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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lvin선생주석/요한복음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요18:6)

1. 성경 (요18:1 ~ 1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 (1) 그 곳은 가끔 예수께서 제자들과 모이시는 곳이므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 (2) 유다가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 그리로 오는지라 (3)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이르시되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4) 대답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하시니라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 (5) 예수께서 그들에게 내가 그니라 하실 때에 그들이 물러가서 땅에 엎드러지는지라 (6) 이에 다시 누구를 찾느냐고 물으신대 그들이 말하되 나사렛 예수라 하거늘 (7)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 하시니 (8) 이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9) 이에 시몬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 그것을 빼어 대제사장의 종을 쳐서 오른편 귀를 베어버리니 그 종의 이름은 말고라 (10) 예수께서 베드로더러 이르시되 칼을 칼집에 꽂으라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 하시니라 (11)

 

2. 묵상 (Calvin선생 주석 요약본)
”1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 이 부분에서 사도 요한은 우리가 다른 세 복음서에서 읽고 있는 많은 사건들을 생략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부러 그렇게 생략했기 때문이다. 곧 그의 의도는 세 복음서 기자들이 침묵하고 있는 것 가운데서 기록할 가치가 있는 사건을 수록하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여기서 부족된 사항에 대해서는 다른 복음서 기자들의 글을 참고하기 바란다.

 

“기드론 시내 건너 편으로~~~~” ; 성경 여러 곳에 보면 기드론 골짜기 또는 기드론 개울이라는 표현이 나오고 있다. 이 장소를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그곳이 후미진 골짜기 마을이라서 어두웠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보다 더 가능한 것을 제시할 뿐이지 더 이상 갑론을박하지 않겠다. 핵심은 이 장소의 명칭을 밝히는 복음서 기자의 의도이다. 요컨대 그는 그리스도께서 자발적으로 그의 죽음을 당하러 가셨다는 점을 제시 하고자 했을 뿐이다. 그리스도께서 유다가 잘 알고 있는 이곳에 오신 이유는 스스로 이 배신자와 원수들에게 자신을 바치려는 뜻에서가 아니고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일어날 모든 사항을 미리 알고 계셨던 만큼 경솔하게 실수할 수 없었다. 후에 가서 요한은 그리스도께서 그들 앞으로 다가섰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그는 억지로 죽음을 당하신 것이 아니라 자발적인 희생제물이 되는 뜻에서 그것을 기꺼이 담당하셨다. 요컨대 순종이 없었더라면 우리를 위한 속죄가 얻어질 수 없었을 것이다. 더욱이 그가 동산으로 들어가신 것은 피난처를 찾기 위해서가 아니라 기도할 자유와 시간을 얻기 위해서였다.

 

”3 유다가~~~~~~” ; 유다가 그 많은 호위병과 군인들과 함께 왔다는 사실은 언제나 이유없이 떨기 마련인 악한 양심을 나타내는 증거이다. 물론 이 군인들은 총독에게서 얻은 사람들이요 그는 또한 천부장까지 파송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갑작스러운 폭동에 대비한 수비대가 도시에  주둔하고 있었으며 총독 자신도 어디를 가든 호위병을 거느리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머지 사람들은 제사장들의 하인들이었다. 그러나 요한이 바리새인들을 따로 언급하는 것은 이 사람들은 자기들이 마치 누구보다도 더 종교에 관심이 있다는 듯이 더욱더 날뛰었기 때문이다.

 

”4 예수께서 ~~~~ 아시고 “ ; 그리스도께서는 단 한마디 말씀으로 나타내신 그 한마디의 위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허용하시기 전에는 불경건한 자들이 그리스도에 대해서 아무런 권력을 행사할 수 없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는 그들이 찾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사실을 부드럽게 대답하시고 있지만 그들은 마치 광풍에 휩쓸리거나 벼락맞은 사람들처럼 땅에 엎드리고 만다. 그 당시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힘을 제지할 능력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는 아버지께 순종하기를 원하셨다. 이것은 그가 아버지의 경륜에 따라 죽기로 되어 있었다는 점을 알고 계셨기 때문이다. 우리는 또한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그의 하늘의 법정에 오르셔서 세상을 심판하실 때는 그의 음성이 불경건한 자들에게 얼마나 무섭고 처참하게 들리겠는가 하는 점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그는 희생 제물용 어린 양으로 거기에 계셨기 때문에 모든 그의 겉모양의 위엄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었지만 단 한마디의 말씀을 듣고 단호하게 무장을 갖춘 그의 원수들은 갑자기 쓰러지고 만다. 그리고 그는 그들에게 아무런 저주의 말도 내뱉지 않고 오직 “내로라”하는 답변만 하신다. 그러므로 그가 인간의 심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산 자와 죽은 자의 심판관으로 오실 때는 어떻겠는가? 곧 낮고 천한 모습이 아니라, 하늘의 영광을 입으시고 천사들과 함께 오실 때는 어떻겠는가? 당시 그는 이사야가 묘사하는 그의 음성의 효력을 간단히 예로 보여 주고자 하셨다(사 11:4)

 

”7 이에 다시 ~~~~물으신대” ; 여기서 하나님께서 불경건한 자들에게 치시는 눈먼 상태가 얼마나 강력하며 하나님의 공정한 심판을 통해 그들이 사단에게 홀리게 될 경우 그들의 무감각이 얼마나 처참할 정도인가 하는 점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소나 말이 넘어져도 어느 정도 기력이 있지만 이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신령한 능력이 공공연하게 드러나게 되었는데도 그에게서 사람의 모습마저 찾아볼 수 없었다는 듯이 자신만만하다. 아니 유다 자신도 무감각한 그대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버림받은 자들을 사단에게 건네  줄 경우 금수보다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무서워할 줄 알아야겠다. 한마디로 그들의 악의는 그들에게 하나님의 빛을 주목하지 못하게 하는 베일과도 같으며 그들의 오만은 그들의 마음을 돌보다 더 견고하게 만들어 순응할 수 없게 하고 만다.

 

”8 너희에게 내가 그니라 하였으니~~~~” ;죽음을 맞이해서 그의 순종을 통해 우리의 죄를 도말하려 할 뿐 아니라 그의 양무리를 보호하는 좋은 목자의 임무를 어떻게 수행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이리의 위험을 보시고 그들이 자기에게 맡겨진 양들에게 다가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미리 공격하고 있다. 그러므로 악한 사람들이나 악마가 우리에게 덤벼들 때마다 우리는 그가 동일한 방법으로 우리를 도우시려고   가까이 계시다는 점을 의심하지 않도록 해야겠다. 그와 동시에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본을 통해서 목자들이 그들의 임무를 올바르게 수행하는 데 있어서 따를 원칙을 규정하신 셈이다.

 

”9 하나도 잃지 아니 하였사옵나이다” ; 이 문장은 그들의 몸이 아니라 영혼과 관계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할 때 부적당한 인용으로 보일 수도 있다. 요컨대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을 마지막까지 안전하게 지켜 주신 것이 아니다. 그는 끝없는 위험과 죽음 가운데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안전하게 확보하셨을 뿐이다. 나의 대답은 이것이다. 곧 복음서 기자는 다만 그들의 육의 생명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그들의 영원한 구원을 바라보고 지금까지 그들을 지켜주셨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연약성이 지금까지 얼마나 컸는가 하는 점을 곰곰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들이 평생에 걸쳐서 시련에 내맡겨졌더라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이 그가 그들에게 허락하신 힘이 부치는 시험을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신 만큼 그들을 영원한 파멸에서 구해 주셨다. 우리는 여기서 비록 그가 여러 가지 시험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을 시험하신다 해도 그는 우리에게 이겨낼 수 있는 힘을 허락하시는 만큼 우리가 궁극적으로 위험하게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일반적인 교훈을 배울 수 있다.

 

“10 이에 시몬 베드로가~~~~” ; 그리스도께서는베드로 한 사람을 통해서 인간들이 임의적으로 시도하려는 모든 것을 정죄하고 있다는 점을 우리는 여기서 배워야겠다. 하나님께서 인정하고 안하시고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듯이 인간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열성이라는 가면 밑에 무조건 변호하려는 것보다 더 흔한 일도 없다는 점을 생각할 때 이것은 아주 귀한 교훈이다. 인간의 사리 분별력이라야 모두 헛된 것 아닌가?  설령 베드로의 열성에서 비난할 점을 발견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불쾌하다고 선언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스도께서 죽음으로부터 보호를 받고 그의 이름이 영원히 치욕을 받지 않은 것은 베드로의 덕택이 아니었다. 그는 군인들에게 폭행을 가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능력에 반기를 들고 있다는 점에서 막상 강도와 같이 행동하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증오의 대상이었는데 이 한가지 행동은 그의 원수들의 중상모략에 그럴듯한 근거를 제공할 수도 있었다. 혀가 아니라 칼로 자신의 신앙을 입증하려 했다는 점에서 그의 행동은 너무 무모했다. 정작 신앙 고백을 하라는 부름을 받을 때는 부정하고 그의 스승의 명령이 없는데도 난동을 부리는 베드로였다. 이러한 뛰어난 본을 통해서 우리는 우리의 열성을 억제하는 것을 배워야겠다. 그리고 우리의 방종한 육신은 하나님의 명령 이상의 것을 하고 싶어 안절부절하기 마련이지만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서 한 치라도 벗어난 짓을 하려 할 때에는 우리의 열성은 악독한 면으로 뒤바뀌고 만다는 점을 배워야 한다.

 

”11 검을 집에 꼿으라” ;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베드로의 행동을 책망하는 명령이다. 그러나 우리는 그 이유에 대해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개 개인이 공적 권위를 부여받은 자들에게 반기를 드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 일이었다. 요컨대 우리는 이것을 “검을 가지는 자는 검으로 망하느니라”라는 다른 세 복음서 기자들의 일반적인 말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를 부당하게 자극한다 해도 법률과 공적 권리가 허용되지 않는 한, 힘이나 무력을 사용해서 그들에게 반격을 가하는 일이  없도록 경계해야겠다. 누구든지 자신의 소명의 한계를 벗어나는 자는 설령 그가 온 세상의 박수갈채를 한 몸에 받고 있다 해도, 그의 행동에 대한 하나님의 인정은 결코 받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 ;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침묵을 지켜야만 했던 특별한 임무인 것처럼 보인다. 우리는 같은 자세로 십자가를 감당하는 자세를 갖출 필요가있다.... 하지만 병이나 그밖의 질고에 대한 대비책을 강구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미는 잔을 거절하는 것이므로 그렇게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광신자들의 이야기는 일축하기로 하자. 물론 언젠가는 한 번 죽을 우리들이므로 죽음을 각오해야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죽음의 시각이 우리에게 알려져 있지 않으므로 하나님께서는 그가 손수 정하신 여러가지 도움을 통해서 우리의 생명을 보호하실 것을 허용하고 있다. 질병이 우리의 육신에 제 아무리 괴롭히더라도 우리로서는 그것을 견딜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것이 확실히 치명적인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질병의 완화책을 강구해야 한다. 다만 유의할 점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의 허용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