지지자인 세겜의 장관 스불(31-33절)은 미처 그를 돕지 못한 듯하다. 만일 성내에 거하던 스불이 아비멜렉을 도왔다면 아비멜렉은 성읍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을텐데, 오히려 그는 끈질기게 저항하는 성읍 주민들로 인해 고전을 했다.
그 성을 헐고 소금을 뿌리니라 - 소금은 식물의 결실을 방해하는 역할을 한다. 따라서 아비멜렉의 이러한 행위는 그 성읍에 대해 영원한 멸망의 저주(신 29:23)를 선고하는 것을 상징한다(Pulpit Commentary). 한편 일찍이 여호수아도 여리고 성을 점령한 후 그 무너진 성을 재건하지 못하도록 저주를 선고한 적이 있다(수 6:26). 그리고 로마의 디도(Titus)장군도 A.D. 70년 예루살렘을 점령하여 그 성을 완전히 헐었던 적이있다.
46. 세겜 망대의 사람들 - 많은 학자들은 이들을 밀로 족속(6,20절)과 동일시한다(Keil, Goslinga, Hervey). 그러나 꼭 그렇게 볼 이유는 없다. 한편 여기에 언급된'망대'는 세겜 사람들이 포도밭에 세워 둔 막대를 의미하는 것 같다(사 5:2). 망대는그 성읍과 가까운 곳에 위치하여 외적의 침입을 막는 파수막 역할을 하였다. 세겜 망대는 세겜 성읍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위치했고 천 여 명도 거뜬히 운신할 수 있는 견고한 요새였던 것 같다(49절). 그래서 쉽게 점령할 수 없었던 아비멜렉은 화공법(火攻法)을 사용하여 공격하였던 것이다(6절).
엘브릿 신당의 보장 - '엘브릿'은 '계약의 신'이라는 뜻으로 '바알브릿'(4절;8:33)과 같은 의미이다. 8:33 주석 참조. 그리고 '보장'에 해당하는 원어 '체리아흐'(* )는 '동굴'이나 '지하 방'과 같은 은밀한 장소를 가리킨다. 공동번역은 이를 '밀실'로, RSV와 NIV는 '요새'(stronghold), Living Bible은 '은신처'(refuge)로각기 번역하고 있다.
들어갔더니 - 이처럼 세겜성으로부터 세겜 망대로 피한 사람들은 다시 위기를 느끼고 엘브릿 신당의 은밀한 곳을 도피처로 삼았다. 즉 거기에는 바알의 도움이 있어안전할 줄로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이 도피처로 삼은 보장이 결국 그들의 무덤이되고 말았다(47-49절). 악인의 종국은 이처럼 처참하고 가련하다(잠 3:25). 정녕 구원의 손길이 필요한 순간에 그들의 신 바알은 아무런 힘도 쓸 수 없었다. 반면에 주 여호와께서는 재앙의 날에 피난처가 되시며(렘 17:17), 구원의 산성이 되신다(시 28:8).
47. 모든 사람의 모인 것이...들리매 - 본래 유능한 전술가는 적들을 한 곳으로 유인,그곳에 모인 적들을 대량으로 살상하는 작전을 편다. 그런데 세겜 사람들은 스스로가한 곳에 모였으니 이를 전해 들은 아비멜렉은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였을 것이다.
48. 살몬 산 - 지명의 뜻이 '그늘'인 점으로 보아 울창한 숲으로 덮힌 산인 듯하다(Luther, keil, Hervey). 혹자는 에발산에 대한 다른이름이라고 하며, 또 다른 사람은그리심 산과 관련된 산꼭대기로 오늘날의 셀만(Selman)이라고도 한다(Goslinga). 그러나 성경에 달리 언급된 사항이 없으므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9. 그곳에 불을 놓으매 - 아비멜렉과 그의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꺽어 온 나무 가지로(48절) 신당 보장(保障) 앞에 불을 놓았다. 이것은 보장에 불을 붙혀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을 태워 죽이기 위함이 아니라 불타는 나무의 연기로 질식시켜 죽이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연기로 견디다 못해 밖으로 뛰쳐나오는 사람도 손쉽게 죽이기 위함이기도하다. 반면에 이러한 방법을 사용하지 않고 그들이 굴로 들어가게 되면 도리어 자기들이 공격을 받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좁은 굴 입구를 통해 굴 속으로 들어갈 수있는 인원은 제한되어 있으므로 굴 속에 있는자들은 방어하기가 용이하기 때문이다.
남녀가 대략 일천 명이었더라 - 이로 보아 그 보장은 비록 지하이지만 매우 넓은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 그들은 항상 종교 의식을 거행할 수 있었을것이다. 또한 이곳에서는 우상숭배에 따른 음란한 행위도 벌어졌을 것이다.
50. 데베스 - 세겜 북동쪽에서 약 18km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 성읍이다. 혹자는 이곳을 오늘날의 '투바스'(Tubas)일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Wycliffe, Robinson). 이곳사람들도 세겜 사람들과 함께 아비멜렉에 대항하여 반역을 도모했음에 틀림었다.
51. 성중에 견고한 망대 - '성 안에 있는 견고한 요새'란 뜻으로 데베스 성의 최후의보루를 가리킨다.
그 성 백성의 남녀 - 단순히 '그성 백성들'이라 하지 않고 '남녀'란 말이 첨가되어 있는 점에 유의하여 혹자는 이들이 그성에서 구별된 사람들 곧 그 성의 지도자들이라고 추정한다(Goslinga). 그러나 본절에서 특별히 남녀가 구별되어 언급된 것은 아비멜렉이 여인의 손에 죽게 된 사실과 깊은 연관이 있다. 즉 성중의 모든 백성이 그 견고한 망대로 피했는데 그 중에는 여자들도 있었다는 사실은 후에 아비멜렉이 여인의손에 죽게 되는 것과 자연스럽게 연결된다(53절).
52. 불사르려 하더니 - 세겜인들을 공략할 때 사용하였던 것과 꼭 같은 화공법(火功法)을 사용하려는 것을 가리킨다. 49절 주석 참조.
53. 한 여인이 - 남자들이 활과 창과 칼로써 항쟁하는 동안에 여인들도 그 성을 수호하기 위하여 접근하는 적에게 돌을 떨어뜨림으로써 그 투쟁에 일익을 담당하였다.
맷돌 윗짝 - 맷돌은 고대 시대에 없어서는 안 될 가정 필수품이었다. 여인들은 이것을 사용하여 곡식을 빻아 음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이유로 여인들은 그 망대로 피할때에 이 맷돌을 가지고 갔던것 같다.
그 두골을 깨뜨리니 - 영역 성경 KJV는 조금 더 과장된 표현을 사용, '그의 두골을 완전히 부수니'(all to brake his skull)라고 번역하였다. 그러나 아비멜렉은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머리에 치명상을 입었지만 아직 죽지는 않았다(54절).
54. 병기 잡은 소년 - 좀더 정확히 말해서 '병기 잡은 신복'이다. '소년'에 해당하는'나아르'(* )는 '아이', '청년', '사환' 등을 의미하지만, 본절에서는 전쟁에참가할 만큼 나이가 들었고 주인을 따르는 자이므로 '사환' 또는 '종'의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다윗도 사울의 병기 잡은 자로 그를 따라 다닌 적이 있다(삼상 16:21).
그가 여인에게 죽었다 할까하노라 - 용사가 힘 없는 여인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은매우 명예롭지 못한 일이다. 그래서 아비멜렉은 죽어 가는 그 순간에서도 명예로운 죽음을 원했던 것이다(Wycliffe, Pulpit Commentary). 이와 유사하게 블레셋과 싸움을하던 사울은 치명상을 입은 후 이방인들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겨 자기의 병기든 자로 하여금 자기를 치게 한 일이 있다(삼상 31:4).
55. 아비멜렉을 추종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의 죽음을 목격한 후 더 이상 싸워야할 명분이 없으므로 사방으로 흩어져 버렸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아비멜렉의 죽음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자기 처소로 떠나갔더라 - 지도자를 잃은 아비멜렉의 군대는뿔뿔이 흩어졌다. 이처럼 명분이 정당하지 못한 집단은 한때 흥왕하는 듯하여도 쉬 와해되기 마련이다. 반면에 진리 안에서 모인 무리들의 결속력은 가히 영구적이라 할 것이다. 왜냐하면 모인 무리들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핍박을 당하여 소멸되기도 하지만, 진리는 영원하므로 언제 어디서든지 또 다시 일어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이는 우리 성도들은 자칫 모임의 순수성이 흐려지지 않도록 늘 힘써야 할 것이다. 한편 아비멜렉의 죽음으로 인하여 그 동안 세겜인과 아비멜렉 간에 진행되었던 내분(內紛)은 끝이 난다.
56~57. 여기에서 저자는 결론적으로 아비멜렉의 악행과 그를 추종한 세겜 사람들의 악행에 대하여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이 임하였음을 보여 주고 있다.
자기 아비에게 행한 악 -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가문에 대한 세겜 사람들의 반감(反感)을 고조시키기 위해 짐짓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여룹바알'로 부르는 악을 범했었다(9:2). 또한 그는 자기 형제들을 죽이고 자기 아버지 기드온이 거절한 왕위를 차지하므로 자기 아버지의 이름을 더럽히는 죄악을 저질렀었다(9:2-6).
[호크마주석의 대강]
전장에서 우리는 기드온의 마지막 행적에 관하여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제 본장에는 기드온이 죽은 후 그의 아들 아비멜렉에 의해 발생된 이스라엘 사회의 혼란상이 기술되어 있다. 즉 본장은 하나님의 통치를 무시하고 오직 자신의 정권야욕에만 눈이 어두워 지극히 잔인한 방법으로 스스로 왕위에 오른 아비멜렉(1-6절)이 자신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는 비극적인 장면을 보여 준다(7-57절).
한편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다스리심에 있어서 당신의 뜻에 합당한 사람을 세우시고 그로 하여금 당신의 뜻을 대행케 하시기를 원하신다(삼상 16:1 ; 렘 3:15). 이러한 하나님이 의도는 하나님께서 친히 이스라엘을 다스리고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보여 주시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하나님께로부터 세우심을 입은 이스라엘의 지도자는 스스로 높아져서 백성들을 억압하거나 착취해서는 아니되며, 전 백성을 위해 수고하는 선한 청지기로 그리고 그들을 하나님께로 더욱 가까이 인도하시는 안내자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감당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본장에 언급된 아멜렉은 자기 아버지 기드온의 이름을 빌어 자기 자신의 탐욕을 채우는 데 급급하여 백성들 위에 군림하는 압제자의 전형적인 모형이 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도리어 백성의 손에 의해 죽임당하는 비참한 최후였으니(52-54절) 곧 하나님의 심판의 결과가 아닐 수 없다. 이상과 같은 본문은 여러가지 시사해 주는 바가 많은데 특히 장차 도래하게 될 이스라엘의 왕정 시대에 대비하여 두 가지 중요한 교훈적인 경고를 함축하고 있다.
(1) 왕권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고 인간 스스로가 왕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는 행위이며 불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그 왕으로 인해 사람들은 반드시 고통을 당하게 될 것이다(삼상 8:10-18).
(2)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제도와 권력은 결국 무너지고 만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들이 바벧탑을 쌓아 흩어짐을 면하려고 했을 때 하나님께서 도리어 그들을 치심으로 인해 사방으로 흩어지게 하셨던 데서 잘 나타나 있다(창 11:1-9). 이와 같이 하나님을 떠난 문화, 정치, 경제 이 모든 것은 반드시 무너진다. 인간이 세운 어떠한 사상도 영원하지 않다. 이러한 사실들을 통해 성도는 하나님꼐서 통치하시는 나라 곧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서 확장시키기 위해 무엇보다도 인본주의적인 요소를 과감하게 버리고 철저히 하나님의 법칙에 따라 살아야 한다(마 6:31-33).
1. 아비밀렉의 죄악(9:1-6)
기드온이 생전에 여러 아내와 첩을 두었으며 세겜 출신 첩에가서 난 아들이 바로 아비멜렉임은 이미 전장에서 언급된 사실이다(8:30, 31). 본문에는 바로 그러한 아비멜렉이 기드온 사후(死後), 형제들을 대신하여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저지른 죄악들이 기술되어 있다. 즉 아비멜렉은 스스로 이스라엘의 왕이 되기 위해 (1) 교묘한 말로 자기 와가 쪽의 사람들인 세겜족을 포섭했으며(1-3절), (2) 불량배들을 돈으로 매수하여(4절), (3) 자기 형제 70명을 죽였다(5절). 이러한 행동에는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성취시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은 아비멜렉의 인간 됨됨이가 잘 나타나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도와서 왕이 되도록 한 세겜 사람들 역시 그와 같은 부류의 인물들임에 다름없다(6절). 이런 이유로 그들도 훗날 아비멜렉과 함께 하나님의 징벌을 당하였는데 곧 저들간의 내분으로 인한 양자 모두의 자멸이다(22-24, 44-57절).
이상에서처럼 아비멜렉의 개인적 욕심은 큰 비극을 가져왔으니 곧 자신의 죽음 뿐 아니라 많은 사람의 희생이다. 그런데 우리는 성경 가운데서 아비멜렉의 잘못과 유사한 경우를 또 찾아볼 수 있다. 그것은 곧 다윗의 아들 압살롬의 반역 사건이다. 압살롬은 교묘한 방법으로 백성들의 마음을 자기 아버지 다윗에게서 떠나게 하여 왕위를 차지하려 했다(삼하 15:1-6). 이러한 압살롬의 행위를 성경 저자는 압살롬이 백성의 마음을 도적질했다고 표현했다(삼하 15:6). 또한 그는 자기 형이자 다윗의 장남 암논도 살해했다(삼하 13:29). 이상의 비극과 관련하여 우리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고 한 사도 야고보의 경고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무릇 이를 탐하는 자의 길은 다 이러하여 자기의 생명을 잃게 하느니라"(잠 1:19)고 한 지혜
자의 가르침도 겸허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지 아니할진대 언제 어떤식의 유혹에 이끌려 우리 역시 동일한 비극을 초래할지 그 누가 알랴!
자녀 교육의 중요성 - 아비멜렉은 기드온의 아들이지만 그의 어머니가 세겜에서 살았던 점(1절 ;8:31)으로 미루어 보아 자기 아버지의 신앙 인격을 배울 기회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이처럼 성장기에 충분한 인간 교육이나 신앙 훈련을 받지 못했을 뿐 아니라, 부도덕한 우상 숭배가 극심했던 세겜 땅에서 성장했으므로 자연 아비멜렉은 여러 면에서 인격적 결함을 지닐 수 밖에 없었다.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자녀 교육에 대단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그러나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준비한 자녀 교육은 사상 누각(砂上樓閣)과 같다. 인간이 중심이 된 교육은 아무리 빈틈없이 그리고 합리적으로 실시할지라도 결국에는 실패하게 된다. 그예로 유물론과 공산주의를 들 수 있다. 즉 마르크스가 내세운 유물론과 공산주의는 철저히 인간 중심으로 기초가 형성되어 있으므로 하나님과 인간 관계의 문제가 개입될 여지가 없다(P. Tillich). 그 결과 공산주의는 인간 지도자가 신의 절대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어 독재자의 전유물이 되어 왔다. 결국 오늘날에 이르어 공산주의는 자신들의 결정적인 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서서히 변화를 시도하고 있다. 이것은 인간 역사 가운데 인본주의가 초래한 결과 중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이와 반대로 포로 후기의 유대인들은 자녀 교육의 중요성을 깨닫고 가정에서 뿐 아니라 자기들끼리 모여 사는 곳에는 항상 회당을 지어 교육에 열중했다. 그 결과 그들은 2,000여년 동안 세계 각처에 흩어져 살아도 망하지 않았으며, 유대 고유의 민족성도 잃지 않았다. 만일 그들의 교육이 단지 인간 중심의 교육이었다면 유대인들은 전세계에 흩어져 사는 동안 다른 민족에게 흡수되거나 민족성을 잃어 그드르이 자취는 이 지구상에서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교육은 제일 먼저 자기들이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했다. 즉 그들은 수직적인 관계의 교육을 확실히 가르친 후 수평적인 관계의 교육을 실시했다.
여기에서 교회 교육과 자녀 교육의 중요성이 다시 한번 입증된다. 아이가 하나님의 말씀과 교훈으로 잘 양육되어 자라나게 되면,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된다. 그런데 아이가 그러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장소는 학교가 아니라 교회와 가정이다. 교회는 아이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기도록 부지런히 가르칠 필요가 있으며, 가정도 아이들에게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쳐야 한다(신 6:6-9). 또한 자녀의 교육울 학교에 의존하는 부모가 없도록 교육하는 것도 교회의 임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잠시 흥왕하다 사라질 인간의 사상을 교육하는 것도 교회의 임무이기도 하다. 따라서 교회는 잠시 흥왕하다 사라질 인간의 사상을 됴육하는 곳이 아니라 영원하고 불변하는 진리를 교육하는 곳이 되어야 한다. 이와 관련하여 수 24:14-28 강해, '기독교 가정에서의 부모의 책임'과 삼상 2:11-26 강해, '부모의 자녀 교육'을 참조하라.
2. 요담의 비유(9:7-21)
아비밀렉의 죄악에 대하여 요담이 우화(寓話)로써 통렬히 꾸짖는 부분이다. 당시 아비멜렉의 가증스러운 행위(4, 5절)와 세겜 사람들이 그를 왕으로 삼은 사실(6절)에 대해 극소수(7절)를 제외한 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입을 막고 방관하는 소극적인 자세를 보였다. 아마도 그들은 아비멜렉의 잔혹한 보복이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그러한 때 기드온의 아들들 중 유일한 생존자인 요담(5절)은 홀로 그리심 산 꼭대기에 올라 아비멜렉과 세겜 사람들의 죄악상을 신랄하게 지적하고 경고했다. 특히 요담은 매우 창조적인 우화를 사용하여 논지를 전개시켰는데, 이러한 우화는 일종의 비유 문학으로서 다수 대중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매우 좋은 방법이다. 본문에서 8-13절은 왕이 되기를 거절한 나무들의 우화로서 기드온의 처신을 상기시키며(8:22, 23), 아비밀렉외에 기드온의 70명 아들이 왕위에 대해 취한 태도를 암시하고 있다. 즉 여기에 등장하는 감람나무, 무화과나무, 그리고 포도나무 등은 나름대로의
귀한 재능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며, 분수를 넘어 과욕에 빠지지 않는 겸허한 인간상을 대변하고 있다(롬 12:3). 반면에 14, 15절에 등장하는 가시나무는 아무런 재능이나 자격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협박과 공갈로써 왕위를 서슴없이 가로챈 아비밀렉을 비유
하고 있다(시 12:8 ; 전 10:6).
이상과 같은 우화를 결론지으면서 요담은 자연스레 아비밀렉과 세겜인의 잘못을 지적한다(16-19절). 그리고선 저들의 결국이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놓여 모두 멸망당할 뿐임을 엄숙히 경고한다(20절). 이처럼 요담은 아비밀렉이 자기 형제 70인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5절) 그를 복수하기 위해 은밀히 군사를 양성한다든가 기타 다른 인간작인 방법을 간구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심판을 하나님이 손에 맡기면서 정의를 외치는 예언자적 행동을 보였을 뿐이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된다. 왜냐하면 천하 만사 모든 일이 결국은 하나님의 뜻대로 주장된다는 것이 곧 성도의 신앙이가 때문이다(시 103:19). 또한 모든 일에 원수 갚는 것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지 인간이 좌우할 바가 아니기 때문이다(롬 12:19). 실제로 하나님께서는 훗날 당신의 공의를 좇아 아비밀렉을 심판하셨는바 그로써 보복거리도 저절로 해결되었지 않은가(50-57절)
성경에 언급된 비유 문학(比喩文學) - 본문에는 요담이 우화를 사용, 비유적으로 아비멜렉의 죄악을 고발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는 곧 그 표현 양식상 일종의 비유 문학이다. 이처럼 성경에서 일반작으로 비유가 사용된 목적은 어떤 한 사건을 다른 사람에게 암시적으로 일러주거나(삼하 12:1-4 ; 14:5) 신령한 교훈을 가르치기 위함이었다(사 5:1-6). 한편 이러한 비유 문학은 구약관 신약 전체 시대 동안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구약 시대에는 비유를 사용하여 다른 사람의 죄악상을 고발하는 문학 형태
가 가장 많이 나타난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는 종종 선지자들을 통해서 하나님의 심판과 결부되어 언급되었다(왕상 20:39;사 5:1;렘 13:1;겔 17:3;19:2, 3;24:3). 그러나 신약에서는 비유의 형태와 그 적용 범위가 매우 다양해졌다. 그중 세례 요한의 비유는 구약의 선지자들과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다(마 3:10, 12;요 1:29-36;3:29, 30).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비유는 선지자들과 같은 형태 뿐 아니라 진리를 밝혀 주기 위한 것도 많이 있다(마 13, 24장). 또한 사도 바울은 이 비유를 주로 교훈적인 내용을 보다 생생하게 묘사하기 위해 사용했다(갈 4:22-31; 딤후 2:2-6, 20, 21).
이와 같이 성경에는 비유적인 방법을 통해 다양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계시해 주는 부분이 많다. 그런데 이와 관련, 오늘날 가장 중요한 문제는 성경에 나타난 여러 가지 비유들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에 대한 비유 해석법이다. 예들 들어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선한 사마리아 사람 비유'(눅 10:25-37)에서 선한 사마리아 사람을 예수 그리스도로 해석하고, 제사장과 레위인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같은 지배 계급으로 해석하여 선하신 그리스도상을 부각시키려 했다면 이것은 예수님의 비유 내용에서 벗어난 해석이다. 왜냐하면 이비유에서 에수님께서는 당신과 바리새인, 당신과 제사장 무리를 대조시켜 당신의 선하신 인격을 부각시키려는 데 초점을 두지 않고 오직 '우리의 이웃이 누구인가'하는 것에 초점을 두고 계시기 때문이다. 따라서 비유를 해석하는 사람은 그 비유가 사용된 목적 및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고 난 후에 그 비유에 함축된 교훈을 도출(導出)해 내어야 한다. 즉 숲 전체를 조망(眺望)한 후에 나무 하나 하나를 관찰하는 방법을 취해야 한다. 그렇지 아니하면 우리는 성경이 본래 주고자 하는 의미를 종종 곡해할 우려가 있다. 한편 비유 문학과 관련, 기타 다른 내용에 관해서는 본서 1권, 성경 총론 편의 '성경과 문학'을 참조하라.
3. 세겜족의 최후(9:22 -49)
드디어 오래 참고 기다리던 때가 이르러 하나님께서 먼저 아비멜렉을 추종하였던 세겜족을 징벌하시는 장면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아비멜렉과 세겜족 간에 분열이 일어나게 하신다(22-25절). 그 결과 가알을 주축으로 한 세겜족(26-29절)과 스불(30-33절)을 위시한 아비멜렉군 간에 싸움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3차에 걸친 전투 끝에 많은 세겜 족속들이 도륙당하고 만다(34-49절).
이상에서처럼 세겜 사람들이 아비멜렉에 대항해서 싸우게 된 이유는 본문에 언급되어 있지 않지만 25절을 살펴볼 때 포악한 아비멜렉의 압제로 말미암은 것 같다. 어째든 이 모든 사건은 아비멜렉을 도운 세겜족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보응이었으니 이로써 요담의 경고도 부분적으로 성취된 셈이다(20절). 결국 본문에 나타난 것과 같은 아밀렉과 세겜족 간의 내분 및 전쟁, 살륙 등은 인간의 탐욕스런 이기주의로 인해 세워진 것이 얼마나 헛된 것인가를 보여 주고 있다. 즉 아밀렉은 자신의 이기적인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온갖 악행을 다하여 소기(所期)의 목적을 달성했으나 하나님께서 그와 대적하실 때 너무도 쉽게 그가 쌓아올린 모든 것은 허물어진 것이다.
한편 오늘날 모든 나라에는 황금 만능주의와 이기주의가 팽배해 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이 자기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인간들은 자신들이 세워놓은 이 세상의 장막집을 자랑한다. 왜냐하면 자신이 세워 놓은 그 장막이 매우 튼튼하게 보이며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도들은 이 세상의 장막집은 반드시 썩고, 예수님께서 성도를 위해 마련하신 영원한 처소로 들어갈 날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고후 5:1-5 ; 벧후 1:13). 그리고 그때에는 아귀다툼 하면서까지 모아 두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한갖 헛될 뿐임을 기억하자. 그리하면 우리 모두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물질적이며 일시적인 것에 정신을 빼앗기기보다 영원한 것, 영적인 것 곧 저 하늘 나라의 것을 소유하려는 데 정신을 쏟을 수 있을 것이다(마 6:19-21).
4. 아비멜렉의 최후(9:50-57)
세겜족을 징벌한 데 이어 하나님께서 아비멜렉마저 아떻게 심판하셨는지 그 과정을 보여 주고 있는 부분이다. 즉 본문에는 아비멜렉이 데베스 성읍을 공략하다가 여인이 던진 맷돌 짝에 맞아 수치스러운 죽임을 당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비멜렉이 데베스 성읍을 공격하게 된 이유는 본문에 전혀 언급되어 있지 않으나, 그 성읍 사람들이 세겜 사람들과 협력하여 아비멜렉에 대항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튼 아비멜렉은 이스라엘 전체 성읍 중 가장 큰 성읍이자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세겜 성읍을 무력으로 점령한 바 있으므로 조그마한 성읍인 데베스를 공략하는 데에는 별 어려움이 없으리라고 예상했을 것이다. 이것은 여호수아의 군대가 여리고 성읍을 무너뜨린 후 지극히 작은 성읍인 아이 성을 쉽게 무너뜨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과(수 7:3) 같은 것이다. 예상했던 대로 아비멜렉은 데베스를 쳐서 취할 수 있었으나(50절) 아직 몇몇 저항 세력이 남아 망대에서 저항하고 있었으므로(51절) 그들을 치기 위해서 화공법(火攻法)을 사용하고자 그 망대에 접근했다. 바로 그때야 여인이 던진 맷돌에 맞아 그는 결국 수치스럽고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되었다(53절). 이로 인해 이스라엘 땅에는 3년 동안의 괴뢰 정권(傀儡政權)이 막을 내리게 되었으니(54-57절) 이
모든 것은 이미 요담 예언적으로 경고한 바 있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신 심판이 임한 것이라는 의미를 지닌다(20절). 한편 아비멜렉의 모든 소행은 그가 죽음으로써 끝을 맺었기에 결국 그가 의도했던 바가 하나님께로부터 출발되지 않은 인간작인 사상과 소행임이 입증되었다. 초대 교회당시 사도들로 인해 교회의 세력이 확장되자 대제사장과 사두개인의 무리가 사도들과 대항할 때의 일인데, 그때에도 교법사 가말리엘은 사람을 미혹하여 잠시 일어났던 드다와 갈릴리 유다의 세력을 예로 들면서 사람에게서 비롯된 사상은 무너질 것이나 하나님께로부터 말미암은 사상이나 행위는 결코 사람이 무너뜨릴 수 없다고 연설한 적이 있다(행 5:38, 39). 따라서 오늘날 성도들도 반드시 무너지게 될 인간적인 발상과 행위, 사상들을 좇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행동하는 베뢰아 사람들과 같이 신사적인 신앙을 소유해야 할 것이다(행 17: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