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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요6:10)

1. 성경 (요6:1 ~15)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1) 큰 무리가 따르니 이는 병자들에게 행하시는 표적을 보았음이러라 (2)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거기 앉으시니 (3) 마침 유대인의 명절인 유월절이 가까운지라 (4)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 하시니 (5)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 빌립을 시험하고자 하심이라 (6)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7)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8)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 (9)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하시니 그 곳에 잔디가 많은지라 사람들이 앉으니 수가 오천 명쯤 되더라 (10)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앉아 있는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물고기도 그렇게 그들의 원대로 주시니라 (11)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12)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 (13)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말하되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14)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

 

2. 묵상 (Calvin선생의 주석 요약본임)
“그 후에 예수께서 디베랴의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매” : 사도 요한은 다른 세 명의 공관 복음서 기자들이 생략한 그리스도의 언행을 기록하는 그의 습관과는 달리 동일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요한은 다음날 그리스도께서 가버나움에 가셔서 전하신 말씀을 기록하기 위한 목적으로 이 본문을 기록하고 있다. 이 표적과 다음에 나오는 내용이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기록된 말씀은 다른 세 복음서 기자가 공통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또 다른 목표로 연결된다는 의미에서 특별한 데가 있다. 다른 이들은 이 일이 세례 요한이 죽은 직 후에 일어났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폭군의 야만성을 생각한 것이라는 이유로~~~~

 

”큰 무리가 따르니~~~” ; 사도 요한은 주님께서 병자를 고치고 사람들을 가르치면서 보낸 이야기를 생략하고 있다. 아마도 사도 요한은 사건의 핵심과 요지만을 언급하는 것이 충분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그다음에 나오는 내용으로 유도하기를 원했다. 이제 우리는 백성들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것을 얼마나 간절히 원했던가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자신을 돌보지 않고 광야에서 하루 밤을 보내는 것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의 게으름과 나태함으로 인하여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는 것보다 배고픔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더 관심을 갖는 것은 더욱 핑계할 여지가 없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생활을 생각하다가도 조금만 다른 일이 생기면 즉시 우리는 사소한 일에 사로잡힌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따르기 위해 자신을 등한히 여기는 자들을 돌보신다. 그들이 굶주릴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들에게 양식을 주시고, 때로는 경건한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에 헌신했음에도 지쳐 굶주림으로 어려움을 겪게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믿음과 인내를 시험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우리의 궁핍함을 주시하시고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십니다. 하나님의 지원이 즉시 부여되지 않음은 그 이유가 우리에게 감추어져 있을지라도 가장 좋은 이유 때문에 그렇게 하시는 것을 믿어야 한다.

 

”예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시니~~~” ; 그리스도께서는 유월절이 될 때까지 한적한 곳에 물러가 있기를 원하셨던 것이 틀림없다. 그래서 본문 말씀에 주님께서 산에 오르사 제자들과 함께 앉으셨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이 인자로서 의도했음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은 다른데 있었다. 그리스도께서는 기꺼이 순종했다. 하나님의 인도 하심에 따라 많은 사람이 모인 군중 속으로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예수께서 ~~~빌립에게 이르시되” ; 그리스도께서는 빌립이라는 제자를 통하여 잠시 후에 목도하게 되는 이적을 과연 바라고 있는가를 시험하고 있다.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 부유하지 못하였기에 거액이 필요하다고 말함으로 그리스도를 놀라게 할 생각이었던 것 같다.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 ~~~” 주님의 명령에 모두 자리에 앉는 순종을 한다. 이것이 믿음의 시련이다. 불확실해 보이지만 순종하는 이것은 흑암 중에 걷게 하신 것과 같다. 자기 백성을 실망시키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우리는 배워야 한다.

 

”예수께서 떡을 가져 축사하신 후에~~~” ;감사는 엄숙한 성화다. 생각 없이 삼키는 자들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세상에 영적인 생명을 줄 분이며, 아버지께서 육의 몸도 양육하라는 명령을 받은 것임(고전1:3).  인자로 오신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그리스도를 분배자로 임명하셨다(신8:3). 인간은 외적 수단에 너무 의존하기에 하나님을 섬기기를 의지하기에 너무 힘이 든다

 

”이에 거두니 보리떡 다섯 개로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찾더라” ;마태는 보리떡 일곱 개로 사천 명을 먹이셨을 때에 보리떡과 같은 숫자의 광주리가 남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마15:37). 더 큰 숫자의 사람에게 충분한 더 작은 양의 음식과 거의 두배 가까이 남은 음식은 우리가 고의적으로 눈을 감고 모르는 체하고 있는 그 하나님의 축복이 얼마나 능력이 있는 것인가를 더욱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또한 그리스도께서 광주리를 채우라고 명하신 것이 기적을 강조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었지만,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고 명하실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동시에 근검절약을 권고하고 있음에 유의해야 하겠다. 하나님의 은택이 풍성한 것이 우리를 사치로 이끌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풍부하게 누리는 자들은 주의 깊고 성실하게 그들의 남아도는 재산을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는 목적에 사용하지 않는다면 언젠가 그들의 잉여 재산에 대하여 하나님께 회개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 사람들이 예수의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 그 사람들이 표적의 주인을 메시아로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보면 표적이 약간의 유익을 가져다준 것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표적을 행하신 목적이 다른데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곧 그들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갖고 있던 지식을 엉뚱한 방향으로 잘못 적용시킨다. 사람이 올바르게 길을 걷는 것처럼 보여도 곧 타락하고 마는 것이다.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을 삼으려는 줄 아시고~~~ ;성경은 왕을 세우는 권리를 하나님 한 분에게 국한시키고 있다 이는 시편 2편 6절에 “내가 나의 왕을 ~~~~세웠다”고 말씀하신 것과 같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그들은 어떤 종류의 나라를 상상했을까? 그들은 그리스도의 인격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지상 왕국을 상상했다. 이에서 우리는 영적인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고 우리 자신의 이성으로부터 새삼스러운 것을 지어내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배우게 된다. 우리의 패역한 마음이 범하는 거짓에는 한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이 시점에 임금의 자리에 앉으신다면 그의 신령한 나라는 멸망했을 것이다. 그러면 복음은 영원한 누명을 쓰게 되고 구원의 소망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